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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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3사관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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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학력
3. 생애
4. 경력
5. 평판
5.1. 간부들의 평가
5.2. 용사들의 평가
5.3. 그 외
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장성급 장교로 최종 계급은 소장으로 제7보병사단장과 육군3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2. 학력[편집]




3. 생애[편집]


강원도 출신으로 원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79년 2월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보병학교에서의 초군반 교육을 마치고 수도방위사령부[1] 제1경비단의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소대장 임기를 마치고 군 위탁 편입으로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진학하여 그 곳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2].

준장 진급 후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 제7공수특전여단장 등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실장 보을 마지막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에는 상지대학교 석좌교수와 아세아직업전문학교장 학장을 맡다가 현재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감사실장을 맡고 있다.


4. 경력[편집]


  • 중령
  • 대령
  • 준장
    •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3]
    • 제7공수특전여단
    • 육군특수전사령부 참모장
  • 소장
    • 제7보병사단[4]
    • 육군3사관학교[5]
    •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실장
  • 전역 2016년 5월


5. 평판[편집]


휘하 간부와 용사들이 이 사람의 참모 역량을 최악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평판이 매우 나쁘다. 본인의 후배 장군인 윤의철(육사 43기) 장군에 버금갈 정도로 평가가 좋지 못하다[6]. 전형적인 멍부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 멍청한 인간이 장군까지 진급할 수 있었을까? 보통 장교들은 멍청하면 중령 진급도 안 되는데[7]


5.1. 간부들의 평가[편집]


  • 간부들의 평에 따르면 지시를 한 번 내릴 때 명확한 기준이 없었을 뿐 아니라 막무가내식으로 일을 시키기만 했다. '거기 있잖아, 내 말이 뭔지는 잘 알지?'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고 다녔다.[8]
  • 이 사람의 '그거 무엇인지'라는 말을 알아듣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평이 중론이다. 휘하 참모와 용사들은 이 사람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똑똑한 참모가 이 사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지시를 이행했는데도 이 사람은 툭 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다녔다.
  • 첫 보고 건을 보자마자 무조건 반려시키고 보았다. 몇 번이고 고쳐야 받아주었을 정도로 업무 효율이 낮은 사람이었다.
  •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 시절 생일빵을 때린 임관을 7일 앞둔 생도들을 퇴교 처분하고 런닝만 입혀 내쫓았으며 행정소송 취하를 종용했다. #
  • 생도대장 시절 3사 생도들은 하루에 10km(아침 2km, 오후 4km, 금요일 주간 구보 10km, 토요일 산악구보 완전군장 10km)가량을 구보해야 했다. 이는 후임 생도대장인 박종진 장군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박 장군은 생도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이후 소장, 중장을 거쳐 대장으로 전역하였다.
  • 제7공수특전여단장 시절 전투체육에서 구기종목을 모두 없애버리고 매주 수요일 산악구보 측정으로 바꾸었다. 또, 천리행군과 ATT, 고등산악 등 훈련을 자주 시켰음에도 개인정비 시간조차 주지 않아서 부상을 입는 장병들이 많았다. 정작 전임 여단장 때보다 훈련 성과가 나빴을 뿐 아니라 체력단련 실적 측면에서도 평가가 나빴다.


5.2. 용사들의 평가[편집]


  • 지휘관을 역임할 때마다 용사들을 관리하는 역량이 서툴러서 휘하 용사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이를 은폐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 육사 출신 후배 장군인 윤의철 장군과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통제에만 이상하게 집착했지, 정작 성과는 나오지도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 한 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너희를 믿지 않는다. 너희를 믿을 바에 우리집 개를 믿는다.'고 하였다. 용사들의 관점에서 개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 96연대장 시절 아침마다 기상하면 대대에서 연대까지 뜀걸음을 시켰다.
  • 제7보병사단장 시절 기존에 있던 휴가를 모두 삭제하였다. 개인 휴가를 모두 단체 휴가로 바꿔서 개인이 따로 휴가를 나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휴가를 새로 주지도 않았는데, 특급전사도 예외가 아니었다.[9] 결국 8연대에 소속된 모 용사가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 트위터에 직접 마음의 편지를 쓰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 장관 역시 이러한 심각성을 인지하여 원 장군에게 휴가를 복구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원 장군 본인은 복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상급자에 대한 하극상이 아닐 수 없다.
  • 원 장군이 없애버린 휴가는 후임 사단장인 구홍모 장군이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구홍모 장군은 중장 진급에 성공하여 요직에 올라탔다[10].
  • 사단장 시절 개인 여건과 상관 없이 알통 구보를 강요하여 용사의 전투력 저하를 일으켰다.
  • 주말에는 개인 휴식 여건을 보장하지 않고 부대 주변 대민 봉사활동으로 돼지풀 제거를 강요하였다.
  • 사단 위수지역이 3주동안 춘천까지 확대되었다가 철회되었는데 당시 지역주민들과 갈등을 빚어서 그랬다고 한다. 결국 갈등이 해결되면서 환원되었다. 결국 원 사단장은 휴가를 없애고 이걸 다 외출로 바뀌버리면서 화천군에서 지역경제발전에 대한 공로로 상까지 받았다.
  •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목하에 일과시간 종료 후 매일 1시간씩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 즉 모든 개인정비 시간 및 여유시간을 규정에도 없는 사단장의 명령 때문에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박탈당했다는 의미이다. 그 시간에는 TV 시청도 금지 당했으며 대부분의 용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5.3. 그 외[편집]


  • 한 번은 민간인과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군사경찰을 불렀으며, 민간인을 폭행하려한 전적이 있다.
  • 사단장 시절 본인이 담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잠시 사단 전 구역을 금연구역화하고 흡연장 철수를 명한 적이 있다.


6. 여담[편집]


  •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 3사 4기수 후배인 서정열 장군과의 공통점으로 제7보병사단장, 육군3사관학교장, 육군본부 감찰실장 보직을 이어서 수행했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평판은 극과 극이다. 서 장군은 예나 지금이나 휘하 병력들로부터 존경을 받지만, 원 장군 본인은 휘하 참모와 용사로부터 평판이 매우 나쁘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 아들 원승환은 학군사관 54기로 임관하여 본인에 이어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본인의 전역 한 달을 앞두고 특전사에서 같이 공수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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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사령관은 전성각으로, 후임자는 12.12 군사반란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장태완 장군이다.[2] 본인의 3사 2기수 선배인 한동주 장군도 소대장 임기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3] 후임 박종진[4] 전임 이상현, 후임 구홍모[5] 전임 김길영, 후임 금용백[6] 참고로 윤의철 장군은 문재인 정부 인사이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국가위기관리센터장을 역임한 바 있다.[7] 보직이 잘 풀리거나 정권이 본인과 맞으면 가능하다. 윤의철의 경우 역시, 문재인 정권과 맞아서 중장까진 올라간 것이다.[8] 이 것은 지도자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 형식적으로나마 주는 재량권까지 빼앗는 악습이다.[9] 이건 윤의철만도 못한 짓이다. 윤의철은 특급전사는 포상휴가를 갈 수 있는 구멍은 있었다. [10] 거기에 구홍모 장군은 용장이면서 덕장으로 평판이 자자했고, 합동참모본부 내 요직에 올라탈만큼 능력까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종섭국방부장관의 고향 친구이자 육사 40기 동기라는 점도 한몫했다. 구홍모 장군의 후임 사단장인 서정열 장군도 능력자에 덕장으로 평판이 자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