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 카빈 강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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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범인은 어떤 인물인가
3. 범행
4. 창작물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worst criminals.jpg
왼쪽이 문도석, 오른쪽이 이종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이종대(향년 38세), 문도석(향년 31세) 2인이 탈취한 M1 카빈 소총을 사용해 연쇄강도 및 살인을 저지른 사건. 적어도 4건의 범행이 일어났고 당시 돈으로 496만원 가량이 탈취되었으며 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교도소서 만나 살해 또 살해…끝내 아들과 자신까지 죽였다


2. 범인은 어떤 인물인가[편집]


주범 이종대는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20살이었던 1955년부터 상습적으로 강도를 저지르다가 1957년에 체포되어 군산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1958년 7월 9일 교도관폭행하고 권총을 탈취한 후 교도소를 탈옥했다가 2시간 만에 다시 검거되는 등의 전과가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출소한 것이 1968년이다.

문도석도 이종대처럼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탈영을 저질러 불명예 전역하고 운전사 일을 하다가 교통사고 및 그 외 폭력, 횡령, 업무상과실치상 등 죄목으로 옥살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여기서 이종대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후 둘은 여러 건의 범죄를 저지른다. 본인들은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그랬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변명일 뿐이다.

우선 1972년 7월 27일 은행에서 직원 월급을 찾아 나오는 서울 상명초등학교 직원을 납치 강도한 후 총이 있으면 더 크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1972년 9월에 경기도 평택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카빈 소총 3정과 120발의 실탄을 절취했다.[1] 범인 중 문도석이 열쇠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문도석은 그 능력을 범죄에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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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이 사용한 M1 카빈 소총. 은닉이 편하도록 개머리판총열덮개 등을 제거하고 권총손잡이를 만들어 붙여 대형 권총 수준으로 크기를 줄여 개조했다. 당시 사용된 총기를 에어소프트 건으로 재현한 영상


3. 범행[편집]




이들은 1972년 9월 12일 은행에서 돈 66만원을 찾아 나오던 이모 씨[2]납치한다.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들이 경찰복 차림을 하고 가짜 관용차 번호판을 단 차량으로 범행했기에 목격자들은 범죄자 연행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고 말리지 않았다고. 납치 5분 만에 공덕동 부근에서 4발의 총성이 들렸다는 제보가 들어온 후 차가 발견되었지만 범인들과 피해자 모두 어디에도 없었다. 싸운 흔적과 피해자로 보이는 사람의 혈흔만이 남아 있었고, 피해자는 그대로 실종되고 만다. 범인들이 피해자의 반항이 심하자 사살한 뒤 경기도 용인의 경부고속도로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기 때문이다.

1973년 7월 27일에는 산구에 위치한 은행에서 교직원을 납치해 55만260원을 빼앗기도 했다. 8월 25일에는 로동 제1수출공업단지에 소재한 한 회사를 노렸다. 당시 24살 경리 직원은 은행에서 직원들의 월급을 찾고 회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종대는 직원에게 다가가 소총을 겨누고 이내 직원의 하복부에 쐈다. 직원은 숨졌고 범인은 378만1500원(현재 가치로 약 6339만 원)이 든 현금 보따리를 뺏어 차를 타고 달아났다.

그날 밤 "여기 성산동인데요. 골목길에 수상한 차가 한 대 있어요, 번호판도 없고요."라고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경찰은 바로 출동했고 차 안을 수색하던 도중 두 명이 놓고 간 노트가 발견됐다. 경찰이 단서가 있을까 해서 확인해 봤더니...

지문 채취 열심히 해보슈

라고 조롱하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걸 본 경찰은 완전히 극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 3만 명이 동원되었고 현상금도 22만원에서 200만원(현재 가치로 3340만원)으로 올라갔다. 차량 정비소, 차량 절도범들, 운전면허 소지자들까지 전부 수사 대상으로 올랐다.

바로 그때 엽서 한 장이 경찰서에 날라왔다. 수신인이 수사본부장이라고 적혀 있어 내용을 확인했더니... 이 또한 실로 가관이었다.

필적 감정 열심히 해보슈
좆빠지게 됐구나
진범으로부터


하지만 그들은 잡히지 않았고 꼬박 1년 가까이가 흐른 1974년 7월 23일 또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 승용차를 빌려 지방으로 내려가던 중 승용차 운전사 최모 씨가 이들이 숨긴 총을 발견하자 역시 살해한 후 경상남도 산청군의 야산에 암매장하고 그 승용차를 탈취한 것이다.

이후 오산시, 성남시 일대를 이동하던 중 7월 25일 새벽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 인근에서 승용차가 고장나자 범인 중 하나가 등산복 차림으로 시내까지 내려와서 택시를 잡았는데 이때는 새벽이었다. 당시는 승용차가 귀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장난 차량을 두고 서울로 가자는 요구와 당시 죽미령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는 점이 이상했던 택시 기사는 '자신이 피곤해서 기사를 한 명 더 태우고 가자'고 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승차를 거부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택시 기사가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범인(문도석)의 인적사항을 파악했으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서 그냥 보냈다. 범인이 탄 다른 택시의 기사는 고장난 승용차까지 데려다준 후 자신이 수리를 해 주겠다며 자리를 피하고 택시를 타고 시내로 왔다. 방금 전 상황을 수상히 여긴 그는 경찰 둘을 데리고 돌아왔고 검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뒷좌석 쪽에서 개조한 카빈 소총을 발견했다. 이에 범인 중 하나가 총격을 가했고 택시 기사와 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다행히 이때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범인들은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방금 전 일로 문도석의 인적사항을 파악했던 경찰이 이들의 연고지[3]에 급파되었다.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갔지만 꼬리를 밟힌 둘은 자포자기하여 죽기로 결심했고 문도석은 그날부로 바로[4] 7살 아들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문도석이 이종대에게 자신은 남자답게 죽겠다면서 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5]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어찌 살겠다고 발버둥치겠소"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이종대는 여성 1명, 어린이 2명을 인질로 삼고 날짜가 바뀌어 다음날인 7월 26일이 될 때까지 꼬박 하루 가까이를 버티며[6] 경찰과 대치했다. 그곳이 어디냐면 인천에 있는 자기 집이었고, 그 인질들이 누구였냐면 바로 이종대의 아내와 아이들. 바로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경찰이 집을 포위하자 4시간 만에 이종대는 자기 아내를 총으로 쏴 죽였다. 총성이 들리자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는 경찰을 향해 '가족들 얘기는 꺼내지 마라. 내 마누라, 내 새끼들 죽이고 살리는 건 내가 결정한다'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7]

얼마 후 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묻는 경찰에게 이종대에게서 나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영구차를 준비해라. 두 아들을 죽였다...

이후로도 장장 17시간 동안이나 농성이 이어졌다. 경찰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8] 하루종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이종대의 가족, 친척,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설득했으나[9] 이종대가 '어차피 자신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사형을 당할 사람'이라며 요지부동이라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이기도 했고. 위에 언급된 범죄 행각의 내용이 바로 이 경찰과 대치 중이던 상황에 자백한 것들이다.

그러다 8시 2분경, 또다시 총성이 들렸다. 경찰이 이종대를 불렀지만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경찰이 창문을 향해 작은 돌을 던져 보며 반응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조심스레 안에 들어간 경찰들은 좁은 방에 이종대와 아내, 그리고 겨우 3살과 6살인 어린 두 아들들까지 온 가족이 모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실로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다. 큰 아들 태양이 가슴에는 장난감 기타가, 막내아들 큰별이 품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안겨져 있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해자들의 시신은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종대가 자살하기 전 피해자들의 암매장 장소를 경찰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벽걸이 달력을 뜯어서 그 뒷면에 글을 쓰고 약도를 그린 뒤 창문 너머로 던져 주었다고 한다. 유서도 이 남은 달력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태양아 큰별아 미안하다
여보 당신도 용감했소
너희들 뒤를 따라간다
황천에 가서 집을 마련해서 호화롭게 살자
이 냉혹한 세상 미련없다

마치 자기 가족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처럼 쓴 것이다.

결국 범인 본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해 9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끝이 난다.

4. 창작물[편집]


10월 유신 체제 하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총기 강도사건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의 큰 이목이 쏠렸으며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각종 창작물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 소설가 최인호는 1979년 이 사건을 소재로 《지구인》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은 현재도 절판되지 않아 구할 수 있다. 2005년 개정판 서문에서 작가는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 두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진 연쇄살인은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괴리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인 사회 범죄였다. 이종대를 그 사회악의 하수인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썼다.

  • 이장호 감독이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1982년 영화화했다.


  •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남주인공 2명의 이름부터 이종[10]와 문도석이다.

  • 이현세만화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의 초반부 무장강도 사건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주인공의 인생이 무너지는 첫 계기가 된다.

  • 이본토만화 《개머리판 없는 칼빈강도》는 이 사건을 만화로 그린 것이다.

  • 연극 '등신과 머저리'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1980년 대한민국연극제 문공부장관상 및 남자 연기상, 1981년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5. 기타[편집]




'동반 자살'이 아닌 '살해 후 자살'인 이유 | 꼬꼬PICK

  • 2021년 7월 15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다루며 재조명되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사건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과 함께 '주범들이 어린 자식들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을 살해하고 자살하기까지의 행적'[11]을 자세하게 다뤘다.

  • 특히 오직 부모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과 그 아이들의 시신이 운구되는 장면[12]에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전 출연진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9회에서 이 이야기가 다뤄졌는데 출연진 중에서도 자녀가 있는 이현이정성호가 특히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으며[13] 심지어 정성호가 이종대의 유서 내용을 읽고 나서 "말도 안 되는 새끼네, 이거."라며 욕까지 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그대로 전파를 탔는데 본인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듯 정성호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그렇다 보니 강도범들이 자기 품 안에 안기려는 자식을 비정하게 살해한 뒤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더욱 가슴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14] 두 아들의 어머니인 이현이도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흐느껴 울었다.[15] 그 밖에도 어떻게 제 자식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무고한 아이들의 생사를 왜 부모가 멋대로 정하느냐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특히 이현이는 장도연"잠시 후"라는 말을 하자 "거짓말..."이라며 부정하다 마침내 "두 발의 총성이 울렸어."라는 말이 나오자 "거짓말. 어떻게 그래? 어떻게 자기 자식을."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 방송의 후반부에는 언론에 보도된 일가족자살 사례 몇 가지를 함께 언급하면서[16] 부모가 아직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는 것을 동반자살로 치부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과[17] 존속살해에 비해 비속살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법적 장치까지 비판했다.[18]

  •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존속살해라는 죄목이 있고 일반 살인보다 더 중한 처벌을 내리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형법으로 규정한 가중처벌 사유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부모가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정상 참작의 사유로 감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패륜인데도. 한 마디로 그간 사법부의 관행이 자식을 한낱 부모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며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의 아동 학대에 시달린 자식들이 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가 벌어졌을 때 형량을 낮추는 일 따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심각한 일이다. 사실상 아동 학대 피해자들이 에 대해서 심한 반감[19]사법불신을 품게 되는 원인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심하면 자국 혐오까지 이어질 정도로 대한민국사법부가 아이의 목숨보다 어른의 목숨을 소중하게 대하면서 방치한 끝에 얻은 참혹한 대가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 민법에서 부모의 징계권, 즉 합법적으로 자식을 체벌할 수 있는 권리가 삭제된 게 2021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해당 회차에 언급된 기사 중에는 고작 육아 스트레스로 자식을 살해한 경우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예가 나오는데 이은석 사건 같은 경우 부모의 필설로 다 쓰기 힘든 오랜 학대 끝에 참다 못해서 부모를 살해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에서는 끔찍한 패륜 범죄로만 보도되었고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친형의 적극적인 변호로 그나마 정상참작 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 출연진들 모두 '동반자살'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말아야겠다는 견해를 보였으며 '동반자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과 일본 정도 외에는 거의 사용되는 예가 없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했다. 서양권에서는 구성원이 모두 동의하에 자살한 Joint suicide와 위 사건과 같은 Murder suicide(살해 후 자살)라는 용어로 구분한다. 머큐리 같은 수사물 요소가 있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꼬꼬무에서는 '살해 후 자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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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향토예비군을 갓 창설하면서 각 마을에 무기고를 두었는데 무기고 관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허술해서 이렇게 총기가 손쉽게 털리는 일이 가능했다. 1971년 8월에는 10대 소년 2명이 을 이용해 자물쇠를 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훔쳐 다방에서 난사한 일이 있었다.[2] 당시는 계좌이체가 없던 시대라 돈을 찾거나 보내려면 무조건 현금을 싸들고 은행을 드나들어야 했고 월급을 현금뭉치로 봉투에 담아 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는 이 피해자의 이름을 '박현우'라는 가명으로 내보냈다.[3] 현재 구로구 개봉로5길 48.[4] 밤 9시 30분.[5] 참 안타까운 게 문도석의 아내는 "자수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고 말하는 남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몸을 피했지만 어린 아들은 그저 아빠가 좋아서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고.[6] 문도석이 자살한 지 1시간 만인 밤 10시 반부터 다음날 8시 2분경까지.[7] 다만 1970년대는 가부장제가 극심했던 시절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8] 이때 모인 인파가 약 2천명에 달했다.[9] 당시는 경찰에 협상 전문가가 없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실제 베테랑 위기 협상 요원에 따르면 이렇게 범인의 친족과 지인을 협상자로 투입하는 것은 사실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만 더 높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사건이 비극으로 끝난 것만 봐도 그렇고. 4년 전인 1970년 일본에서 발생한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도 경찰이 인질을 잡고 대치 중이던 범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족들을 투입했다가 오히려 범인들을 더 자극하는 역효과만 불러왔고 급기야 이들이 당시 투입된 자기 어머니에게까지 총을 쏘는 사태가 벌어졌다.[10] 이명세 감독이 알고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종대의 이복동생의 이름이 진짜로 '이종세'다.[11] 심지어 위 문단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자신이 무슨 각박한 세상 때문에 의롭고 억울한 죽음을 맞았고 가족들(어린 자식들 포함)은 각자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동의했다는 식으로 유서를 써 놨다.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정성호는 이 유서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값어치 없는 유서'라며 분개했다.[12] 이종대의 아들들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장면이 포착된 당시의 영상과 사진을 (아무래도 시체 사진이다 보니 어느 정도 블러 처리되기는 했지만)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어려 그만큼 몸도 작다 보니 들것 하나에 두 아이를 모두 눕힌 채 옮겨지는 모습이었다. 당시는 개인정보나 인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거의 전무해서 사건사고가 터지면 가해자건 피해자건 이름 석 자에 심하면 주소까지 그대로 까발려지는 시대였기에(이 사건에서도 범인들에게 살해 및 암매장당한 사람들의 실명이 모두 공개되었다) 천 하나 덮이지 않은 채 시신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13] 이야기꾼(진행자)인 장성규도 이종대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직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두 아들이 방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말하기 직전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현이처럼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는지라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던 모양.[14] 그 전에는 들고 있던 자료사진을 화풀이하듯 던져 버리기도 했다. 그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잠시 남한 측 패널로 출연했을 때는 북한의 열악한 아동 인권 실태를 주제로 다룬 방영분에서 북한 당국의 아동 인권 유린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대놓고 '미친 거 아니냐'고 비난했을 정도로 아동 대상 범죄나 인권 유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15] 특히 후반부에 나온 살해 후 자살에 대해서 보도한 뉴스 영상에서 이현이의 슬픔은 제대로 폭발했다.[16] 2000년부터 2019년까지 19년간 언론에 보도된 수만 무려 247건이었다. 그리고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피해자는 대부분 평균적으로 9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며 당연하지만 자의로 죽음을 택한 아이들이 절대로 있을 리 없다. 참고로 뉴스 자료 중에는 인천 일가족 자살사건을 다룬 뉴스도 나왔다.[17] 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기사 중 주범들이 아이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에 대해 '(그래도 아비 없이 세상 살기 힘들테니 데려가겠다는 부정이 느껴진다며)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고 서술한 부분에서 김선재 아나운서는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는 표정을 보였고 정성호는 대놓고 '이 사람들 한글 다시 배워야겠다'고 깠다. 김선재는 자신도 뉴스를 진행하고 있지만 뉴스에서도 종종 나오는 '동반자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나 많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평함과 동시에 '분노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18] 장항준이 이 때 "도 그래."라고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19]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감정을 뜻하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