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희/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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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축구선수 김기희의 국가대표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국가대표 경력[편집]



2.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12)[편집]



2.1.1. 홍명보호 시절 (2009~2012)[편집]



2.1.1.1. 2012 런던 올림픽[편집]

2012 런던 올림픽에서 경기가 거의 기울자 수비보강을 위해 단 4분을 뛰고 병역면제를 받은 선수이다. 엔트리에 올라간 과정이 있는데 당시 부주장이였던 장현수가 부상낙마로 엔트리에서 빠지면서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갔다. 올림픽 진출을 확정한 이후 처음 치룬 평가전에 골을 넣으며 대활약을 한 것이 결국 최종 엔트리 승선에 큰 도움이 된 셈이다.

파일:attachment/1344654179868.jpg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내면서 병역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전까지 1분도 뛰지 못했지만 마지막 경기인 일본전에서 후반 44분 구자철과 교체, 투입되며 병역혜택 조건을 충족시켰다.[1][2] 후반 40분에 정성룡이 부상을 당했을 때 엄청 식겁했을 거다. 이미 교체 카드를 두장 쓴 상황이었으니 골키퍼가 부상이면 교체할 수밖에 없었으니.

파일:attachment/ltegoondae.jpg

당시 김기희 선수 인터뷰에 따르면 저 면제로이드 짤방을 본인과 다른 선수들, 홍명보 감독과 함께 본 모양이다. 본인도 기분 나쁘진 않고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저 상황에서 홍명보 감독은, 키가 큰 일본 선수[3]를 집중적으로 마크하라고 작전 지시를 했다고 한다.

4분 뛰고 2년을 벌었다. 그리고 동메달 연금 매월 52만 5,000원, 포상금 1,800만원을 비롯해 축구협회가 활약상에 따라 주는 최소 4,000만원의 포상금 까지 받았다.

축구같은 단체 경기에서는 팀의 전략 구상이나 만일을 대비하여 백업 멤버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2012년 당시의 병역법은 1초라도 출전한 선수만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4] 팀의 전술이나 경기력과는 전혀 별개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5] 골키퍼가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통 백업 골키퍼는 주전 골키퍼의 부상이 아니면 거의 출전하지 못한다. 다니엘 스터리지승부차기를 막아 낸 백업 골키퍼 이범영영국전에서 정성룡의 부상이 아니었으면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

결국 대회 종료 후 김기희 선수의 교체출전 논란이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면서 병역법에 대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올림픽 축구는 2주만에 최대 6경기를 하는 반면, 엔트리는 18명으로 월드컵이나 아시안컵이 23인 임을 고려하였을때 더 빡빡한 일정에 인원수는 훨씬 더 적다. 즉, 김기희를 포함한 후보 선수들 역시 매경기 출전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만들었고, 팀 훈련에 참가한다. 또한, 단체전 같은 경우 예선을 치르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데, 김기희는 올림픽 예선에서 충분히 활약해줬기 때문에 본선에서 4분 밖에 뛰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임승차'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과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6년 뒤에는 김기희와 조금 많이 다른 케이스이지만, 아예 경찰청에 입대했는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고 조기 전역을 하게 된 선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기희의 당시 소속 팀인 대구 FC만으로 놓고 보면, 대구 FC 최초의 월드컵 출전 선수가 올림픽에 준하는 대회인 아시안 게임에 나서서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고 온 것도 특이사항이다.

한편 4분 전역이라는 해프닝을 낳았던 병역법의 '대회 출전 선수만 병역특례' 조항은 2021년 '국제대회 엔트리 포함 선수 병역특례' 로 개정되면서 앞으로는 대한민국 축구 U-23 대표팀이 올림픽 메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면 엔트리 전 선수가 특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후 2012년의 김기희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 이상 없다.

이후 2021년에 김기희는 올림픽 당시의 은사인 홍명보 감독을 소속팀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재회하게 됐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2~ )[편집]



2.2.1. 최강희호 시절 (2011~2013)[편집]


2012년 11월 14일 화성에서 열린 호주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2.2.2. 홍명보호 시절 (2013~2014)[편집]


또한 브라질 월드컵에 대비하여 미국 전지훈련에 참가했고, 미국과의 친선전에도 출전했다.


2.2.3. 슈틸리케호 시절 (2014~2017)[편집]



2.2.3.1. 슈틸리케호/2014년[편집]

2014년 9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과거 알 사일리야 SC에서 자신을 지도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하자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2014년 10월 파라과이와 코스타리카 평가전 멤버로 차출되었다. 10월 10일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에서 노장 곽태휘와 더불어 4백의 중앙 수비를 맡았다. 후반 44분까지 무난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김영권과 교체되었다.

소속팀을 우승시키고 11월 원정 평가전 차출이 유력해 보였으나 훈련소에 4주 동안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가야 했기 때문에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 점에 대해서 몹시 아쉬워했다. 4주 동안 군사 훈련을 받고 다시 복귀해서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 더구나 아시안컵이 코앞인 상황에서 그리 된 터라 김기희의 아시안컵 출전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김기희도 이 점을 아쉬워했지만, 훈련소 입소를 미룰 수가 없는 터라 아시안컵 이후를 기약하게 되었다.


2.2.3.2. 슈틸리케호/2015년[편집]

2015년 1월, 4주 훈련을 마치고 전북 현대 모터스로 돌아와 부지런히 몸을 만들고 있다. 훈련소에서는 처음에 조폭 취급을 받다가 이내 국가대표인게 밝혀져서 대접을 받았다고#. 3월 클래식 리그 홈개막 경기인 성남전을 김형일과 함께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슈틸리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3월 A매치 2연전 엔트리에 올랐다.

아시안컵에서는 훈련과 겹쳐 소집되지 않았으나 그 외의 상황에서는 꾸준히 국대에 뽑히고 있다. 김영권이 부동의 주전으로 자리잡아가는 가운데 그 파트너 자리를 놓고 김주영, 곽태휘와 경쟁하는 양상이다. 8월 동아시안컵 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었고 김주영과 김영권 파트너 자리를 놓고 경쟁, 일본전과 북한전에 선발 출전했다.


2.2.3.3. 슈틸리케호/2016년[편집]

동아시안컵 이후에도 꾸준히 국대 차출되고 있으나, 김영권, 홍정호, 장현수 등 중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주로 국대에 뽑히고 그런 선수들이 경기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니[6] 역시 중국에서 뛰고 있는 김기희 역시 짱개화된 수비수로 세트로 까이며 그만 좀 뽑자고 네티즌들에게 한 소리 듣고 있다. 그래도 언급한 선수들에 비하면 국대에서 크게 부진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덜 까이고 있는 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치러진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과의 홈경기에서 전반 25분 클리어 미스로 선제골 실점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클리어 미스를 해 놓고도 느릿느릿 뛰다가 우즈벡 선수가 슈팅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뛰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정신력마저 중국화 되었다고 까이는 상황이다. 더구나 시즌 초 소속팀의 전력구성이 다 끝난 상황에서 중국으로 가겠다고 한 태도에 대해 다시금 질타하는 여론이 높다. 시즌 초에는 각 팀의 전력구성이 이미 끝나기에 대체자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자명하고, 여기서 온 수비불안은 소속팀의 시즌 막판 수비진 붕괴에 의한 우승실패까지 이어졌기에 당분간은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2.4. 신태용호 시절 (2017 ~ 2018)[편집]


2017년 10월 10일 신태용호의 2번째 평가전인 모로코 전에 선발 출장했으며, 초반 2실점을 당한 후 전반 28분 정우영과 교체 아웃되었다.

이후, 성인대표팀에는 더이상 발탁되고 있지 않다.

[1] 사실 주전으로 뛰기엔 무리가 있었다. 기존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중앙 수비 조합은 김영권홍정호였으나, 홍정호가 부상으로 일찌감치 이탈한 뒤 그 백업 자원이었던 장현수마저 부상으로 대회 직전 대표팀에서 낙마, 이에 결국 세 번째 옵션이었던 황석호가 김영권의 파트너가 되어 대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김기희는 수비에서 네 번째 옵션에 가까웠기에 일본과의 경기도 다소 여유롭게 이기고 있었던 전개가 아니라면 정말 출전이 불투명할 수 있었다.[2] 여담으로 김기희의 출전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18인 엔트리 전원 기용이라는 기록도 가져가게 되었다.[3] 정황상 스기모토 켄유를 말하는 것 같다.[4] 이러한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실력 미달의 선수가 을 이용해 대표팀에 승선한 후 경기를 뛰지 않거나, 무임승차 수준의 활약으로 병역혜택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해당 규정이 생기기 전에는 이러한 일이 공공연히 있었다.[5] 이런 경향은 축구가 심하다. 야구는 교체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주자, 대수비, 대타같이 출장 못 한 선수를 병역특례를 위해 잠깐 출전시켰다가 다른 선수로 바꿔도 전력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기용법이 있다. 투수도 경기 일정에 비해 엔트리에 들어가는 수가 여유롭지 않아 어지간해선 경기 일정상 전부 출장하게 된다. 하지만 축구는 교체를 3명까지만 할 수 있는 규정 때문에 그런 식의 교체가 쉽지 않다. 2점차로 여유롭게 이기고 있었던데다 교체 인원이 남아서 막판 투입이 가능했던 거다.[6] 특히 카타르전에서 김기희의 파트너로 뛴 홍정호는 이 날 경기에서 2실점 관여(하나는 PK 헌납, 나머지 하나는 경합 중 미끌어지면서 선수를 놓쳐서 실점의 빌미를 제공)에 경고 누적 퇴장까지 겹치면서 이 날 이후로 엄청나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이전에는 이런 모습들이 딱히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적인 짱개화로 몰락한 선수로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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