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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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김포군·강화군)
제13대
정해남

제14대
김두섭


선거구 분리
박종우[1]
이기문[2]
이경재[3]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김두섭
金斗燮 | Kim Doo-seop


파일:김두섭 (45).jpg

출생
1930년 3월 13일 (94세)
경기도 김포군
본관
김해 김씨[4]

팔전구기(八顚九起)
종교
개신교
학력
김포국민학교 (졸업 / 32회)
김포중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졸업 / 47회)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 6회 / 학사)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소속 정당

[[무소속|
무소속
]]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4
현직
대한민국 국기홍보중앙회 상임고문
경력
제14대 국회의원(경기 김포)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간사
김포새마음경로대학장
만산장학회장
새정치국민회의 경기 김포지구당위원장

1. 개요
2. 생애
3. 생활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그의 정치인생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8전9기 도전했으나 다시 5번 낙선한, 그 의지만큼은 정말이지 대단한 사나이. 게다가 일생동안 정당은 누구보더 많이 옮겼을지언정 지역구만큼은 자신의 고향인 김포를 절대 떠나지 않았다. 이 부분 역시 퍽 대단하다고 볼 만한 부분이다.

2. 생애[편집]


1930년 3월 13일 경기도 김포군(現 김포시)에서 태어났다. 김포초등학교(32회), 김포중학교, 경신고등학교(47회),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6회)를 졸업하고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1954년 정준 무소속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본인이 모시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무소속 정준 후보에 밀려 첫 번째로 낙선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돈해 후보에 밀려 2번째로 낙선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군소정당 민주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재소 후보에 밀려 3번째로 낙선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김재춘 후보에 밀려 4번째로 낙선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경기도 강화군-김포군-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오홍석 후보와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에 밀려 5번째로 낙선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느 정당에서도 공천을 받지 못하자 공탁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용태영 변호사 등과 함께 안민당을 창당해 안민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신능순 후보와 민주한국당 오홍석 후보에 밀려 6번째로 낙선하였다.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500만원의 공탁금을 내야했지만, 정당 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200만원의 공탁금만 내면 되었다. 어쨌거나 떨어져서 돈은 깨졌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안동선 후보와 민주정의당 박규식 후보에 밀려 7번째로 낙선했다.

이미 11대와 12대 총선때부터는 김포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지금같은 소선거구제가 아닌 중선거구제를 실시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김두섭과는 연고가 전혀 없는 부천시가 김포에 붙었다. 당연히 김두섭은 선거구내 인구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부천에서 거의 표를 받지 못해 낙선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강화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에게 몰표를 날렸고 민주정의당 정해남 후보에 밀려 8번째로 낙선했다.

1991년 민주당에 조직책을 신청하였으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고 8전 9기 끝에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자유당 정해남 후보를 꺾고 처음 당선됐다. 이때는 강화군의 표가 민주당과 민자당으로 갈렸고, 덕분에 106표차로 신승할 수 있었다. 당선된 이후 농림수산위원회윤리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이후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박종우 후보에 밀려 9번째로 낙선하였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사실 이때 정당을 여러 번 바꿨다. 본래 신한국당 소속이었으나, 박종우가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자연히 김포군 지구당위원장 자리는 박종우에게 넘어갔는데 보통 지역구의 국회의원은 자기가 속한 지역의 지구당위원장도 겸임한다. 이에 따라 김두섭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못 받을 확률이 커지자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하였다. 문제는 박종우가 의원 빼가기에 따라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면서부터 생겼는데, 당연히 신한국당에서 벌어졌던 대로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을 박종우가 차지하면서 김두섭은 또다시 밀려나 한나라당으로 갔고, 거기서 지구당위원장을 노렸으나 한번 탈당하고 돌아온 김두섭을 한나라당 측에서 곱게 볼 리가 없었고 자연히 한나라당 김포시 지구당위원장은 구본태에게 넘어갔다. 당연히 김두섭은 반발하여 또 한나라당을 탈당해 결국 자민련으로 가게 된 것.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기도 김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박종우 후보에 밀려 10번째로 낙선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유정복 후보에 밀려 11번째로 낙선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유정복 후보에 밀려 12번째로 낙선했다. 사실 여기서도 당초 공천을 넣었던 당은 한나라당이었고, 한나라당에서 공천 탈락을 하자 자유선진당으로 갈아탄 것이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행복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유정복 후보에 밀려 13번째로 낙선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20대 총선은 예비후보 등록만 하고 출마는 하지 않았다. 사유는 돈이 없어서 인터뷰를 보면 "91살 되는 오는 2020년도 21대 총선에 연금을 적금들어 다시 도전할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2019년 11월 20일 김포신문 인터뷰를 보면 건강에도 문제는 없다.

2020년 2월 21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자유통일당 소속으로 김포시 갑 지역구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리고 첫 총선 출마로부터 60주년을 맞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자금문제가 걸렸는지 결국 출마는 하지 못해 2회 연속 총선 불출마를 하였다.

21대 총선 불출마 이후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인 2022년 2월 전현직 국회의원 300명과 함께 윤석열 지지선언에 참여하였다. 다소 아이러니한 건 김두섭의 최종 당적은 친박-반윤 성향인 우리공화당이었다. 이를 미루어 보면 당내 다른 인사들과 마찰이 생겨 우리공화당을 탈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3. 생활[편집]


2012년 후보 당시 영상을 보면 조그만 컨테이너에 작디작은 점포를 열고 태극기를 5,000원에 팔고 있다. 컨테이너는 본인이 국회의원 연금으로 나오는 돈을 모아 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국회의원 연금은 받고 있으므로 본인은 금전적으로 지장은 없는듯 하지만, 평생 선거에 출마하면서 가산을 많이 탕진했다고 하니 그렇게 부유하게 사는것 같지는 않은 듯하다. 자녀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너희도 내 노후걱정 하지 마라"라고 쿨하게 약속하고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형편껏 김포에서 살고 있다. 다른 가족들은 직장 등의 이유로 다 김포를 떠나고 혼자 김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중이다. 사실 14대 국회 임기 당시만 하더라도 양천구 신정 7동의 허름한 자택에 거주하였으나[5]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2000년대 초반을 전후로 신정동 판자촌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가자 고향인 김포로 집을 옮겨 생활하고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군


4,614 (11.10%)
낙선 (4위)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민정당|
]]

7,459 (11.46%)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당(1967년) 로고타입.svg

5,050 (6.42%)
낙선 (3위)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국민당(1971년)|
파일:국민당(1971년) 흰색 로고타입.svg
]]

3,078 (4.09%)
낙선 (4위)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고양·강화

파일:민주통일당.svg

13,629 (9.28%)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김포·강화


32,957 (18.70%)
낙선 (3위)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한국국민당(1981년)|
파일:한국국민당(1981년) 글자.svg
]]

62,940 (20.82%)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강화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40,752 (39.57%)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32,218 (35.14%)
당선 (1위)
초선[6][7]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군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5,341 (32.40%)
낙선 (2위)
[8]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시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4,945 (8.44%)
낙선 (3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1,026 (1.13%)
낙선 (5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603 (3.83%)
낙선 (3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국민행복당(2011년)|
파일:국민행복당(2011년) 흰색 로고타입.svg
]]

913 (0.83%)
낙선 (4위)


역대 선거 벽보[9]


선거 참여 횟수가 역대 정치인들 중 가장 많다. 국회의원 선거 최다 도전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54 - 1957
정계 입문


1957 - 1961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61 - 1963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민정당|
]]

1963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3
탈당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963 - 1965
입당

1965 - 1967
합당[10]

1967
합당[11]

1967
탈당

1967 - 1970
창당

1970 - 1971
정당 해산

1971 - 1972
창당

1972 - 1973
정당 해산

1973 - 1980
창당

1980 - 1981
정당 해산

1981 - 1982
입당

1982
당명 변경

1982 - 1985
탈당

1985 - 1987
입당

1987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합당[12]

1990
탈당

1990 - 1991
입당

1991
당명 변경

1991
합당[13]

1991 - 1992
신당 합류를 위한 탈당

1992 - 1993
창당

1993
탈당

1993 - 1995
복당

1995 - 1996
당명 변경

1996 - 1997
탈당

1997 - 1998
입당

1998
탈당

1998 - 2000
입당

2000
탈당

2000
창당[14]

2000
탈당

2000 - 2002
입당

200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2 - 2004
창당[15]

2004
자진 정당 해산

2004 - 2006
복당

2006 - 2008
합당[16]

2008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8 - 2011
입당

2011 - 2012
합당[17]

2012
탈당

2012
입당

2012 - 2013
정당 해산

2013 - 2014
입당

2014 - 2016
당명 변경

2016 - 2020
탈당

2020
창당

2020
합당[18]

2020
당명 변경

2020 -
탈당
정계 은퇴
정치 경력이 무려 60년이 넘는다. 정계 입문으로 따지면 무려 김영삼과 동기다. 즉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또한 보유했던 당적이 모든 정치인을 통틀어 가장 많다. 피닉제로 유명한 이인제김한길은 물론, 안동선보다도 많은 당적을 보유했다. 재미있게도 안동선과 김두섭은 12대 총선에서 맞붙은바 있다. 특이한 점은 극우정당에 입당했을지언정 진보정당에는 한 번도 몸담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기표와는 차이가 있는데 보수적인 성향만큼은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둘러보기[편집]





[1] 김포군 선거구제15대 국회의원 이다.[2] 계양구-강화군 갑의 제15대 국회의원 이다.[3] 계양구-강화군 을의 제15대 국회의원 이다.[4] 대한민국헌정회 의원프로필[5] 이 당시 통일국민당 대표였던 정주영이 아파트라도 하나 장만하라고 3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주었으나, 정작 김의원은 이 돈을 가지고 김포 지역 주민들에게 기념품을 만들어 나눠주었다.[6] 9번의 선거 중 첫 당선.[7] 당적변경: 통일국민당무소속민주자유당신한국당[8] 당적변경: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한나라당민주국민당자유민주연합[9] 제 5~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0] 민정당과 신설 합당[11] 신한당과 신설 합당[12]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3] 민주당과 신설 합당[14] #[15] #[16] 해산과 동시에 한나라당에 일괄 합류[17]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18] 우리공화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