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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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民主黨)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다. 1955년 9월 18일에 이승만 정권 여당이던 자유당의 억지스런 사사오입 개헌이 동기가 되어 창당된 민주당계 정당이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은 이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5] 그래서 1955년 민주당 창립 시점부터 60년 뒤인 2015년에 민주당 60주년 기념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참고로 더불어민주당과 법적으로 연관이 있는 최초의 전신 정당은 1995년 창당된 새정치국민회의이다.
역대 민주당계 정당 중 처음으로 원내 다수당 자리를 획득했던 당이 이 당이다. 4.19 혁명의 여파로 자유당이 박살나면서[6] 제4대 국회 회기 중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모두 과반 이상의 의석을 보유하며 압도적 집권 세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분당까지 가는 내부 갈등을 겪으며[7] 1960년 말 분열됐고[8] , 1961년에는 5.16 쿠데타로 아예 민주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민주당의 전성기는 1년을 채 못 넘기고 마감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계 정당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기 이전까지 보수정당에 밀려 줄곧 원내 2당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9]
한편 민주당 창당에는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으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있던 우익 정치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나 노선갈등으로 물러난 뒤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혁신계(진보세력)의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다. 장택상과 조봉암은 사상적으로 정반대였지만, 사적으로는 대단한 절친으로 장택상이 조봉암은 혁신계지만 사상적으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보증하고 김성수도 호응하면서 민주당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민주당 창당 직전 사망하고, 구 한민당, 민국당 출신들은 장택상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조봉암은 안 된다"면서 거부하면서 조봉암은 민주당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의 절친인 장택상도 민주당 창당에서 빠지고 자유당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조봉암은 혁신계를 결집시켜서 독자적으로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밀어주기보다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져달라고[11] 유세하였고 이승만이 당선되게 된다. 반면 진보당은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을 밀어주었고, 2.4%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면이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역시 선거 도중 사망한다.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당했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부통령 선거 결과 이기붕이 장면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어 역사에 3.15 부정선거로 기록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하야한다.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의석의 약 75%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12] 민주당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구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0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신파가 의석수를 늘려가며 사실상 집권여당으로써 역할을 했지만, 고작 집권 1년차에 5.16 군사정변이 터져서 와해되어버렸고, 헌정이 재개된 이후로는 절차부심해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석패했고, 의회권력도 단일화 실패로 결국 민주공화당이 차지하고야 만다.
민주당 구파는 구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계열의 인사들이다. 전라도(넓게는 기호 지방까지)의 토착 지주 출신 정치인들이 다수였던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부터 당대의 정치엘리트로서 민족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해온 그룹이었다. 1955년 사망해 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김성수는 소위 '민주당 구파 스타일' 정치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당 신파는 민주당 구파보다 10살 연하의 비주류 신진 소장 세력으로, 장면을 위시하는 평안도·흥사단 계열의 인사들과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합류한 자유당 탈당파[13] , 관료·법조인 출신 인사들의 연합이었다.
이 야당의 두 그룹은 교육수준, 이승만에 대한 적대감,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장려하는 경제관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 교육을 받은 장소, 종교, 독립운동과의 유대관계, 계급, 경력 및 직업, 부의 근원, 출신지, 미국과의 친밀감 등에서 두 그룹은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으며, 분당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분당파는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협상파는 신파로 넘어가 합작파가 되었다.
신파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고,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소장파 의원 32명이 신풍회를 조직하였고, 합작파는 정안회를 조직하였다. 노장파에서도 비주류로 구성된 중도파는 신풍회와 협력하려 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정당 중 하나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민주당을 정치적 뿌리로 보고 매년 9월 18일 창당일 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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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민주당(民主黨)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다. 1955년 9월 18일에 이승만 정권 여당이던 자유당의 억지스런 사사오입 개헌이 동기가 되어 창당된 민주당계 정당이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은 이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5] 그래서 1955년 민주당 창립 시점부터 60년 뒤인 2015년에 민주당 60주년 기념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참고로 더불어민주당과 법적으로 연관이 있는 최초의 전신 정당은 1995년 창당된 새정치국민회의이다.
역대 민주당계 정당 중 처음으로 원내 다수당 자리를 획득했던 당이 이 당이다. 4.19 혁명의 여파로 자유당이 박살나면서[6] 제4대 국회 회기 중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모두 과반 이상의 의석을 보유하며 압도적 집권 세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분당까지 가는 내부 갈등을 겪으며[7] 1960년 말 분열됐고[8] , 1961년에는 5.16 쿠데타로 아예 민주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민주당의 전성기는 1년을 채 못 넘기고 마감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계 정당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기 이전까지 보수정당에 밀려 줄곧 원내 2당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9]
2. 역사[편집]
2.1. 창당과 통합[편집]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야당 세력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한 정당에 여러 계파가 모여 있다 보니 창당 이후에도 이합집산으로 모인 계파와 과거 정당 출신들이 갈등을 벌였다. 구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출신 구파,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민주당 창당에는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으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있던 우익 정치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나 노선갈등으로 물러난 뒤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혁신계(진보세력)의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다. 장택상과 조봉암은 사상적으로 정반대였지만, 사적으로는 대단한 절친으로 장택상이 조봉암은 혁신계지만 사상적으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보증하고 김성수도 호응하면서 민주당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민주당 창당 직전 사망하고, 구 한민당, 민국당 출신들은 장택상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조봉암은 안 된다"면서 거부하면서 조봉암은 민주당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의 절친인 장택상도 민주당 창당에서 빠지고 자유당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조봉암은 혁신계를 결집시켜서 독자적으로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
2.1.1. 창당에 동원된 정당과 계파[편집]
2.2. 두 번의 대선[편집]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워 정권교체에 도전한다. 그러나 선거 유세 도중 신익희가 사망하면서 이승만에 맞서는 또다른 세력이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이승만과 1대1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밀어주기보다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져달라고[11] 유세하였고 이승만이 당선되게 된다. 반면 진보당은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을 밀어주었고, 2.4%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면이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역시 선거 도중 사망한다.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당했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부통령 선거 결과 이기붕이 장면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어 역사에 3.15 부정선거로 기록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하야한다.
2.3. 제2공화국 시기[편집]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의석의 약 75%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12] 민주당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구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0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신파가 의석수를 늘려가며 사실상 집권여당으로써 역할을 했지만, 고작 집권 1년차에 5.16 군사정변이 터져서 와해되어버렸고, 헌정이 재개된 이후로는 절차부심해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석패했고, 의회권력도 단일화 실패로 결국 민주공화당이 차지하고야 만다.
3. 구파와 신파[편집]
민주당 구파는 구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계열의 인사들이다. 전라도(넓게는 기호 지방까지)의 토착 지주 출신 정치인들이 다수였던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부터 당대의 정치엘리트로서 민족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해온 그룹이었다. 1955년 사망해 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김성수는 소위 '민주당 구파 스타일' 정치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당 신파는 민주당 구파보다 10살 연하의 비주류 신진 소장 세력으로, 장면을 위시하는 평안도·흥사단 계열의 인사들과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합류한 자유당 탈당파[13] , 관료·법조인 출신 인사들의 연합이었다.
이 야당의 두 그룹은 교육수준, 이승만에 대한 적대감,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장려하는 경제관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 교육을 받은 장소, 종교, 독립운동과의 유대관계, 계급, 경력 및 직업, 부의 근원, 출신지, 미국과의 친밀감 등에서 두 그룹은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으며, 분당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분당파는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협상파는 신파로 넘어가 합작파가 되었다.
신파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고,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소장파 의원 32명이 신풍회를 조직하였고, 합작파는 정안회를 조직하였다. 노장파에서도 비주류로 구성된 중도파는 신풍회와 협력하려 했다.
4. 역대 지도부[편집]
5. 출신 대통령[편집]
6. 출신 부통령[편집]
7. 출신 국무총리(내각제)[편집]
8. 역대 선거[편집]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신익희 사망 - 부통령 장면 46.43% 당선
-
- 1956년 지방선거
- 시장 0/6
- 읍장 1/30
- 면장 9/544
- 시의원 54/416
- 읍의원 57/990
- 면의원 231/16,051
- 특별시·도의원 98/437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79/233 33.9%
-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무효)-
대통령 조병옥 사망 -
부통령 장면 17.5% 낙선
-
-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민의원 175/233 75.1%
- 참의원 31/58 53.4%
- 국무총리 장면 117/225 당선
-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윤보선 208/263 당선
- 1960년 지방선거
- 특별시장·도지사 6/10
- 시장 12/26
- 읍장 23/82
- 면장 297/1,359
- 특별시·도의원 195/486
- 시의원 129/420
- 읍의원 142/1,055
- 면의원 2,510/15,376
8.1. 대통령 선거[편집]
8.2. 부통령 선거[편집]
9. 출신 정치인[편집]
10.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뿌리[편집]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정당 중 하나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민주당을 정치적 뿌리로 보고 매년 9월 18일 창당일 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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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59번지로, 현 대일빌딩 자리다.(참고)[2] 이전에는 청록색이라고 되어있었는데, 당시 선거벽보의 색이 누렇게 변해서 청록색이 된 것일 뿐, 원래는 남색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당시 벽보12[3] 현재 민주당계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당색과 유사하다.[4] 로고에 사용되는 폰트가 지금의 민주당 폰트와 유사하다.[5] 실제 뿌리인건 맞다. 다만 그 이상 올라가면 1945년 창당된,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민주당(1955)의 법적 전신이기도 한 한국민주당 역시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민주당은 그 외에도 여러 세력이 모여 통합하여, 반이승만 노선을 정해 야당 정치가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출신의 정치인들도 합류해 친일파 색채가 상당히 희석된 정당이지만(애초에 초대 당수인 신익희부터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한민당은 항목에도 있듯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창당 주축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뿌리라고 하기가 영 껄끄러워서인지 2010년대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족보에서 파이는 굴욕을 맞기도 했다. 이는 보수정당이 독재 시절 계보도 일부를 부정하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일듯.[6] 자유당에 소속됐던 의원들이 대거 탈당해서 무소속 신분을 유지했고 이들 중 일부는 무소속 신분으로 다음 총선에 나가기도 했다. 허나 이 당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들도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었던게 함정.[7] 대통령 윤보선 중심의 구파와 국무총리 장면 중심의 신파로 나뉘었는데, 구파는 주로 예전부터 당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신파는 주로 이승만 정권 이탈 세력들이었다. 다만 김영삼은 자유당 탈당파임에도 신파가 아닌 구파에 속한다.[8] 이들이 탈당한 명분은 일당우위가 이어지면 민주주의에 좋지 않다는 것. 실제 쿠데타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민주당계 양대 정당들이 번갈아가며 장기집권했을 가능성이 높다.[9] 다만 의석수가 아닌 득표율에선 이전에도 앞선 적은 있었고, 여소야대는 민주당계 정당과 비주류 보수 세력 일부가 연합하는 식으로 그전부터 실현된 바 있었다.[10] 대표적인 인물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11] 당연히 사망한 후보를 향해 한 투표는 무효표 처리된다. 또한 당시 여론을 분석한 여러 자료에서 당시 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 중 신익희를 향한 기권표를 던지지 않은 상당수가 조봉암이 아니라 이승만을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12]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도 달성하지 못했던 마의 3/4선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민자당이 이에 비견되는 의석비율을 확보하긴 했지만 선거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 92년 총선에서 149석으로 쪼그라들았다.[13] 김영삼은 자유당 탈당파 출신임에도 유진산, 조병옥과 친분이 있어서였는지 신파가 아닌 구파로 분류되었다. 참고로 김대중은 장면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정일형과 가까웠던 신파였다.[14] 선출 당시 당적은 민주당이었으나, 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은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취임 직전에 탈당했다.[15] 계광순(桂珖淳)[16] 곽상훈(郭尙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