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민당(2000년)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1949년에 창당한 동명의 정당에 대한 내용은 민주국민당 문서
민주국민당번 문단을
민주국민당#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정부상징(1949-2016).svg 대한민국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1973.3.10.~1979.10.26.)
민주국민당
(2001.4.16.~2001.9.3.)

더불어시민당
(2020.3.8.~2020.5.18.)
자유민주연합
(1998.2.25.~2001.9.3.)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svg
민주국민당
공식명칭
민주국민당 (民主國民黨)
약칭
민국당 (民國黨)
창당일
2000년 3월 8일
해산일
2004년 4월 18일
의석 수
1석 / 299석
이념
보수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파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18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5층)
당 색
푸른색 (#353F9C)}}}
붉은색 (#C2012A)}}}

1. 개요
2. 역사
3. 당색
4. 역대 당대표(총재)
5. 역대 선거결과
5.1. 국회의원 선거
5.2. 지방선거
6. 유사정당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민국당 창당식.jpg}}}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되어 정확히 4년 존속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국당(民國黨).

2001년 4월 16일, 새천년민주당이 선언한 3당 연합으로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연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


2. 역사[편집]


"한 가지 대한민국이 좋다고 느끼는 거는, 정당 창당에 대해 특허낸게 없으니까."# (1:30 부터)

신상우 의원의 창당의 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회창 총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중진급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정치 신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단행한다.[2]

이 때 공천 탈락자들 중에는 바로 이회창 총재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김윤환 고문[3], 한승수 前 부총리 같은 민정계 일부, 그리고 신상우 前 국회부의장, 문정수부산광역시장을 비롯한 구 민주계 일부, 이기택 의원[4]을 위시한 옛 민주당 출신 인사, 여기에 1997년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겨뤘던 이수성 前 국무총리[5]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수두룩했다. 그 외에도 현역 의원 공천탈락자가 수십여명으로 공천학살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공천을 받았음에도 각각 중진 대량 컷오프와 지역구 옮겨심기에 반발한 민주당 출신 조순 명예총재[6]김광일 前 대통령 비서실장[7]은 스스로 공천을 반납했다.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조순, 이기택, 김윤환, 신상우 등 중진급 인사들은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여기에 당시 여당새천년민주당의 공천에서 밀려난 김상현[8][9]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대구에서 2회 내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서훈 의원[10], 국민신당 해산 이후 원외에서 독자행보를 하고 있던 박찬종 前 의원과 꾸준히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고 있던 재야운동가 장기표[11] 등의 인사들까지 합류하면서 세를 키웠다. 거기다가 막판에는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허화평[12]까지 참여했다. 창당을 선언한지 불과 19일 만인 2000년 3월 8일 조순을 당 총재로 추대하고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그러나 현역 의원만 수십여명이 참여할 것이란 호언장담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천탈락자들이 지도부의 설득으로 당 잔류를 선택하면서 새천년민주당에서 지역구 2석(김상현, 박정훈), 한나라당에선 지역구 6명(김윤환, 신상우, 한승수, 조순, 서훈, 김동주)과 전국구 2명(김철, 윤원중)만이 탈당해서 민국당에 합류하였다.[13] 그나마 정당법에 따라서 전국구 2명은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 상실. 이러면서 많이 위축되었고, 최대 50석까지 노린다던 기세도 사그라든다. 그래도 창당초기에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현역 의원만 10명에, 인지도가 높은 전·현직 의원, 장관, 지자체장급들이 다수라서 제법 여론조사에서 우위에 나오는 결과도 나왔다. 여기에 한나라, 민주 양당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나름 지역기반이 있는 정치 지망생[14]들을 대거 공천해서 전국 227개 지역구 가운데 161곳에 후보를 내면서 전국정당의 모양새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반호남지역감정을 폭발시켜서 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가담했던 정치인들의 성향이 워낙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관계로 여러가지 난맥상이 불거지면서 시망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당장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영남권에서 워낙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값으로 어찌저찌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대실패였다. 수도권이야 애당초 경쟁력이 있는 후보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살아남을 줄 알았던 영남권에서조차 한나라당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경북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민정계의 거두 5선 김윤환 후보가 구미시에서 무소속 도의원 출신 김성조 한나라당 후보에게 털린 것, 전직 국무총리이자 유력 대권 후보였던 이수성 후보가 고향 칠곡군에서 한나라당의 정치 신인 이인기에게 패한 장면이었다.[15] 즉, 2000년 16대 총선에서 보여준 것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8년, 16년 뒤에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은 대박을 쳤다. 하지만 20년 뒤 급조된 정당은 미러링 수준으로 더 처절하게 망했다(...) 이렇게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민주국민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 데에는 한나라당의 "민국당 찍으면 DJ를 도와주는 격"이라는 논리가 한몫했다가 아니라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른바 '이인제 학습효과'라는 것으로서,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를 찍었더니 김대중이 되었다는 영남권 유권자의 경계심리가 그것이다. '이회창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민국당을 찍으면 정권을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

그래도 영남권에서 2등 낙선도 있고 표도 긁어모아서 지역구 후보들의 전국 득표율 합계는 3.7%.[16] 이걸로 봉쇄조항 3%를 넘겨 전국구 1번 강숙자 후보[17]가 금배지를 달았고, 춘천시에서 부총리 출신의 한승수 후보가 당선되며 2석 짜리 정당으로 생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30석을 장담하던 초반의 기세에 비하면 한 없이 쪼그라든 수준.

그 뒤 수석최고위원이던 김윤환 前 의원이 5달간의 대표권한대행을 하다가 2000년 9월 27일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추대되었다. 이후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한테 국회의원까지 꿔주면서 다시 공조를 복원하였음에도 국회 과반수(137석)에서 2석이 모자라자 민주국민당에도 손을 내밀었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 박찬종, 장기표 등 반 DJ를 표명했던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세가 줄었지만[18], 어쨌든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생존에 성공. 3당 연합의 대가로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19]

하지만 처음부터 이념이나 정책 등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이 당장 눈 앞의 금뱃지만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라 선거결과가 안좋자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윤환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인사들은 명패만 걸어두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2년도 못돼서 2001년 9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 DJP연합이 붕괴했고, DJP연합의 부족한 틈새를 메꿔주던 민국당의 가치도 급속도로 추락한다. 당시 김대중 정부 입장에서는 자민련이 이탈했기 때문에 민국당 국회의원 2명을 잡고 있어봐야 어차피 국회 과반수에는 훨씬 못미친다. 배려해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성향만 놓고보면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던 민국당도 이 해임결의안에 찬성했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선 마음에 들지 않을 터. 결국 다음해 2월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에서 사퇴한다.

당 대표였던 김윤환은 '차기 대통령 4~50대론',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후보론', '차기 대권주자 박근혜' 등을 내세우면서 원외에서 활동했다.당시 김윤환이 주장했던 논리의 타깃은 이회창이었는데 대선 당시 만 56세였고 호남 정당인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당선되었으며 박근혜도 이회창을 비판하면서 탈당 후 복당했다. 김윤환 사후에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당을 재정비하고 차기 대권주자를 거쳐 대통령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선구안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의 당세가 약해서 큰 효과를 보지는 못 했다.

그리고 지방선거와 대선이 예정된 2002년이 되자 모두들 자기 갈길을 가버렸다.

영남 출신 옛 민주계 인사들은 노무현 후보캠프로 들어갔으며, 특히 신상우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의 후원회장을 맡았다.[20] 애초에 민주당 출신이던 김상현도 민주당으로 복당해서 지방선거 직후에 치러진[21]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야 출신 장기표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영등포 재보선에 출마하였으나 권영세에 패배해자 다시 민주당을 탈당했다.[22]

당의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2002년 10월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면서 의석수도 1석으로 줄었다. 다른 한나라당 출신들도 대부분 조용히 원대복귀하였고, 월드컵 열풍으로 정몽준의 인기가 치솟자 김동주 같이 국민통합21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참가하였으나 모든 후보가 낙선하였다.

2002년 11월 27일에 김윤환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 보인 이회창을 지지선언하고 합당까지 가나 싶었지만 신장암 치료를 위해 1월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엎어지고, 김동주 최고위원이 대표권한대행을 하다가 2003년 4월 18일에 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민주국민당은 비례대표(전국구) 강숙자 의원과 껍데기만 남았으며[23], 결국 김동주 대표가 2004년 2월에 사퇴하고 김태룡 전 의원을 대표로 추대했다. 그렇게 용두사미가 된 민주국민당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폭망하면서 정당 등록이 취소[24]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당을 지켰던(?) 강숙자 의원은 금뱃지는 커녕 상습 범죄자로 전락해버렸다.

이 당에서 출마했던 정치 신인 중 이후에 국회의원이 된 인물로는 김한표, 심재엽, 이동섭, 이한정[25] 의원 등이 있다.


3. 당색[편집]


파일:민주국민당 한나라당 당색 구분.jpg
민주국민당과 한나라당의 당 로고 비교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png
선거 공보물 스캔 이미지

이미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당색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나라당의 상징색(
파란색 (#0000A8)
[1] 아사히 신문발 보도 참조[2]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에 대선 직후 집권세력의 의원 빼가기, 1998년 지방선거 패배, 외환위기 책임론 등으로 극도로 위축되있던 한나라당은 2000년 16대 총선도 패배가 유력했는데, 윤여준이 제시한 대규모 물갈이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사회생하였고 윤여준은 이때부터 보수의 전략가, 보수의 장자방이란 칭호를 받으면서 급부상한다.[3] 임명직 당 대표와 정무장관을 지낸 TK의 대부였지만, 그의 계보와 같이 무려 1차로 컷오프 당했다.[4] 이기택 개인은 최형우 의원의 와병으로 인해 공석이 된 연제구 출마를 고수했으나 이회창 총재는 이를 반대하고 전국구 공천을 주려했고 이 문제로 틀어지면서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다.[5] 다만 이수성은 미묘한게 1997년 대선무렵에 탈당하여 민화협 상임의장을 거쳐서 돌아온 상황이었다. 한나라당 당적을 가졌음에도 국민의정부에 유화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이후 17대 대선 때는 독자세력을 구축하여 출마했다가 사퇴하고 민주당계 정당 후보인 정동영을 지원했다.[6] 강릉시 갑과 강릉시 을이 합구가 이뤄지고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공천을 받았으나 반납.[7] 해운대구-기장군 갑 출마를 희망했으나 이기택계인 손태인에게 밀려 을구로 공천받았다. 이 때 을구 지구당위원장인 안경률은 그와 같은 YS계 출신이어서 공천을 반납했다.[8] 당시 김상현은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호언장담했다.[9] 대선 당시에 보인 독자행보로 DJ에게 찍혔다는 것이 정설. 사실 독자행보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정대철을 대통령 후보로 밀며, 김대중이 또 대선에 나가면 안된다고 "대통령도 하고 총재도 하겠다니, 국민회의가 무슨 다 김대중 총재 겁니까?"라면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문제는 김상현은 당대 모든 정치인 중에 김대중과 가장 오래 친분을 쌓다 못해 친동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의 핵심 후배였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젊었을 때 김대중에게 직접 연설을 배웠고, 박정희 정부 시대만 해도 사석에서 남들이 다 선생님이라 부를때 김대중을 선생님이나 의원님도 아닌 그냥 "대중이 형님"이라고 유일하게 불렀을 정도로 엄청나게 친했었다. 김상현의 원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에서는 정치 신인인 우상호가 출마했고, 결국 한나라당 이성헌에게 패했다. 김상현의 아들이 2022년 현재 서대문구 을 국회의원인 김영호 의원이다.[10] 다만 1996년에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한나라당 당적을 가지고는 있었다.[11] 이 사람은 당시 무소속의 홍사덕 의원과 신당창당을 시도했지만 홍사덕이 전국구 2번 공천을 받고 한나라당으로 가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12] 본래 자민련을 탈당한 김용환과 손을 잡고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으나 당을 옮겼다.[13] 또한 제 3당인 자민련이 있었기 때문에, 공천에 떨어져서 원 소속당에 잔류하던가, 아니면 탈당을 해서 당을 옮기더라도 그나마 기반이 있는 자민련으로 들어가지, 구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신생정당인 민국당으로 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14] 거제에서 김기춘에게 밀려서 한나라당 공천탈락해 민국당으로 온 총경 출신 김한표도 이 중 한 사람이다. 이후 19대 국회에서는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15] 여담으로 당시 김윤환 의원를 꺾은 김성조 후보와 이수성 후보를 격침시킨 이인기 후보는 그 후 연달아 같은 지역구에서 18대 국회까지 내리 3선에 성공하지만, 둘 다 19대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 공천에서 떨어지거나 불출마 선언을 했고 뒤에는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이다.[16] 당시는 1인2표제 도입이전으로, 각 정당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얻은 표를 모두 합쳐서 전국구 의원을 배분했다. 헌법재판소가 2002년 지역구 후보자 득표로 전국구 후보자 당선을 결정하는 것은 '이중투표'에 해당한다면서 위헌판정을 내리자, 여야 합의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17] 사실 이 사람도 문제가 많았는데,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를 30억원의 특별당비를 내고 공천을 받았다는 설이 파다했다. 사실상 국회의원 뱃지를 돈 주고 산 것.[18] 막상 장기표는 2002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들어가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나 권영세에게 져서 또 탈당한다. 다만 2002년 당시의 민주당은 DJ의 힘이 약해진지라, 장기표가 들어가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19]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승수의 입각 덕분에 차관자리에서 경질된 반기문다시 부활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결과였다.[20] 이기택도 과거의 인연 때문에 대선 당시에는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참여정부의 실정에 실망했는지 17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인터뷰에서 노무현 지지를 후회한다고 했다.[21] 당시 광주 북 지역구의 국회의원인 박광태가 광주시장 출마로 사퇴하면서 김상현이 들어간 것이다.[22] 장기표는 민중당(1990년) 창당에 참여한 이후로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또다른 정당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의 무한루프를 타고 있다. 당선이 안돼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뿐 거쳐간 정당을 보면 이인제 뺨칠 정도의 철새다.[23] 그나마도 전국구 의원은 탈당시에 자동으로 의원직 상실인지라 당 잔류.[24] 2014년 헌법재판소가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25] 다만 이한정의 경우 2008년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자마자 허위 경력을 기재한 것과 공천헌금을 낸 혐의로 인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여기에 후보 등록 과정에서 전과를 누락한 채 범죄경력 증명서류를 제출된 사실로 인해 정당이 낸 등록무효 소송에서 패소하여 얼마 못 가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전부터 사기, 공갈 등의 전과가 있었으며, 2000년 16대 총선 당시 민주국민당 후보로 나왔을 때도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고... 기막힌 것은 이때 공보물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빌 클린턴장쩌민과 찍은 사진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게재했는데, 지금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보다는 탁하고 옅은 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람할 수 있는 어느 후보의 벽보 외 여타 후보의 스캔 이미지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4. 역대 당대표(총재)[편집]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로고타입.svg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총재
[ 펼치기 · 접기 ]



  • 1대: 조순(2000.03.08 ~ 2000.04.24)





5. 역대 선거결과[편집]



5.1.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례
결과
비고
2000년
16대
1 / 227 (4.3%)
1 / 46 (3.7%)
2 / 273 (3.7%)
원내 4당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민주국민당1.jpg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국민당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고 지역구 후보만 출마시켰으나, 전원 낙선하였다.


5.2. 지방선거[편집]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2년
3회
0 / 16 (0.05%)
0 / 232 (0.0%)
0 / 682 (0.0%)


6. 유사정당[편집]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잠깐 있었던 국민생각이 이 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당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급조한 정당이었고 결과가 참담했다는 점에서. 다만 결과는 그나마 민주국민당이 훨씬 양호해서, 국민생각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의 한광옥 전 대표가 동교동계 일부를 긁어모아서 창당했던 정통민주당 역시 이 당과 행보가 거의 유사했는데, 결과는 역시 참패였고, 한광옥은 결국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합류했다. 참고로 장기표는 이 모든 정당에 참여했다.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가 창당대회 하루 전날에 탈당해서 정통민주당에 합류했고 역시나 선거에선 낙선했다! 민주국민당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으로 더이상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선거를 앞두고 몇몇 명망가들이 급조하는 정당에는 표를 주지 않는다는걸 다시금 보여준 것이다.

2016년안철수-천정배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이 이 당과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으라는 예상이 있었으나[26] 결과는 14대 총선의 통일국민당, 15대 총선의 자유민주연합의 결과와 같이 정반대로 나타났다. 20대 총선 항목 참조.


7.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파일:대한독립촉성국민회 글씨(흰색).png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48.7.~1951.12.)
[[자유당|]]
(1951.12.~1960.4.)
[[민주당(1955년)|]]
(1960.8.~1961.5.)
[[한국민주당|파일:한국민주당 글씨(흰색).png

한국민주당
]]
(1948.7.~1949.2.)
[[민주국민당|파일:민주국민당 글씨(검정).png

민주국민당
]]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3.3.)
[[민주공화당|]]
(1973.3.~1979.10.)
[[민주정의당|]]
(1981.1.~1990.1.)
[[민주자유당|]]
(1990.1.~1992.9.)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1973.3.~1979.10.)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6.2.)
[[신한국당|]]
(1996.2.~1997.11.)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1998.2.~2000.1.)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자유민주연합|]]
(1998.2.~2001.8.)
[[민주국민당(2000년)|]]
(2001.4.~2001.8.)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
(2008.2.~2012.2)
[[새누리당|]]
(2012.2.~2017.2.)
[[자유한국당|]]
(2017.2.~2017.3.)
문재인 정부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2017.5.~2020.3.)

(2020.3.~2020.5.)

(2020.5.~현재)
[[더불어시민당|]]
(2020.3~2020.5)





[ 펼치기 · 접기 ]
구성
인사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정책 및 방향
햇볕정책 · 대중참여경제론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국민PC · 국립대학구조조정계획 · 전자정부 · 인사청문회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노사정위원회 · 국가인권위원회 · 경제자유구역 ·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법 · KAMD · 한국형 전투기 개발 추진 · 한국형 우주 발사체 개발 추진 · 한국형 무인 전투기 개발 추진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논란이 있는 평가 · 햇볕정책/평가
타임라인
1998년
1998년 재보궐선거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휴민트 사건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 지리산 폭우 참사 ·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 정부대전청사 개청
1999년
제1연평해전 · 1999년 재보궐선거 ·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 국정원 출범 · 국민PC 보급 시작 · 국민연금 의무 가입 실시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문화재청 개청 · BK21 · 신지식인 · 옷로비 사건 · 민주민족혁명당 사건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2000년 재보궐선거 · 제1차 남북정상회담 · 6.15 남북공동선언 · 햇볕정책 추진 ·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 진승현 게이트 · 의약 분업 · 새천년 NHK 사건 · 정현준 게이트 · 주한미군 독극물 한강 무단 방류 사건 ·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 · 의문사위 출범
2001년
2001년 재보궐선거 · 제7호 태창호 사건 · 2001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 이용호 게이트 · 여성부 출범 · 인권위 출범 · 테러방지법 파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예지학원 화재 사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재보궐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 한일 월드컵 · 제2연평해전 · 이석기 검거 · 홍삼 게이트 · 최규선 게이트 ·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1.25 인터넷 대란 · 대구 지하철 참사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김대중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김대중 참고







''' 1996.5.30. ~ 2000.5.29.'''

[ 임기 개시 ]
여당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142석

야당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7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48석


파일:민주당(1991년) 흰색 로고.svg

8석

무소속

15석

재적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후반기 개시 ]
연립 여당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87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49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52석



8석

무소속

3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90009; font-size: .8em"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임기 종료 ]
연립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98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52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28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8석


파일:희망의 한국신당 흰색 로고.svg

3석

무소속

9석

재적

298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000.5.30. ~ 2004.5.29.'''

[ 임기 개시 ]
연립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11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7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33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2석


파일:희망의 한국신당 흰색 로고.svg

1석

무소속

1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73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후반기 개시 ]
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111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30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4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1석


파일:한국미래연합 흰색 로고.svg

1석

무소속

3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60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임기 종료 ]
여당

파일:열린우리당 1차 로고.svg

49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신 로고_가로.svg

139석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5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0석


파일:국민통합21 로고3.svg

1석

무소속

12석

재적

271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06:57:33에 나무위키 민주국민당(2000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26] 당내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탈당한 거대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주도해 창당한 정당이라는 것과 선거를 앞두고 거대정당을 탈당했거나 무소속이었던 의원들을 영입해 세를 불렸던 것, 당시 제1야당의 텃밭에서 선거 전 지지율 돌풍을 일으켰던 것,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존재했던 정당명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 등 닮은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