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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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사찰이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길 372이다.

일제강점기 본산제도(本山制度)에서는 31본사의 하나였다. 번창하던 때는 당우가 48동, 1,188평에 달하였으며 소속 전답에 소작미가 2000석을 넘는 대찰이었고, 경흥강숙(憬興講塾)이란 강원(講院)이 1937년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홈페이지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직지사 공식 홈페이지 말사 소개란에 부기되어 있을 정도... #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 극락전(極樂殿), 금륜전(金輪殿),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 향적전(香積殿), 상선원(上禪原), 설선당(說禪堂)[1], 천왕문, 홍하문(紅霞門) 등 48동이다.


1. 개요[편집]


처음 개산했을 때에는 절의 이름을 운봉사(雲峰寺)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찰에 전해지는 괘불화기(掛佛畵記, 1703년)에도 '운봉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도 '운봉사'라는 절 이름이 그대로 쓰였던 모양.

어쩌다가 사찰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건지는 설이 다양하다. 그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지어 이곳에 피신하여 숨어 살면서 어떤 신녀가(神女家)를 만나 매양 지극한 정성으로 불전에 참회하였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이라 하였으며, 이후부터 가운이 크게 부유해져 사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김룡리(金龍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운봉사도 김룡사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금선대(金仙臺)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김룡사 일원의 계곡을 운달계곡이라고 부르는데 '문경 8경'의 하나로 꼽힌다.


2. 역사[편집]


<운달산김룡사사적서(雲達山金龍寺事蹟序)>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10년(588년) 운달 조사(雲達祖師)가 개산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운달의 개산 이후로 고려 시대조선 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이 전해지지 않고, 임진왜란으로 한 번 전소되었다가 다시 지었다고 하니 그나마 절에 보관되어 오던 기록도 소실된 듯하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운달산김룡사사적>으로 절의 남은 기록들이 정리되었고, 현존하는 건물들도 대부분 조선 후기의 것들이다. 신라 시대의 문인 최치원의 시 가운데 '제운봉사(운봉사를 제목으로)'라는 시가 있어서

捫葛上雲峯

平看世界空

千山分掌上

萬事豁胸中

塔影日邊雪

松聲天半風

煙霞應笑我

回步入塵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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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넝쿨 부여잡고 구름 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니 세계가 그저 허공이로구나.

봉우리들은 손바닥 안에서 나뉘고

오만 가지 일들이 가슴 속에서 탁 트인다

탑에 그림자 지고 햇빛 가에 눈이 날리니

소나무 소리나는 하늘 절반은 바람이라

연기와 안개가 분명히 나를 비웃네

발길 돌려 또 속세로 돌아가느냐


이 시가 최치원이 김룡사 즉 운봉사를 가리켜 읊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최치원이 문경에 왔던 것 자체는 사실인데, 그의 사산비명 가운데 하나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가 그 증거로 꼽힌다. 봉암사는 문경시를 사이에 두고 딱 김룡사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김룡사사적에 따르면 인조 2년(1624년)부터 혜총 선사(慧聰禪師)가 김룡사를 중창하기 시작해, 이듬해에 혜총과 그 제자 광제(廣濟), 묘순(妙淳), 수헌(守軒) 등이 합심하여 선당(禪堂), 승당(僧堂), 법당(法堂), 범종루(梵鐘樓), 정문(正門), 그리고 동서회랑(東西廻廊) 과 향로전(香爐殿)을 세웠다. 하지만 이마저도 인조 21년(164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 5년 뒤인 인조 26년(1649년)에 의윤(義允), 무진(無盡), 태휴(太休) 이렇게 세 명의 승려가 대웅전을 지었다. 이후 김룡사의 대웅전은 정조 15년(1791년) 혜안(慧眼)에 의해 중수되었고, 헌종 12년(1846년)에도 다시금 중수가 이루어졌다.

효종 원년(1650년)에 유주(有珠)가 범종루를, 대념(大捻)이 첨성각을 지었다. 이어 법규(法規), 서헌(瑞軒) 두 승려가 선당을 지었고, 영정(靈貞)과 두청(杜淸)은 승당을 지었으며, 민운(敏雲)과 처엄(處嚴)이 사찰의 정문을 세웠다. 천성(天性)과 처진(處眞)은 김룡사의 범종을 주조했다.

숙종 때에 꽤 집중적으로 사찰의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숙종 16년(1690) 연하당(延河堂), 21년(1695) 만월당(滿月堂), 31년(1705) 수월료(水月寮), 34년(1708) 응진전이 세워졌고, 35년(1709년) 극락전 및 영산(靈山), 한산(寒山), 원통(圓通) 등 네 전각이 세워졌다. 설잠(雪岑)이 상실(上室), 중실(中室) 그리고 향적전을 지었다. 40년(1714) 담유(曇裕)과 탁밀(卓密)이 명부전 및 동전(東殿)을 짓고, 45년(1719) 성천(性天)이 범종루를 중건했다.

영조 2년(1726년) 자관(自寬)이 영산전과 명부전을 수리했고, 3년(1727년) 지원(智圓)이 회전문(回轉門)을, 성정(聖貞)이 홍하문을 세웠다. 10년(1734) 극윤(克允)이 산영루(山影樓)를, 16년(1740년) 수연(守演)이 청하전(靑霞殿)을 세웠다. 정조 5년(1781년) 경자갑계원(庚子甲契員)이 명부전을 중수했다.

고종 4년(1867년) 장로(長老) 침계(枕溪)가 응향각을, 30년(1893년)에 동전을 중수했다. 26년(1889년)에는 장로 경허(鏡虛)가 칠성각(七星閣)을 지었다.

1895년 10월 을미의병(乙未義兵)[2]으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1858~1907) 부대가 주둔했던 사찰이 김룡사이다. 3.1운동 당시 김룡사의 승려로 불교중앙학림에 다니던 전장헌(錢藏憲)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각지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달했고, 4월 11일 오후 7시 송인수, 성도환, 최덕찰 등 10여 명의 지방학림 승려들이 요사채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짜서 4월 13일[3] 수업이 끝난 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하고 그날 사용할 태극기 4매와 주민들에게 나눠줄 독립선언문도 필사해 인근 대하리로 향했으나, 도중에 김룡사 주지 김혜옹(金慧翁)이 와서 당장 사찰로 돌아가라고 막아서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김룡사에 헌병들이 몰려와 가담자 27명을 문경헌병대로 연행했다. 열흘 뒤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풀려났고, 세 승려는 실형이 선고된다. #

승려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권상로가 이곳에서 출가(1896년)하고 김룡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 ·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하는 등 불교학을 연구했으며, 24살이던 1903년 영안선사(永安禪師)로부터 인가를 받아 김룡사에서 강석(講席)을 개설했다. 또한 권상로는 1918년부터 1922년까지 김룡사 경흥학교와 상주 보광학교의 강사를 지냈기도 하다. 김룡사의 만세운동 계획이 탄로난 것과 권상로가 뭔가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권상로가 본격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이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라서 애매하다. 김룡사에서는 1987년 경내에 '권상로 대종사 사적비'를 세웠다. #

김룡사 승려로써 만세운동 계획을 기도했던 김훈영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6월 26일 오후 9시 예천의 불교포교당에서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가 빛났던 때에는 우리가 잘 통일되었을 때요, 금일과 같이 조선 사람이 쇠퇴한 것은 사회가 통일되지 아니하고 반상(班常) 사색(四色)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우리가 다른 열강과 같이 살아가자면 이 차별을 일소하고 민족의 힘을 통일함에 있으니, 공자님의 '내 도는 한 가지 이치로 꿰뚫고 있다'라는 것과 부처님의 '오만 가지 법은 모두 하나로 귀의한다(萬法歸一)' 하신 등의 말은 모두 이런 통일을 의미한 것이다"라고 강연했다. 강연 내용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라 판단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튿날 석방됐다. #

그리고 3개월 뒤에 서간도 방면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러 박달준, 김장윤, 김봉률 등이 합천의 가야면을 근거로 삼고 남만주군정부의 인감과 영수증을 만들어 경상남북도 및 충북의 각 사찰을 돌며 군자금을 모았고, 김룡사에서는 돈 130원을 '강탈'[4]했다는 보도가 났다. 1920년(다이쇼 9년) 10월 상순부터 15일까지 김룡사 외에도 고운사에서 40원을 수취, 대봉사와 범어사에서도 50원씩을 수취하는 등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았다.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박달준은 해인사 소속의 승려였고, 김봉률은 함양 영각사 소속의 승려였으며, 두 사람 모두 한족회 소속 류하고산자의 무관학교의 졸업생으로 알려졌다. 박달준은 1921년 1월에 일경에 활동이 노출, 체포되었다. ## 김장윤도 박달준이나 김봉률과 마찬가지로 승려였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었는데, 박달준과 김봉률이 체포된 것과 달리 김장윤은 다른 한 명과 함께 도망쳤다가 1927년에 산청에서 체포되었다. #

1926년에 경술국치 이후 '창덕궁 전하'라 불리던 구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승하 소식이 알려졌을 때 조선 각지의 여느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천에서도 김룡사 포교당과 불이 포교당이 4월 29일 오후 2시에 망곡을 행했다고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

1930년에 주지 육주인택(六洲仁澤)이 설선당(說禪堂)을 중건했고, 1940년 주지 제허병호(霽虛炳浩)가 설선당 및 만세루(萬歲樓)를 중수했다.

천왕문에 봉안되어 있던 사천왕도는 1880년에 제작된 것으로 1994년에 도난당했다가 2022년에 간신히 환수되어 김룡사로 돌려보내졌고## 이듬해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 기타[편집]


승려 시인 석성우가 김룡사의 주지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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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대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로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방이라는 이력이 있으며, 성철 스님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무문관을 마친 후 1965년 대중에게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곳이 이곳이다. 1997년에 실화로 범종루, 해운암과 함께 피해를 입었다.#[2] 을미사변을 계기로 각지에서 벌어졌던 항일 의병 항쟁이다.[3]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도 하다. 문경의 향토사학자 최병식은 1990년대 후반 별세한 김룡사 지방학림 출신의 김철과 민동선의 회고를 채집했는데, 김룡사 승려들이 4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한 것은 당시 산북면사무소 소재지인 한두리 장날이 그날이었기 때문이었다고.[4] 이 시대 신문에는 한국 독립군의 국내외 군자금 모금 활동을 '강탈' 내지 '약탈'로 표현한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