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구설/코치진 및 선수, 팬덤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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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김영신 선수 자살 사건
3. 삼성 시절 항명 사태
4. 김성근 경질 시위
5. 니시오카 츠요시 구타 사건
6. 이만수 및 SK 프런트와의 갈등
7. 최계훈과의 악연



1. 개요[편집]


김성근 관련 구설수에 대한 내용 중 코치진이나 선수들, 팬덤 등과의 갈등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은 문서이다.


2. 김영신 선수 자살 사건[편집]


1986년 8월 14일, OB 베어스의 포수 김영신이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적 부진과 저조한 출전 기회를 비관하여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자살로 결론이 났다. 김영신은 그 직후 등번호였던 54번이 KBO 역사상 최초로 KBO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김영신이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김성근 감독 스타일은 투수의 실수는 지적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거의 모든 책임을 포수에게 묻는다. 선수가 감독의 그런 스타일을 안다면 자신이 지적을 당하더라도 어느 정도 감안을 하고 받아 들어야 한다.

또한 김성근 감독은 한번 사람을 신뢰 하면 무덤까지 가는 스타일이다.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면 한 번 찍히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영신 포수는 정말 자살을 한 것일까 - 대한체육회, 체육포털 2012.07.31


일각에서는 김성근 감독 스타일 상 그 밑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는 야구계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OB 상황을 생각해보면, 김영신의 저조한 출전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포수사관학교"라고 불리는 OB-두산 베어스는 프랜차이즈 역사를 통틀어 쟁쟁한 포수가 많이 들어왔고, 특히 김경문과 조범현 주전 포수 라인이 건재했기 때문. 심지어 서드 포수로 정종현까지 있는 상황에서, 김영신은 신인치고는 꽤 출전 기회를 받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타율이 1985년 0.191, 1986년 0.091로 멘도사 라인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 주전 포수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 현실. 심지어 주전 포수 두명도 아직 20대 창창한 시기였다. 훗날 김성근은 80년대 후반을 위해 김영신을 키우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


3. 삼성 시절 항명 사태[편집]


김성근 감독의 삼성에서의 두 시즌(1991년~1992년)은 코치, 선수단 및 팬들과 갈등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년이었다.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이 삼성의 팀색깔을 완전히 부정하고 철저히 자신의 색깔로 바꾸려고 한 것이 팀내외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 이는 이미 김성근 감독이 선임되던 시점부터 예견되어왔던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삼성이 감독 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는 김성근 감독과 이미 미국식 야구를 섭력해온 삼성의 코치들과의 의견차가 발생한 것. 삼성은 그동안 미국식 야구를 지향했다. 프로구단 최초로 미국전지훈련을 떠났고, 미국인 코치를 영입했다. 국내 코치진의 미국연수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취임하자 곧바로 일본 지도자들을 인스트럭터 형식으로 초청, 색깔 바꾸기에 나섰다. 4월 초부터 타격 인스트럭터로 데라오카, 투수 인스트럭터로 오가와를 초청, 3개월씩 선수들을 지도하게 했다. 트레이너에는 이케다가 3개월간 초청됐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함학수, 손상대, 천보성, 김명성 코치 등이 팀을 떠나게 되었다. 특히 함학수 코치는 김성근이 기업은행 감독 시절 공을 들여서 영입하고, 국가대표팀까지 승선시킨 애제자이자 경북고 성골임에도 불구하고 팀을 떠났다.

김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선수들을 철저히 관리하겠다. 지금까지의 개인기를 지양하고 팀플레이에 주력하겠다”면서 자칭 관리야구를 천명하였고,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라.’라는 지론으로 김성근 감독은 오전 4시김상엽을 불러내 투구연습을 시켰고, 태평양에서 최창호, 정명원에게 했던 것처럼 박용준에게도 매일 500개의 공을 던지게 했다.

또 김성근 감독은 포지션별 경쟁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김성근 감독은 삼성 감독 취임 인터뷰에서 '"포수 포지션이 삼성의 최대의 약점"이라고 지적하며 팀의 주포 이만수 포수에게 고난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렸다.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가 자만해 있다면서 주전 포수를 박정환(1957)으로 교체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취임한지 며칠 후 OB 포수 조범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이만수의 공격력으로 그나마 팀성적이 유지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이만수를 교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휴식도 없이 혹사에 가깝게 출장시켰다. 이해(1991년) 이만수는 118경기에 출장했는데 이는 이만수 본인의 16시즌 커리어 통산 최다출장 기록이다.[1] 하지만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 등 삼성 타자들이 원년부터 해오던 세레머니를 질책하고 금지시키는 등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세레머니를 금지시킨 후 타율이 떨어지자 나중에 김성근 감독은 다시 세레머니를 허용했다.

또 김성근 감독이 더블포지션제를 실시하는 등 삼성의 전통적인 수비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으려 하자 결국 선수단의 집단 반발이 일어났다.


4. 김성근 경질 시위[편집]


시즌 개막부터 김성근 감독이 번트를 남발하며 호쾌한 타격의 팀이라는 삼성의 이미지를 지워나가자 삼성팬들도 반발했다. 뿐만아니라 빈번한 투수교체에 위장선발과 위장오더의 남발, 해태전 이중오더 파문, 투수 혹사 논란 등이 이어지며 타팀 타팀 야구팬들들로 부터 심한 비난과 질책을 받으며 공공의 적이 되자, 삼성팬들은 김성근 감독이 삼성의 팀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면서 불만을 표했다. 게다가 성적마저 하락하자 팬심이 급격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대구의 한 원로 야구인은 “우승 청부사로 영입했던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호쾌한 공격야구를 바라는 대구 팬들과는 맞지 않았다. 팬들은 김 감독의 잦은 투수교체를 비난했고, 홈런보다 번트에 치중한 야구 스타일에 실망했다. 그럼에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니, 팬들의 원성은 높았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팬들의 누적된 불만은 김성근 경질 시위와 관중수의 급격한 감소 등으로 표출되었다. 1992년 봄부터 시작된 삼성팬들의 김성근 경질 시위는 선수단 항명에 큰 힘이 되었고, 시즌 종료 후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이끌어 냈다.

1990년대 초 한국프로야구는 연간 관중수가 300만, 400만, 500만을 연달아 돌파하는 르네상스기였지만, 삼성 라이온즈의 관객수만 급감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1990년 43만 명이던 대구 홈 관중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91년 35만 명으로 줄었고 1992년에는 31만 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삼성의 호쾌하고 화끈한 공격야구가 부활하자 1993년 50만 명을 돌파했다.


5. 니시오카 츠요시 구타 사건[편집]


사건 자체는 2006년에 발생했지만, 정작 사건이 보도된 것은 2009년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기입으로 직접 언급하면서 나왔고, 2016년 4월 한화 이글스가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지면서 기사가 재발굴되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김성근은 내야수 니시오카 츠요시가 맹타를 휘두른 날 타격감이 어땠냐고 니시오카에게 묻자 니시오카는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다소 건방진 말투로 답변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김성근은 니시오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이후로도 두 번 더 맞았다고 한다.

김성근은 이 사건에 대해 "그래도 선수들이 많이 고마워하더라"라고 스스로 미화해서 인터뷰했지만, 군기 잡는 것의 옳고 그름, 그리고 선수 성적의 좋고 나쁨을 떠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든 나쁜 짓이다. 애초에 물어본 말에 대답 한마디 했다고 바로 죽빵을 맞았는데 고마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사건에 대해 "그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폭력을 휘두른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어도 부족할 망정 선수들이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맞은 니시오카 츠요시도 진심으로 김성근이 자신의 얼굴을 때려준 걸 고맙게 느끼고 있을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선수폭행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태도에서 김성근의 인격이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지 보이는 태도다.

또한 이 사건도 언론플레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게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일본프로야구 보다 아래인 KBO 리그에서도 우승을 해보지 못 한 감독으로서 일본에서의 코치 경력은 일천했다. 순회코치란 명칭도 인스트럭터에 가까운 직함으로 이런 경우는 선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먼저 나서기 힘든 직함이다. 다만 어쨌든 순회코치도 정식 코치는 맞고 요즘도 동양 스포츠계에서 심심찮게 폭력사건이 터지는 판에 06년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2021년 학교폭력 폭로 사건이 조명되며, 저 기사 또한 재조명 되었는데, 김성근 또한 스승의 위치에 있는 입장에서 오히려 폭행을 행사했고, 도저히 이 문제는 쉴드칠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되었다. 야갤에서는 김성근도 똑같은 가해자라며 이 츠요시 폭행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고 범죄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6. 이만수 및 SK 프런트와의 갈등[편집]


2010년 7월에 당시 2군 감독이었던 이만수 감독에게, 한 2군 코치가 아버지 기일 때문에 고향에 다녀와도 되냐고 양해를 구한 일이 있었다. 마침 경기 없는 월요일이여서 이감독은 이를 허락했는데, 나중에 김성근 감독은 "전쟁 중인 장수가 어떻게 전선을 이탈해 개인의 사사로움을 취할 수 있느냐"며 크게 화를 낸 일이 있었다.

하지만 2016년 5월 정작 자신이 아플 때 자리를 비우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만수 감독을 디스하던 모습이 무색해졌다. 뿐만 아니라 김성근 감독은 과거 80년대부터 지병인 간염 때문에 종종 수석코치에게 작전권을 위임하고 감독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OB 金(김)감독 肝炎(간염)악화

2011년 시즌 전에 이만수 코치가 자신의 미국야구 경험담을 바탕으로 야구동화 <사인볼과 나의 꼬마 친구>를 출간한 일이 있었다. 이코치는 가장 먼저 김 감독에게 이 동화를 선물했으나, 이를 받은 김 감독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감독에게 사전보고를 하지 않고 책을 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선수나 코치가 책을 출간하거나 인터뷰할 때 감독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기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책을 출간하기 전에 감독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는 것이 일본문화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감독에게 사전보고를 하는 것은 책이나 인터뷰에 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인데, 어린이용 야구동화처럼 팀과 무관하고 좋은 의도로 한 일에 까지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며 트집잡게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 아무튼 이 일로 김성근 감독과 이만수 코치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기사는 전했다.

김성근 경질 이후인 2011년 11월 한 잡지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SK 프런트와 이만수 감독을 대놓고 디스했다. 특히 이만수 SK 감독이 수차례 전화했음에도 받지 않았다는 인터뷰가 과장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만수 감독을 지칭 '그 놈은 아니다. 예의 벗어난 놈'이라 독설을 하여 구설에 올랐다. 자세한 사항은 이만수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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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9일 일구상 시상식에서. 이만수 감독을 대하는 김성근 감독의 불편한 안색이 역력하다. 삐죽 진짜 꼴보기 싫다

같은 2011년 11월, 남성 패션 전문지 GQ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전 감독이 이만수 감독에 대해 그 동안 팬들 사이에서 나돌던 소문이 사실임을 긍정하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만수 부분만 부각되어 기사화되었지만 사실은 이만수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인터뷰 내용은 한국 야구의 현실, 나아가 한국 사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 한국 야구의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이 담겨있다. GQ인터뷰,인터뷰 전문1,인터뷰전문2 감독직에 있을 때는 공인으로써 하기 힘들었던 속마음을 여실히 드러낸 인터뷰기 때문에 인간 김성근에 대한 이해를 위해 꼭 읽어봐야 할만한 인터뷰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당연하게 김성근 전 감독의 이 인터뷰로 프로야구 팬 커뮤니티들은 그야말로 난장판의 키배 마당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비판하는가가 커뮤니티의 성격에 따라 판이하게 갈려 눈길을 끌고있다.

사실 GQ 인터뷰 전체를 살펴보면, 이만수 감독에 대한 비난보다는 SK측에 대한 비난 이야기가 더 비중이 크다. 특히 프런트나 구단 사장에 대한 언급은 어찌보면 이만수 감독에 대한 비판보다도 더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언론에서 김성근이 이만수 깠다는 것이 집중 부각시키다보니 이런 점들이 많이 가려졌다. 이만수 감독을 언급한 부분도 앞뒤 살펴보면 이만수 감독이 전화를 안 했다는 사실 자체를 무작정 비난한 것이 아니라, 이만수가 마지못해서 전화한 것을 마치 자기 의지에 의해 수십 번 전화한 것처럼 언론플레이했던 것, 그리고 구단의 높으신 분들과 이만수 감독의 관계를 통틀어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전화를 받고싶은 시기와 이만수가 전화한 시기는 불과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만수가 전화를 여러번 했다는 발언은 잘못이지만 자신이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도 변명에 가깝다. 김성근의 의도는 이만수 보다도 이만수를 통해 SK를 까려한 것. 물론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동안 이만수 감독의 언행에 김성근 전 감독을 염두에 놓고 볼 때 논란이 될 점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한 편 김성근의 재계약이 논의되던 6월 이만수가 사퇴를 고민했다는 인터뷰에서 둘의 사이가 주위에서 배신, 예의를 운운할 만큼 가깝지는 않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어찌됐건 노릿노릿 노리타들이 주장하는 말이니 걸러 들어야한다

아무튼 그동안 감독으로서 여러 구단들과 숱하게 트러블을 빚었지만, 임기 중이라면 몰라도 아예 파탄이 난 뒤에는 구단이나 후임자에 대해 이 정도로 직설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 전 감독의 임기 중에 SK와 이만수 감독 측이건 김성근 전 감독 측이건 간에 뭔가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것이라는 게 사람들(감독팬)의 해석. 해석본 등장 하지만 과거에 김 감독이 전 구단을 까지 않은 것은 지금처럼 인터넷 등 매체가 발달하지도 않았을 뿐만아니라 인터뷰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성근 감독은 2002년 LG 감독에서 경질된 후에도 연말에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도 LG 프런트를 직설적으로 까댔었다. 아예 신바람야구를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고 했다(...) 그럼 애초 LG 감독을 맡질 말던지 감독팬들의 말이 맞다고 쳐도, 김 감독이 다른 팀에서 감독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도 전 구단을 까대는 발언을 자제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GQ인터뷰도 내년 감독 자리가 다 결정되고 난 시점에서 나온 것이고, 2002년 오마이뉴스 인터뷰 역시 경질되고 시간이 좀 지나서 연말에 나온 것이었다.

또한 한국시리즈 끝난 뒤에 나온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동안 김성근 전 감독이 그나마 SK에 대해 마음을 썼다는 뜻이 아니었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즌 중에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쫓겨난 뒤에 앙심품고 밖에서 팀 흔든다는 비판을 들었을 테니까. GQ가 관심법으로 그런 김성근 감독의 마음까지 해아려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인터뷰 일정을 잡은 것이로군요?
반면 김 전 감독이 내심 NC, LG등 국내 감독복귀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동안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가 이것이 모두 좌절되자 작심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자서전 발매에 맞춘 노이즈마케팅이라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이만수와 SK 프런트에 대한 독설 기사가 올라온 직후 김성근 감독에 대한 인신공격 및 이만수 옹호발언들이 은근히 조직적이고 노골적으로 올라왔다고 하고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김성근 지지성향 팬들에 의한 이만수와 SK 프런트에 대한 비난도 계속되었다.

이후 프레시안 김은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이 SK 감독으로 있었을 적 프런트와 사장의 만행에 대한 내용들을 언급하였다. # 인터뷰 내용으로 미뤄 볼때, 해당 인터뷰 전에 있었던 KBS와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나 이는 통편집 된것으로 보인다.

12월 10일 김성근 전 감독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SK 구단을 맹비난했다. "구단측이 이만수 감독을 헤드코치로 영입할 때부터 감독으로 앉힐 계획이었다"면서 "구단 프론트는 야구인이 아닌 샐러리맨들로서 야구가 아닌 출세가 목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7. 최계훈과의 악연[편집]


삼미 슈퍼스타즈의 18연패를 완봉승으로 끊어낸 삼-청의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86년 시즌이 끝나고 현역으로 입대하여[2] 89년 시즌 중반, 전기리그가 다 끝나서야 전역을 했다.# 전역 이후, 체력도 좋아졌고, 꽤나 살을 찌운 몸으로[3] 89년 시즌 중반에 복귀했으나, 김성근은 "최계훈이 군복무를 할 동안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되도 않는 개소리로 한 번도 1군에 올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노장이기 때문이라는데, 이 당시 최계훈은 28세에 불과했다. 그렇게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1990 시즌이 끝나고 자신감을 잃은 나머지 29살의 나이로 쓸쓸히 은퇴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군대에 갔다오고 난 뒤 1군에 한 경기도 못 올라갔다는 얘기.

야구 팬들은 아직 30대도 되지 않은 젊은 선수인 최계훈을 올리지 않은 김성근 때문에 최계훈이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 선수 생활도 놔버리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미와 청보의 부진한 역사를 이어왔던 고독한 에이스였던 데다, 그 삼미-청보를 이으며 고작 3년 동안 통산 자책점 3.60에 불과한, 타팀 같았음 10승은 했었을 선수가 유일하게 3년 동안 군대를 다녀왔더니, 감독은 바뀌어 있고, 자기가 키운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못 믿겠다며, 자기관리 핑계를 대가면서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 김성근은 이에 대해서 완전히 함구하고 있으며, 최계훈에 대한 것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최계훈부터가 선수 보다 지도자 생활이 훨씬 더 길기에, 이 사실 조차 모르는 야구팬도 많다(…) 실제로 김성근이 짤렸던 90년 시즌이 끝나고, 서른도 안 된 나이에 7년 밖에 안 뛴 선수생활을 정리한 것을 보면 더더욱. 삼성 감독을 가기 위해 임호균 때 각서를 썼네 마네 자작극까지 해대가면서 언플을 때렸던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 김성근은 부모는 아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승승장구에 나와서 포장을 열심히 했지만, 실제로 그는 최계훈 말고도 다른 선수도 맘에 들지 않으면 올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2017년 한화 이글스에서 다시 만난다. 김성근은 2015, 16년 한화 이글스를 그야말로 잿더미로 만들어놨는데, 이를 보고 경악을 한 한화 이글스의 수뇌부는 NC 다이노스 고양본부장으로 재직중이던 박종훈을 단장으로 영입했고, 박종훈은 김성근에게 큰 원한이 있는 최계훈을 2군 감독으로 데려와, 김성근이 가지고 있던 2군 지휘권을 전부 뺏어서 최계훈에게 싹 넘겨버렸다.[4] 그리고 박종훈이 최계훈 영입에 앞서서 한 게 2군 선수들에게 대리운전을 시켰다는 이유로 박상열 2군 투수코치와 이홍범 트레이닝 코치를 잘라버렸다. 이 사실을 안 김성근이 격노해 단장실을 찾아가 격하게 항의했으나, 박종훈은 당신 라인인 김정준(김성근 아들), 계형철, 김광수는 그대로 있고 선수단 분위기 망치는 양반들 짤랐을 뿐이라고 딱 잘라 말라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패싱

최계훈은 박종훈이 영입될 당시, NC 잔류군 투수코치로 재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종훈 때문에 넘어온 건데, 박종훈과 최계훈은 절친이고, 현대 유니콘스의 2군 코치(최계훈 96~99, 박종훈 97~02) 시절부터 출신지, 출신 학교까지 달랐지만, 호흡이 유난히 잘 맞았다고 한다. 2011년 LG의 투수코치를 맡았을 때도, NC로 옮겼을 때도, 한화로 옮겼을 때도, 모두 박종훈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최계훈은 자신을 은퇴시켜버린 불구대천의 원수이긴 해도, 일단은 자신이 모시는 1군 감독이니까 2군 상황에 대해서 보고는 계속 해줬는데, 김성근은 아예 퓨쳐스를 패싱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계훈과 잦은 트러블을 일으키게 된다. 2군 선수의 체력 관리를 위해 등판 간격을 조정했다는 사실에 불만이 있었는지 딴지를 걸었다고. 김성근이 전권을 가졌던 시절 몇백개씩 특투를 했던 투수들은 자율 훈련에 맡겨서 당연히 쉬고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성근은 이런 최계훈의 지도법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한화 담당인 강산 기자가 김성근을 까는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취재파일] 김성근 감독에게 휴대전화는 폼인가요?"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여기서 알려진 사실은 15, 16 시즌 당시 김성근은 2군 선수를 직접 1군으로 호출해, 테스트해보고 맘에 안 든다 싶으면 2군으로 다시 보내버리는 짓을 반복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서산 야구장은 왕복 3~4시간이 되는 거리이다. 엄연히 이는 2군의 영역을 침범하는 짓이다.

그 외에도 고치 캠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수차례 전화도 해보고, 문자도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문자메시지는 읽씹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최계훈 입장에서도 점점 스팀이 쌓여갈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사이가 좋았을 리 없다. 그리고 2017년 3월 14일 김성근 감독은 2군 경기 기록지가 1군 감독실 책상 위에 처음으로 놓여있었다는 언플을 했으나, 2군 상황은 계속 김성근 감독에게 보고되고 있었다고 한다. 소통 자체를 떠나서 불통으로 일관하는 모양새.

보통 1군 감독은 2군 스태프로부터 선수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 2군 감독과 수시로 통화하며 동향을 파악하는데, 이 걸 안 하고 뻗대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최계훈과 프런트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선수 호출을 2017년에도 시도하려고 했다가 프런트가 거부해버렸다고. 구단 관계자가 "창피하고 힘이 빠진다."고 쪽팔려했을 정도. 최계훈 입장에서는 열이 안 받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자기 밑에 있는 선수들을 3~4시간씩 수시로 오라 가라 하고 있으니...

결국, 얼마 되지 않은 5월 7일 결국 김성근은 경질됐는데, 1군에서 성적을 못 낸 것도 있지만, 2군 코칭스태프와의 잦은 트러블도 한 몫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김성근이 짤리고 난 후 이상군 감독대행은 최계훈이 추천했던 선수를 대거 등용시키며, 후반기에 승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후에도 최계훈이 지도했던 선수들이 꽤나 비약적으로 1군에 올라와 있으며, 최계훈은 2019년 한화 이글스 2군을 무려 13년 만에 우승시켰고, 박종훈이 단장직에서 물러나자 자신도 2군 감독직을 내려놓으며 물러나기는 했으나, 김성근과의 싸움에서는 완벽하게 최계훈의 승리로 끝났다.

[1] 그러나 이 영향으로 이만수는 개인통산 199홈런을 기록한 후 한 달 가까이 아홉 수에 걸려 헤메다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가서야 간신히 200홈런을 달성하게 된다.[2] 당시에는 상무 야구단이 실업리그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대학야구선수까지 가능했다.)만 입단이 가능했고, 프로선수가 상무 입대를 하는 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상무 복무 기간 보다 1년이나 더 긴 3년을 꼼짝 없이 복무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마해영은 고려대를 졸업 후,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하고 난 뒤,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 규정은 프로리그의 질적인 저하로 이어졌고, 98년에 프로선수 5명을 입단시킬 수 있는 것으로 허용했는데, 이후 프로야구선수의 병역비리 사건까지 크게 터지며 KBO의 요청으로 인해, 99년 시즌 후에는 전면 허용으로 바뀌게 된다.[3] 참고로, 85년 4월 30일 18연패 탈출에서 보다시피, 굉장히 호리호리한 체격이였다. 얼굴은 백전노장 같긴 했다만[4] 이는 대놓고 김성근이 더이상 구단을 개작살내지 않기 위한 보험이였다. 그간 한화가 15~16년에 야구에 투자했던 금액만 200억이 족히 넘고, 홍보 비용,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무려 1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근데 그 결과가 6, 7위였으니(…) 수뇌부에서는 이를 두고 "돈을 바닥에 버린 게 더 나았을 것."이라며 김성근 라인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보고서를 바닥에 내던졌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장고 끝에 데려온 게 바로 NC 육성이사를 거쳐 2군 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박종훈이였다. 참고로, 2군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거의 2군 단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박종훈과 김성근의 악연이야, 선수 시절 박종훈과 OB 감독이였던 김성근부터 시작될 정도로 유명하다. 오죽했음 김성근이 SK 감독으로 영입됐을 때, 당시 조범현 체제의 수석코치였던 박종훈은 조범현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김성근이 온다는 소리를 듣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두산 베어스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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