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북한)

최근 편집일시 :






김정숙
金正淑
[1]

파일:북한 김정숙 사진.jpg

출생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오산동
(現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덕동)
사망
1949년 9월 22일 (향년 32세)
평양특별시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배우자
김일성
자녀
장남 김정일 (1941년 - 2011년)
차남 김만일 (1944년 - 1947년)
장녀 김경희 (1946년생)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1. 개요[편집]


파일:김정숙우표.jpg
우상화를 위한 선전 우표의 김정숙 초상화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둘째 부인[2]이자 제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생모. 광복 이전부터 일찍이 공산당 활동을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이라고 포장하며 숭배한다.

북한에서의 위상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최고지도자 다음에 준하는 수준으로서 북한에는 그녀의 이름을 붙힌 김정숙군이라는 지역이 존재할 정도이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영원한 국모로 추앙받는다.

2. 생애[편집]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오산동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다. 어릴 때부터 아동단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에 공산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5년 9월에 항일유격대에 가입한 뒤 1936년 이후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에 들어가서 김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37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북한 측 문헌들에 의하면 김정숙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1935년 3월경이었으며, 당시 이들의 만남은 업무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이 관계는 애정으로 발전하였으며 김정숙은 1940년 9월에 김일성과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10월에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1년 소련군 극동88정찰여단에 입대하고, 1941년 2월 장남 김정일(金正日)을 출산하였다. 이후 차남 김만일을 낳았다. 하지만 1944년 태어난 김만일은 1947년에 김정일과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는데, 동생이 일찍 죽은 것을 지켜봤던 경험 때문인지 김정일은 유일한 친동생인 김경희에게 잘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와 1946년에 김경희를 낳았고, 1949년 9월 22일에 넷째 아이를 낳다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사인은 과다 출혈. 태아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김일성이 비서로 들어왔던 김성애와 바람을 피우자, 이를 눈치챈 김정숙이 화를 내며 넷째 아이를 출산할 때 병실 문을 닫고 의사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산으로 인해 의사 없이 아이를 낳던 김정숙과 태아는 사망했다.

이걸 북한에서 김정숙이 김일성이 국사의 대업을 보는 것을 자신 때문에 방해될까봐 갸륵한 마음으로 열어주지 않았다고 포장하는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데 방해되는데 김일성이 불륜을 피웠다는 사실을 공개할리가 없으니 당연히 그대로 공개할수는 없기는 하다.

어쨌거나 김성애가 사망의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김성애와 그녀의 아들인 김평일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말이 있다. 뭐 어쨌든 김정숙이 사망한 뒤로는 "김정숙이 자신의 병을 숨기고 인민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었으니 미리 김정숙을 돌보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내놓고 있는데, 이후 김일성김정일이 사망했을때 비슷한 레퍼토리를 내놓았다.

김정일은 어머니가 해산하다 죽은 경험 때문인지 나중에 평양산원을 지었다고 한다. 한때 김성애는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김정숙을 매우 격하했는데 전국의 여성동맹에서 김정숙의 사진을 끌어내려 버리고 자신의 사진을 걸었다. 하지만 이는 격분한 김정일이 계모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계기가 되었다.

1972~74년에 걸친 투쟁 과정에서 김정일이 김평일을 밀어내고 김일성의 후계 입지를 다지면서 '백두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북한 전역에서 우상화 작업이 시행되었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집권한 뒤로는 김일성-김정숙-김정일을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칭했으며,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넷 모두를 '백두산절세위인'으로 칭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만큼은 아니어도 김정숙의 생일 역시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명절이 되어 있다.

생일12월 24일이어서, 북한 주민들은 매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대신 이 사람의 생일을 기려야 한다고 한다. 학교에 간다든가 직장에 다닌다거나 할 경우에는 각종 행사에도 동원된다고.

3. 대중매체에서[편집]


1990년작 KBS1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권기선이 연기했다.


4. 기타[편집]


김정숙의 러시아식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와랴'[3], '가랴'[4], '니나'[5], '베라'[6] 등의 증언이 전해진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대단히 요리를 잘 했다고 하는데 김일성은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가 김정숙으로부터 국수와 만두를 대접받고 대단히 흡족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같은 거물들에게도 대접했다는 것은 김일성의 허세일지도 모르지만 김정숙이 요리를 잘했다는 것 만은 사실인 것 같은 것이 소련 장교들의 회고에서도 김정숙은 대단히 요리를 잘했다는 기록이 많다. 김일성의 목숨을 구해줬던 노비첸코도 김정숙이 병원에 입원한 자신에게 밥상을 한가득 차려서 온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동명이인으로 외교관료인 허담의 아내이자 김일성의 고종사촌동생인 김정숙(金貞淑, 1931~)과 대한민국 제19대 영부인인 김정숙(金正淑, 1954~) 도 있다.

김정일은 2000년대 초반에 한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을 묻는 질문에 어머니 김정숙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자신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기억이 그리 많지 않을텐데도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는지 아버지 김일성이 왜 계모인 김성애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냐고 묻자 조국이 하나이듯 어머니도 하나라며 오직 김정숙만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2015년 5월 11일 북한의 조선혁명박물관에 있는 김정숙의 금반지가 도둑 맞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급 문화재가 도난당한 셈. 김정은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의 소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2020년 5월 2일, 일본 방송 BS TV도쿄 닛케이 플러스10은 김일성의 부인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의 사진을 올려 물의를 빚었다.# 5월 5일 방송사 홈페이지에 정정 및 사과문이 게시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1-27 18:04:34에 나무위키 김정숙(북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9:58:33에 나무위키 김정숙(북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의 배우자인 김정숙과 동명이인이며 한자까지 같다. 심지어 북한 김정숙의 젊은 시절 공산당 활동 시기 모습과 대한민국 영부인 김정숙을 비교해보면 외모까지 상당히 닮은 편이다.[2] 본처는 한성희[3] 레베셰프 소장의 부인 증언.[4] 김정숙이 머물렀던 뱌츠코에 마을 사람들 증언.[5]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의 연구.[6] 1997년 6월 29일 모스크바 중앙 TV방송 특집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