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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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유스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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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사와무라 히로카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가와 야스히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최다 승리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최고 승률
마일스 마이콜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부타 카즈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19번}}}
우에노 히로후미
(2007-2011)

노무라 유스케
(2012~)


현역



파일:노무라.webp

히로시마 도요 카프 No.19
노무라 유스케
野村祐輔 / Yusuke Nomura

생년월일
1989년 6월 24일 (34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오카야마 쿠라시키시
신체
177cm / 86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11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2~)
연봉
2023년 / ¥55,000,000
등장곡
皮膚呼吸[1] - Mr.Children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3. 투구 스타일
4. 기타
5.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일본의 야구 선수. 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


2. 커리어[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오카야마 현 출신으로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초6때 우승을 하는등 초등학생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중학교때에도 오카야마 현의 중학교에서 야구를 했고 고등학교도 오카야마 현의 고등학교로 진학이 예정되었으나 고료 고등학교의 연습을 보고 난 뒤 마음이 바뀌어 고료고 진학을 택했다. 입학 후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고3 시즌이였던 2007년 여름 고시엔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 결승 진출을 시켰으며 결승전의 상대도 전력 상으로 안 좋았던 팀이라 우승은 기정사실화가 되는 듯 했는데...

파일:external/www.asahi.com/OSK200708220068.jpg
[2]

결승전에서 8회말에 역전 만루홈런을 맞으면서 팀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상대팀이였던 사가키타 고교는 그냥 일반적인 공립고교였으며[3] 결승전까지 온 것만 해도 진짜 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던 고등학교였다.[4] 그런 고등학교를 상대로 패전 심지어 역전 만루홈런을 맞았다. 당시 노무라의 소속 고등학교였던 고료 고교도 많은 명문팀을 물리치면서 올라왔으나 모든 포커스는 후에 고시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승팀으로 평받은 사가키타 고교로 옮겨갔다.[5] 여담으로 노무라 본인은 경기가 끝난 뒤엔 바로 울지 않았으나 경기가 끝나고 숙소로 가던중에 통곡했다고...

그래도 절치부심했는지 도쿄 6대학 소속의 메이지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1학년 시즌에는 시즌 방어율 제로를 기록하거나 3학년 시즌에는 방어율왕을 기록하는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고 4학년 시즌에는 3경기 연속 완봉을 기록하면서 소속대학인 메이지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사이토 유키 이후 리그 통산 7번째로 30승과 300탈삼진을 동시에 달성하였다. 이 시절에는 대졸 빅 3으로 꼽혔고, 그 모습을 바탕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2011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했다.[6]

2.2. 히로시마 도요 카프[편집]


계약금 1억 엔, 연봉 1,500만 엔으로 히로시마와 계약을 했다. 등번호는 19번. 그리고 데뷔시즌인 2012년에 전반기에만 7승 3패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고 이 호성적을 바탕으로 감독 추천으로 센트럴리그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다. 1997년의 사와자키 토시카즈 이후 데뷔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하는 히로시마 신인이 등장하나 했지만, 아쉽게 10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9승 11패 ERA 1.98(!!)[7]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바탕으로 201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참고로 센트럴리그 신인 투수가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건 1966년의 호리우치 츠네오(요미우리 자이언츠) 이후 처음이었으며, 옆 리그에서 신인왕을 차지한 또다른 대졸 신인인 치바 롯데 마린즈마스다 나오야와 함께 헤이세이 태생으로는 첫 신인왕 수상자라는 기록도 공동으로 갖게 되었다.

2013년에는 시즌 초반에 부상으로 시즌을 날려먹기도 했으나 데뷔 첫 완투승도 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공인구의 영향인지 방어율은 3점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히로시마가 오랜만에 플레이오프를 가서 그런지 몰라도 12승 6패를 기록 데뷔 첫 10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 후에는 콘노 아사미와의 열애설까지 떴다. 그러나 2014년에는 부진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중 시즌 중반에는 부상이 아닌 이유로 2군에 강등이 되기도 했다.

2016년 드디어 기량이 만개하여 7월 4일부로 양대 리그 최초로 10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7월 12일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시즌 11승째를 거두며 리그 다승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올스타전 이전 11승은 2010년 시즌에 마에다 켄타(현 다저스)가 기록한 뒤 처음이며, 7게임에서 7연승은 1986년의 키타벳푸 마나부 이후 30년 만이다. 시즌 최종 성적은 25경기 16승 3패 평균자책점 2.71로 센트럴리그 다승왕에 오르며 데뷔 이후 첫 타이틀 홀더가 되었고,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2017년에는 2월 8일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에서 대회 도중 교체가 가능한 지명 투수 명단에 들어갔다.[8] 4월 4일 주니치 드래곤즈 원정에서 선발 등판하여 시즌 첫 승리를 거두고 통산 50승을 달성했다. 110경기 만에 50승 달성은 마에다 겐타의 122경기 50승을 넘어서는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최단 경기 50승 달성이다.[9]. 시즌 최종 성적은 155.1이닝 ERA 2.78(센트럴리그 4위)을 기록하여 팀의 37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런데 9승 5패 다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2차전과 5차전에 선발로 등판해 각각 5이닝 4실점, 3이닝 3실점으로 두 경기에서 모두 패전 투수가 되는 등 부진하여, 팀의 일본 시리즈 진출 실패의 원흉이 되었다.

하지만, 부상과 수술로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2018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022년에는 코로나와 부상으로 로테이션이 터지는 바람에 땜빵으로 들어갔다.

2023년 6월 29일, 요코하마전에 6이닝 3피안타 무4사구 무실점 호투로 화려하게 귀환하였으나, 7회에 닉 털리가 방화를 저지르고 동점을 허용하는 바람에 시즌 첫 승리는 아쉽게 날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7월 6일 한신전에서도 6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첫 승리를 수확했다. 7월 16일 또다시 요코하마전에서도 5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3경기 17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채 승리 요건을 충족시켰으나...또 털리가 7회에 블론 세이브를 저지르면서 데자뷔를 찍었다(...)

3. 투구 스타일[편집]


쓰리쿼터의 폼에서 나오는 평균 136km/h, 최고 147km/h의 패스트볼과 커터에 가까운 고속 슬라이더가 주특기인 투수다. 하지만, 수술과 부상 이후에는 패스트볼 구속이 140km/h 도 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133~139km/h 사이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와 같은 무빙 패스트볼과 그보다도 더 느린 오프스피드 피치인 체인지업과 낙차 큰 슬로 커브 등의 느린 변화구로 타이밍을 빼앗는다.


4. 기타[편집]


  • 애칭은 노무스케(ノムスケ)(...)이다.

  • 초,중고등학교를 히로시마와 같은지역을 나왔고 고등학교는 히로시마의 명문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히 히로시마 팬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얼굴이 나름 미형이다보니 수많은 카프죠시들의 지지를 마에켄, 도바야시 쇼타, 이치오카 류지와 함께 받고 있다.

  • 상기에 언급되다시피 사가키타 고교의 기적의 어떤 의미로든마무리를 지은 투수다 보니 일본 내에서든 국내의 몇몇 일본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언급이 되고 있다.눈물 심지어 드라마틱하게 역전을 하다보니 최소 은퇴할 때까진 죽어라 언급될 듯 싶다.


5. 연도별 성적[편집]


통산 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탈삼진
WHIP
2012
広島
27
172⅔
9
11
0
0
.450
1.98
143
6
52
103
1.13
2013
23
149⅓
12
6
0
0
.667
3.74
142
13
37
103
1.20
2014
19
104⅔
7
8
0
0
.467
4.39
114
10
37
75
1.44
2015
15
87⅓
5
8
0
0
.385
4.64
110
11
23
51
1.52
2016
25
152⅔
16
3
0
0
.842
2.71
139
11
37
91
1.15
2017
25
155⅓
9
5
0
0
.643
2.78
152
12
38
106
1.22
2018
20
119⅓
7
6
0
0
.538
4.22
136
10
30
60
1.39
2019
18
95⅓
6
5
0
0
.545
4.06
96
6
34
65
1.36
2020
13
70⅔
6
3
0
0
.667
4.58
81
9
22
35
1.46
2021
8
35⅔
0
4
0
0
.000
6.31
48
6
17
29
1.82
2022
9
41⅓
2
3
0
0
.400
5.23
55
4
14
18
1.67
NPB 통산
(11시즌)
202
1184⅓
79
62
0
0
.560
3.60
1216
98
341
736
1.31

[1] 정규앨범 19집 "重力と呼吸" 수록곡.[2] 8회말 역전만루홈런을 맞기 직전의 사진이다. 여담으로 사진에 찍혀있는 포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고바야시 세이지[3] 사가키타의 기적 문서에서도 보듯이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목표로 엘리트 야구를 추구하는 학교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동호인 야구 수준이였다. 1회전 통과만 해도 감지덕지였다고 팀원들이 말할정도였다.[4] 사가키타의 기적 항목에도 언급되었지만 당시 사가키타 고교 주장이 고시엔에서 1승만 해도 위대한 업적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5] 실제로 당시에도 국내에 여러번 소개가 되었기도 했다.[6] 닛폰햄과 거인은 또다른 대졸 빅 3 중 하나인 스가노 도모유키를 동시에 1순위로 지명했으나 닛폰햄이 당첨제비를 잡자 스가노를 드래프트 재수를 택하고 결국 거인의 유니폼을 입었다. 소프트뱅크는 다케다 쇼타를, 오릭스는 아다치 료이치를 각각 1순위로 지명했다. 요코하마, 롯데, 라쿠텐은 마지막 대졸 빅 3인 후지오카 타카히로를 지명했고 롯데가 추첨에서 이겨서 후지오카를 데려갔다. 이후 라쿠텐은 무토 요시타카를, 요코하마는 키타가타 유죠를 지명.그리고 키타카타는 폭망했고, 무토는 망했고, 후지오카는 아주 망한 것은 아니지만 기대치랑 비교하면 망한 편이었다[7] 물론 2012년 시즌 당시의 공인구 상황을 고려해야한다.[8] https://www.nikkei.com/article/DGXLSSXK40188_Z00C17A2000000/[9] https://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7/04/05/kiji/20170405s00001173105000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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