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웨스트 더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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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풋볼 리그 초창기
4. 1970년대~1980년대
5. 1990년대~2010년대
6. 2010년대~현재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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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리그 성적 추이

만약 첼시가 리그 1위고 시티가 2위이고, 리버풀이 리그 최하위이고 맨유가 그 바로 위인 상황에서 주말에 첼시가 시티와 경기하고 리버풀과 맨유가 경기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때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경기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리버풀입니다.

이 나라에는 두 밖에 없습니다. 두 구단만이 종교처럼 받아들여지죠.

The biggest game in English football? Liverpool vs Manchester United 中

리버풀 FC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지역 감정에 기반한 라이벌리를 형성해오긴 했으나 단순한 지역 감정을 넘어 역대 잉글랜드 축구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를 가진 팀들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맞수'가 되어 리그 내에서 최고로 치열한 라이벌리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1] 하지만, 직접적으로 매 시즌 우승 경쟁을 펼치며 리그를 엎치락 뒤치락으로 양분해온 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라이벌리와는 다르게 노스웨스트 더비의 양 팀은 60년대 빌 샹클리맷 버스비 시대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우승 경쟁을 했던 단일 시즌이나 리그에서 우승을 나눠먹던 시기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2] 이는 70년대와 80년대 리버풀이 전성기를 누리던 동안에는 맨유가 25년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며 부진을 겪었고 90년대에서 10년대까지 맨유가 전성기를 누리던 동안에는 리버풀이 29년간 리그 우승을 못하는 암흑기를 보내는 등, 양 팀의 호황기와 암흑기가 상반되며 길게 이어지다 교차되는 역사가 반복된 까닭. 하지만 이러한 운명적인 양 클럽의 역사는 오랜 기간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집단적인 울분과 장기간 잉글랜드 축구를 지배하며 유럽 축구를 선도한 빛나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낳았다. 여기에 잉글랜드 북서부 리버풀맨체스터 지역의 해묵은 지역감정, 양 팀이 겪었던 분통한 , 클럽과 지역을 대표하는 수 많은 로컬 출신 ,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국 축구 특유위 훌리건주의 등이 결합되었고, 양 팀의 경기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치열한 더비 매치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노스웨스트 더비는 단순히 잉글랜드 북서부에 국한된 지역적인 더비 매치라기 보다는 누가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인가를 두고 다툰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상당히 복합적인 역사를 가진 라이벌리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클럽과 두 클럽들이 위치한 들이 서로 비슷한 역사를 공유해온만큼, 양 팀의 라이벌리에서는 양 팀이 동시에 향유해온 집단적이고 정서적인 공통점들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특수성 또한 존재한다.

2. 풋볼 리그 초창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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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0 시즌에 열린 두 팀간의 경기[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1878년에 '뉴턴 히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어 풋볼 얼라이언스라는 잉글랜드 내 별도의 리그에 소속되어 있다가 해당 리그가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 합병되며 1892-1893 시즌부터 잉글랜드 1부 리그에 합류했고, 리버풀 FC은 1892년에 창단되어[4] 이듬 해인 1893-1894 시즌부터 잉글랜드 2부 리그로 합류하게 되었다. 리버풀은 풋볼 리그 합류 첫 시즌만에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후 동 시즌 1부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친 맨유와 승강이 걸린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루게 되는데, 이 것이 양 팀의 역사상 첫 맞대결이다.[5]

이후 리버풀과 맨유는 초기 풋볼 리그에서 서로 두 차례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리버풀은 1900-1901 시즌에 처음으로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 뒤를 이어 1905-1906 시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버풀의 두 번째 우승 시즌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후 1부 리그로 승격한 시즌이기도 했는데, 두 시즌 뒤인 1907-1908 시즌엔 맨유가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맨유는 이후 첫 FA컵을 우승한 뒤 1910-1911 시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되었다가 1919년 리그가 재개된 후, 리버풀은 1921-1922 시즌과 1922-1923 시즌에 리그 2연패를 달성하며 쭉 1부 리그를 지킨 반면, 맨유는 리버풀이 네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1922-1923 시즌에 2부 리그로 강등되는 가파른 쇠락을 경험한다. 맨유는 이후 3년만에 다시 승격했으나 1930-1931 시즌 재차 강등을 당했고 이후엔 2부 리그에서도 좋지 못한 성적을 유지하다가 강등 3년 차에 클럽 역사상 최악의 성적인 2부리그 20위까지 떨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후 1935-1936 시즌 맨유는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다시 승격의 기쁨을 맛봤지만 곧 바로 다시 강등되어 일명 '요요 클럽[6]'의 시기를 보냈다.[7] 이 두 차례의 전쟁 사이 시기에 리버풀은 두 차례의 리그 우승을 챙겼지만 맨유는 어떠한 공식 대회도 우승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양 팀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으로 알려진 1915년 영국 축구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3. 빌 샹클리맷 버스비 시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리버풀은 1946-1947 시즌을 우승하며 다섯 번째 리그 타이틀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 리버풀은 침체기에 빠져 1953-1954 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된 뒤 오랫동안 좋지 못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 사이 맨유는 전설적인 감독 맷 버스비[8]가 부임하여 팀의 부활을 알렸다. 버스비의 맨유는 1947-1948 시즌 FA컵 우승을 비롯하여 1951-1952 시즌 41년만에 리그 우승을 되찾아왔고 1955-1956, 1956-1957 시즌 리그 2연패로 리그 우승 5회를 달성하며 안정기를 갖게 되었다. 반면 당시의 리버풀은 2부 리그로 떨어진 뒤 계속해서 승격에 실패하고 있었는데, 1959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빌 샹클리가 부임하면서 리버풀도 반전에 성공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1962년에 1부 리그 승격을 이뤘고 고작 2년 뒤인 1963-1964 시즌 6번째 리그 우승이자 17년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 시즌에 버스비의 맨유는 샹클리의 리버풀에 뒤이에 리그 준우승에 머물렀고, 리버풀과 맨유의 본격적인 경쟁 구도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듬 해 1964-1965 시즌에는 맨유가 6번째 리그 우승으로 리버풀을 따라잡았고 그 다음 1965-1966 시즌에는 리버풀의 7번째 리그 우승이, 또 그 다음 1966-1967 에는 맨유의 7번째 리그 우승이 이어졌다. 두 팀은 빌 샹클리맷 버스비라는 전설적인 명장들이 이끄는 이안 캘러한, 로저 헌트, 데니스 로, 보비 찰튼, 조지 베스트와 같은 기라성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서로 경쟁하던 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클럽들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이 시기의 두 팀은 트로피들을 놓고 리그 패권을 다투던 직접적인 경쟁팀이었음에도,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게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실제 당시 양 팀 팬들의 증언 또한 경쟁심은 있었으나 적개심과 증오는 없던 사이로 종합된다.[9] 이는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오래된 지역 감정에도 불구하고, 양 팀에게 전통적인 더비 매치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당시의 양 팀에게는 에버튼, 리즈 유나이티드 등, 더 오래된 앙숙들과의 라이벌리가 훨씬 서로에게 존재감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맨유와 리버풀을 이끌던 맷 버스비빌 샹클리가 매우 절친했던 사이이기도 했고, 심지어 버스비는 리버풀 선수 출신이었던 것도 양 팀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10][11]

1962년 리버풀이 1부리그로 승격이 되었을 때도, 많은 변화는 없었다. 심지어 필 치스날이 1964년 이적을 했음에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는 에버튼 FC더 큰 라이벌이었다.

TV 프로듀서 데이비드 할


올드 트래퍼드에서 항상 샹클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상 그랬다. 버스비와 함께라면 구단 뿐만 아니라 구단 경영진 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들은 언제나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샹클리는 맨유 선수들을 보기 위해 자주 우리 클럽을 찾기도 했다. 언제나 붉은색 셔츠와 넥타이를 멘 샹클리는 인사도 매번 같았다. "어이, 아들, 잘 지내고 있어?"라고 인사 한 뒤에 "넌 올드 트래퍼드에 오는 게 아니라 안필드에 왔어야 했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데니스 로[12]


제가 처음 리버풀로 원정 경기를 보러간 것이 1963년 4월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탠드로 갔죠. 지금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리버풀과 맨 유나이티드 팬이 함께 있는 거에요. 아니면 반대로 그들이 오는거죠. 그게 수 년간 해오던 방식이었습니다.

모든 리버풀 서포터들의 관심사는 "경기장 잘 보이니, 꼬마야?"였어요. 맨체스터 동쪽의 Higher Openshaw 지역에서 온 꼬마가 Kopite 들에게 보핌을 받는걸 보게 되죠.

The biggest game in English football? Liverpool vs Manchester United 中 양 팀 서포터들의 증언

실제로 뮌헨 비행기 참사 당시 리버풀은 맨유에 5명의 선수 임대를 제안하기도 했으며[13], 이후 양 팀이 퍼스트 디비전에서 경쟁하던 때에도 맨유 선수였던 보비 찰튼 경이나 리버풀의 감독인 빌 샹클리가 서로의 경기장에 자주 놀러갔다. 또한 맨유 레전드 보비 찰튼 경은 당시 리버풀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찰튼 경이 선수 시절에 엘로 카드 한 장 안받았을 정도로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역이었기에 그러했다. 반대로 맨유 팬들에게는 당시 리버풀 최고의 공격수이자 역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우승 멤버였던 로저 헌트가 그러한 존재였다. 안필드의 관중들이 조지 베스트의 플레이를 인정하고, 올드 트래퍼드의 관중들이 빌 샹클리와 그의 팀에게 박수도 보내던 시기였다.

4. 1970년대~1980년대[편집]



치열하면서도 우호적인 면이 있었던 양 팀의 60년대 경쟁도 잠시. 1967-1968 시즌 맨유가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안 컵을 우승하며 정점에 오른 후 맷 버스비는 사임 의사를 밝히며 맨유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두 클럽의 역사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버스비의 사임 이후 맨유는 급속도로 추락하며 강등권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1973-1974 시즌, 또 다시 강등의 아픔을 겪는 등 버스비 이후 줄줄이 사령탑 교체에 실패하며 무려 26년 동안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는 긴 암흑기를 보내게 되었다. 반면 리버풀은 70년대에 들어와 후에 '붉은 제국'으로 불리우는 본격적인 클럽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클럽을 위기에서 구하고 버스비의 맨유와 경쟁하던 60년대를 보낸 리버풀의 빌 샹클리 또한 1972-1973 시즌 팀의 8번째 우승 이후 감독직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맨유와 다르게 리버풀은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까지 일명 '부트 룸(Boot Room)'[14]' 멤버들로 이어지는 흠 잡을 곳 없는 사령탑 세대교체를 성공시켰다. 리버풀은 샹클리 이후 지휘봉을 넘겨 받은 부트 룸 출신 감독들 휘하에서 1972년부터 1992년까지 11번의 리그 우승, 19번의 도메스틱 컵 우승, 그리고 4번의 유러피안 컵 우승을 포함한 7개의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시기 맨유는 1977년 리버풀의 트레블을 저지하는 결정적인 FA컵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리그와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과 없이 도메스틱 컵 8차례 우승에만 그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70년대에서 80년대를 걸쳐 두 팀이 꽤나 상반된 성적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외부 상황적 요소들이 결합하며 이 시기 양 팀간의 라이벌리는 직접적으로 우승을 양분하던 60년대 중반에 비해 오히려 점차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팬 문화의 변화였다. 홈 관중과 원정 관중의 구분없이 평화롭게 경기를 즐기던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70년대 영국의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만들어낸 단체 원정과 대중 가요의 유행으로 인한 챈트 응원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집단성을 과시하기 시작한 팬들은 소속감과 동질감을 바탕으로 상대방과의 충돌을 야기하게 되었다. 영국 축구 전반에 걸쳐 격렬한 훌리건주의가 대두되었고 경기장에는 홈 팬들과 원정 팬들을 분리하는 스탠드 내 장벽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리버풀과 맨유는 60년대의 호성적에 힘입어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팀들이었다. 두 팀은 두드러지는 관중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고, 압도적인 분위기와 숫자의 원정 팬들이 안필드올드 트래퍼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덩달아 오래된 지역 감정 또한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이 전반적으로 경기 침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머지사이드 지역보다 맨체스터 지역은 더 나은 경제적 상황을 가지고 있었고, 1974년 영국 정부의 지방 정부 법안 개정에 따라 두 지역은 원래의 랭커셔주에서 각각 머지사이드주와 그레이터 맨체스터주로 분리 독립하게 되어 양 지역간의 연고적인 연결점 또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두 클럽을 연결하던 빌 샹클리맷 버스비는 은퇴해버린 뒤였다. 머지사이드 지역에 거주하는 리버풀 팬들은 맨체스터 지역에 먼저 유입된 캐주얼족(Casuals) 문화에 적잖은 반감을 드러냈다. 또한 당시 맨유는 구단 차원에서 적극적인 홍보와 미디어 개발에 노력하였으나 그에 걸맞는 결과물을 팀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리버풀 팬들은 실력에 비해 미디어에서 과대평가되는 맨유를 달가워하지 않았다.[15] 반면 맨유팬들로서는 모든 트로피들을 쓸어담던 당대의 리버풀을 당연히 좋게 바라볼 수 없었다. 집단 팬 문화는 뜨거워져가는데, 리버풀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고 맨유는 맷 버스비 감독 이후 2부 리그로의 강등이라는 치욕적인 부진에 빠져 있었다. 맨유가 이를 갈며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했을 때, 그들의 원정 팬들은 '붉은 군대(Red Army)'라 불리우는 악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밥 페이즐리의 지도 아래에서, 리버풀은 잉글랜드와 해외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팀이 자신들이 영원히 리버풀의 목에 걸린 가시라는 것을 증명해보이려고 했다.

우리는 이런게 있어요. "그들이 다 우승할 수는 있어도, 우리는 이길 수 없어."

The biggest game in English football? Liverpool vs Manchester United 中

이렇게 점차 남달라지던 리버풀과 맨유 사이의 분위기는 1976-1977 시즌 FA컵 결승전을 기점으로 절정에 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리그 우승을 일찍이 확정지은 후,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도 진출하며 트레블의 꿈을 꾸고 있던 리버풀을 FA컵 결승에서 맨유가 꺾어버린 것. 2년 뒤 FA컵 준결승 전에서도 맨유는 리버풀을 잡고 결승에 진출했다. 전체 팀 성적은 비할 바가 못됐지만 맨유는 중요한 순간에 번번히 리버풀의 발목을 잡아댔다. 양 팀에겐 에버튼맨체스터 시티라는 전통적인 지역 라이벌들이 존재했지만, 지역 감정과 더불어 클럽의 역사를 좌우하는 더비 매치들이 불타오르고 있던 터라, 양 팀 모두 가까운 이웃보다는 증오를 쏟아낼 명백한 적을 필요로 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노스웨스트 더비는 매우 치열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16]

이 시기에 한 가지 더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리버풀과 맨유가 치열한 라이벌리를 발전시켜감으로서 당시 잉글랜드의 젊은이들에겐 엄청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양 팀은 어마어마한 원정 팬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팬들은 상대보다 우월해 보이고 싶어했는데, 마침 그들에겐 유럽 대항전 원정 응원을 통해 대륙의 유행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양 팀의 팬들은 팀을 따라다니며 유럽 대륙의 문화에 눈을 떴고 이에 자연스럽게 지역의 패션과 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했던 것.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지역 청소년 무리들은 각각 'The Scallies'와 'Perry Boys'라 불리면서 자신들의 모양새나 위세를 과시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10대, 20대들에게 있어서 최신의 패션 문화를 알 수 있는 곳 또한 안필드올드 트래퍼드 근처였을 정도였다. 이 시기 잉글랜드에 펑크 문화, 하드 모드, 스웨이드헤드, 스무디 등의 서브 컬쳐들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훌리건주의의 영향이었다.

5. 1990년대~201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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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09 시즌에 열린 양 팀간의 경기[17]

두 팀 간의 감정이 서포터들에 의해 과열되어 가던 사이, 리버풀은 80년대 중반 이후 클럽의 역사를 바꾼 두 차례의 참사를 겪으면서 점차 전성기 사이클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힐스보로 참사의 여파로 케니 달글리시가 감독직에서 사임한 이후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에서 리버풀은 끔찍한 부진을 면치 못했고, 이후 리버풀의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반면 맨유는 알렉스 퍼거슨이 부임한 80년대 중후반 이후, 서서히 본인들의 힘을 키우고 있었고 프리미어 리그 시대에 접어든 1992-1993 시즌, 드디어 26년만의 리그 우승이자 팀의 8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퍼거슨 감독은 1991-1992 시즌에 맨유를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1966-1968 시즌 맷 버스비 감독 이후 리그에서 처음으로 리버풀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데 이어, 바로 이듬 해를 시작으로 무려 13번의 리그 우승, 19번의 도메스틱 컵 우승, 2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우승을 포함한 6번의 국제대회 우승과 1998-1999 시즌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는 등 압도적인 커리어를 맨유에서 보냈다. 반면 퍼거슨 감독이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리버풀은 2004-2005 시즌 기념비적인 UEFA 챔피언스 리그우승을 비롯하여 몇 차례 굵직한 타이틀을 들어올리기는 했으나, 퍼거슨 감독의 은퇴시즌까지 단 한 차례도 리그에서 맨유보다 높은 순위에 위치한적이 없었을 정도로 지독한 리그 부진에 시달렸다.

알렉스 퍼거슨감독이 90년대와 00년대를 관통하며 2010년대 초반까지 맨유를 잉글랜드 최강의 클럽으로 올려놓는 동안, 70년대와 80년대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대에 환호했던 리버풀 팬들과 당시 긴 암흑기를 겪었던 맨유의 팬들은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맨유가 겪었던 아픔을 리버풀도 겪게 되었고, 리버풀이 쌓아둔 압도적인 트로피들을 맨유 또한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뒤바뀐 상황과 서포터들의 감정은 훌리건주의가 과격했던 시대에 불타오른 양 팀의 감정을 가열시켜 경기의 분위기를 심각할정도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 양 팀의 서포터들은 경기장 안과 밖에서 무수한 사건사고들[18]을 야기하면서까지 열광적으로 라이벌리를 불태웠다. 또한 이 시기 노스웨스트 더비의 열기는 서포터들 뿐 아니라 선수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퍼거슨 감독이 맨유에 부임한 이후로는 양 팀의 선수들이 이 라이벌리에 굉장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퍼거슨 감독은 "리버풀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본인의 목표"라는 도발적인 인터뷰를 하며 공공연하게 리버풀을 향한 적대감정을 드러낼만큼 이 더비 매치를 통해 선수들의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또한 양 팀의 라이벌리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으며 더비 매치의 열기가 차오르던 때에 축구를 접한 로컬 세대들이 이 시기에 데뷔하여 팀 내 주축들로 뛰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선수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감정이 가득 차있었다. 더군다나 스티븐 제라드게리 네빌같은 양 팀의 로컬 출신 선수들이 팀을 오랜기간 이끌던 시기였다. 이에 두 팀의 선수들은 서로 간의 경기에서 거친 플레이와 도발적인 언행들을 보여주곤 했고 상당히 많은 경고 및 퇴장, 부상자들이 쏟아지는 경우도 잦았는데, 실제로 이 시기 선수들은 더비 매치에 의해 진심으로 상대에게 혐오스러운 감정까지 가지기에 이르렀다고 밝힌 바 있다.[19][20]

나의 목표는 리버풀을 그 빌어먹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 얘기 그대로 내보내도 좋다!

부임 당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1] 잉글랜드는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초창기 월드컵도 자신들이 축구의 주인이나 마찬가진데 다른 나라들이 나와서 설치는 게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3번(1930년, 1934년, 1938년)이나 출전을 거절했으며 웸블리 스타디움을 'The Home of the Football'이라 칭했을 정도. 거기다가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1955년 유러피언 컵도 잉글랜드 리그 우승팀에게 불참을 권유하며 막으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축구의 종주국에서도 최고의 클럽이라는 타이틀은 양 팀 서포터들에게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2] 오히려 7-80년대에 리버풀과 경쟁한 에버튼, 00년대 맨유와 경쟁한 아스날 FC, 첼시 FC 혹은 10년대와 20년대 초반에 양 팀과 경쟁한 맨체스터 시티 등이 두 팀들과 더 직접적인 리그 경쟁에서의 악연이었던 클럽들이며, 심지어 유럽 대항전 무대에서도 리버풀과 맨유의 만남은 2010년대 들어와서 역사상 처음 성사되었을 정도로 인연이 없었다.[3] 1910년 개장한 올드 트래퍼드의 개장 첫 경기였다. 경기는 3-4 리버풀의 역사상 첫 노스웨스트 더비 리그 원정 승리. 맨유에겐 OT 최초의 패배였다.[4] 존 하울딩이 에버튼 운영진들과 재정운영에 관한 이견으로 인한 다툼 끝에 당시 에버튼 중심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 만든 팀이 리버풀 FC이다. 머지사이드 더비 참조.[5] 해당 경기는 리버풀의 2-0 승리로 끝나 리버풀은 승격, 맨유는 강등되었다.[6]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는 클럽을 뜻하는 말[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8-1939 시즌엔 그래도 1부 리그로 다시 승격하여 순위를 마쳤다.[8] 맨유의 레전드 감독인 맷 버스비는 양 팀의 얽힌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버스비는 리버풀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고 주장직까지 역임하며 120경기 가량을 뛰었던, 전쟁 시기 리버풀을 상징하는 선수 중 한명이었던 것.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커리어가 끝난 버스비는 리버풀의 감독직을 원했으나 리버풀은 버스비에게 수석 코치직만을 제안했고, 결국 버스비는 감독직을 제안했던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리버풀과 맨유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두드러지는 라이벌리가 존재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했었던 일.[9] 당시 팬들의 증언에 따르면, 심지어 리버풀과 아스날 FC이 맞붙었던 컵 경기에서 맨유 팬들이 종종 지역적으로 가까웠던 리버풀을 응원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10] 1981년 샹클리가 급사했을 당시, 버스비는 상심이 너무 컸던 탓에 관련 취재 및 전화 통화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또한 맷 버스비 경은 빌 샹클리의 후임이자 샹클리의 수석 코치였던 밥 페이즐리와도 선수 시절 리버풀을 함께 이끌던 사이로서, 버스비가 페이즐리의 롤모델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11] 리버풀 선수 시절의 맷 버스비는 당시 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으로 뽑혔을 정도로 리버풀 팬들에겐 상징적인 선수 중 하나였기에, 그가 이끄는 팀이 경쟁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버풀 팬들은 꾸준하게 버스비를 존경했었다고 한다.[12] 허더즈필드 타운시절에 샹클리의 제자였다. 데니스 로가 첫 1군 무대 데뷔를 했을 때 투입시킨 감독이 당시 허더즈필드의 감독이었던 샹클리.[13] 당시 많은 국내외 클럽들이 다수의 선수를 잃은 끔찍한 참사를 겪은 맨유에게 선수 임대 제안을 했었다.[14] 리버풀 홈 구장인 안필드 내에 있었던 축구화 보관을 위한 장비실이다. 본래는 장비실이었지만 빌 샹클리를 비롯하여 그의 수석 코치였던 밥 페이즐리루벤 베넷, 톰 손더스, 조 페이건, 로니 모란 등의 코치들이 차를 마시며 전술 회의를 진행했던 비공식적인 코치 회의실로서,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인 장소로 유명하다.[15] 당시 리버풀 팬들은 팀이 리그와 유럽 무대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었지만 너무 프로페셔널하고 워크맨처럼 축구만 잘하는 이미지라 맨유의 스타 선수들의 후광에 그들의 선수들이 가려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맨유 선수단을 조롱하는 구호가 바로 과하게 멋만 부렸다는 의미의 'The Glams'.[16] 축구 사회학자 존 윌리엄스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모든 것을 정복한 리버풀 팬들의 참을 수 없는 잘난 척과 저조한 성적을 거둔 유나이티드 팬들의 오만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7] 잉글랜드 내에서도 거칠기로 유명하여 경고와 퇴장이 잦았다.[18] 경기장 안에서는 서로의 참사를 조롱하거나 홍염을 터트리고 이물질을 투척하는 등의 행위가 비일비재했으며, 경기장 밖에서는 상대를 향한 혐오가 드러나는 걸개들을 상대의 원정길에 걸어놓는다거나 상대팀의 버스를 향해 위협을 가하는 일이 잦았다.[19] 이 시기의 두 팀을 대표하는 스티븐 제라드리오 퍼디난드 같은 선수들은 상대를 너무나도 싫어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거의 상대 팀 선수들과 대화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20] 루이스 수아레즈파트리스 에브라 사이의 인종차별 사건도 대표적인 양 팀 선수간 갈등의 사례.

서포터들과 선수들의 적개심이 가열되면서 노스웨스트 더비의 규모와 열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프리미어 리그 시대의 개막으로 잉글랜드 리그에 자본과 미디어의 관심이 쏟아지며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폴 스콜스,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마이클 오언 등의 로컬 스타들을 비롯한 양 팀 내 스타 플레이어들의 탄생이 이어진 것은 덤. 또한 양 팀은 이 시기 유럽 무대에서도 활약하여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들이 되었고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팬 베이스를 보유한 클럽들로도 성장했다.[21] 자연스럽게 양 팀 간의 경기가 잉글랜드를 넘어 전세계 축구를 대표하는 더비 매치 중 하나가 된 것이다. 7-80년대에 기울어졌던 영광의 역사가 다시금 균형을 맞춤과 동시에 새로운 스토리들과 관심들이 쏟아지면서 명실상부 양 팀의 경기는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 축구에 있어 최대의 이벤트가 되었다.

6. 2010년대~현재[편집]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양 팀의 분위기는 또 다시 교차되기 시작했다. 맨유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은퇴 이후, 10여년간 제대로된 후임자를 찾지 못하며 감독 교체에 애를 먹었고 우승권 전력에서 멀어지는 등 그동안의 황금기가 무색해지는 상당한 부진을 겪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버풀은 기나긴 암흑기 끝에 2015년 위르겐 클롭 감독을 선임하며 팀의 6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30년만의 리그 우승을 포함해 현존 최상위 대회에서 모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쾌거[22]로 명가의 부활에 성공했다. 이에 또 다시 지난 역사와 같이 양 팀의 황금기와 암흑기가 거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이 있던 가운데, 2022-2023 시즌 맨유가 에릭 텐 하흐를 감독에 선임하며 아주 오랜만에 EFL컵 우승과 더불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은 팀 전력의 노쇠화로 인해 상대적 부진을 겪고 있어 양 팀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앞으로 지켜볼만하게 되었다.

201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00년대 중후반에 과열되었던 노스웨스트 더비의 분위기는 이전보다는 약간 수그러진 편이다. 이유는 맨유가 퍼거슨 감독 이후 부진하는 동안,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가 리버풀의 직접적인 타이틀 경쟁자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라이벌리를 형성했기 때문. 이에 노스웨스트 더비에 집중되었던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된 편이다. 특히나 20년대로 진입하면서 맨시티와 리버풀이 프리미어 리그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수준 높은 경기들과 치열한 경기 결과들을 매번 만들어낸 반면, 리버풀과 맨유간의 경기에서는 일방적으로 리버풀이 맨유를 압도하는 경기가 잦아서[23] 비교적 텐션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부터 10년대 초반까지 양 팀을 이끌면서 노스웨스트 더비의 분위기를 끌어올려줬던 로컬 스타들 그리고 이 라이벌리의 중요성을 실로 잘 알고 있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은퇴 등으로 인하여 사납고 거칠었던 전통적인 노스웨스트 더비의 분위기가 유해진 부분도 이유로 꼽힌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스웨스트 더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 리버풀은 2000-2001 시즌 UEFA 유로파 리그와 2004-200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 맨유는 1998-1999 시즌과 2007-2008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22] 2019년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슈퍼 컵, FIFA 클럽 월드컵, 2020년 프리미어 리그, 2022년 FA컵(잉글랜드), EFL컵, FA 커뮤니티 실드[23] 최근 5경기의 스코어 차가 리버풀 21 : 3 맨유로 리버풀이 초강세, 맨유가 초열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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