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칙령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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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상세
3.1. 원문
3.2. 해석
4. 의의
5. 한계
6. 석도 논란
6.1. 이규원의 검찰
6.1.1. 반박:조사의 문제점
6.2. 대한지지(大韓地誌)
6.2.1. 반박:대한지지의 오류
6.3. 조선상식문답
6.3.1. 반박:일제강점기 때 저술
6.4. '양고' 소동
6.4.1. 반박:양고 기사의 문제
6.5. 석도의 문제
6.5.1. 반박:석도의 명칭
6.6. 죠션디도
6.6.1. 반박:이중잣대
6.7. 사라진 우산도
6.7.1. 반박:오해의 사전차단
6.8. 증보문헌비고(1908)
6.8.1. 반박:사료 오독
6.9. 통감부의 탐문
6.9.1. 반박:당대의 시대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00년 10월 25일 울릉도울도군으로 울릉도 도감을 울도군수로 격상한 관제 개정.


2. 배경[편집]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內部)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할 것을 청하면서 의정부(議政府)에 울릉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울릉도는 종(縱)이 80리, 횡(橫)이 50리이다.[1]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번식하여 농지 1만 두락(斗落)에 연간 수확이 감자 2만 포(包), 보리 2만 포, 밀이 5천 포이다. 비록 육지의 산군(山郡)에 미치지 못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근래에 외국인이 왕래하여 교역의 이익이 있다.


종과 횡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남북, 동서의 거리라고 해석하면 울릉도의 실제 동서, 남북 길이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아마도 종과 횡의 합 130리(약 52km)가 울릉도의 실제 둘레인 40km에 어느 정도 근접하여 울릉도의 둘레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울릉도의 인구는 1,400여 명이었다. 조선인이 1,000명, 일본인이 400명이었다. 조선인의 주요 생업은 농업이었다. 울도군에 대한 대한제국의 기본 관심도 농업국가의 그것이다. 대한제국의 내부가 감자, 보리, 밀의 연간 생산량을 소상하게 보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비율도 높았는 데, 주로 강치잡이를 위해서였다.

3. 상세[편집]



3.1. 원문[편집]


鬱陵島(울릉도鬱島(울도改稱(개칭ᄒᆞ고 島監(도감郡守(군수改正(개정ᄒᆞ(

第一條: 鬱陵島(울릉도鬱島(울도로 개칭ᄒᆞ야 江原道(강원도付屬(부속하고 島監(도감郡守(군수改正(개정ᄒᆞ야 官制中(관제중編入(편입ᄒᆞ고 郡等(군등五等(오등으로 ᄒᆞ (.

第二條: 郡廳(군청 位置(위치ᄒᆞ 台霞洞(태하동으로 (ᄒᆞ고 區域(구역鬱陵全島(울릉전도竹島(죽도 石島(석도管轄(관할ᄒᆞ (.

第三條: 開國五百四年(개국오백사년 八月十六日(팔월십육일 官報中(관보중 官廳事項欄內(관청사항난내 鬱陵島(울릉도 以下(이하 十九字(십구자珊去(산거ᄒᆞ고 開國五百五年(개국오백오년 勅令(칙령 第三十六號(제삼십육호 第五條(제오조 江原道二十六郡(강원도이십육군六字(육자ᄒᆞ 七字(칠자改政(개정ᄒᆞ고 安峽郡下(안협군하鬱島郡(울도군 三字(삼자添入(첨입ᄒᆞ (.

第四條: 経費(경비ᄒᆞ 五等郡(오등군으로 磨鍊(마련호되 現今間(현금간인즉 吏額(이액未備(미비ᄒᆞ고 庶事草創(서사초창ᄒᆞ기로 海島收稅中(해도수세중으로 故先(고선 磨鍊(마련ᄒᆞ (.

第五條: 未備(미비ᄒᆞ 諸條(제조ᄒᆞ 本島開拓(본도개척(ᄒᆞ야 次第(차제 磨鍊(마련ᄒᆞ (.

第六條: 本令(본령頒布日(반포일로부터 施行(시행ᄒᆞ (.

光武(광무 四年(사년 十月二十五日(십월이십오일

御押(어압 御璽(어새 (

(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의 정 부 의 정 임 시 서 리 찬 정 내 부 대 신 李乾夏(이건하



3.2. 해석[편집]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2]

로 개정한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할 것

제2조: 군청은 태하동[3]

으로 청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한다.[4]

제3조: 개국 504년(1895년) 8월 16일자에 관보 중 관청의 사무란 내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며, 개국 505년(1896년) 칙령 제36호 제5조에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5]

아래에 울도군 3자를 첨입한다.

제4조: 경비는 5등군[6]

으로 마련하되, 현 상황을 들어보아 이익이 미비하여도 사무를 시작하여 섬에서 나오는 과세로 고선 마련한다.

제5조: 미비한 조항들은 섬을 개척하면서 점차 마련해나간다.[7]

제6조: 본령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광무 4년(1900년) 10월 25일

의정부 의정 임시서리 찬정내부대신 이건하[8]


4. 의의[편집]


독도대한제국의 영토임을 황제의 칙령으로 재확인한 문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입증하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 일본 측이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보다 5년 앞서 작성되었다.

더불어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칙령을 중앙정부의 관보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 관보는 의무적으로 대한제국의 체약국 공사관에 발송되고, 각국 공사관도 이 중앙정부의 관보를 반드시 보기 때문에 ‘국제적 고시’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관보 고시는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제적으로 선언한 셈이 된다.

5. 한계[편집]


의의와 정반대되는 한계인데, 석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이 너무 넓다. 다른말로 너무 짧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해당 글이 '두 글자'밖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위도나 경도가 없어 글만 보면 어디있는 섬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 측은 해당 글이 증거로 올라올 때마다 칙령 내에 위도나 경도를 나타내지 않아 대한제국이 주장했던 석도는 독도라는 확신을 줄 수 없다며, 자신들의 주장에 끼워맞추고자 울릉도 북쪽의 작은 섬인 관음도를 석도로 주장한다.

분명 표현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석도에 해당하는게 사실상 독도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단순히 이름만으로 보았을 때 석도의 후보로는 독도, 관음도, 울릉도의 작은 돌섬들 외에는 없는데[9] 앞서 '울릉전도'라고해서 울릉도의 작은 부속도서들은 이미 포함되었고 관음도는 울릉도와 거의 붙어있어 사실상 이 부속도서에 속하는 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6. 석도 논란 [편집]


상기되어 있듯이 정확도의 한계로 인해 칙령 41호의 석도가 어디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는데 석도는 독도라고 공식 입장을 내놓은 한국 정부 측과는 다르게 일본 정부 측에선 석도가 관음도라고 주장하고 있다.[10]

일단 석도 논란의 하위 항목에선 일본측이 관음도설의 근거로 내세우는 자료와 해석,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측의 반박을 모두 서술한다.

6.1. 이규원의 검찰[편집]


1882년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고종의 명을 받고 울릉도 일대를 조사하였는데 이후 보고서를 올리며 우산도의 실재를 부정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산도는 울릉도의 이칭이라고 주장했는데, 물론 세부적인 부분은 좀 다르지만 과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되었던 '우산무릉 일도설'을 어느정도 계승한다고 보면 된다.[11]

6.1.1. 반박:조사의 문제점[편집]


이규원이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된 것은 1881년이고, 실제로 조사는 다음해인 1882년에 이루어 있다. 그동안 이규원은 자기 나름대로의 조사를 해 고종과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문답을 진행하는데, 이 때 울릉도와 송죽도 두 섬이 있고, 울릉도를 곧 우산도로 부른다는, 조선시대의 불확실한 기록과 대조해봐도 상당히 이상한 주장을 한다. 이에 고종이 의문을 표하며, 그 정보의 출처를 추궁했는데, 이규원은 자기 말이 맞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결국 이러한 정보를 이전 울릉도 감찰관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이라고 실토한다. 즉, 울릉도로 현지조사를 떠나기 이전부터 이규원은 우산도=울릉도로 전제 자체를 잘못 깔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종은 이전 수토관들의 조사가 명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울릉도와 우산도, 송도 혹은 죽도라고 불리는 송죽도 세 섬을 울릉도라고 통칭한다는 설이 있으니 이를 직접 확인하라고 이규원에게 명을 내린다. 때문에 1882년 이규원은 직접 울릉도로 현지조사를 떠나게 되는데, 성인봉까지 올라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를 했지만 당시 울릉도를 흐린날이 잦은 6월이라서 독도를 육안으로 발견하는데는 실패한다. 결국 이런 식의 조사는 결과적으로 그의 오해를 더 강화시키는데 일조한다.

즉, 이규원의 감찰은 본인부터가 잘못된 전제를 깔아두고 진행한 조사인데다가, 독도를 발견하지 못한 조사 자체의 한계로 인해 더 왜곡된 보고가 올라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규원이 작성한 내용을 보면 본인이 직접 관측한 섬인 울릉도와 죽도 외에 송도라는 섬을 추가로 기재하고 이를 다른 섬처럼 묘사했다가, 당시 섬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의 사례를 거론하며 울릉도가 곧 송도라고 하는 등 모순 또한 존재했다. #

6.2. 대한지지(大韓地誌)[편집]


1899년 당시 대한제국에서 학부 편집국의 국장은 이규환(李圭桓)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한국의 근대 역사학, 지리학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는 현채(玄采)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대한전도》의 제작을 주도했다고 보인다.

파일:대한전도(1899).jpg

파일:대한전도_울릉도, 우산(1899).jpg

지도의 간행과 때를 같이 하여 동년 12월 25일 현채가 《대한지지(大韓地誌)》라는 지리서를 편찬하였다. 현채는 한국사 최초로 대한제국의 위치를 국제 표준 위도, 경도를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우리 대한국(大韓國)의 위치는 (중략) 북위 33도 15분에서 42도 25분에 이르고 동경 124도 30분에 130도 35분에 이른다."


즉, 이 지도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동단(東端)은 동경 130도 35분이다. 그러나 실제 독도의 위도는 동경 131도 55분이라 대한제국의 동단보다 더 동쪽에 있게 된다.

더불어 대한전도에서 우산도는 울릉도 동북에 인접한 작은 섬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는 죽도[12]에 더 가깝기 때문에 이를 두고 해상에서 동남쪽으로 87km의 독도라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1899년에 학부 편집국의 현채가 그린 《대한전도》에는 독도가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현채는 독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거나, 혹여 알았더라도 그것을 대한제국의 판도 밖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이 일본의 해석이다.

6.2.1. 반박:대한지지의 오류[편집]


대한지지에 나온대로라면 확실히 독도는 대한제국의 범위 밖에 있게 되나, 이런식으로 해석해버리면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발생한다. 왜냐하면 동단이 동경 130도 35분이 되면 동경 130도 54분에 위치해 있는 울릉도마저도 대한제국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즉, 정확도 자체가 무척 떨어지는 지도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책 말머리에 나온다.

대한지지의 발문(跋文)에는 “본서는 일본인이 저술한 한국 지리관계 도서를 주로 하고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연혁을 참고로 역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한지지의 후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했다."라고도 적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현채는 일본 지리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는 이 범위에 울릉도가 제외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이 경위도의 기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 역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지리서인 환영수로지(1883), 신찬조선국지도(1894), 조선팔도지(1887)[13], 신찬조선지리지(1894), 신찬조선국지도(1894), 조선수로지(1894) 등을 확인해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이들 모두 조선의 동단을 130도 35분으로 기록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6.3. 조선상식문답[편집]


1947년 최남선(崔南善)은 그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조선의 '극동(極東)'은 동경 130도 56분 23초로서 '경상북도 울릉도 죽도[14]'라고 밝혔다. 그런데 1905년 1월 일본 정부가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면서 밝힌 독도의 경도는 동경 131도 55분이었다.[15]

최남선이 밝힌 죽도의 경도와 대략 1도의 차이가 있다. 죽도와 독도가 놓인 북위 37도에서 경도 1도의 차이는 85km이다. 이는 죽도와 독도 간의 실제 거리와 거의 일치한다. 때문에 일본측에선 이 사실이 대한제국의 동단이 독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6.3.1. 반박:일제강점기 때 저술[편집]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을 살펴볼 때 한가지 간과하는 것은 이 책이 출판된 연도인 1946년만 주목한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상식문답은 최남선이 독립 직후에 저술한 책이 아니라 1937년 1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총 160회에 걸쳐 매일신문에 연재된 "조선상식"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즉, 위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최남선이 말하는 조선의 영역과 그 동단은 193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현세편람(朝鮮現勢便覧)"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독도를 무단편입한 일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남선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회원이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는 등 사실상 친일파로 활동한 것을 감안하면 본인의 행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라 보기도 힘들다.


6.4. '양고' 소동[편집]


대한제국이 울릉도를 죽도 및 석도와 함께 울도군으로 승격한 지 6개월 뒤인 1901년 4월 일본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도쿄(東京)의 각 신문이 동해(일본해)에서 미지의 섬 하나를 발견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울릉도에서 동남 30리 해상에, 일본 오키(隱岐) 섬에서 거의 같은 거리의 해상에, 아직 세인에 알려지지 않은 한 섬이 발견되었다. 일본 지도에도 영국 지도에도 올라 있지 않은 섬이다. 울릉도에 사는 일본인은 맑은 날 산의 높은 곳에서 동남을 보면 아련히 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실은 1, 2년 전 규슈(九州)의 어느 잠수기를 갖춘 어선이 어족을 찾으러 바다로 나왔다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섬 하나를 발견하고 이를 근거지로 삼아 주변 바다를 탐사하였다. 그 결과 주변 바다에 어족이 매우 풍부함을 알았으나 해마(海馬) 수백 마리의 방해를 받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섬은 크기는 30정보, 구릉이 매우 높으나 해변의 굴곡이 많아 어선을 정박하고 풍랑을 피하기에는 편리하다. 그렇지만 땅을 파도 물을 얻을 수 없어서 수산물 제조장으로서의 가치는 적다. 일본과 한국의 어민은 이를 가리켜 양코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상의 정보에 의거할 때 아직 해도에 올라 있지 않다고 하나 1849년 프랑스의 배가 발견한 리앙쿠르트 섬이 아닌가 싶다. 확실한 단정은 자세한 보고를 얻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기사의 내용을 볼 때, 독도에 관한 보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세간에는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섬이 발견되었다고 소동을 벌였지만, 실은 1849년 프랑스의 배가 발견하여 '리앙쿠르트(Liancourt)'라고 이름 붙인 그 섬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 섬을 공히 '양코'라고 부른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1901년 4월 1일 한성의 <제국신문>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울릉도 동남 30리 해중에 양고라 하는 섬을 일본에서 얻었는데, 그 섬은 천하지도에 오르지 아니하였고, 소산은 어물인데, 바다 속의 말(海馬)이 제일 많아 어부들을 많이 상한다더라.(<제국신문> 1901년 4월 1일)


기사의 내용은 위의 일본발 기사와 동일하다. 다만 일본이 양고를 획득했다 함은 오보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은 1905년 1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당시 대한제국의 정부나 민간은 울릉도 동남 30리 해중의 섬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동남 30리는 일본 신문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어서 120km를 의미한다.[16]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만한 거리의 섬이라고는 독도 밖에 없다. 역대의 조선왕조가 영유의식을 가져온 섬이라면 모를 리 없는 섬이다. 그렇지만 <제국신문>은 양코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보는 땅으로 태연하게 보도하였다.

일본 신문이 지적하듯이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그 섬을 알고 있었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그 섬을 '양코'라고 칭했다. '양코'나 '양고'나 같은 이름이다. 그럼에도 울도군이나 중앙 정부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1901년까지도 대한제국은 독도의 객관적 소재를 인지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6.4.1. 반박:양고 기사의 문제[편집]


양고 섬에 대한 제국신문의 기사는 독도나 석도의 실체를 규명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개화기 당대의 수준 낮은 보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에 가깝다. 왜냐하면 실제로 맞는 내용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문을 그대로 번역하여 검증작업 하나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다보니 조선 기준으로 300리는 가야 나오는 독도를 30리에 있다고 표기하는 실수를 한다. 이는 일본의 '리'와 한국의 '리'조차 구분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조선의 기준으로 울릉도로부터 30리 거리에 있는 섬이라면 그냥 죽도밖에 없다.

심지어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는 단순한 것마저 실패해 독도를 일본이 편입했다는 오보까지 더해져있는 수준이라 이러한 논쟁의 근거로 삼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실제로 일본이 독도를 자국에 최초로 편입시키려 시도한 것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이는 1905년에 발표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울릉도 동남쪽 30리에 대한 섬의 정보나 인식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6.5. 석도의 문제[편집]


1883년부터 울릉도에 살기 시작한 조선인이 멀리 동남 해상으로 어로 활동을 나가면서 바다에 홀로 떠있는 바위섬을 가리켜 '독도(獨島)'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는 주민의 공동 인식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보인다. '독도(獨島)'라는 명칭의 섬이 문헌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04년 9월 25일 일본 해군함 니이다카(新高)의 <행동일지(行動日誌)>에서이다. 이 일지에서는 "리안쿠르트 바위를 실제로 본 일본인으로부터 청취한 정보"라고 하면서 "조선인은 이를 獨島라고 쓴다"고 했다. 이처럼 당시의 울릉도의 조선인은 맑은 날 아침이면 동남쪽 바다의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그 섬을 '獨島'라고 부르던 것이다. '독도'가 다시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06년 4월의 일이다. 1906년 4월 4일 일본 시마네현 오키시마 도사(島司) 일행이 울릉도를 찾아와 독도가 일본령에 편입되었음을 알린 다음, 울릉도의 인구와 산업에 관해 묻고 돌아갔다. 이에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이 강원도관찰사 이명래(李明来)에게 "본군에 소속한 獨島가 바깥 바다 100여 리에 있는데, 지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특정 음을 표기하기 위해 글자를 빌리는 차자(借字) 현상은 어떤 음, 뜻을 정확히 대변할 글자가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사는 전통적으로 한자 문명권이다. 돌섬이라는 뜻을 한자로 표기할 때 '石島'로 표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돌섬은 지역에 상관없이 한자로 표기될 때 반드시 '石島'라고 했다. 그 정도야 한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어렵지 않은 표기 방식이었다. 굳이 타 지방 방언을 끌어와서 '돌섬'을 '독섬'으로 바꾼 다음 '홀로 독(獨)'이라는 엉뚱한 한자를 빌려 표기할 필요가 없었다. 즉, 독도(獨島)는 '홀로 있는 섬'이란 뜻이고 석도(石島)는 '돌로 된 섬'이라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독도와 석도는 그 이름의 뜻이 서로 다른 섬이다.

게다가 1900년 대한제국의 관리가 붙인 '석도'라는 명칭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1910년대 이후에는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울릉도 현지에서 자생한 관음도(觀音島)라는 명칭이 지도에 명기되었다.

6.5.1. 반박:석도의 명칭[편집]


칙령에서는 울도군의 관할 구역을 울릉도와 죽도, 석도로 규정하였는데 한국은 바로 이 석도가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칙령이 반포되던 때의 울릉도 주민 대다수는 1883년 울릉도 재개척 정책에 의해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는데, 거진 전라도경상도의 남해안에 살던 어민들이었다. 이들은 여태까지 우산도로 알려져 있던 울릉도 동쪽의 바위투성이 섬, 현재의 독도가 돌섬임을 감안하여 '돌섬'의 사투리 표현인 '독섬'이라 불렀다. 참고로 돌을 독이라 부르는 것은 전라도, 경상도를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서 쓰이던 사투리로 현재 방언 사전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

이에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에서 울릉도 주민들이 부르던 명칭인 ‘독섬’을 의역하여 ‘石島’라 한 것인데, ‘독섬’을 훈차하면 '석도(石島)’가 되고, 음차하면 ‘독도(獨島)’가 된다. 즉 정리하자면 독섬=석도=독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두 표기가 혼용되다가 얼마 후 독도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는 독도라는 표기가 나온다. 더불어 당시 주민들이 댓섬(대나무섬)이라 부르던 섬을 죽도로 표기했으니, 독섬(돌섬)이라고 부르던 독도를 석도로 표기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당시의 관음도는 주민들이 깍새섬이라고 불렀다는 점 또한 석도가 관음도가 될 수 없는 근거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돌섬'과 '바위섬'이라는 용어 혹은 개념의 구분 문제이다. 한국 측은 '석도'와 '독도'는 동일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근거는 경상도 및 전라도 방언에서 '돌'과 '독'이 혼용됐다는 점이다. 옛날 한국인들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뜻에 맞는 글자를 찾기도 하고 발음에 맞는 글자를 찾기도 했다. 돌섬 즉, 독섬을 석도로도 표기하고 독섬 즉, 독도(獨島)로도 표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기 위해 일본측은 "객관적으로 보아 독도는 돌섬이라기보다 바위섬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위섬이므로 돌섬 즉 독섬으로 불렸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주장대로라면 '독도=바위섬, 울릉도 근처의 섬(관음도, 죽도)=돌섬'이 된다.

그런데 이는 굉장히 주관적인 구분법일 뿐이다. 대체 어디에서 돌섬과 바위섬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쓴단 말인가? 돌섬과 바위섬은 해양학이나 지리학 등지에서 학술적으로 명백히 구분해서 쓰는 단어도 아니고, 학술적으로 독도는 바위섬이고 관음도와 죽도는 돌섬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당장 인터넷에서 관음도, 죽도, 독도 세 섬의 사진을 검색해봐도 관음도건 죽도건 독도건 생김새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지면 바위섬이 되고 한 개의 단일섬이면 돌섬이 된다는 뜻도 아니며, 덩치가 크고 위가 평평하면 돌섬, 크기가 작고 뾰족하면 바위섬이 된다는 기준도 없다. 일본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독도는 바위섬이므로 돌섬 즉, 독섬으로 불렸을 리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은 돌과 바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바위산'을 보고 '돌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사회의 이런 일반적인 언어습관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있는 자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6.6. 죠션디도[편집]


파일:이승만의 죠션디도_1911년판.jpg

위 지도는 19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교민들이 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려 있는 '죠션디도'인데 전국의 지명이 한글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확대한 부분을 보자면 울릉도 바로 남쪽에 '돌도'가 붙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돌도가 석도임은 자명하니, 칙령 41호의 석도가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km 떨어진 독도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새로운 행정구역을 선포하면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조사했고, 그 결과 죽도와 석도를 군역으로 지정하였다.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그대로이지만 죽도 이외에 오늘날 울릉도에 부속한 섬을 찾으면 관음도(觀音島) 이외에는 인접한 섬이 없기 때문에 칙령 41호의 석도는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6.6.1. 반박:이중잣대[편집]


죠션디도에 대한 위같은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지도 해석에 대한 이중잣대 문제이다. 일본은 앞서 조선시대 고지도들에 그려진 '우산도'에 대해서는 '위치가 부정확하므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며 실존하는 섬이 아닌 환상의 섬이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해당 지도의 울릉도 밑에 있는 정체불명의 두 개의 섬에 대해서는 '위치가 부정확하게 그려져있지만 관음도랑 죽도 맞음. 아무튼 그럼.'이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문제의 두 개 섬을 관음도 죽도라고 비정할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우산도에 대한 엄근진한 태도와는 달리 매우 관대한 해석을 하는데 이는 명백한 이중잣대이다.
둘째, 설령 해당 지도의 두 섬이 관음도나 죽도가 맞다고 해도 석도가 독도가 아님을 확언할 수는 없다. '돌도(?)'라 써진 왼쪽의 섬이 죽도가 될 경우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를 죽도와 명백히 구분하여 언급한 점과 정면으로 충돌해버리게 된다. 그나마 관음도라고 해석하면 칙령 제41호와 충돌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해당 지도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관음도의 또 다른 이름은 돌도이다.'지 이것만으로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관음도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엔 부족하다. 관음도가 돌도라고 불렸는지와는 별개로 독도의 경우 독도/역사 항목에서 보듯 돌섬/독섬이라고 불렸다는 수많은 근거들이 존재하며 교차검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관음도의 경우 깍새섬이라 불렸단 얘기는 있어도 돌섬/독섬이라고 불렸다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며 만약 있다면 이영훈이 제시했어야 한다. 결국 이영훈이 제시한 자료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해도 결국 '관음도와 독도 모두 돌섬/돌도라 불렸다.'란 결론이 나오는 정도가 한계이다. 종합하자면 일본은 문제의 지도로부터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관음도나 죽도'라는 결론을 무리하게 도출하려다가 기적의 분류법과 이중잣대 등 수많은 논리적 헛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측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이영훈의 경우, 저 '죠션디도와 울릉도 부분(1911)'에서 '돌도'라고 읽은 단어가 실은 '울도'라는 반박이 나왔고 결국 이영훈도 '돌도일 가능성이 있으나 울도일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러한 비판을 수용했다.


6.7. 사라진 우산도[편집]


한편 울릉군의 영역을 지정하면서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한다"고 했다. 이 칙령 제 41호를 통해서 우산도는 그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산도는 불과 1년 전인 1899년의 대한전도까지 표기되어 왔던 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일본측에선 대한제국이 더 이상 우산도를 언급하지 않게 된 이유가 우산도는 울릉도의 별칭임을 마침내 인지, 수긍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6.7.1. 반박:오해의 사전차단[편집]


우산도라는 지명은 본래 전통적으로 울릉도 근처에 존재했던 오늘날의 독도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내내 오랜 공도정책을 진행함에 따라 점차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정보의 정확도가 떨어지게 되어 지도에서 현재의 죽도 위치에 해당하는 곳에 우산도가 그려지는 경우가 잦았다. 때문에 우산도의 명칭을 독도에 그대로 사용했다간 자칫 죽도가 중복되어 표기되는 형태의 오류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칙령에서는 오늘날의 죽도와 독도를 엄밀히 구분하기 위해 울릉전도, 죽도, 석도를 울도군(鬱島郡)의 관할구역으로 지정했다. 당시의 독도는 '돌섬'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여 '석도'가 되었던 것이다. 돌섬의 명칭은 이미 1904년 니이타카호 군함일지와 1906년 심흥택 군수의 '본군소속 獨島' 표기를 통해 교차검증된 바 있는 이름이다.

즉, 고종이 독도의 원래 명칭인 우산도를 사용하지 않고 석도로 재명명한 것은 근대적인 행정명령에 있어 오해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한 것이지, 이를 없는 지명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

6.8. 증보문헌비고(1908)[편집]


1905년 1월 일본 정부는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1908년 대한제국은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이는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의 마지막 증보판으로 나온 것이다.

우산도와 울릉도. 울진현 동쪽 350리에 있다. 鬱은 蔚로도 芋로도 羽로도 武로도 쓴다. 두 섬을 합하면 芋山이다. (續) 지금의 울도군이다.

'(續)' 이전이 《동국문헌비고》의 기술이며, 그 이하가 1908년 《증보문헌비고》에서 추가된 기술이다.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이 지금은 울도군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독도는 1905년 일본에 의해 빼았겼으며, 대한제국의 신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우산도를 여전히 대한제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는 우산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이우산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6.8.1. 반박:사료 오독[편집]


일본측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간단하게 논파되는데 《증보문헌비고》의 경우 편찬기간은 1903년부터 1906년 12월까지였으나 책의 범례에 1904년의 일까지만 기재한다고 명시하였고 이후 1908년에 간행되었다. 즉, 1904년 이후의 사건은 책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애초에 근거로도 삼을 수 없는 자료이다. #


6.9. 통감부의 탐문[편집]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은 1905년 1월의 일이다. 울도군수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1906년 4월 4일이다. 이에 울도군수는 그 사실을 강원도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강원도관찰사가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는 것은 4월 29일이며, 의정부가 보고서를 접수하는 것은 5월 7일이었다. 이후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이 강원도관찰사에게 관련 지령을 내리는 것은 5월 10일이었다.

근대적인 통신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근대의 역참제(驛站制)에 의존하여 느릿느릿하게 진행된 보고와 대응의 과정이었다. 강원도관찰사가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는 것은 4월 29일이며, 의정부가 보고서를 접수하는 것은 5월 7일이었다. 이후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이 강원도관찰사에게 관련 지령을 내리는 것은 5월 10일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중앙정부가 이를 인지하고 대응한 것이다.

울도군수의 보고를 접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매우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은 의정부의 참정대신 박제순이 강원도관찰사에게 내린 지령이다.

보고서는 자세히 살폈으며 (일본의) 독도 영유설은 전혀 근거가 없으나 해당 섬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


박제순의 지령에서 그가 그때까지 독도라고 하는 섬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석도는 어떠한가? 1906년 7월 통감부가 울도군의 내력을 물었을 때 대한제국 내부는 "1900년에 울도군으로 승격한 이 섬은 죽도와 석도를 관할한다"고 답변하였다. 그렇게 석도도 빼앗긴 적이 없다. 그렇다면 무슨 섬을 빼앗겼다는 것인가? 다시 말해 대한제국은 석도를 '독도'로 공식 개칭한 적이 없다.

6.9.1. 반박:당대의 시대상[편집]


1900년대 후반은 말이 대한제국이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와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더불어 내각은 친일파로만 채워져있는데다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마저 빼앗겨 일본에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주장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던 시기였다. 이때의 적극적이지 못한 대응을 문제삼는 것은 시대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이다.

결정적으로 이 안건을 담당한 중앙관료인 박제순은 친일파의 대명자이자 매국노였던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울도군의 지리에 관해 잘 알고 있었든 잘 모르고 있었든 일본이 원하는 이상 독도가 일본에 넘어가는걸 옹호하면 옹호했지 막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의 독도 점거를 인정한 적이 없으며, 통감부도 현 상태가 아닌 내력을 물은 것이므로 대한제국 내부에서 울도군이 석도를 관할한다고 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이에 집중했는데 1906년 5월 1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제국신문(帝國新聞)>은 내부대신 이지용의 반응을 보도하였다. 5월 9일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보도하였고, 이를 본 황현(黃玹)은 그의 일기 <매천야록(梅泉野錄)>에다 "울릉도 동쪽 바다 100리에 한 섬이 있는데 독도라 한다. 예부터 울릉도에 속하였다. 왜인이 그의 영지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적는 등 한창 통감부의 검열이나 감시가 심할 때인데도 언론이나 민간에서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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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에서 1리는 392.727273m이다.[2] 현재의 군수와 같다.[3] 현재 울릉군 서면 태하리.[4] 울릉도가 울도로 개명한 것이 아니라 울릉도와 석도를 통합하여 울도군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5] 현재는 북한의 이천군에 존재했던 옛 행정구역이다. 안협군과 울도군 사이에 큰 관련이 있던건 아니고, 단지 순서대로 표기하라는 뜻이다.[6] 개국 504년(1895년) 9월 5일 칙령 제164호 〈군수관등봉급에 관한 건〉에 의해 면과 결호수의 다소에 따라 군(郡)을 1등군부터 5등군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중 가장 작은 규모의 군으로 분류한 것이다.[7] 여기서 개척은 신대륙에서의 개척같은 뜻이 아닌 새로운 섬을 발견하거나 마을 발전 등 확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8] 현재의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볼 수 있다.[9] 죽도는 따로 언급되었다.[10] 참고로 한국에서도 이 관음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영훈 교수가 있다.[11] 물론 어디까지나 일설이고 조선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자료에서 우산도와 울릉도는 각각 별개의 섬으로 취급됐다.[12] 17년전 이규원이 확인한 현재의 죽도.[13] 朝鮮八道誌. 고마쓰 스스무(小松運)가 1887년에 편찬.[14] 실제 죽도의 경도는 동경130도 56분 17초이므로 거의 근접하다.[15] 실제 독도의 경도는 동경 131° 52′ 22''이다. 1도는 60분이고, 1분은 60초이다.[16] 일본에서 1리는 조선의 열 배인 3.9km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