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카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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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카이너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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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Kiner%20Ralph%20Plaque%20273_NBL_0.png
랄프 카이너
헌액 연도
1975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5.41% (13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46 ~ 195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토미 홈스
(보스턴 브레이브스)

랄프 카이너
(피츠버그 파이리츠)


에디 매튜스
(밀워키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4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점왕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랄프 카이너
(피츠버그 파이리츠)


델 에니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보유 기록
최다 연속 홈런왕 시즌
7시즌
1946~1952년



파일:Ralph Kiner.jpg

피츠버그 파이리츠 No. 4
랄프 맥퍼렌 카이너
Ralph McPherran Kiner

출생
1922년 10월 27일
사망
2014년 2월 6일 (향년 91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뉴멕시코 주 산타 리타
신체
188cm / 88kg
포지션
좌익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41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PIT)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 (1946~1953)
시카고 컵스 (1953~195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55)

1. 개요
2. 출생과 성장,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연도별 성적
6. 여담



1. 개요[편집]


윌리엄스, 디마지오, 뮤지얼, 그리고 카이너. 이들은 자신들이 활동했던 기간에 가장 뛰어난 외야수였다.

- 빌 제임스


카이너는 단 한번의 스윙으로 당신의 리드를 날려버릴 수 있다.

- 워렌 스판


전 메이저리그 타자.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을 대표한 전설적인 강타자이자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전설. 내셔널 리그 7년 연속 홈런왕이자 MLB 전체 6년 연속 홈런왕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은퇴한 비운의 타자.

"홈런왕은 캐딜락을 타고, 타격왕은 포드를 탄다"(Home run hitters drive Cadillacs, and singles hitters drive Fords.)는 명언으로 유명하기도 하다.[2]

통산 10시즌 1,472경기 6,256타석/5,205타수 1,451안타 369홈런 971득점 1,015타점 1,011BB/749K .279/.398/.548 .946OPS/149OPS+ 47.9 bWAR.

2. 출생과 성장, 선수 시절[편집]


카이너는 1922년 뉴멕시코 주 산타 리타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알함브라에서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미 해군 조종사로 임관해 복무했고, 비행시간 누적 1,200시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 1946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23살의 나이로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시즌 23홈런을 쳤으나 109삼진을 당했는데, 팀은 시즌 종료 후 디트로이트에서 트레이드되어 와 있던 말년의 행크 그린버그의 은퇴를 만류하였고, 이에 카이너는 그린버그의 정성어린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 카이너는 리그 전체 1위에 해당하는 5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1949년에는 당시 핵 윌슨의 내셔널리그 최고기록(1930년 56홈런)에 단 2개가 모자란 54홈런 시즌을 기록했다. 1947년부터 1953년까지 7년 연속 30홈런 이상이자 내셔널리그 홈런왕, 1952년까지 양대리그 통합 6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는 충공깽스러운 성적을 기록. [3] 이런 활약에 그는 1948년부터 1953년까지 6년 연속 올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대 타수당 홈런 비율 순위>
1위 : 마크 맥과이어 10.61
2위 : 베이브 루스 11.76
3위 : 배리 본즈 12.92
4위 : 짐 토미 13.74
5위 : 랄프 카이너 14.11

그의 타수당 홈런 비율은 역대 5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이 중 약쟁이인 맥과이어와 본즈를 제외하면 3위이다. 그리고 6위는 하먼 킬러브루, 9위는 테드 윌리엄스인데 이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생각하면 랄프 카이너가 단순한 홈런왕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53년 6월 4일, 카이너는 피츠버그와 시카고 컵스의 10명 트레이드로 컵스로 이적하게 됐다. 이는 피츠버그 단장 브랜치 리키와 연봉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리키 단장은 "우린 네가 있는데도 리그 꼴찌다. 이건 네가 팀에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라고까지 했다고 한다.[4]

이 때가 30세 때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이 해에 등 부상을 당했고, 당시 의학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너는 1953~54 시즌 컵스, 1955 시즌 클리블랜드에서 총 3년을 더 뛰었으나, 결국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1955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뛴 기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했다.[5]

통산 fWAR은 45.9에 지나지 않는데, 7년 연속 홈런왕치고는 10년치라고 봐도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이는 그가 수비에서 엄청나게 WAR을 까먹었기 때문.[6] 한편 통산 1011볼넷을 얻는 동안 삼진은 749개밖에 당하지 않은 테드 윌리엄스 유형의 타자였다.


3. 은퇴 후[편집]


카이너는 은퇴 후 1961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중계석에 앉았다. 이듬해 그는 뉴욕 메츠 중계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4년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53년간 메츠 경기 해설을 진행했다. 이는 단일 팀의 중계를 맡은 해설자로서 세 번째로 긴 기록이다.[7] 마지막 해설 시즌이었던 2013년에는 당시 중계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시그니처 홈런 콜은 "It is gone, goodbye." 그 밖에 WOR-TV에서 "Kiner's Korner"라는 TV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2014년 2월 6일, 캘리포니아 랜초 미라지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2세.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서는 고전했는데, 뛴 기간도 고작 10년[8]에다가 누적스텟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채 400홈런도 치지 못했고, 1500안타도 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7년연속 홈런왕의 임팩트가 매우 컸기 때문인지, 마지막 해인 1975년에, 그것도 입성 커트라인보다 딱 한 표 많은 273표로 턱걸이 입성에 성공. 비운의 은퇴 역시도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랄프 카이너
52
145
136
34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Left Field (19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랄프 카이너
49.3
43.6
46.5
좌익수 HOF 입성자 평균
65.2
41.5
53.3


5.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랄프 카이너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46
PIT
144
579
124
17
3
23
63
81
3
74
109
.247
.345
.430
.775
2.5
2.4
1947
152
666
177
23
4
51
118
127
1
98
81
.313
.417
.639
1.055
8.2
8.1
1948
156
670
147
19
5
40
104
123
1
112
61
.265
.391
.533
.924
5.7
6.1
1949
152
667
170
19
5
54
116
127
6
117
61
.310
.432
.658
1.089
7.8
8.1
1950
150
672
149
21
6
47
112
118
2
122
79
.272
.408
.590
.998
5.0
5.2
1951
151
670
164
31
6
42
124
109
2
137
57
.309
.452
.627
1.079
7.6
8.0
1952
149
633
126
17
2
37
90
87
3
110
77
.244
.384
.500
.884
4.2
4.3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53
PIT/CHC
158
666
157
20
3
35
100
116
2
100
88
.279
.391
.512
.903
2.8
2.8
1954
CHC
147
643
159
36
5
22
88
73
2
76
90
.285
.371
.487
.858
2.7
2.9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55
CLE
113
390
78
13
0
18
56
54
0
65
46
.243
.367
.452
.818
0.8
0.1
MLB 통산
(10시즌)
1472
6256
1451
216
39
369
971
1015
22
1011
749
.279
.398
.548
.946
47.6
48.0


6. 여담[편집]


  • "홈런왕은 캐딜락을 타고, 타격왕은 포드를 탄다"는 명언이 유명하지만, 이는 사실 그의 팀 동료였던 좌완 선발투수 프리츠 오스터뮐러가 한 말이다. 카이너가 단타를 좀 쳐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말년의 오스터뮐러가 그를 지켜보다가 다가와서는 "랄프, 오른쪽으로 밀어서 안타를 치는 우타자들은 포드를 몰아. 좌측 담장을 넘겨대는 우타자는 캐딜락을 몰지." 라고 했다는 것. 카이너 본인도 2004년에 한 인터뷰에서 이 말은 오스터뮐러가 먼저 했던 말이라고 인정했었다고 한다. #, #

  • 뉴욕 메츠에서 한 번도 선수생활을 한 적이 없지만, 1962년부터 메츠 중계석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메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피츠버그 시절 카이너가 때린 홈런의 상당수는 당시 담장이 꽤나 당겨져 있던 좌측, 좌중간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원래 행크 그린버그를 위해 만든 것이라 언론에서도 "Greenberg Gardens"라고 칭하고 있었는데, 이후에는 카이너를 위해 담장을 유지해 뒀던지라 이름도 "Kiner's Korner"로 바뀌었다. 상술했던, 본인이 진행한 TV 프로그램 제목을 여기서 따온 것.

  • 할리우드의 국민적인 연예인이었던 빙 크로스비가 파이리츠의 지분을 갖고 있었기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며, 밥 호프프랭크 시나트라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빙 크로스비의 주선으로 아역배우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영화 프리미어 참석에 에스코트를 해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넷 리와는 한동안 데이트했고, 에바 가드너, 마릴린 먼로, 제인 러셀과도 소문이 돌았다.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9]

  • 평소 단어를 살짝 틀리게 말하는 버릇(malapropism)이 있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 이름을 헷갈려했는데 같이 해설을 진행했던 팀 맥카버를 "팀 맥아더"라고 한다든지, 몬트리올 엑스포스게리 카터게리 쿠퍼로 부르고, 심지어는 자기 이름을 "랄프 코너"라고 부른 적도 있다고.

  • 선배이자 그와 비슷한 커리어를 가진 행크 그린버그가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하며, 그에게서 받은 가르침으로 인해 첫 해 23홈런에 그쳤던 장타력이 다음 해 51홈런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 통산 좌익수 1,307경기/1루수 58경기. 1951년에만 1루수를 겸했고 이외에는 항상 좌익수로 나왔다.[2] 그런데 사실 이는 그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다. 아래 여담 항목 참고[3] 1947~1952년 동안의 평균 성적이 무려 156안타 45홈런 115타점이었다.[4] 당시 8팀이 있었던 내셔널리그에서, 카이너가 7년 연속 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있을 때 팀 순위는 7-4-6-8-7-8-8위였다.[5] 명예의 전당 후보 입성 조건이 선수 생활 10년이다. 다만, 뇌수막염으로 인해 8년만 뛰고 31세에 요절해 베테랑 위원회로 헌액된 에디 조스는 예외.[6] 10년 간 oWAR 52.9, dWAR -10.7[7] 1위는 66년간 중계한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 2위는 1959년부터 현재까지도 다저스의 스페인 현지방송을 진행하는 하이메 하린.[8]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르기 위한 최소조건이 10년이다.[9] 현재는 야구선수들이 TV나 토크쇼에 출연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당시는 1950년대였다. 당시에는 미국의 전설적인 TV 프로그램 투나잇 쇼가 막 시작했을 때고 이제 막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접어들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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