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야 카디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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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독립운동가
중국어
热比娅·卡德尔 (간체자), 熱比婭·卡德爾 (정체자), Rèbǐyà Kǎdé'ěr (한어병음)
영문
Rebiya Kadeer
위구르어
رابىيە قادىر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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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3. 논란



1. 소개[편집]


영어 위키백과의 레비야 카디르 문서

위구르독립운동가. 티베트달라이 라마가 있다면, 위구르에는 이 사람이 유명하다. #

2. 생애[편집]


1946년 11월 15일생(75세).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아러타이(阿勒泰)[1]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버지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 가난한 인생을 살았지만, 세탁 사업을 하면서, 후에 백화점,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좋은 인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의 학대로 인해 28살에 이혼을 했다. 그 이후 위구르 독립운동을 했던 시디크 루지와 재혼했다.

그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자선 사업 및 위구르인들을 채용하는 등의 행보로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런 행동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1996년 남편 루지를 추방하고 이후 레비야 카디르에게도 남편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으나 레비야 카디르는 이를 거절했다. 1999년에는 남편에게 보내준 신문 기사로 인해 중국에서 국가 기밀 누설죄로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미국 국무부 장관의 방문을 앞두고 신병치료를 위한 명목으로 가석방되었다. 3월 17일 미국으로 망명하여 가족들을 재회한다.

그 이후에도 위구르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독립을 하되,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처럼 폭력으로서가 아닌 오직 평화적으로만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위구르 무장단체인 ETIM의 노선을 반대했다. ETIM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그룹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논리로 레비야 카디르의 위구르 독립 운동 전면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2006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3. 논란[편집]


여기까지만 보면 위구르달라이 라마처럼 보이겠지만, 라비예 카디르의 운동은 일본 극우의 지원을 받았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2012년에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민족혼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日本民族の精神の象徴的な所である」"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역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ここを訪問することは歴史を学ぶことである。」

"(이곳에 안치된 영령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몰한 일본의 영웅들입니다. " 「第二次世界大戦で亡くなった方々は日本の英雄である」

.일본어 발언 출전은 일본어 위키백과 링크

관련 기사. 단 이 기사 역시 너무 중국 중심적으로 치중되어 있으므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중립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신사 참배는 일본혐중 세력에 의해 반강제된 부분이 없지 않다.

더욱이 그는 무슬림이기에 야스쿠니 신사를 떠나서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본다면 이슬람교 교리와도 배치된다. 따라서 위구르인들 중에서 레비야 카디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위구르 독립운동 관련 페이스북 계정에서도 그가 헤드라인에서 많이 못 올라오게 만드는 대표적인 흑역사. 티베트 독립운동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게 위구르 독립운동은 한 사람을 대표삼아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여하튼 카디르가 반중감정과는 별개로 적어도 일본제국군의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데다가, 그것도 참배했다는 것은 무슬림들 입장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보통 위구르 측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싫어하며, 위구르도 중국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일본에 호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내 많은 모스크들이 훼손되고 무슬림들이 학살당한 것도 사실이기에 일본의 과거사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것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위구르인도 많다. 주로 중국국민당에서 활약하던 후이족 군인들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그래서 당시 후쑹산 같은 후이족 이슬람 학자들이 일본 제국에 대한 무슬림들의 지하드를 선포하기도 했다.

위구르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과 다른 강대국 사이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기에 이런 극단적인 강요를 받은 셈이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반중 감정보다는 반서구 감정이 강하다보니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 더 관심이 쏠려있어서, 위구르 문제는 서방에서도 중동에서도 상대적으로 묻히는 편인 안습한 상황이다. 쿠르드도 중동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편이다. 때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일본 극우들과 가까워지고 또 그럼으로 인해 인식이 안좋아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인권운동가이기도 한 그가 이곳을 참배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경악스럽기도 하다. 물론 달라이 라마 14세 문서를 보면 달라이 라마 14세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의혹이 담긴 내용이 있긴 하지만.

일본 극우들은 위구르, 티베트, 파룬궁 문제를 순수하게 접근하지 않고 중국을 디스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본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레디야 카디르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이런 일본 극우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명백한 침략주의를 진영논리로 옹호하는 것은 본인의 운동 자체에 해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정치인/독립운동가이기도 했었던 아민 알 후세이니와 비슷하기도 하다. 나치 독일도 아민 알 후세이니를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일부 정치인들을 속이면서 이용해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 손을 잡고 영국을 몰아내려 했던 인도의 찬드라 보세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체첸이나 다른 북카프카스의 분리독립주의자들도 반러감정이 심해진 일부 사람들의 경우는 나치도 긍정적으로 보아 우크라이나 동남부 내전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계 극우들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슷하게 반러주의가 있는 일부 일본 극우들도 체첸, 인구시 등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걸 아는 일부 체첸, 인구시, 다게스탄의 반러 및 분리운동가들 역시 이러한 일본에 호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경우로는 쿠르드의 민병대들 역시 아랍인들의 차별에 맞서 팔레스타인보다는 이스라엘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비슷하게 일부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은 ISIL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와 손을 잡고 활동한 적도 있었다. # 반대 방향에서도 비슷하게 중국 네티즌들이 "과거 위구르에 이슬람이 전파되며 불교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내용을 과장을 섞어서 퍼나르는 영어로 번역해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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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위구르어로는 알타이(ئالتاي شەھىرى , Altay). 阿勒泰는 한자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