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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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자

파일:(노년기)권하자 사진.jpg

본명
권하자
출생
1940년 8월 13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2013년 7월 12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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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종교
무교
직업
공무원[1](퇴직)
부모
아버지 권○○, 어머니
남매
8명[2]
묘소
미 매장[3]
1. 개요
2. 과거[4]
3. 노숙 생활
3.1. 지인의 도움 거부
3.2. 논란
4. 언론 보도
5. 반응
6. 논란
6.1. 할머니는 왜 그랬을까
7. 사망
8. 그 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서울특별시 정동 등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2. 과거[5][편집]


서울에서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당시 바로 위인 6번째 형제(즉 언니 또는 오빠)가 죽은 후에 어렵게 얻게 된 자식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가족들 중에서 부모의 편애를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한다.[6]

성년이 되자 권하자는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하여 4년동안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였다.[7] 참고로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입학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서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까지 져가며 등록금을 내줬다고 한다.

이후 권하자는 주일본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3년을 근무했고[8][9], 이후 1976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외무부 유엔 담당 부서에서 15년을 근무했다.[10] 따지고 보면 도합 18년을 근속한 셈이다. 다만 정식 공무원이었는지 혹은 계약직이나 일용직 등 기간제근로자였는지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 외무부 근무를 1976년, 즉 그녀 나이 36세 정도에 시작했는데 대학 학업 소요 기간인 4년 외에 12년의 가량의 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1970~1980년대 외무부 시절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어묵을 사먹거나 사탕을 사도 꼭 백화점에서만 샀다고 할 정도로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11]

권하자는 결혼한 적이 없다. 젊은 시절 결혼을 생각한 적은 여러번 있었으나, 부모님이 워낙 눈이 높아서 생전에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권하자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급이어야 한다고 했다.[12]

3. 노숙 생활[편집]


어떤 경위로 몰락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락 등이 단절되었고 주소지도 불명하게 되었다. 몰락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퇴직 후 퇴직금을 사기당해 재산을 잃고 정신적 충격까지 얻고 몰락한게 아니냐는 추측과[13], 외무부 시절부터 씀씀이가 헤펐던 점이나, 몰락 이후 도움의 손길이 오면 고급만을 고집하는 점을 봤을때 퇴직 후에도 씀씀이가 그대로라서 전부 탕진 후 몰락한거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2005년 무렵부터 몇 년 동안이나 24시간 영업을 하는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 커피숍, 교회를 오가면서 지인이 보내주는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고급 커피만을 마시고 살았다고.

2010년 12월 12일 가수 겸 생명운동가 이광필이 이 할머니의 사연을 널리 알리고 돕기 위해 인터뷰 영상을 작성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신문기사가 나는 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2005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숍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5개월 가량 쉬어가게 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맥도날드 할머니가 가게에 오지 않게 되어 도와주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아쉬웠던 차에 11월에 우연히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의 사연을 알리고자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4]

사실 이 할머니는 그쪽에서는 나름 명물이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매점 직원들과 심지어 다른 손님들에게도 갑자기 이유없이 소리지르며 시비를 거는 등 자주 행패를 부려서 커피 전문점 주인들이 합의하고 가게 내에서 못 자게 했었다. 잘 하면 긴급출동 SOS 24에 출연할 했는데…

방송을 보고 외무부 시절 후배와 지인, 고등학교 동창들이 찾아와 거주지를 마련해주려 하는 등 도움을 주려 했으나 계속 도움을 거절했다고 한다.[15]

이 사연이 세간에 알려진 뒤 넷상에서 나온 증언들에 의하면 이미 90년대 중후반~후반에도 커피숍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봤었다는 목격담이 존재할 정도였는데, 이로보아 이미 90년대에 몰락했거나, 혹은 그때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듯 하다. 게다가 그 당시에도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혼잣말을 하거나 혹은 가만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갑자기 이유없이 소리를 지르며 시비를 거는 등 정신이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상술한 커피숍에서 다른 손님들한테 행패를 부렸다는 것도 이렇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이다.


3.1. 지인의 도움 거부[편집]


고교 동창 및 전직 외무부 직장동료 등의 지인들은 할머니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거처와 함께 일자리를 제공하고 나섰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 모든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자신은 자기의 방식대로 남은 생을 이어가겠다고 했다.[16][17] 생계가 될 수 있는, 약간의 월급이나 봉사료 등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스스로 거절한 것이다. 생계가 될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


3.2. 논란[편집]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맞아야 하는데, 아무데나 몸을 누일 수도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지요[18]"라고 밝혔다.

그의 여동생은 “언니는 하도 눈이 높고, 완전히 공주 같아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줄 알고 그렇게 기다리다가 결혼도 못했다”고 밝혔다.[19][20] 상술했듯 그의 여동생은 부모로부터 손 벌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스스로 결혼까지 해냈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인생을 얻은 사람이다. 성격 차이가 아니라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본인의 언니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스스로 생활고를 선택했고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감당한다면 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못 된다. 그렇다면 누구도 그를 비판,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도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가 온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인터넷과 오프라인에서 그를 비판 및 비난하는 여론이 조장된 이유이기도 하다.

호텔도 그냥 호텔은 안된다. 고급 호텔이어야 된다고 밝혔지만 그는 스스로 그 호텔에 들어갈 수 있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고급 호텔에 들어가기 힘들더라도 그는 일을 해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을 모았어야 했다.[21] 자기가 돈을 벌어서 고급호텔에 들어간다면 누구도 그를 비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고급호텔은 커녕 일반호텔에 들어갈 비용도 스스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어렸을 때 곱게 자랐다. 아버지가 성공한 목재 사업가라 시집도 안 가고 부모님 품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다”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몰라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한 끝에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22]" 고 밝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몰라서 고민했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그 고민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점. 게다가 손윗형제들은 자신들이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동생을 아껴주었는데 이 손윗형제들 마저도 대부분 사망하고 나니, 더더욱 수렁으로 빠진 셈이다.

어느 언론 취재진이 연초라서 떡국을 대접하고 싶다 하니 시시한데 가서 먹고 싶지 않아, 지하 1층 같은데 가서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음식이라면 괜찮다고 사양할 수도 있고, 다른 음식은 없느냐고 거절할 수도 있다. 이 언론인이 할머니에게 대접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생면부지인 남에게 고급 음식, 값비싼 음식을 요구했다. 이 언론인이 수용했으니 다행이지만,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나마도 언론인이 수용한 것도 취재를 해야하니 수용한게 컸을 것이다.


4. 언론 보도[편집]


2010년 12월 24일에 같은 방송국의 휴먼다큐인 SBS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에서 사연이 방송되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2011년 1월 14일에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좀 더 자세한 취재를 하였다.

1차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맥도날드 할머니의 본명은 권하자라고 한다. 권하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으며, 주일본한국영사관에서 3년 근무했다. 이후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현재의 외교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당시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또한 늘 가지고 다니는 쇼핑백에는 영어 신문이 가득 차있었는데, 할머니는 이 신문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정도로 영어 실력 수준이 전문가 수준이었으며 프랑스어도 상당히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2020년대 기준으로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막힘 없이 구사할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당시 시대상으로는 그야말로 엘리트. 또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보그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방송에서 공개하기를 외무부에서 퇴직한 뒤에 어떻게 지내왔는지 상세한 것은 불명이나, 동사무소의 기록에 의하면 2005년 1월 24일에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고, 현재 국내에 권하자의 가족[23] 가운데서는 여동생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5. 반응[편집]


할머니가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지원을 해주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 사우나에 가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소갈비 등 고급 음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주문하는 등 사치스러운 일을 하며 돈을 탕진했다. 또 설날을 맞아 제작진이 떡국 한 그릇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대뜸 자신이 아는 종로의 한식집을 가자고 했으며, 찾으러 가는 길에서도 제작진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한식점이 이전해서 찾기 어렵자 신경질을 내다가 마침내 찾아간 한식집이 지하로 이전한 것을 알고는 '시시한 곳에서 먹고싶지 않다'며 역정을 내는 등 안하무인의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더불어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기관을 20년 이상 이용한 적 없다는 발언 등을 하였다.

추가로 기자와 대화할 때의 태도도 대단히 일방적이고, 자기 생각에 안 맞는 말 같으면 기자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며, 기본적인 소통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핵심적인 내용에 가려지긴 했지만 기자가 할머니의 짐에서 뭔가를 꺼내려 하면서 물어보자, 기자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이건 내 비밀"이라고 못 건드리게 하는 통에 기자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보여주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완곡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을 대번에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을 본다면 기본적으로 대화하는 데 있어서 고집스러운 성격일 가능성이 많다. 거기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모습도 있었다.

사실 긴급출동 SOS 24와 달리 이 방송에서 훈훈한 휴먼다큐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당사자의 안하무인과 황당함 때문에 결국 그 주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할머니 자신의 실상을 까발리게 되었다. 결국 미모 화제만 언론에서 실어주는 형편. 말하자면 방송 컨셉을 처음부터 잘못 잡은 대표적인 경우. '다큐가 아닌 솔루션 형식으로 갔어야 했다'는 말이 많았다. 이 할머니의 경우는 그 뒤에 나온 화장실 3남매[24]의 아버지가 보이는 모습과도 꽤 유사한 상황이다. 역시 나름 잘 살던 가장이었지만 사업이 망한 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꽤 유사하다.

'방송사에서 흥미 위주로 개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캐는 것이 불쾌하다' 는 반응도 있었는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긴급출동 SOS 24,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마찬가지이니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황이 저렇게 되면 이미 '개인의 사생활'이라기보다는 '사회문제'에 더 가깝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숙하면서 사는 것을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1년 2월 이후 한동안 언론보도가 나오지 않았지만, 각종 커뮤니티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봤다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기존의 자기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25] 일반인들이 설득하긴 힘들겠고 전문가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할 듯. 아울러 후속 방송이 필요하긴 한데 이 할머니의 비정상적인 생활과 행동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자잘한 개인 문제 이런 거 떠나서 고령인 데다 저 생활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경우 갑자기 건강 악화가 올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나선다고 해도 쉽게 설득하기는 어려울 듯. 긴급출동 SOS 24에서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이 나서도 설득하는 데 진땀 빼는 광경이 자주 벌어지는 걸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맥도날드 할머니 사연도 사실 긴급출동 SOS 24에 나왔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방송을 탄 2011년 1월 이후 5월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SBS에서는 한 번 이 문제를 다뤘다면 끝까지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너무 소극적인 방법을 쓰는 거 같은데 긴급출동 SOS 24를 방송하던 때처럼 더 적극적인 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할머니의 지인들이나 후배들은 심리상담가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편 이 시기에 일베 커뮤니티 유저들이 할머니를 쫒아다니며 인증사진을 찍고 커뮤니티에 조롱글을 여러차례 올려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다만 '내재적 접근'으로 권하자를 본다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과 오버랩되어 측은지심을 느낄 수도 있다. 여주인공이 이제는 늙어서 할머니가 되었는데 자연은 어김없이 봄이 와서 세월을 한탄하며 회한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늙은 할망구~ 늙은 할망구~" 이렇게 탄식을 하며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장면인데 권하자를 보면 그 생각이 날 수 있다. 젊은 시절 모든 걸 다 가졌던 권하자도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어 마지막 모습은 처량했다.[26] 권하자를 그렇게 이뻐하고 공주처럼 떠받들며 항상 편을 들어주던 부모들도 이미 이 세상에 없고, 맥도날드나 카페에서 쪽잠을 자는 말년의 현실이 잘나가던 시절과 너무 대비되어 갭이 크다. 손자뻘 청년들은 사진을 찍으며 조롱하는 등 권하자가 젊은 시절에는 이런 미래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날 외국인 친구가 권하자를 오랜만에 보니 체중이 눈에 띄게 준 것을 보며 암이라고 직감했다는데(친척도 그랬다고), 검사해보니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아들었을 때 권하자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대학만 나와도 대단하던 시절에 여성으로서 상당한 고학력자에 직장에서 외모로도 손꼽히며 퀸으로 선정됐을 정도니 정말 당시엔 아주 눈부신 인생이었을테고 꿈에서도 종종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텐데, 눈을 떠보면 맥도날드에서 쪽잠을 자는 처량한 신세에 '암 말기' 판정까지 받아들일 때의 심정은 인생이 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말년의 모습을 부모가 본다면 어떤 심정일지, 타임머신 타고 80년대로 돌아가서 잘 나가는 권하자를 만나 "이게 당신의 미래 모습"이라고 보여준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화사했던 젊음도 한 순간인지라 권하자가 '암 말기' 소견을 받아든 후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모든 것이 꿈처럼 허무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사실 권하자가 이렇게 된 데에는 본인 책임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맥도날드나 카페에 민폐 끼친 것 외에는 크게 남들에게 잘못을 한 것이 없고, 그저 완벽한 삶을 꿈꿨을 뿐인데 현실은 시궁창이니 인지부조화로 인해 현실부정을 하며 현실도피에 빠져 이리 된 것이니 딱한 면도 있다. 서초구에서 같이 살자는 외교부 후배의 제의를 "거기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고 정신 못차렸다는 비난의 댓글들도 있으나, 외국인 친구의 말처럼 동정 받고 싶진 않았을테니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수도 있다. 막상 나중에는 외국인 친구가 쉼터를 연결해줬는데 별로 좋은 쉼터가 아니었음에도 받아들였다. 쉼터 입소 후 병으로 오래 머물지 못했던 것을 보면, 쉼터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세가 악화됐을 순 있다. 외국인 친구 말로는 쉼터에서 괴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온 몸에 멍이 든 사람도 있는 등 권하자가 맘 편히 쉴 만한 곳은 아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권하자가 기자나 주변인들에게 하대하는 듯한 태도는 분명 문제가 맞긴 하지만, '내재적 접근'으로 권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고맙다고 조아리는 것 자체가 본인 딴에는 가오가 떨어진다고 여겨 일부러 더 당당한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래 열등감 있는 사람들이 감추려 일부러 더 오버하는 경향이 있는데, 'MBC 실화탐사대'에 나온 비행기 기장 사기꾼(원래는 일용직 노동자)도 기장인 걸 너무 티내고 다녀서 신동엽이 "기장 복장을 하고 온 동네 다 돌아다닌다"라며 한마디했다. 의사 사칭범은 수술복 입고 밖에서 애인을 만나는 등 하여간 뭔가 구린게 있는 사람이 그걸 감추려 더 오버하며 유난떠는 경향이 있는데, 권하자 역시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에게 다소 거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기 딴에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수단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인 친구에게는 그저 대화를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했던 것을 보면, 전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6. 논란[편집]


'왜 쉼터에 안 가냐'는 댓글들도 많았는데 이건 무책임한 소리일 수 있다. 제법 노숙 생활 산전수전 겪었다는 일명 왕고 노숙자들도 쉼터를 기피하며 질색까지 한다. 쉼터에서 워낙 통제가 심한 데다가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거칠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 노숙자들조차 기피하며 들어간다 해도 얼마 못 가 제 발로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모 신문과 인터뷰에서 쉼터 입소 얘기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질색을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다'라고 못을 박았는데 이건 할머니를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거기에 맥도날드 할머니의 경우 70살이 넘은 고령인데 과연 쉼터로 가게 했을 경우 적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듯하다. 이런저런 사정 제껴두고 노숙자들 기준으로 보면 엄연히 할머니는 약자이다. 남성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나이는 별 소용 없고 주먹 잘 쓰는 순서대로 서열 정해지는 거 보면, '왜 쉼터에 안 들어가냐'고 하는 소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과 같다. 고령의 노숙자들을 상습 폭행과 구타에 갈취까지 하는 젊은 노숙자들이 많다는 걸 잘 생각해두자.

그렇다 해도 자신의 집에 같이 살자는 후배의 호의을 동네가 별로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후배들이 준 돈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는 등, 자기 자신은 고급스럽게 산다고 인식을 하는 듯한데,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할머니의 코트는 시커멓게 때가 탔으며, 머리를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코트 밑까지 머리가 자란 게 보일 정도였다. 후배의 권유대로 그 집에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인이라도 오래 돌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혈연이 이어진 친 여동생도 질색하는 사람을, 후배라고 제대로 돌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형제자매와의 사이가 남보다 못하고 그로인해 형제자매보다 차라리 쌩판 모르는 사람을 더 신뢰하는 사람도 적잖게 있지만 이렇게 누가 봐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PD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렇긴 한데...


6.1. 할머니는 왜 그랬을까[편집]


권하자 할머니를 임종 때까지 보살핀 건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같은 한국인은 권하자 할머니를 비난하면서 놀려대고, 정작 그녀를 끝까지 도와준 건 외국인이냐?"며 반성이 필요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국인들은 권하자 할머니를 도우려고 했고, 도움의 손길을 거부한 건 권하자 본인이었다. 권하자는 도움을 주려던 사람들을 외국인 빼곤 모두 거부했다.[27] 그것도 누가 협박을 했거나 무슨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거나 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순전히 자의로 모든 도움을 직접 거부했다. 단순히 도움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맥도날드의 직원들과 손님들에게 행패를 부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가족을 너무 괴롭혀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다.[28]

권하자가 외국인의 도움만을 받은 것은 오히려 도와주려던 사람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기에 할머니의 성격상 자신의 이국에 대한 호감을 충족시켜줄 '영어로 말을 거는 외국인'의 도움만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그 교육 잘 받은 상류층 느낌이 나는 20대 캐나다 백인 여성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권하자였다고 한다. 처음에 맥도날드에서 눈이 마주쳐서 백인 여성이 어색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조금 있다가 권하자가 찾아와 영어로 말을 걸며 친해졌다고 한다. 여성들 중에는 자기들이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남성에게는 벌레 쳐다보듯 사람취급도 안하며 도움 받는 것조차 자존심 상하는지 거부하다가, 자신의 기준에 충족하는 남성에게는 태세전환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권하자도 한국인들을 대할 때와 너무나 달랐다. 지상파 방송국 기자가 말을 걸었을 때는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투나 이런게 하인대하듯이 낮춰보는 느낌이 강했던 것과 대조됐다. 지상파 방송국 기자라면 한국에서 무시당할 레벨이 아님에도 이럴진대, 하물며 평범한 한국인들이 권하자의 눈엔 어떻게 비치겠는가.

권하자가 잘나가며 선진국에서 지내던 시절엔 한국이 못살던 시절이었으니 한국인들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남아 있었던 건지 한국인들에게는 낮춰보는 경향이 뚜려했던 반면, 캐나다 백인 여성에게는 오히려 권하자가 낮추며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나에겐 당신이 유일한 가족이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가족으로 인정했다. 물론 마이콜 같은 흑인이나 파키스탄 노동자가 말을 걸었다면 과연 '가족'으로 받아들였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초구 사는 외교부 후배가 같이 살자고 하니 자존심이 상한듯 그 동네 마음에 안든다며 거절하고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던 권하자가, 서구의 백마 탄 왕자 아우라가 느껴지는 영어권 백인 여성에게는 한마디에도 감동하고 마음을 열었기에, 한국인들이 권하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권하자가 한국인들을 무시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쩌면 과거 자신이 무시했던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더욱 '무시하는 척' 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백인 여성이 대단한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도움보다는 쉼터로의 연계가 중요하다"며 쉼터로 연계시켜줬는데, 쉼터는커녕 서초구에서 같이 살자는 제의도 거부하던 권하자는 백인 여성이 쉼터를 연계시켜주자 묵묵히 따랐다.

백인 여성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에요. 할머니에게는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아주 좋은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직업을 잃었다고 상상해보세요. 누가 당신에게 동정심을 갖길 바라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도움받길 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많이 아프고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약간의 돈을 건네기는 했지만, 한 번도 할머니가 불쌍해서 돈을 건네지는 않았어요. 도와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하고 다가갔기 때문이에요.” 한국인 방송국 기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시도했을 땐 벌레 쳐다보듯 쳐다봤던 권하자는 백인 여성과 '영어로' 대화할 때는 행복을 느끼며 친구로 받아들였다.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딱히 대단한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말동무를 했을 뿐이지만, 영어로 백인과 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월의식을 충족할 수 있었는지 만족해했다. 실제 백인 남자친구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우월의식을 과시하는 여성들도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권하자는 '대화'와 '친구'가 필요한 것은 맞았으나, 안타깝게도 평범한 한국인들과 대화하거나 친구를 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고 '백마 탄 왕자' 급을 원했을 뿐이었다.

맥도날드에 거처한 것 역시 맥도날드가 외국계 기업이고 자신을 내쫓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그곳에 거처했을 가능성도 있다. 누추한 할머니가 품위를 그렇게 중요시 하면서 맥도날드에 머물러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이야 한끼 3천원이지 지금은 기본이 6천원에, 비싸면 만원이 넘어가는데 처음 생길 88년도, 권 할머니가 젊었을 당시 맥도날드는 서민층 아이들은 생일때나 파티하러 가볼 수 있는 나름 고급 식당이었다. 굳이 24시간 하는 다른 많은 업종들 내비두고 밤을 지새러 찾았던 가게 리스트에 카페, 교회와 더불어 맥도날드가 포함된 것은 결국 그나마 손 닿는 범위 내에서라도 허영을 채우려 했던 것.

할머니는 약 20년 간 한국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하였는데, 이런 환경에서 영어의 사용 빈도는 높을래야 높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긴 노숙 생활을 했음에도 습관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고, 굳이 영어로 된 신문을 읽는 등 서양 문화를 의도적으로 많이 접하고 과시하려 했다. 프랑스 외교 일을 했었던 엘리트 경력이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미련과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할머니의 말투를 들어보면 품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이 들린다. 좋게 말하면 엘레강스한 말투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과시적인 말투이다. 보통 할머니들 말투는 절대 아니다. 남들이 깨뜨릴 수 없는 강한 허영심을 가진 할머니로 보인다. 한마디로 극한의 공주병을 앓다 간 할머니라 할 수 있겠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도 참고.


7. 사망[편집]


이후 2013년 5월 29일, 서울역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국립중앙의료원으로 후송되어 검사한 결과 말기로 밝혀졌다. 이후 2013년 7월 12일 송파구 새희망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 중에 세상을 떠났으며, 무연고 변사자로서 화장되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참고로 권하자는 무연고 변사자이기 때문에 묘지에 묻힐 수 없고 다른 무연고 변사자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화장해서 봉안당 안치 혹은 산이나 바다에 뿌려진다.[29]

언론사 등을 통해 2013년 10월 14일 이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던 외국인과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캐나다 여성인 스테파니 씨는 우연히 할머니와 대화하게 되면서 서로 절친해졌고, 만남을 지속하며 풍부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긴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다고. 또한 몸이 편찮아 보이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보호소에 가시도록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이제 당신이 제 유일한 가족이군요."라고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며, 그녀가 과거에 안주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그녀 또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소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관련 기사인터뷰)

한편 이광필 역시 2013년 10월 10일 마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이전 행보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네티즌언플이라며 달갑지 않아했다.


8. 그 외[편집]


2011년 7월 31일에 이광필의 부상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어 비판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당시 이광필이 여름용 의류 등을 전달하려다 우산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광필에 의하면 우산에 눈을 찔렸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이광필이 권하자에게 와서 뭔가를 계속 권하자 굉장한 거부반응을 보였는데도 물건을 계속 주려고 하고, 권하자는 이광필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 피해다녔는데 자꾸 쫓아오자 우산을 휘둘러댔다고 한다. 다만 크게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권하자나 이광필 모두 한 성격 하는 스타일인지라 이광필은 기껏 자신이 준비해 간 후원물품이 거부당하자 집요하게 전달하려고 했고(그냥 조용히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권하자 역시 상대의 호의를 배려해 일단 받고서 정 싫으면 나중에 버리든지 해도 되는데 둘 다 노빠꾸라 '우산 신공'까지 발휘하며 결사코 거부하고 또 우산 맞고 눈 찔렸다고 드러눕는(...) 이광필 등 뭔가 총체적 난국처럼 보인데다가(사실 충돌이 날 만한 사안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도움 받기를 싫어하는데 굳이 도와줘야 하냐는 부정적인 여론이 생겨났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인터넷상에서 '과연 그 할머니를 도와주는 게 옳은가'라는 의문과 더불어 언론의 보도 태도 등지에서 논쟁이 일었고, 설상가상으로 이광필이 하리수의 트랜스젠더 사진전 참가에 대해 음란하다며 하리수를 음란물 유포죄로 고소한 것 때문에 네티즌들의 비난 여론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광필과 권하자 모두에게 등을 돌리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권하자를 이슈화시키며 돕자고 나섰던게 바로 이광필이었기 때문이다. 이광필이 없었으면 권하자가 위키에까지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얻지 못했을 수 있는데, 정작 그런 이광필조차 우산으로 얻어맞을 정도로 권하자는 도움을 원하지 않으며 그리 착한 성격도 아니고, 이광필 역시 하리수 고소건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부정적인 여론이 증가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게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실화와 동일하나 장편소설인 만큼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담겨 있어서 어떻게 권하자가 맥도날드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힌트를 준다. 단, 모티브를 따온 것이지 실제 권하자의 자서전은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권하자의 생각을 이 장편소설에 담았다고 보긴 어렵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권하자의 일생에 대한 애틋한 시각을 드러낸다.

시크릿 류의 믿음을 강조하는 책들의 문제점이 권하자처럼 되기를 강요한단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자신의 생각이 그것을 끌어왔기 때문이라며 원하는 걸 상상하라는 '끌어당김 법칙'까지도 나왔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 바라는 대로 된다고 한다. 단순히 바라기만 한다면 양자장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며 자신이 꿈을 이룬 상상을 하며 느낄 때 비로소 인식하여 우주의 기운이 작동하여 꿈을 이뤄준다고 한다. 만약 권하자에게 사우디 재벌이 짠하고 나타나서 정말 신데렐라가 됐다면야 끌어당김 법칙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권하자에게는 끝내 우주의 기운 따위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법이지, 현실에 눈을 감고 별을 따는 상상만 백날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타조 증후군)

오히려 'MBC 실화탐사대'에선 권하자처럼 신데렐라가 되기를 원하는 피해자들을 노리는 '사기 결혼'을 상당히 다뤘는데, 진심으로 믿으면 사기꾼들에게 끌려가는 법칙이 있다. 시크릿 신봉자들은 주변에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끼친다며 손절하라고 하는데, 실제로 사기 결혼 피해자들을 보면 이미 가족이나 지인들이 눈치 채고 조심하라고 일러줘도 귓등으로도 안듣고 신데렐라가 된 상상에만 빠져살다가, 나중에 눈 떠보면 돈은 다 털려있고 백마 탄 왕자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클리셰가 많다. 정신과 의사 양재진 원장은 누가봐도 괜찮은 상대가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 때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심병을 가지란 것이 아니고,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으로 "저런 사람이 나를 왜 좋아하지???"라는 합리적 의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울러 자기 객관화(주제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소 괴롭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현실을 하나둘씩 개선해나갈 수 있는 법인데, 현실은 외면하고 신데렐라가 된 상상만 해봐야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어 탈탈 털리거나 권하자처럼 상상만 하다가 떠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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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사관 및 대사관에서 근무을 한적이 있으니 전직이 공무원이다.[2] 권하자도 포함[3] 권하자는 무연고 변사자이기 때문에 묘지에 묻힐 수 없고 다른 무연고 변사자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화장해서 봉안당 안치 혹은 산이나 바다에 뿌려진다.[4]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5]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6] 권하자의 막내 여동생은 "언니가 공주로, 어머니시녀로 살았어요."라고 표현했다. 반면 막내인 자신은 오히려 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성격조차 차이가 나서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피를 나눈 자매로서 이런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지금도 난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게 두려워요"라고 말했다.[7] 기사1 기사2.[8] 기사3[9] 다른 언론사들에는 주일본 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그는 외무부에서 18년을 근무한 셈.[10] 기사4[11] 당시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기준으로도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사는 것은 꽤 까다로운 사람 취급받을 일이지만, 70~80년대 백화점의 위상은 서민은 꿈도 꿀 수 없는 부유층을 위한 장소였다. 적어도 외무공무원 월급으로 매번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절대 아니다.[12] 이렇듯 권하자의 부모님이 딸을 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 해가며 공주대접 한것이 오히려 딸 인생을 망치는데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해도 권하자가 백마탄 왕자님 운운을 하면서 끝내 거절하게 만들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와 지나치게 수준이 차이나는 배우자감만 바라보고 있었으니(...)[13] 퇴직 후 퇴직금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공무원연금은 근무연수를 채우지 못해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14] 하지만 후에 벌어진 권하자와 이광필의 몸싸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이광필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였을지 의심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광필(가수) 항목으로.[15] 후배가 어디 외딴 시골도 아니고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산다고 하니 동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그 집으로 가지 않고 용돈만 받았다. 권씨는 실제로 강북의 4대 성문 밖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강남 쪽은 권씨가 젊었을 당시 전부 논밭이었기에 과거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권씨는 그 당시의 '말죽거리 동네'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씨가 과거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다른 예로, 맥도날드는 권씨가 젊었을 당시 서민층 아이들은 생일때나 파티하러 가볼 수 있는 나름 고급 레스토랑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현재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16]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31044393&mode=sub_view[17]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1131032531001[18]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31044393&mode=sub_view[19] 언론의 취재 결과 맥도날드 할머니는 한사코 제작진과 주변의 도움을 외면한 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대신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현실에서는 더이상 돌봐주거나 전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식은 하지만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어머니를 대신할 더 멋진 남편, 훌륭한 남편이 나타나서 ‘나의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구축해 나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20]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010500063#csidx322169f19f49873982bff9a7e629a91[21] 혹자의 추측대로 퇴직 후 퇴직금을 사기당한 것이라면 적어도 노력을 하긴 했다고 볼 수는 있다. 흔한 프리터나 사회부적응자들과는 달리 권하자는 적어도 50대까지는 외무공무원으로서 일해서 돈을 벌어왔기 때문이다. 다만 사치가 심했다는 것을 보면 이를 모아서 훗날을 대비하는 노력은 하지 않은 듯.[22]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010500053#csidxea67c3f1e84541ebe3d29524084b4ad[23] 다른 형제는 사망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상술했듯 형제들중 당장 바로 윗 형제는 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해서 생전엔 얼굴도 못봤다.[24] 이 3남매의 사례는 같은 방송사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방송되었다.[25] 종로, 중구 쪽에 회사를 다니는 회원들의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몇몇 유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맥도날드 할머니를 맥도날드, 스타벅스, 롯데리아 등에서 목격했다고 한다.[26] 반출생주의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자녀에게 물려줘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밀 시오랑은 자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물려주는 부모는 무책임하다고까지 했다. 동물들이야 이성이 없으니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고 아이를 출산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을 겪고 사망하는 시체만 한구 늘어날 뿐이란 걸 잘 인지한 상태에서도 아이를 낳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염세주의적인 반출생주의자들이 있다. 젊은 날에 눈부셨던 권하자 역시 말년엔 애틋한 상황이었는데, TV 다큐에서 요양원을 다룬 방송에서는 심지어 80년대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의사 출신도 나왔었다. 대학만 나와도 인정받던 시대에 한국 의사들을 초월하여 미국에서 손꼽히는 병원의 의사였던 이 할아버지는 권하자와 달리 그래도 결혼하여 아이는 낳았긴 한데, 요새 누가 집에서 안모시니 쓸쓸히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창밖을 보며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다. 말년에 외로웠는지 아이를 더 많이 낳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했는데,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아이에게 고통을 물려주는 부모들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요양원에 봉사활동 간 사람은 설마 저 휠체어에 불쌍하게 앉아있는 노인이 젊은 시절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걸 몰랐을텐데, 지금은 동정을 받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권하자나 이 의사 양반도 부모들이 잘 키워서 성공했다고 엄청 주변에 자랑하며 만족했을텐데, 말년엔 초라하고 고통을 겪는다.[27] 권하자는 악질적인 행동을 반복하다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고 실제로 권하자가 이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했다면 충분히 안락하게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방송에서도 나왔지만 권하자의 외교부 후배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권하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바로 집의 위치를 물어본 뒤 '그 동네는 별로'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28] 그나마 손윗 형제들은 생전에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동생을 아껴주긴 했다.[29] 묘지에 묻히고 싶거든 자기 묘지를 관리해줄 가족들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