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자유대학교

덤프버전 :


파일:SealofFreeUniversityofBerlin.png 베를린 자유대학교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Freie Universität Berlin
Free University of Berlin
베를린 자유대학교

파일: SealofFreeUniversityofBerlin.png
대학 정보
표어
Veritas, Iustitia, Libertas
(진리, 정의, 자유)
약칭
FU-Berlin, FU
초대 총장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개교
1948년 12월 4일 (75주년)
국가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소재지
독일 베를린
(Kaiserswerther Str. 16-18, 14195 Berlin, Deutschland)
분류
공립대학
회장
귄터 M. 치글러 (Günter M. Ziegler)
기금
€601.4 million (2020년)
네트워크
DFH
독일 U15
우나 유로파
베를린 대학교 연합
학생
학부
22,636명 (2021년)
대학원
9,938명 (2021년)
박사과정
3,628명 (2021년)
외국인 학생
8,132명 / 35,888명 (22.65%) (2023년|여름 학기)
한인 학생
385명 / 35,888명 (1.07%)[1] (2023년|여름 학기)
직원
교직원
2,851명 (2022년)
행정직원
2,719명 (2022년)
교수
358명 (2018년)[2]
색상
파란색 (#003366)

초록색 (#6b9e1f)

링크
웹사이트
파일:SealofFreeUniversityofBerlin.png 공식 홈페이지
파일:SealofFreeUniversityofBerlin.png 글로벌 캠퍼스
SNS
파일:LinkedIn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마스토돈(SNS) 아이콘.svg
[ 지도 펼치기 ]
달렘 캠퍼스


‘샤리테’ 벤자민 프랭클린 캠퍼스


뒤펠 캠퍼스


랑크비츠 캠퍼스




소개 영상 | 글로벌 캠퍼스
베를린 자유대학교 75주년 : 자유를 찾아서

로고

1. 개요
2. 역사
2.1. 창립 과정
2.2. 68운동과 자유대
2.3. 대학의 성장
3. 교과
4. 캠퍼스
5. 기타
6. 역대 총장/회장
7. 출신 인물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48년에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달렘에 세워진 독일 베를린에 있는 공립대학으로, 정식 명칭은 'Freie Universität Berlin'[3]이고, 베를린에서는 많은 이들이 약칭인 "에프우(FU)"로 부르기도 한다.[4]

독일 140개 대학중 독일 정부의 우수대학육성정책(Exzellenzinitiative)에서 우선 지원 대상인 최우수 대학(Exzellenzuniversität)으로 3차례 모두 선정된 단 6개 대학중 하나이다. 또한 독일에서 가장 큰 20개 대학 중 하나이며 2007년과 2012년 독일 대학 우수 이니셔티브에서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베를린 최초의 "우수 대학"으로 인정 받은 대학교이기도 하다.

세계대학랭킹 102위로 한국과학기슬원(83위)과 성균관대(145위) 사이의 포지션이다.


2. 역사[편집]



2.1. 창립 과정[편집]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분단되며 수도인 베를린 또한 동·서 베를린으로 분단되는데 베를린 대학교소련이 점령한 동베를린에 속하게 되면서 베를린대 관계자들과 학생들이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학술 교육을 보장할 수 있는 자유 대학 설립을 요구하였다. 결국 1948년 1월 15일에 치안판사이자 베를린 시장 대행이었던 루이스 슈뢰더(독일 사회민주당 소속)가 대학 재설립을 명령하면서 자유 대학 설립 운동이 4월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고, 당시 미군정 총독이었던 루시우스 D. 클레이(Lucius D. Clay)도 미군정 내 자유 대학 설립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6월 19일 학생, 교수, 정치인들이 모여 베를린 자유대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48년 11월 15일 달렘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 건물에서 역사적인 첫 수업을 시작하였고, 1948년 12월 4일 드디어 독일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역사적인 창립대회가 열리면서 베를린 자유대학교가 출범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당시 자유 대학 운동을 주도하였던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5]가 임명되었다.


2.2. 68운동과 자유대[편집]


이렇게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내걸고 창립한 대학[6]이지만, 196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와 함께 서독 학생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발돋움하였다.[7] 1967년 시위 중 경찰에게 사망한 학생운동가였던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 또한 베를린 자유대학교 학생이였으며 그의 죽음은 독일 좌익 학생운동이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8] 게다가 서독 68운동의 상징인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의 중요 멤버 다수가 자유대 출신이었다. 서독 학생운동의 아이콘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도 이 대학에 입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인물이다.[9]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서독 학생운동이 하강기에 접어들었다. 70년대에 일부 활동가들이 서독 적군파 같은 테러 운동에 몰두하며 대중에게서 고립되는 와중에 상당수 68운동 멤버들이 학계에 투신하여 지식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유대는 비판이론 학파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저명한 사회주의 지식인 볼프강 아벤트로트(Wolfgang Abendroth)를 중심으로 하는 마르부르크 학파의 근거지인 마르부르크 대학교와 함께 진보•좌파 지식인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대한민국의 거물급 좌파 지식인이었던 김세균[10]도 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토 주어 연구소(Otto-Suhr-Institut)[11]는 68운동을 거치면서 수년간 좌익 지식인들의 싱크탱크로서 기능하였다.

동독 몰락 이후 자유대가 훔볼트대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르트무트 켈블레(Hartmut Kaelble)[12], 하르트무트 호이서만(Hartmut Häußermann)[13] 같은 자유대 출신 소장파 지식인들이 정교수로 임용되었기에 동독 붕괴 이후 철저한 이데올로기 숙청[14]을 거친 훔볼트대에서 어느 정도 사상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후 지속해서 쇠퇴하던 독일의 좌파 세력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기점으로 사회 전반에서 크게 힘을 잃게 되었다. 오토 주어 정치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베른트 라트비히(Bernd Ladwig)는 88년에서 94년까지 자유대 정치학과를 다녔는데, 2018년도 인터뷰에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구소 내에서 좌우 학자들의 갈등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68운동 출신 교수들은 2010년대에 들어 전부 정년퇴임을 했고 심지어 상당수는 사망했다. 그럼에도 후배 세대들이 대학 내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면서 진보•좌파 대학이라는 명성이 완전히 꺾인 상황이다.

이 대학의 원외반대운동 사료관(APO-Archiv)[15]은 서독 사회운동 관련 1차문헌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다. 서독의 68운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함부르크 사회연구소 사료관(Das Archiv des Hamburger Instituts für Sozialforschung)과 함께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자료 열람을 위해선 사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문서실에서 열람할 수 있는 PDF 자료들도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문헌들은 원본을 직접 읽어야 한다.#


2.3. 대학의 성장[편집]


1980년대 이르러 자유대는 독일 처음으로 50,000명 이상의 학생들들이 다니는 거대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는 학생수가 무려 60,000명을 넘기기도 했는데 1991/92년 겨울 학기에서는 자유대 최대 기록인 62,072명의 학생을 달성하면서 초거대 대학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의 급성장으로 베를린 상원에서는 정원 축소를 결정하고 결과적으로 통일 이후 2003년 예산 문제에 직면하던 주정부에서 홈볼트대와의 의료기관 양분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를린 주정부에서 홈볼트대와 자유대의 의학부를 통폐합시켰고 이의 영향으로 학생 정원이 30,000 ~40,000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3. 교과[편집]


FB 생물학, 화학, 약학

FB 교육과학 및 심리학

FB 지구과학
지구과학 산하의 '행성과학과 원격탐사'(Planetary Science and Remote Sensing) 전공은 현재까지 독일에서 유일한 해당 분야 전공이다.

FB 사학 및 문화연구 (동아시아와 중동, 유대인, 개신교 및 가톨릭 신학, 종교 연구, 미술사, 동아시아 미술사 포함)

FB 의학부 ‘샤리테’
현재는 홈볼트대 및 자유대의 의학부를 합쳐서 운영하고 있는 유럽 최대의 대학병원이다

FB 수학 및 컴퓨터공학

FB 철학과 인문학

FB물리학

FB 정치 및 사회과학

FB 경제학

FB 법학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유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로 과거부터 수많은 과밀 현상에 입학위가 대책을 여러번 내놓기도 했다.

본래는 경제학 또한 같이 배우는 단일학부였지만 1947년 7월 30일 경제학부와 법학부가 분리되면서 지금의 법학부가 탄생했다.

FB 수의학


4. 캠퍼스[편집]


  • 달렘 캠퍼스(Dahlem Campus)
대부분의 전공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메인 캠퍼스.
  • 란크비츠 캠퍼스(Lankwitz Campus)
지구과학 관련 전공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캠퍼스.
  • 뒤펠 캠퍼스(Düppel campus)
수의과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캠퍼스.


5. 기타[편집]


독일에선 도시 하나에 종합대학교(Universität)가 하나만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특이하게도 베를린은 동서 분단이라는 역사가 있었기에 공대나 예대 간판을 달고 있지 않은 종합대학교가 2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대라고 부르면 둘 중에 어느 대학을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자유대, 훔볼트대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표어는 라틴어로 Veritas, Iustitia, Libertas(진리, 정의, 자유)로 고려대학교의 표어(자유, 정의, 진리)와 배열만 다르다.

서울대학교와 연구 협약을 하고 있으며 학생 교류도 하고 있다.


6. 역대 총장/회장[편집]


총장
  • 1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 2대 에드빈 레드슬롭
  • 3대 한스 프가이헤르 크레스 폰 크레센슈타인
  • 4대 게오르크 로테
  • 5대 에른스트 에르하르트 허쉬
  • 6대 안드레아스 폴슨
  • 7대 게르하르트 쉥크
  • 8대 에드워드 노이만
  • 9대 에른스트 하이니츠
  • 10대 허버트 뤼어스
  • 11대 한스 요아힘리버

회장
  • 1대 에발트 하른트
  • 2대 에버하르트 램멀크
  • 3대 디터 헤켈만
  • 4대 요한 빌헬름 게를라흐
  • 5대 피터 게겐스
  • 6대 디터 렌젠
  • 7대 피터 앙드레 알트
  • 8대 귄터 M. 치글러 - (현)


7. 출신 인물[편집]


가나다 순으로 정렬할 것.



8.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11:06:54에 나무위키 베를린 자유대학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북한 학생 2명을 제외한 수치로 북한 학생 두 명 모두 2023년 여름 학기 신입생이며 대한민국 국적의 신입생은 103명이다.[2] 대학 외 연구기관 교수 48명과 후임교수 127명을 포함한 2018년 수치이다.[3] 영문 명칭도 이와 비슷한 형태인 'Free University of Berlin'이다.[4] 마찬가지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는 하우(HU), 베를린 공대(Technische Universitä Berlin)는 테우(TU)로 불린다. 다만 독일 전역에서 그렇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고, 주로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에 한정해 사용한다.[5] 1920년대부터 근 30년간 독일 역사학계의 거두로 군림했던 근현대사학자였다. 온건 보수파를 대변했던 인물로 나치 세력에 적극 찬동하진 않았지만 반유대주의를 공유하고 있었다. 베를린대 출신으로 1914년부터 모교 교수로 활동했으나 종전 후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자유대 설립에 앞장섰다.[6] "설립 당시 자유대는 싫든 좋든 소재 도시의 통합원칙, 즉 베를린의 특성을 가미한 전투적 반공주의에(dem militanten Antikommunismus) 복속했다. 공산주의식 학문 교화를 막아내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것이 유일한 원칙으로 남게 되었다." - Siegward Lönnendonker (1988), Freie Universität Berlin. Gründung einer politischen Universität, Berlin: Duncker & Humblot, pp. 372[7] 예컨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가 발간하는 Forschung Frankfurt에 서독 68운동의 양대산맥이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였다는 서술이 있다.[8] 여담으로 오네조르크의 시신을 그의 고향인 하노버로 이송할때 동독 정부가 국경을 일시적으로 개방해주었다.[9] 1961년부터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1973년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전공으로는 철학, 전공분야(Fachrichtung)으로는 사학, 부전공으로 사회학, 지리학, 언론학을 공부했다.[10] 지금은 정의당 소속일 정도로 성향이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한노정연, 진보평론을 이끌던 대표적인 좌파 학자였다.(관련 기사)[11] 오토-주어 연구소는 본래 ‘독일 정치 대학교’라는 개별 대학으로 운영되었다가 1959년 자유대에 통합되어 연구소 바뀐 조직이다.[12] 오토 주어 정치학 연구소 교수였던 게르하르트 A. 리터(Gerhard A. Ritter)의 제자. 리터는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 한스 몸젠(Hans Mommsen) 등과 함께 사회사 연구를 대표하던 학자였고, 노동사 연구로도 획을 그었다. 걸출한 경제사학자였던 켈블레는 복지, 사회불평등 연구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13] 1967년도 자유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박사 지도교수는 루디 두치케의 은사기도 했던 우르스 예기(Urs Jaeggi)였다. 독일 도시사회학의 권위자였으며, 도시 구조가 불평등과 소외를 반영하는 현상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14] "비교적 이른 시점에 동독 대학들은 내부 사정과 선별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중략) 이런 사정 작업으로 많은 분과,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숙청(liquidation) 과정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의 학계 커리어를 끝장냈기에 이런 인적 변화는 동독 대학 개혁에서 상당히 고통스런 측면에 해당했다. (중략) 대학들을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동독 교수직 대부분은 서독의 젊은 학자들에게 돌아갔다." - Emmanuel Droit/ Wilfried Rudloff (2018), Educational Rivalries. The Transition from a German-German Contest to an International Competition, in: Frank Bösch(편), A History Shared and Divided. East and West Germany since the 1970s, New York/ Oxford: Berghahn Books, pp. 419[15]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