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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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왕족. 정종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숙의 기씨이다. 친형제로는 남동생 금평군과 정석군, 그리고 무림군이 있다.
2. 생애[편집]
1412년(태종 12년)에 부정윤이 되었고#, 1417년(태종 17년)에 순평군에 봉해졌다.# 1425년(세종 7년)에는 형 의평군이 태조 이성계의 도장을 베껴서 사패를 위조할 때 공모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442년(세종 24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직되었고#[2] 이듬해인 1443년(세종 25년)에 복권된 뒤 그 다음해인 1444년(세종 26년)에 종2품 중의대부로 승격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처형과 간통했다는 죄로 탄핵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3. 사망과 이후[편집]
1456년(세조 2년) 9월 29일에[3]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다. 한 때 위치가 잊혔다가 14세손 이발원(李發源)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아냈다고 한다.#
1872년(고종 9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증되었다.
4. 여담[편집]
- 《용재총화》에 따르면, 순평군은 나이 40이 되도록 글을 깨치지 못했다. 종친이 무슨 글을 모르겠냐고 할 수 있지만, 의외로 왕족들 중에서 저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리고 순평군처럼 글 한 자도 모르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학식과 교양이 부족한 경우 역시 꽤 많았다. 똑똑하다거나 열심히 공부한다거나 하면 왕위를 노린다는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순평군은 40이 넘어서 종친들을 교육하는 학교인 종학(宗學)에 입학했다. 그리고 첫 수업 때 《효경(孝經)》을 배웠다. 교수관이 효경의 첫 장 제목인 ‘개종명의장 제일(開宗明義章 第一)’이란 일곱 글자를 가르쳤지만 순평군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외우지를 못했다. 나이 들어 배우려니 암기가 잘 안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늙고 둔하니 ‘개종(開宗)’ 두 글자만 알면 됐다.”라 하고는 집에 돌아갈 때 말 위에서도 그 글자를 계속 생각하면서 외웠다. 노비들에게도 “너희들도 ‘개종’ 두 자를 외워두었다가 내가 막히면 알려다오.” 하고 일러두었다. 글공부가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순평군은 죽을 때 식구들에게 “영원히 종학과 이별하는 것이 아주 통쾌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5. 가족 관계[편집]
- 정부인 : 군부인 순창 설씨(郡夫人 淳昌 薛氏) - 판사재감사 설존(判司宰監事 薛存)의 딸
- 장남 : 의성군 이백평(義城君 李伯平)
- 손자 : 이하포(李夏宲)
- 차남 : 의신부정 이숙평(義新副正 李叔平)
- 며느리 : 진천 송씨(鎭川 宋氏) - 판중추 송흥(判中樞 宋興)의 딸
- 손녀 : 김윤(金崙)의 처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서손자 : 회도령 이우(懷道令 李佑)
- 서손자 : 청계령 이척(靑溪令 李倜)
- 서손자 : 의래령 이신(宜來令 李伸)
- 서손자 : 이성묵(李性黙)
- 장녀: 연안 김씨 김구(金昫)의 처
- 외손자: 김수조(金守祖)
- 차녀: 양천 허씨 허준(許峻)의 처
- 외손자: 허후형(許後亨)
- 외손녀: 강양정 이숙[4] (江陽正 李潚)의 처
- 장남 : 의성군 이백평(義城君 李伯平)
- 첩부인 : 성씨 미상
5.1. 후손[편집]
후손으로는 배우 이정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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