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거홍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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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왕녀
신거홍의 처 | 愼居弘의 妻


미상[1]
생몰년
미상
본관
전주 이씨
부왕
연산군
생모
미상[2]
남편
신거홍(愼居弘)[3]
자녀
슬하 4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신종선(愼從善, 1534 ~ ?)
차남 - 신순선(愼純善, 1537 ~ ?)
3남 - 신명선(愼明善, 1540 ~ ?)
4남 - 신흥선(愼興善)
장녀 - 신여정(愼女貞, 1530 ~ ?)
차녀 - 김복흥(金復興)의 처 1532 ~ ?
3녀 - 신여진(愼女眞, 1542 ~ ?)
4녀 - 신여종(愼女終, 1544 ~ ?)

1. 개요
2. 생애
3. 이함금과 동일인물?



1. 개요[편집]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신원 미상의 궁인(宮人) 사이에서 태어난 딸.

2. 생애[편집]


《연산군일기》나《중종실록》에서의 기록은 없고 《연려실기술》과《선원록》, 《거창신씨족보》에만 기록되어있는 인물이다.

세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서출왕녀는 판관[4] 신거홍에게 시집을 가서[5] 4남4녀를 낳았고 묘소는 화성군 정남면 백리에 있다고 한다.

따로 옹주 작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6]

일곱째 혹은 막내(여덟째)[7]로 추정되는 막내딸 신여종이 1544년에 태어난걸 보면 이 무렵까지는 살았던걸로 보인다.


3. 이함금과 동일인물?[편집]


연산군은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서 8~10명 가량의 딸들을 얻었는데 중종반정 이후에도 살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딸들은 폐비 신씨에게서 낳은 폐휘신공주, 장녹수에게서 낳은 이영수(李靈壽), 정금(鄭今)에게서 낳은 이함금(李咸今), 이름 미상의 후궁에게서 낳은 신거홍의 처, 이 넷뿐이다.

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이 셋은 《중종실록》에 나오는 반면, 신거홍의 처는 《연려실기술》과 《선원록》에서만 나오고있다.

폐주의 딸이긴하지만 결혼도 하고 8명의 자식을 낳을 정도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혼자 누락된게 의문으로 남는다.

이를 보아, 이함금과 신거홍의 처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그 이유로는,

첫번째 기록이 남아있는 왕녀들 중 휘신공주는 이미 중종반정 전에 구문경과 혼인을 하였고, 이영수는 권한에게 몰래 시집간게 알려진 기록이 있어 남은 사람은 이함금밖에 없다.

두번째 이함금은 1518년 1월에 생존해있던 실록의 기록이 있다. 함금이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도 13살, 혹은 그 이상임으로 혼인이 가능한 나이다.

세번째 신거홍의 처는 《선원록》에 기록되어있는데 1517년, 이영수와 이함금을 《선원록》에 올리도록 아뢰는 요청을 중종이 윤허한 기록이 있다.

네번째 신거홍의 처는 《선원록》에 첩1녀로 적혀있는데, 즉 서장녀라는 의미이다.[8] 이함금 역시 (후궁직첩을 받지 못한것으로 추정되는)정금이란 후궁에게서 얻은 서녀이다.

이함금이 실록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이 1518년이 끝이고 신거홍의 처에 대한 기록도 미비하지만 이 둘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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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거홍의 처가 연산군의 다른 서녀인 이함금(李咸今)과 동일인물이라면 본명은 함금(咸今)이다.[2] 신거홍의 처가 연산군의 다른 서녀인 이함금(李咸今)과 동일인물이라면 생모는 궁녀 정금(鄭今)이다.[3] 본관 거창(居昌)[4] 《거창신씨족보》 에는 홍천현감을 지냈다고 적혀있다.[5] 《연려실기술》은 후취(계실)로 갔다고 적혀있지만 《거창신씨족보》 에는 신거홍의 유일한 정실부인으로 기록되어있다.[6] 이복자매인 이영수(李靈壽) 역시 5살 때 중종반정이 일어나 옹주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7] 막내아들 신흥선은 생년불명이다.[8] 현재 확인되는 연산군의 서장녀는 일찍 사망한 이복억으로 1499년에 태어났다. 그럼 이함금은 서장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복억은 중종반정 전에 사망하였고 함금이 영수(1502년 생)보다 일찍 태어났다면 살아있는 서녀들 중에서는 서장녀가 되는것이 맞다. 또는 함금이 1498년에 태어난 것일 수도 있고 영수보다 어리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수가 《선원록》에 제외되면서 자연스럽게 유일한 서녀가 되어서 서장녀로 기록된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