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베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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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카베유키오.jpg

오카베 유키오(岡部幸雄(おかべ ゆきお, Yukio Okabe)
국적
일본파일:일본 국기.svg
출생
1948년 10월 31일(75세), 군마현
신체
161cm, 53kg[1], A형
직업
경마 기수
데뷔
1967년 3월
은퇴
2005년 3월 10일
성적
중상
171승
(중앙 165승, 지방 4승, 해외 2승)
G1
38승
(중앙 37승, 해외 1승)
통산
18646전 2943승
중앙 18377전 2905승
지방 136전 25승
해외 133전 13승

1. 개요
2. 경력
3. 경주마 목록
5.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경마 기수. 팬들에게는 명수(名手)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1967년부터 2005년까지 활동하여 통산 18646전 2943승, 중상 171승[2], G1 38승[3]을 기록했다.

경주에서의 실적 외에도 인습에 갇혀있던 일본경마계에 끊임없이 해외 기술과 지식을 끌어들여온 선구자적인 면모도 있다. 특정 조교사 밑에 소속되지 않는 프리 기수, 일본 경주마의 해외원정, 미국 원정에서 배워온 서양식의 기승기술과 손을 바꾸는 채찍 기술, 관계자들의 체면이 아닌 말의 미래를 지향하는 말 우선주의타이키 셔틀을 통해 일군 일본마의 두번째 유럽 G1 승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은퇴 이후엔 경마 특별방송에서 단골 게스트로 나오고 있으며, 특히 개선문상 특집 방송에는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2. 경력[편집]


오카베 유키오의 친가는 농가로 말의 육성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말을 타는데 익숙했고 1964년 6월 마사공원 기수 양성소에 입학했다. 이 때 동기들은 마사공원 꽃의 15기생으로 불리며 기수 현창자인 오카베 유키오, 시바타 마사토, 후쿠나가 요이치[4], 더비 우승 기수인 이토 마사노리 등이 있다. 이 시기 실습에서는 경마관계자의 아들이 교관에 특혜를 받고 좋은 말을 타 배경이 없는 오카베 유키오는 열등반에 속했다고 한다.

1966년 기수 양성소를 수료하고 1967년 기수면허를 취득해 조교사 스즈키 키요시(鈴木清)의 소속 기수로 데뷔했다. 다음 해 암말 도쿄 타임즈배에서 첫 중상우승을 기록했고 1969년에는 72승으로 관동 리딩자키 2위에 올랐다. 1971년에는 카네 히무로(カネヒムロ)[5]를 기승해 1971년 오크스에서 우승하며 첫 팔대경주/GI급 경주 우승을 기록했다. 이 때 카네 히무로의 조교사가 포상으로 미국 서부 여행을 보내줘 오카베 유키오는 미국의 경마를 지켜보면서 목표로 삼고 다음 해 1972년 8월 미국원정을 떠나 커리어 처음으로 해외 경주를 기승하며 미국의 기승방식이나 기술적, 정신적인 면에 영향을 받았다.

1983년 부터 심볼리 루돌프에 기승의뢰를 받으며 1984년 심볼리 루돌프와 함께 삼관을 달성했다. 이 해 10월 소속을 떠나 프리 기수가 되었다. 동기는 소속 마방의 말에 우선 기승하게 되면 타고 싶은 말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었으며 오카베 자신이 심볼리 루돌프의 기수였던 만큼 "루돌프를 타지 못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한 번 루돌프를 타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억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카베 유키오가 프리 기수가 되고 다른 기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90년대에는 일류 기수가 프리인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이 후 오카베는 레이스에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에 기승의뢰에 에이전트를 도입하며 2006년에는 JRA에서도 에이전트 제도가 공인될 정도로 보급되었다.

1987년 당시 중앙경마 최다승인 138승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전국 리딩 자키에 올랐다. 1988년 6월에 낙마사고로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활약하며 1987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 10회의 관동 리딩 자키에 올랐다. 처음으로 중앙 경마의 전국 리딩 자키를 획득한 것은 기수 인생의 후반을 지난 39세였고 또 중상 99승, GI 경주 23승은 40세 이후에 올린 것이다.

커리어 말년에는 왼쪽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며 수술과 재활로 2003년에는 경주에 나가지 않았고 2004년 1월에 복귀해 63승을 추가한 후 2005년 3월 10일 은퇴를 발표했고 20일에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원래 경주이름도 "오카베 유키오 기수 은퇴 기념 경주"로 특별히 바뀌어 은퇴 경기와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 후에는 JRA 어드바이저로서 재결 위원이나 심판 업무를 실시하는 결승 심판 위원등에 대한 의견이나 조언을 맡는 역을 하고 프리랜서 경마평론가도 하고 있다. 2009년에 일본 중앙경마회 재정위원회 위원으로 취임했다.

3. 경주마 목록[편집]


유명 경주마 목록 - 주요 G1 우승 레이스 순으로 표기한다. 단순 대타 기승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주전 기수로서 활동한 말은 굵은 표시로 표기했다.



4. 심볼리 루돌프[편집]


오카베 유키오의 가장 특별한 친구라기보다 사부. 그가 자신에게 경마를 가르쳐준 은사라고 거듭 언급하는 마필이다.
여담으로 자신에게 경마를 가르쳤다고 자인하는 심볼리 루돌프가 경주마 현역에서 은퇴한 후 루돌프의 등(ルドルフの背)이라는 책을 썼는데, 경마계에서는 거의 괴문서 취급받는다(...) 몇 가지 내용만 소개하자면 출처
  • 루돌프는 스스로 경주를 이해하며 알아서 작전을 세우고 페이스 조절을 한다.
  • 루돌프가 패배한 3개의 경주는 모두 주전 기수인 나의 탓이다. 출처
  • 루돌프는 영어를 알아들을 것이다.[9]
참고로 오카베는 기수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 즉, 위의 저 말들이 겸손따위가 아닌 순수한 감상이라는 것

5. 여담[편집]



  • 은퇴 후인 2006년에 토카이 테이오[10], 심볼리 크리스 에스(+타니노 김렛[11]), 심볼리 루돌프와 함께 촬영한 더비 특집 다큐멘터리. 4분쯤 부터 당시 25세였던 루돌프가 나오는데, 오카베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는지 노령의 나이에도 엄청난 기세로 방목장을 뛰어다니고 보란듯이 우습보, 좌습보로 발바꿈까지 선보이면서 오카베 기수가 믿기 힘들다고 말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계속 당근이 나온다.
  • 사생활이 깨끗하고 경마계의 인맥, 혈연 관계를 싫어해 경마와 관련없는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인간관계가 중시되는)조교사가 되지않았다.
  •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조수였던 후지사와 카즈오와 인연으로 후지사와의 조교마를 타고 1111회 기승해 295승(중상 35승, GI 8승)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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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역 시절 기준이며, 현재 체중은 더 나갈 것으로 보인다.[2] 중앙 165승, 지방 4승, 해외 2승[3] 중앙 37승, 해외 1승[4] 후쿠나가 유이치의 아버지. 후쿠나가 유이치의 동기생들은 경마학교 꽃의 12기생으로 불린다.[5] 오크스 우승당시 마체중은 384kg으로 팔대경주/GI급 경주 우승마 마체중 최저기록을 보유중이다. 그레이드 도입 이후 최저기록은 스에히로 조 오(スエヒロジョウオー)가 1992년 한신3세 스테이크스에서 우승시 기록한 390kg.[6] 에어 그루브의 어머니이다.[7] 오카베 유키오는 심볼리 루돌프와 모든 경기를 함께 한 기수이다.[8] 오카베 유키오의 유일한 일본 더비 우승 경력이다.[9] 원문: “루돌프 군.....”나는 그의 등에서 말을 건다. “레이스지만 편하게 가자고. 크리스(맥캐런)는 아니지만 Take it easy야. 네 머리라면 이 정도의 영어는 알겠지..... 그래, 편하게 말이야. 그래, 그래, 그러면 돼.” 이미 뇌가 녹아버린 것 같다.[10] 다만 테이오가 더비에서 우승했을 당시 기수는 오카베가 아니었다(당시 기수는 야스다 타카유키). 이때 오카베가 기승했던 말은 레오 더반.[11] 김렛은 오카베 기수가 기승했던 말이 아니지만(당시 기수는 타케 유타카), 오카베가 크리스 에스에 기승해 일본 더비에 출주했을 당시 우승마라 함께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