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볼리 루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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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주마. JRA 사상 4번째 삼관마(트리플 크라운). 최초의 JRA G1 7승마. JRA 현창마. 최초의 무패 3관과 G1 7승 등의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름 '루돌프'의 유래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인 것도 있어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7~80년대 전성기를 보낸 심볼리 목장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마로, 4세(현 기준 3세) 시절 유력한 동년배 라이벌인 비젠 니시키[6] 를 꺾으며 삼관의 영예를 얻었고, 연말의 전년도 삼관마였던 미스터 시비와의 대결에서 연달아 완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하며 은퇴할 때 까지 G1 7승을 거두며 19전 연대율 100%를 기록해 '신마(神馬)'로 불린 전설적인 경주마 신잔의 위상을 처음으로 뛰어넘었다고 여겨지는 기념비적인 경주마이다. 루돌프가 활약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국제 그레이드 도입을 시작으로 클래식 거리의 국제 경주인 재팬 컵이 개최되고 1984년 재팬컵부터는 안장에 이름을 넣기 시작하는 등[7] 현재 일본 경마의 기반이 닦여지기 시작한 시기로 불린다.
16번의 경기 중 13번의 승리보다 3번의 패배가 더 회자되는 말이기도 했으며, 어지간히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경주에서는 후에 '경마에는 절대가 없다, 그러나 루돌프에게는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대의 모든 말들을 압도했다. 2005년 딥 임팩트의 등장 이전까지 일본 경마 최강의 기준점이자 지금도 최강의 기준으로 삼는 명마 중의 명마.
마주 와다 토모히로는 파르홀론 혈통의 자마에 집착했으며, 3번의 시도 끝에 심볼리 루돌프를 얻어냈다.
심볼리 루돌프의 전형제 누나 스위트 콩코르드(スイートコンコルド,1978)는 스텔비오의 모계 4대모다.
트리플 크라운 2전째인 일본 더비에서는 기수 오카베 유키오의 성급한 지시를 무시하며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하다가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타이밍 좋게 스퍼트를 걸어 우승했다.# 오카베 기수는 '루돌프에게 경마를 한 수 배웠다'고 평했다. 2분 40초 부근부터 나온다. 오카베가 평소와 다른 페이스를 느끼고 조급해져 루돌프 기승 후 처음으로 채찍질을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코너를 돌면서부터 슬쩍 페이스를 올려 5위권으로 올라오더니, 마지막 직선 200m를 남기고 강력한 스퍼트로 앞선 3두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 상세히 보면 1마신정도 차이로 벌려내자 마지막 순간에는 슬쩍 힘을 빼는 여유도 보인다. 오카베 기수는 마지막 스퍼트 직전 루돌프로부터 "꽉 붙잡아(しっかり つかまってろ)"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고, 스퍼트 타이밍은 루돌프가 정했다고 증언했다.
킷카상 이후 2주만에 출주한 재팬 컵에서 카츠라기 에이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먹고 생애 첫 패배를 당했을 때는 마방에 돌아온 후 분노에 미쳐 날뛰었다고 한다. 비록 패배하였지만 컨디션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도[10] 3착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게 경마에서 대적할 바 없어보이던 루돌프도 1985년 위기가 터지는데,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 하루 전에 한신 경마장에서 훈련하다가 경기장에 생긴 진창에 미끄러지면서[14] 기수도 낙마하고 루돌프도 어깨 부상이 터져버린 것. 마주는 바로 출주를 취소하고 요양에 들어갔지만 회복 속도가 더뎠고, 설상가상으로 근육통까지 터지면서 마주는 은퇴를 선언하며 그대로 은퇴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주는 계속해서 치료법을 찾아댔고 결국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세침 치료를 받게 했다. 이 치료법은 말이 세침이지 거의 칼에 가까운 도구로 상처의 세균 감염 부위를 찔러 감염된 피를 뽑고 근육에 자극을 주는 치료법이었는데[15] ,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술이었음에도 루돌프의 근성이었는지 천운이었는지 효과를 보이며 회복했고 이에 마주는 은퇴를 철회하면서 1985년의 남은 G1 경기까지 모두 뛰어 7관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16]
1985년 천황상 가을에서 갤럽 다이나[17] 에게 2착으로 패배[18] 했을 때는 마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찾아간 사진사에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19]
1986년에도 현역 지속을 타진,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찬 목표 하에 개선문상 출주 계획을 잡았다가 취소했다. 외조부가 유럽 주요 대회 및 개선문상에 처음 발을 내민 스피드 심볼리다. 첫 유럽 원정 경주마라는 큰 발자취를 위해 JRA가 당시 영상으로 따로 기록해놨다. 그렇기 때문에 심볼리 목장에서도 욕심이 클수 밖에 없었다. 그 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조교사의 의견을 무시한 마주 와다 토모히로의 의향에 의해 미국의 샌루이 레이 스테이크스에 참가했다. 하지만 조교사를 미국 현지에서 배제하면서까지 잡은 무리한 스케쥴의 결과는 경주 도중 계인대염 발병으로 인한 6착 패배였고 결국 여기서 심볼리 루돌프의 커리어가 끝나게 되었다. 물론 정상적으로 개선문상에 출주했더라도 그 해의 우승마가 당시 세계 최강, 역대 최강의 경주마로 손꼽히는 명마 중 하나인 댄싱 브레이브[21] 였다는 점에서 승산은 희박했겠지만 사실상 마주가 커리어를 끝장낸 거나 다름없기에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
은퇴 후 종마로 전업해 중상(重賞)을 우승하는 자마들을 여럿 배출했으며, 그 중 가장 뛰어난 자식이 G1 4승의 명예를 남긴 토카이 테이오다. 이클립스계가 아닌 바이얼리 터크(Byerley Turk)계 혈통이었기에 해외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 바이얼리 터크의 혈통을 보존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역시 혈통상 비주류여서인지, 역대 최강을 논할 때 함께 거론되는 딥 임팩트와는 달리 종마로써의 성적이 뛰어났다고 평하진 않고 있다.
종마 은퇴 후에는 사람들이 견학하러 올 시간이 되면 알아서 목책 근처로 와주거나 사진 찍기 좋은 포즈를 찍는 팬서비스를 하다가도, 견학 시간이 끝나면 퇴근하듯 다시 방목지 중앙으로 가서 쉬는 등 사람들이 방문하는 목적과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1년 죽음을 맞이할 당시 나이는 30세로 일반적인 경주마의 자연수명(20대 중후반)에 비해 꽤 장수한 말이기도 하다. 오카베 유키오 기수와 25세에 방송 촬영을 했을 때도 기세 좋게 뛰어다니며 카메라 앞에서 좋은 구도를 잡아주고 오카베 기수도 믿기지 않는다고 감탄할 정도로 심신 양면으로 정정했다.[22]
더 훗날인 29세가 되었을 때 경마 팬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사람으로 따지면 거의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고 당당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어 '역시 황제는 황제'라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문서 상단의 대표 사진도 이 때 찍힌 것이다.[23] 공개일의 영상(11분 54초부터)을 보면 건물 안에서 이동 중엔 교배하러 가는 거라고 착각을 한건지 크게 발기 했다가 그런게 아닌걸 눈치채고 금세 발기를 가라앉히고 집어넣고 경쾌하게 걷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아들 토카이 테이오도 이런 은퇴 후의 공개행사 영상이 있는데 테이오는 끝까지 발기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 다닌다.
1988년산
1996년산
기본적으로는 유럽식의 선행책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요코즈나 스모'로 불리는 탄탄하고 안정적인 주행을 바탕으로 다른 말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는 주행을 했다. 다만 이러한 주행 스타일 자체는 관계자들의 선호가 반영되어서 자주 사용했을 뿐이었고, 파워와 순발력 양면으로 나무랄 것이 없으며 머리도 무척 좋은 경주마여서 보통은 수준 높은 페이스 배분을 기대하기 힘든 신마전에서부터 원숙한 주행을 보여주었고, 성장한 이후에는 도주[25] 부터 추입까지의 다양한 주법을 모두 소화 가능했다.
왼발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주마들은 오른쪽 방향으로의 코너링을 힘들어했지만,[26] 루돌프는 왼발을 주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우회전 때는 오른발을 자연스럽게 쓰면서 완벽하게 코너링을 소화했는데 대부분의 말들이 자신이 쓰는 발이 그대로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해 코너링에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일 정도의 다리 힘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가속 시의 보폭이 다른 말보다 상당히 커서 당시 서러브레드의 평균 완보(7m 30cm)를 크게 상회하는 8m 70cm의 보폭으로 달릴 수 있었다.
나이를 먹고 성숙하면서 유럽의 명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마체가 완성되어 재팬 컵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온 외국의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낙 취재받는 일이 많다보니 카메라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고있었던지 카메라를 갖다대면 포즈를 취해주었다고 하며, 덕분에 사진빨 잘 받는 말로도 유명했다. 서러브레드가 단순히 기수의 지시에 따라 그저 달리기만 할뿐인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
현역 시절엔 뛰어난 성적과 경마의 정석 수준의 전술을 펼치며[27] 기수의 말을 잘 듣는 똑똑한 모습 덕분에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목장에선 상당히 난폭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다른 말들은 평소 루돌프의 눈치만 보며 꼼짝도 못했고[28] , 그 외에도 암말들에게 툭하면 들이대거나 목장 직원들에게까지 겁없이 짓궂은 장난을 치는 등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딴판인 폭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제멋대로 날뛰다가도 훈련 시간 및 경기하러 나갈 때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져서 사람들 말도 잘 듣고 훈련과 경기 역시 열심히 임했으며, 이땐 암말이 옆에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루돌프 주전 기수 오카베와의 인터뷰(아카이브)
이 갭이 얼마나 심했는지 훈련을 위해 자주 목장에도 찾아가 기승하던 전담 기수 오카베 유키오조차도 목장 직원에게서 들어서야 알게 됐다고 하고, 수년간 루돌프의 경기를 중계하던 베테랑 아나운서조차 오카베와 조교사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이런 양면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경마 아나운서 시라카와 지로의 증언 이는 경기 때와 아닌 때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루돌프의 지능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다.
이 루돌프의 절제력이 대외적인 무대에서 풀어진 것은 어쩐지 이전과 달리 집중력 없이 말을 안 듣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오카베 기수까지 떨어뜨린 은퇴식 현장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카베 기수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루돌프 또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말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제서야 매료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또한 루돌프가 높은 지능으로 은퇴식의 개념을 이해하고 더 이상 자제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해석이 있다.
어렸을 때의 애칭 겸 아명[29] 은 이마에 있는 하얀색 초승달 모양 무늬에서 따온 '루나'라고 한다.[30] 또한 어렸을 때부터 사납고 장난치는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보니 사자의 영어명인 '라이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 경마 역대 최강의 말을 논할 때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언급될 만큼 강한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당대의 인기는 미스터 시비에게 한참 밀렸다.[31] 일본 특유의 판관편애[32] 적 성향도 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추입으로 터프를 종횡무진 누볐던 시비외 달리 루돌프는 정석적인 선행, 선입 주법으로 별다른 경쟁도 없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겨버리니 무섭다[33] , 재미가 없다는 평을 많이 받았기 때문. 덕택에 시비를 뛰어넘는 기록을 보유한데다가 시비와의 3전 모두 전승이라는 객관적인 실력차까지 있음에도 인기 면에서는 시비에게 완패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마주 와다 토모히로는 루돌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보였으며 그만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직접적으로 육성에 관여했다. 모두가 '이 조합은 이제 한물 갔다'고 말한 파르홀론 계통의 배합으로 심볼리 루돌프라는 거물을 탄생시킨 성공의 경험이 자부심과 독선으로 나타난 것. 어찌나 자부심이 대단했는지 클래식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인 3세마(현 기준 2세마) 시절 루돌프는 대부분의 3세 유력마들이 출주하여 그 해 관동의 3세마 최강자를 가리던 아사히배 3세마 스테이크스를 거르고 뜬금없이 도쿄의 오픈 경기에 출주했는데, 이 출주는 같은 날 도쿄 경마장에서 개최되는 재팬 컵을 보러 온 외국의 관계자들에게 '일본에도 이런 대단한 말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결정되었다고 한다. 육성 중에도 와다는 목장 소유 시설 내에서 직접 조교를 진두지휘하기도 했고 그 루돌프조차도 고생할 정도[34] 의 가혹한 출주 스케쥴을 잡기도 했으며, 상술했듯 1986년의 해외 원정 과정에서 조교사를 비롯한 마방의 관계자들을 배제하는 폭거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마주의 행적이 관계자들에게도 좋지 않게 보였는지, 주전 기수였던 오카베 유키오도 세침 치료를 진행한 것에 관해 "신잔을 넘어서는 6관을 루돌프가 차지하게 하려는 야심의 조각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거다."라는 비꼬는 듯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위험한 치료법을 시도했다는 얘기.#
와다 토모히로는 이후 비슷한 혈통으로 배합[35] 된 마테리얼을 키울 때도 루돌프를 대할 때처럼 마방과 목장을 왔다갔다하면서 조교를 진행하고 항상 근처에서 앉아 지켜보며 관리했는데, 루돌프는 매우 똑똑했던 덕인지 환경의 변화를 정신적 재충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고 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안정할 수 있는 말이라 악영향이 없었지만 보통의 서러브레드다운 예민한 성격을 가진 마테리얼은 가뜩이나 루돌프 2세처럼 키우려는 무리한 장거리 출주와 스케줄에 지쳐가는 와중에 변화하는 환경과 마주의 지나친 관심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고 한다. 계속된 패전과 부진으로 끝내 와다의 관심이 떨어져 조교사의 뜻대로 적성에 맞는 마일 경주인 케이오배AH(現 케이세이배AH)에 나가게 되자 금세 우승을 했을 정도. 슬프게도 마테리얼은 케이오배 우승 직후 골절, 골절 치료 도중 출혈성대장염까지 발병하며 사망한다.
결국 와다 토모히로가 고집했던 파르홀론 혈통의 몰락과 그 과정에서 생긴 미호 마방들과의 마찰로 인해, 심볼리 목장은 2002년 심볼리 크리스 에스를 배출할 때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맞게 된다.
와다 토모히로와 심볼리 루돌프가 경주 외적으로 일본 경마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 있는데, 바로 경주마의 스타일링. 당시 일본 경마 관계자들은 자르면 재수 없다는 이유로 갈기나 꼬리털을 정리하는걸 꺼렸다. 다만, 갈기는 묶어서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기수의 시야를 방해하거나 채찍질을 할 때 매우 거슬리기 때문에 일본 전통의 ‘와타리’라는 세 가닥 털실로 갈기를 통째로 땋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것이 구무원들의 고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는 금기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심볼리 목장에서부터 갈기와 꼬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로 미호에 나타났으며, 미호의 관계자들에게 있어 그 모습은 훌륭한 마체와 함께 마치 유럽에서 온 세련된 명마를 연상시켰다고. 그리고 루돌프의 화려한 외모와 성적 덕분에 구무원들은 고된 갈기땋기 업무에서 차츰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전통인 만큼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루돌프 이후로도 사일런스 스즈카처럼 특유의 와타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경주마도 있으며[36] 현재까지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망아지 시절 어미가 젖을 주지 않자 어미를 패기로 제압하여 어미가 굳은 사이 젖을 먹었다거나, 종마 시절 암말이 교배를 거부하자 사람들이 억지로 빨리 교배시키려 할 때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말리고 암말이 교미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는 등 굉장히 비범한 일화들이 있다. 이 때 암말의 마주는 수태가 안 될 줄 알고 교배료만 날렸다고 한탄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수태에 성공했다고 한다.
평소 사과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부사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이 사실을 들은 주전기수 오카베 유키오는 "자신보다 입맛이 훨씬 더 고급스럽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토카이 테이오, 츠루마루 츠요시 등을 비롯한 루돌프의 자마들 역시 아비의 식성을 물려받아 사과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주의 아들인 와다 타카히로가 전통 사케 주조가와 결혼하면서 루돌프에서 따온 나나칸바(七冠馬)라는 준마이 다이긴조가 존재한다. 2022년에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와 협업하여 7777병 한정의 우마무스메 사양의 한정판을 발매했다.
[각주]
1. 개요[편집]
85년, 재팬 컵.
어떤 남자[5] 가 말했다.
「경마에 절대란 없지만, '그 말'에게는 절대가 있다」
승리보다, 단 세 번의 패배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말.
심볼리 루돌프.
영원한 황제.
그 가을, 일본은 세계에 도달해 있었다.
「전 세계를 석권하라」
2013년 재팬 컵 CM
일본의 경주마. JRA 사상 4번째 삼관마(트리플 크라운). 최초의 JRA G1 7승마. JRA 현창마. 최초의 무패 3관과 G1 7승 등의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름 '루돌프'의 유래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인 것도 있어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7~80년대 전성기를 보낸 심볼리 목장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마로, 4세(현 기준 3세) 시절 유력한 동년배 라이벌인 비젠 니시키[6] 를 꺾으며 삼관의 영예를 얻었고, 연말의 전년도 삼관마였던 미스터 시비와의 대결에서 연달아 완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하며 은퇴할 때 까지 G1 7승을 거두며 19전 연대율 100%를 기록해 '신마(神馬)'로 불린 전설적인 경주마 신잔의 위상을 처음으로 뛰어넘었다고 여겨지는 기념비적인 경주마이다. 루돌프가 활약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국제 그레이드 도입을 시작으로 클래식 거리의 국제 경주인 재팬 컵이 개최되고 1984년 재팬컵부터는 안장에 이름을 넣기 시작하는 등[7] 현재 일본 경마의 기반이 닦여지기 시작한 시기로 불린다.
16번의 경기 중 13번의 승리보다 3번의 패배가 더 회자되는 말이기도 했으며, 어지간히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경주에서는 후에 '경마에는 절대가 없다, 그러나 루돌프에게는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대의 모든 말들을 압도했다. 2005년 딥 임팩트의 등장 이전까지 일본 경마 최강의 기준점이자 지금도 최강의 기준으로 삼는 명마 중의 명마.
2. 혈통[편집]
마주 와다 토모히로는 파르홀론 혈통의 자마에 집착했으며, 3번의 시도 끝에 심볼리 루돌프를 얻어냈다.
심볼리 루돌프의 전형제 누나 스위트 콩코르드(スイートコンコルド,1978)는 스텔비오의 모계 4대모다.
3. 생애[편집]
3.1. 1984년 (4세, 현 3세)[편집]
3.1.1. 사츠키상[편집]
3.1.2. 일본 더비[편집]
트리플 크라운 2전째인 일본 더비에서는 기수 오카베 유키오의 성급한 지시를 무시하며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하다가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타이밍 좋게 스퍼트를 걸어 우승했다.# 오카베 기수는 '루돌프에게 경마를 한 수 배웠다'고 평했다. 2분 40초 부근부터 나온다. 오카베가 평소와 다른 페이스를 느끼고 조급해져 루돌프 기승 후 처음으로 채찍질을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코너를 돌면서부터 슬쩍 페이스를 올려 5위권으로 올라오더니, 마지막 직선 200m를 남기고 강력한 스퍼트로 앞선 3두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 상세히 보면 1마신정도 차이로 벌려내자 마지막 순간에는 슬쩍 힘을 빼는 여유도 보인다. 오카베 기수는 마지막 스퍼트 직전 루돌프로부터 "꽉 붙잡아(しっかり つかまってろ)"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고, 스퍼트 타이밍은 루돌프가 정했다고 증언했다.
3.1.3. 킷카상[편집]
3.1.4. 재팬 컵[편집]
킷카상 이후 2주만에 출주한 재팬 컵에서 카츠라기 에이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먹고 생애 첫 패배를 당했을 때는 마방에 돌아온 후 분노에 미쳐 날뛰었다고 한다. 비록 패배하였지만 컨디션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도[10] 3착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3.1.5. 아리마 기념[편집]
한달 뒤 아리마 기념에서 카츠라기 에이스를 한큐에 박살내버리면서 이때의 패배를 단번에 설욕했다.[11] 정작 카츠라기 에이스 진영은 아리마 기념을 앞두고 멘코를 바꿨다느니 하면서 루돌프 진영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경기 후에도 미스터 시비를 이긴 것에만 주목하며 기뻐했다.
3.2. 1985년 (5세, 현 4세)[편집]
3.2.1. 천황상(봄)[편집]
사실 심볼리 루돌프 기수인 오카베 유키오도 루돌프의 주행방법이 재미없어서 인기가 없다는걸 의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직선에서 시비가 추격하는 것을 기다리고 그 후 시비를 따돌리면서 승리하려고 하였으나 미스터 시비가 평소와는 다르게 3코너에서 부터[12] 올라오면서 실현시키지 못했다.[13]
3.2.2. 타카라즈카 기념[편집]
그렇게 경마에서 대적할 바 없어보이던 루돌프도 1985년 위기가 터지는데,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 하루 전에 한신 경마장에서 훈련하다가 경기장에 생긴 진창에 미끄러지면서[14] 기수도 낙마하고 루돌프도 어깨 부상이 터져버린 것. 마주는 바로 출주를 취소하고 요양에 들어갔지만 회복 속도가 더뎠고, 설상가상으로 근육통까지 터지면서 마주는 은퇴를 선언하며 그대로 은퇴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주는 계속해서 치료법을 찾아댔고 결국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세침 치료를 받게 했다. 이 치료법은 말이 세침이지 거의 칼에 가까운 도구로 상처의 세균 감염 부위를 찔러 감염된 피를 뽑고 근육에 자극을 주는 치료법이었는데[15] ,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술이었음에도 루돌프의 근성이었는지 천운이었는지 효과를 보이며 회복했고 이에 마주는 은퇴를 철회하면서 1985년의 남은 G1 경기까지 모두 뛰어 7관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16]
3.2.3. 천황상(가을)[편집]
1985년 천황상 가을에서 갤럽 다이나[17] 에게 2착으로 패배[18] 했을 때는 마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찾아간 사진사에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19]
3.2.4. 재팬 컵[편집]
천황상 가을에 이어서 이번에도 15번 최외각 게이트였지만 가볍게 승리하면서 천황상 가을의 패배는 부상의 여파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3.2.5. 아리마 기념[편집]
루돌프의 기수인 오카베 유키오가 경주마의 퍼포먼스를 과시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루돌프의 경기는 심심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루돌프가 그 정도로 강한게 맞냐는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론을 의식하던 심볼리 루돌프 진영은 일본에서 뛰는 마지막 경기인 만큼 일반인들에게 루돌프의 진짜 힘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때문에 애초에 처음부터 미호 신잔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얼마나 마신차를 벌리면서 이길까 만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아예 도주를 해버릴 생각이었지만[20] 경기 전개로 인하여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3.3. 1986년(6세, 현 5세)[편집]
1986년에도 현역 지속을 타진,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찬 목표 하에 개선문상 출주 계획을 잡았다가 취소했다. 외조부가 유럽 주요 대회 및 개선문상에 처음 발을 내민 스피드 심볼리다. 첫 유럽 원정 경주마라는 큰 발자취를 위해 JRA가 당시 영상으로 따로 기록해놨다. 그렇기 때문에 심볼리 목장에서도 욕심이 클수 밖에 없었다. 그 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조교사의 의견을 무시한 마주 와다 토모히로의 의향에 의해 미국의 샌루이 레이 스테이크스에 참가했다. 하지만 조교사를 미국 현지에서 배제하면서까지 잡은 무리한 스케쥴의 결과는 경주 도중 계인대염 발병으로 인한 6착 패배였고 결국 여기서 심볼리 루돌프의 커리어가 끝나게 되었다. 물론 정상적으로 개선문상에 출주했더라도 그 해의 우승마가 당시 세계 최강, 역대 최강의 경주마로 손꼽히는 명마 중 하나인 댄싱 브레이브[21] 였다는 점에서 승산은 희박했겠지만 사실상 마주가 커리어를 끝장낸 거나 다름없기에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
3.4. 은퇴 후[편집]
은퇴 후 종마로 전업해 중상(重賞)을 우승하는 자마들을 여럿 배출했으며, 그 중 가장 뛰어난 자식이 G1 4승의 명예를 남긴 토카이 테이오다. 이클립스계가 아닌 바이얼리 터크(Byerley Turk)계 혈통이었기에 해외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 바이얼리 터크의 혈통을 보존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역시 혈통상 비주류여서인지, 역대 최강을 논할 때 함께 거론되는 딥 임팩트와는 달리 종마로써의 성적이 뛰어났다고 평하진 않고 있다.
종마 은퇴 후에는 사람들이 견학하러 올 시간이 되면 알아서 목책 근처로 와주거나 사진 찍기 좋은 포즈를 찍는 팬서비스를 하다가도, 견학 시간이 끝나면 퇴근하듯 다시 방목지 중앙으로 가서 쉬는 등 사람들이 방문하는 목적과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1년 죽음을 맞이할 당시 나이는 30세로 일반적인 경주마의 자연수명(20대 중후반)에 비해 꽤 장수한 말이기도 하다. 오카베 유키오 기수와 25세에 방송 촬영을 했을 때도 기세 좋게 뛰어다니며 카메라 앞에서 좋은 구도를 잡아주고 오카베 기수도 믿기지 않는다고 감탄할 정도로 심신 양면으로 정정했다.[22]
더 훗날인 29세가 되었을 때 경마 팬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사람으로 따지면 거의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고 당당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어 '역시 황제는 황제'라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문서 상단의 대표 사진도 이 때 찍힌 것이다.[23] 공개일의 영상(11분 54초부터)을 보면 건물 안에서 이동 중엔 교배하러 가는 거라고 착각을 한건지 크게 발기 했다가 그런게 아닌걸 눈치채고 금세 발기를 가라앉히고 집어넣고 경쾌하게 걷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아들 토카이 테이오도 이런 은퇴 후의 공개행사 영상이 있는데 테이오는 끝까지 발기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 다닌다.
3.4.1. 주요 자마[편집]
1988년산
- 토카이 테이오 - 사츠키상(1991), 일본 더비(1991), 재팬 컵(1992), 아리마 기념(1993), 오사카배(1992)
- 아쿠모아 사카제 -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1990) 3착
- 쿄와 호세키 - 4세 암말 특별(1992), 도쿄신문배(1993), 오크스(1992) 3착
- 아일톤 심볼리 - 스테이어즈 스테이크스(1992, 1993), 타카라즈카 기념(1994) 2착
- 심볼리 미사키 - 나카츠 기념(1997)
- 잠시드[24] - 류테스상 2착, 다이아몬드 스테이크스 2착
- 미스터 루돌프 - 더비 그랑프리(1993), 키타닛폰신문배(1993), 키타쿠니 왕관(1994), 하쿠산 대상전(1995)
- 심볼리 멜로디 - 아시카가 기념(2003)
1996년산
- 프론털 어택 - 주니치신문배 (2000) 3착
- 하쿠신 프리덤 - 오와리 나고야 컵 (2009)
4. 주행 스타일[편집]
기본적으로는 유럽식의 선행책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요코즈나 스모'로 불리는 탄탄하고 안정적인 주행을 바탕으로 다른 말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는 주행을 했다. 다만 이러한 주행 스타일 자체는 관계자들의 선호가 반영되어서 자주 사용했을 뿐이었고, 파워와 순발력 양면으로 나무랄 것이 없으며 머리도 무척 좋은 경주마여서 보통은 수준 높은 페이스 배분을 기대하기 힘든 신마전에서부터 원숙한 주행을 보여주었고, 성장한 이후에는 도주[25] 부터 추입까지의 다양한 주법을 모두 소화 가능했다.
왼발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주마들은 오른쪽 방향으로의 코너링을 힘들어했지만,[26] 루돌프는 왼발을 주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우회전 때는 오른발을 자연스럽게 쓰면서 완벽하게 코너링을 소화했는데 대부분의 말들이 자신이 쓰는 발이 그대로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해 코너링에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일 정도의 다리 힘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가속 시의 보폭이 다른 말보다 상당히 커서 당시 서러브레드의 평균 완보(7m 30cm)를 크게 상회하는 8m 70cm의 보폭으로 달릴 수 있었다.
나이를 먹고 성숙하면서 유럽의 명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마체가 완성되어 재팬 컵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온 외국의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낙 취재받는 일이 많다보니 카메라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고있었던지 카메라를 갖다대면 포즈를 취해주었다고 하며, 덕분에 사진빨 잘 받는 말로도 유명했다. 서러브레드가 단순히 기수의 지시에 따라 그저 달리기만 할뿐인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
5. 비화[편집]
현역 시절엔 뛰어난 성적과 경마의 정석 수준의 전술을 펼치며[27] 기수의 말을 잘 듣는 똑똑한 모습 덕분에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목장에선 상당히 난폭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다른 말들은 평소 루돌프의 눈치만 보며 꼼짝도 못했고[28] , 그 외에도 암말들에게 툭하면 들이대거나 목장 직원들에게까지 겁없이 짓궂은 장난을 치는 등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딴판인 폭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제멋대로 날뛰다가도 훈련 시간 및 경기하러 나갈 때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져서 사람들 말도 잘 듣고 훈련과 경기 역시 열심히 임했으며, 이땐 암말이 옆에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루돌프 주전 기수 오카베와의 인터뷰(아카이브)
이 갭이 얼마나 심했는지 훈련을 위해 자주 목장에도 찾아가 기승하던 전담 기수 오카베 유키오조차도 목장 직원에게서 들어서야 알게 됐다고 하고, 수년간 루돌프의 경기를 중계하던 베테랑 아나운서조차 오카베와 조교사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이런 양면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경마 아나운서 시라카와 지로의 증언 이는 경기 때와 아닌 때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루돌프의 지능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다.
이 루돌프의 절제력이 대외적인 무대에서 풀어진 것은 어쩐지 이전과 달리 집중력 없이 말을 안 듣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오카베 기수까지 떨어뜨린 은퇴식 현장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카베 기수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루돌프 또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말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제서야 매료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또한 루돌프가 높은 지능으로 은퇴식의 개념을 이해하고 더 이상 자제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해석이 있다.
어렸을 때의 애칭 겸 아명[29] 은 이마에 있는 하얀색 초승달 모양 무늬에서 따온 '루나'라고 한다.[30] 또한 어렸을 때부터 사납고 장난치는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보니 사자의 영어명인 '라이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 경마 역대 최강의 말을 논할 때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언급될 만큼 강한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당대의 인기는 미스터 시비에게 한참 밀렸다.[31] 일본 특유의 판관편애[32] 적 성향도 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추입으로 터프를 종횡무진 누볐던 시비외 달리 루돌프는 정석적인 선행, 선입 주법으로 별다른 경쟁도 없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겨버리니 무섭다[33] , 재미가 없다는 평을 많이 받았기 때문. 덕택에 시비를 뛰어넘는 기록을 보유한데다가 시비와의 3전 모두 전승이라는 객관적인 실력차까지 있음에도 인기 면에서는 시비에게 완패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마주 와다 토모히로는 루돌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보였으며 그만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직접적으로 육성에 관여했다. 모두가 '이 조합은 이제 한물 갔다'고 말한 파르홀론 계통의 배합으로 심볼리 루돌프라는 거물을 탄생시킨 성공의 경험이 자부심과 독선으로 나타난 것. 어찌나 자부심이 대단했는지 클래식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인 3세마(현 기준 2세마) 시절 루돌프는 대부분의 3세 유력마들이 출주하여 그 해 관동의 3세마 최강자를 가리던 아사히배 3세마 스테이크스를 거르고 뜬금없이 도쿄의 오픈 경기에 출주했는데, 이 출주는 같은 날 도쿄 경마장에서 개최되는 재팬 컵을 보러 온 외국의 관계자들에게 '일본에도 이런 대단한 말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결정되었다고 한다. 육성 중에도 와다는 목장 소유 시설 내에서 직접 조교를 진두지휘하기도 했고 그 루돌프조차도 고생할 정도[34] 의 가혹한 출주 스케쥴을 잡기도 했으며, 상술했듯 1986년의 해외 원정 과정에서 조교사를 비롯한 마방의 관계자들을 배제하는 폭거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마주의 행적이 관계자들에게도 좋지 않게 보였는지, 주전 기수였던 오카베 유키오도 세침 치료를 진행한 것에 관해 "신잔을 넘어서는 6관을 루돌프가 차지하게 하려는 야심의 조각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거다."라는 비꼬는 듯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위험한 치료법을 시도했다는 얘기.#
와다 토모히로는 이후 비슷한 혈통으로 배합[35] 된 마테리얼을 키울 때도 루돌프를 대할 때처럼 마방과 목장을 왔다갔다하면서 조교를 진행하고 항상 근처에서 앉아 지켜보며 관리했는데, 루돌프는 매우 똑똑했던 덕인지 환경의 변화를 정신적 재충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고 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안정할 수 있는 말이라 악영향이 없었지만 보통의 서러브레드다운 예민한 성격을 가진 마테리얼은 가뜩이나 루돌프 2세처럼 키우려는 무리한 장거리 출주와 스케줄에 지쳐가는 와중에 변화하는 환경과 마주의 지나친 관심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고 한다. 계속된 패전과 부진으로 끝내 와다의 관심이 떨어져 조교사의 뜻대로 적성에 맞는 마일 경주인 케이오배AH(現 케이세이배AH)에 나가게 되자 금세 우승을 했을 정도. 슬프게도 마테리얼은 케이오배 우승 직후 골절, 골절 치료 도중 출혈성대장염까지 발병하며 사망한다.
결국 와다 토모히로가 고집했던 파르홀론 혈통의 몰락과 그 과정에서 생긴 미호 마방들과의 마찰로 인해, 심볼리 목장은 2002년 심볼리 크리스 에스를 배출할 때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맞게 된다.
와다 토모히로와 심볼리 루돌프가 경주 외적으로 일본 경마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 있는데, 바로 경주마의 스타일링. 당시 일본 경마 관계자들은 자르면 재수 없다는 이유로 갈기나 꼬리털을 정리하는걸 꺼렸다. 다만, 갈기는 묶어서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기수의 시야를 방해하거나 채찍질을 할 때 매우 거슬리기 때문에 일본 전통의 ‘와타리’라는 세 가닥 털실로 갈기를 통째로 땋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것이 구무원들의 고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는 금기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심볼리 목장에서부터 갈기와 꼬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로 미호에 나타났으며, 미호의 관계자들에게 있어 그 모습은 훌륭한 마체와 함께 마치 유럽에서 온 세련된 명마를 연상시켰다고. 그리고 루돌프의 화려한 외모와 성적 덕분에 구무원들은 고된 갈기땋기 업무에서 차츰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전통인 만큼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루돌프 이후로도 사일런스 스즈카처럼 특유의 와타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경주마도 있으며[36] 현재까지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망아지 시절 어미가 젖을 주지 않자 어미를 패기로 제압하여 어미가 굳은 사이 젖을 먹었다거나, 종마 시절 암말이 교배를 거부하자 사람들이 억지로 빨리 교배시키려 할 때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말리고 암말이 교미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는 등 굉장히 비범한 일화들이 있다. 이 때 암말의 마주는 수태가 안 될 줄 알고 교배료만 날렸다고 한탄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수태에 성공했다고 한다.
평소 사과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부사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이 사실을 들은 주전기수 오카베 유키오는 "자신보다 입맛이 훨씬 더 고급스럽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토카이 테이오, 츠루마루 츠요시 등을 비롯한 루돌프의 자마들 역시 아비의 식성을 물려받아 사과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주의 아들인 와다 타카히로가 전통 사케 주조가와 결혼하면서 루돌프에서 따온 나나칸바(七冠馬)라는 준마이 다이긴조가 존재한다. 2022년에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와 협업하여 7777병 한정의 우마무스메 사양의 한정판을 발매했다.
6. 기타[편집]
- 일반적으로 해당 연도의 클래식 출전마들을 통틀어 'XX년도 클래식 세대'라고 부르는데 루돌프의 84년 클래식 세대는 "루돌프 세대"라고 통칭되어진다. 사실 이 외에도 꽃의 47년조[37] , TTG세대[38] , 시비 세대[39] , 오구리 세대(88년 클래식 세대), 황금세대(98년 클래식 세대), 마루가이(マル外) 세대[40] , 딥 임팩트 세대(2005년 클래식 세대) 등 특출난 존재가 해당 연도를 대표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명칭이긴 한데, 문제는 진짜로 이 세대는 루돌프 빼곤 아무도 없다라는 것.
루돌프의 라이벌로 불리는 말들은 꽤 있고 다들 명마로 불리지만 기록으로 남는 실적, 즉 고마 G1 승리마가 루돌프 빼곤 딱 한마리 뿐이다. 루돌프 이외에 고마 G1을 획득한 이 세대의 말은 전성기 한참 후인 1987년 타카라즈카 기념을 재패한 스즈 퍼레이드 딱 한마리 뿐이다. 84년의 아리마 기념, 85년의 천황상 봄, 재팬 컵, 아리마 기념의 4경기를 빼면 몽땅 선대인 시비 세대가 쓸어갔다. 그럼에도 클래식 세대가 약하다는 이미지가 없다는 건 그만큼 루돌프의 이미지가 강력했다는 뜻이기도 하니 정말 황제의 이명에 걸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 여담이지만, 이렇게 고마 전선에서 약세를 보인 세대는 오사이치 조지가 딱 한번 승리한 걸로 끝인 89년 클래식 세대 정도 뿐이고 그나마 비슷한 경우는 루돌프의 자마인 토카이 테이오를 제외하면 야마닌 제퍼가 홀로 고마 G1 3승을 올렸을 뿐 나머진 전멸한 1991년 클래식 세대 정도다.[41] 일본 생산마로만 한정하면 아예 단 한마리도 고마 G1을 따지 못한 2000년 클래식 세대도 있긴 하다.
- 심볼리 루돌프는 마지막 관동 지역 소속 클래식 삼관마로 루돌프 이후 클래식 삼관을 달성한 경주마는 전부 관서 소속이다.
- 나카야마 경마장 한정 6전 6승 무패에 마신차를 가장 크게 벌린 경기[42] 도 보유하고 있던 레코드도 전부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열린 중상 경주일 정도로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7. 경주 성적[편집]
[1] 통산 4번째 트리플 크라운이자 최초의 무패 삼관마.[2] 1980년대 초반 시대상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으며 한입마주 절반은 못채우고 심볼리 지분이었다고 한다.[중앙] [해외] [3] 현 JRA상 최우수 3세 수말.[4] 현 JRA상 최우수 4세 이상 수말.[5]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사였던 노히라 유지[6] 다이타쿠 헬리오스의 아비.[7] 지금이야 안장에 이름을 넣는 것이 당연하지만, 텐 포인트, 마루젠스키 등 그 이전 세대 경주마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안장에 이름이 없었다.[8] 중상마만 서술.[9] 1981년 케이오배 스프링 핸디캡에서 우승했다.[10] 전술했든 장거리 경기인 킷카상 이후 2주의 시간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경기 당일 배탈이 나는 바람에 설사를 하였다고 한다.[11] 사실 원래 아리마 기념까지 출주할 계획은 없었으나 카츠라기 에이스가 아리마 기념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자 향후 카츠라기 에이스보다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출주 선언을 하였다고.[12]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미스터 시비와 같은 추입 각질의 삼관마인 딥 임팩트의 천황상 봄을 보고 오면 알기 쉽다.[13] 평소처럼 추입이었다면 한다면 아리마 기념처럼 졌잘싸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래봤자 졌다는 사실은 변함 없기에 평소와는 다른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14] 당시 한신 경마장은 시설관리가 굉장히 엉망이었다고 한다. 본래라면 코스에 진창이 생기면 당연히 훈련을 취소하고 정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강행한 것.[15] 이 세침 치료는 의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어 후일 시술 금지되었다.[16] 이것을 고증해서 우마무스메에서의 인게임 육성 목표에는 타카라즈카 기념이 없다. 즉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는 선택인 것.[17] 루돌프와의 승부를 두려워해서 출주마가 확 줄어버렸는데, 샤다이 팜 대표 요시다 젠야가 그래도 천황상에 국내 최대 목장 소속마가 하나도 없는게 아쉽다는 이유로 그냥 머릿수나 채우러 보낸, 더트와 터프 양쪽을 전전하며 뚜렷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던 준오픈 클래스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엄청난 막판 스퍼트로 토쇼 보이가 갖고 있던 당시 일본 잔디 2000m 레코드를 갱신하며 우승, 본격적으로 잔디 중상에 도전하기 시작해 다음해 야스다 기념을 승리하고 해외 원정을 떠나는 등 마생이 크게 바뀌었다. 한편 갤럽 다이나가 루돌프를 제압한 이 날, 요시다 젠야는 기대하지 않은 도쿄의 천황상 대신 평생의 애마인 샤다이 소피아가 출전한 G2 스완 스테이크스를 관전하러 교토에 가 있었는데(그래서 갤럽 다이나가 심볼리 루돌프를 꺾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그의 차남인 요시다 카츠미였다.) 안타깝게도 그 경기에서 샤다이 소피아가 예후불량으로 안락사 되는걸 직접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이 비보가 목장에까지 날아들었을 때에는 한창 갤럽 다이나의 우승 축하 파티중이었다. 나중에 젠야는 카츠미에게 '내가 루돌프가 이기는 걸 보기 싫어서 도망친 결과 소피아가 그렇게 되었다. 승리도 얻었지만 동시에 전과도 얻었다.'며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18] 카츠라기 에이스 때는 카츠라기 에이스의 묻지마 대도주를 캐치 못한 결과, 뭘 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경기였지만 갤럽 다이나의 경우엔 변명할 여지가 없이 추월 당한 역전패였다. 다만 부상으로 인해 세침 치료를 받고 그것을 견뎌낸 후 복귀전이였던 것도 모자라 17번 최외각 게이트였기에 참작할 만한 결과였고 실제로 조교사도 패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기수는 자신의 기승 미스를 탓하며 홧김에 술을 들이켰다고...[19] 다만 동물은 인간과는 다르게 슬픔의 감정을 눈물로 표현하지 않기에 패배의 슬픔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니라 안구 건조와 같은 사유로 눈물을 흘렸던 것이 우연히 사진에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20] 같은 나카야마 2500미터인 닛케이상에서 도주로 4마신차로 승리하였으니 이론상 가능하다.[21] 커리어는 짧았지만 2000기니, 킹 조지 Ⅵ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 이클립스 스테이크스를 우승하고 초호화 멤버가 모여 G1마가 굴러다니던 1986년 개선문상에서 역대 최고기록 승리(2000년 신다에 의해 경신)를 거두어 「60년대의 유럽대표마는 시 버드, 70년대에는 니진스키와 밀 리프, 이어서 80년대는 댄싱 브레이브」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명마. 킹 헤일로의 아버지이자 2021년 푸아상(G2)에서 대도주로 우승한 딥 본드의 외증조부이며, 한국에도 직계후손이 있는데 2012년 코리안 더비 우승마인 지금이순간과 2021년 대통령배 우승마인 심장의고동이 대표적이다.[22] 심지어 은퇴한 지 20년이 되어감에도 좌회전, 우회전에 따라 좌습보, 우습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을 보고 오카베도 깜짝 놀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지간한 말들이 죽어라 훈련시켜야 겨우 하는 발바꿈을 25세 고령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구사하는건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23] 현역 시절에는 경주가 가까워오면 스스로 많이 먹고 운동을 하면서 몸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때의 습관이 남아서인지 종마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자율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점은 아들 테이오도 물려받았다.[24] 심볼리 목장 생산, 소유마로 프랑스에서 조교, 데뷔한 경주마. 최고성적은 프랑스 G3 2착. 이 후 일본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해외 10전 4승, 중앙평지 18전 3승, 장애물 1전 0승.[25] 1984년 아리마 기념에서는 도주하는 카츠라기 에이스의 바로 뒤를 따라가는 도주/강선행을 선보였고, 같은 포지션에서 무리 없이 승리하여 재팬 컵에서의 패배를 되갚아주었다.[26] 이는 반대로도 적용되어서 오른발을 사용하는 경주마들은 왼쪽 코너링을 힘들어한다. 유명 경주마 중에서는 오구리 캡이 좌습보를 유독 어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강한 이미지에 비해 거리차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인데 기수의 말에 의하면 여유를 두고 달렸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라스트 런이었던 아리마 기념에선 이게 마지막이니 전력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채찍을 더 썼다고.[28] 유일한 예외가 시리우스 심볼리로, 다른 말들과 달리 시리우스는 루돌프와의 병합 훈련에서 계속 지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몇번이나 끝까지 도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루돌프도 시리우스만큼은 마방에서 계속 견제하는 등 나름 자신과 동격의 상대로 여겼다고 한다.[29] 경주마는 경주에 나가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론 어미말의 이름+탄생연도로 칭하고 이름을 등록하지 않다 보니 목장 사람들끼리만 부르는 아명이 따로 있다.[30] 어미말의 이름이 스위트 루나이기도 함[31] 이에 대한 근거로 루돌프가 3관을 제패한 1984년과 이듬해인 85년 경마장 입장 인구가 굉장히 적었던 것을 들기도 하지만, 이는 84년부터 장외마권 발매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나왔다.[32] 언더독 효과와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유래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33] 1차 경마 붐을 일으킨 하이세이코와 반대 케이스. 하이세이코는 이길 때는 압도적이었지만 종종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 질 때도 있었는데, 그 당시의 하이세이코는 지방 출신으로 상경한 사람들이 감정 이입을 하는 말이었기에 그렇게 진 모습도 친숙하다는 이유로 인기가 더 올라가기도 했다.[34] 실제로 루돌프의 커리어에 남은 오점인 3패를 논할 때 전부 마주를 빼놓을 수가 없다(...). 재팬 컵 패배는 킷카상 이후 무리할 정도의 짧은 로테이션으로 컨디션을 망쳐서였고(당시 킷카상은 11월 2주차에 개최되었다. 3000m의 장거리를 뛰고 고작 2주만에 다시 2400m 경주에 나서야 했던 것.), 천황상(가을)의 패배는 세침 치료를 견뎌내고 회복하여 은퇴를 번복한 루돌프의 복귀 경기였으며, 샌 루이스 레이 스테이크스에서의 부상과 참패 역시 조교사 측의 의견을 들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35] 부마와 모부마가 동일.[36] 이는 우마무스메 사일런스 스즈카에게도 디자인의 일부로 남아 있다. 머리 장식으로 달고 있는 태극모양 구체가 원본마가 애용하던 와타리의 끝 부분.[37] 쇼와 47년인 1972년 클래식 세대. '사백유성의 귀공자' 타이 템, '불사조' 타니노치카라, '비월의 천재' 그랜드 마치스, '앵화일섬' 도쿠자쿠라, 비극의 명마 하마노 퍼레이드 외에도 이름을 남긴 유력마만 10여두가 넘어가는 원조 황금세대[38] '천마' 토쇼 보이, '유성의 귀공자' 텐 포인트, '녹색의 자객' 그린 그래스의 3강이 유명한 76년 클래식 세대[39] '터프의 연출가' 미스터 시비, '중거리의 왕자' 카츠라기 에이스, '마일의 황제' 니혼 필로 위너, '관서 총대장' 스즈카 코반, 5세대 G1재패의 첫 주자 다이나 칼, 중거리의 쾌속마 윈저놋트 등이 활약한 83년 클래식 세대[40] 2000년 클래식 세대. 이 세대는 클래식 전선에 출전한 일본마들이 최약체 세대로 꼽히는 반면 아그네스 디지털, 이글 카페, 에이신 프레스톤, 탭 댄스 시티 등 외국산마들이 강세를 보였기 때문에 외국산마를 뜻하는 마루가이를 세대명으로 쓰는 편.[41] 야마닌 제퍼는 단거리&마일 노선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클래식 G1을 나간적이 없기 때문에 테이오가 3세때 무패 2관을 달성할 당시 상대한 경주마 중 고마 G1을 우승한 경주마는 없다.[42]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열리는 닛케이상과 1985년 아리마 기념에서 4마신차로 우승하였다.[43] 1983년까지는 400만 이하 조건전이었으나 1년뒤인 1984년부터 오픈 경주로 승격된다. 이후 2014년에 중상으로 승격하면서 이초 스테이크스로 개명되고, 2015년부터는 사우디아라비아 로열 컵으로 개명된다. 2016년부터 GⅢ으로 변경.[44] 이 해부터 일본이 그레이드제를 도입하였다.[레코드] A B C [45] 후나바시 소속으로 남관동 공영경마에서 중상 6승, 24전 10승을 기록한 말이며 1981년 산 밀 조지의 자마다. 지방 소속 말의 재팬 컵 출주권이 걸린 도쿄 기념에서 우승하고 커리어 유일의 잔디 경주였던 재팬 컵에 15마리 중 11번 인기로 나와 2착을 기록했다. 이 후 지방 소속의 재팬 컵 2착은 코스모 벌크가 기록했다.[46] 1997년에 GII로, 2020년에 GIII로 격하[47] 펄롱. 1펄롱은 1/8마일. 12펄롱은 약 2414m로, 경마에서는 2400m로 환산된다.[48] 이 경주를 비롯해 미국 GI 3승, 그리고 프랑스 원정에서 G1 1승, 도합 G1 4승을 달성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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