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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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원삼(전황후황원삼).jpg
중요민속자료 제49호 전(傳) 황후 황원삼


1. 개요
2. 특징
3. 유래
4. 유형과 형태
4.1. 단령형 원삼
4.2. 복합형 원삼
4.3. 안정형 원삼
4.4. 정형화된 원삼
5. 착용 제도


1. 개요[편집]


조선의 여성 예복.


2. 특징[편집]


'둥근 형태의 맞깃'이 달린 옷으로 옆이 터져 있으며, 무릎을 덮는 길이에 앞길은 짧고 뒷길은 긴 형태이다. 소매의 넓이는 매우 넓고, 소매 끝에는 색동과 백색의 한삼(汗衫)[1]을 달았다. 앞여밈은 섶이 없이 맞대어진 형태로, 칠보로 장식한 단추나 고름을 달아 여며서 입었고, 홍색의 대대(大帶)를 가슴에 둘러맸다.

조선시대에는 왕비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여성부터 사대부 여성들까지 직물과 색깔, 무늬 등을 다르게 하여 두루 입었으며, 민간에서는 활옷과 함께 신부가 혼례에서 입는 예복이었다.[2] 무당들도 활옷과 함께 무복으로 사용했다.

현대에는 주로 사극에서 볼 수 있고, 사진 촬영용이나 결혼식을 전통 혼례 방식으로 치르는 경우에도 신부가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3]


3. 유래[편집]


원삼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4]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원삼을 조선 초기 단삼(團衫)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1450년(문종 즉위년)부터 '단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단삼은 명나라에서 받은 왕비의 예복 중 하나이다.[5]

명나라의 왕비 예복의 하사는 1403년(태종 3)부터 1603년(선조 36)까지 16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태종 3년에는 원령(圓領), 이후에는 단삼(團衫)으로 기록되어있다.[6] 이에 따라 원령과 단삼은 같은 제도로 볼 수 있으며, 단삼의 형태는 단령형 원삼으로 추정 가능하다.[7]

또한, 《대명회전》에 기록된 명나라의 단삼 제도와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난 단삼은 형태와 용도 면에서 유사점이 발견되며, 《가례도감의궤》에서 용도와 옷감 소요량 면에서 단삼이 원삼과 동일한 옷임을 입증한다.[8] 단삼은 '둥근 깃'의 옷으로 아직까지 정확한 실물은 보고되지 않았으나 학계에서는 단삼이 단령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하며,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여성 단령에서 원삼으로 변화한 것으로 본다.[9]

양반 부녀자들이 원삼이라는 것을 지어 입고 흉배를 달아 입었으며 백주대도를 활보하여도 괴이하다 여기지 아니하였다.

양성지, 《눌재집》


한편, '원삼'이라는 용어는 양성지가 저술한 《눌재집》에서 처음 보인다. 1627년(인조 5)까지 단삼과 원삼이라는 용어가 혼용되다가 소현세자 가례 이후에 원삼으로 일원화되었다.


4. 유형과 형태[편집]



4.1. 단령형 원삼[편집]


단령형 원삼은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복식 유물이 발견된다. 이 시기의 원삼은 조선 초기의 원삼으로 단령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때부터 사라 능단의 값이 뛰어올랐으로 조사(朝士)로서 가난하여 살 수 없는 자는 여자의 옷으로 단령(團領)을 만드니, 조하(朝賀)·조참(朝參) 때이면 반 너머가 다 여자의 원삼(圓衫)이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6월 13일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연산군 시기의 기록이다. 여성의 원삼을 개조하여 관리의 단령을 만들 수 있었다고 썼는데, 남성의 단령과 비교할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으나 대체로 유사하다. 이는 출토되는 복식 유물로도 증명된다.

파일:원삼(연안김씨)_경기도박물관.jpg
파일:원삼(용인영덕동무연고분묘).jpg
연안 김씨 단령형 원삼[10]
용인영덕동 단령형 원삼[11]

우선 첫째, 남성 단령의 품이 대부분 50~70cm 내외인 반면, 여성 단령은 품이 80~102cm 정도로 품이 크고 넉넉하다. 이는 여러 겹의 저고리를 덧입고 풍성한 실루엣의 예복용 치마를 아래에 입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소매 모양이 직배래의 통수(筒袖: 좁은 소매) 형태로, 소매에 한삼(汗衫)이 달렸거나 혹은 달았던 흔적이 발견된다. 셋째, 여성 단령은 옆선의 무를 부채처럼 2~3번 접은 뒤 여러 겹의 맞주름을 잡았는데, 이는 남성 단령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이다.

파일:단령(둥근옷깃).jpg
파일:원삼(단령형원삼_옆선).jpg
둥근 깃
단령형 원삼의 옆선 무

또한, 대대(大帶)가 같이 출토되는데 이는 후기 원삼의 대대와 유사하며, 출토 복식의 대부분이 흉배가 부착되어 있어서 예복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12]


4.2. 복합형 원삼[편집]


복합형 원삼은 17세기 초, 중반에 해당하는 시기의 원삼으로 단령과 원삼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파일:원삼(동래정씨)_경기도박물관.jpg
파일:원삼(전주이씨)_경기도박물관.jpg
동래 정씨 원삼[13]
전주 이씨 원삼[14]

첫째, 도련의 모양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관찰된다. 둘째, 직배래의 통수(筒袖: 좁은 소매) 형태였던 소매 모양에 변화가 생기고 전주 이씨 원삼처럼 한삼에 색동이 나타난다. 셋째, 둥근 깃에서 대금형(對襟形: 여며지지 않고 맞닿는 형태)의 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동래 정씨 원삼은 가장 이른 시기의 대금 형태로 확인되는 복식 유물이다.


4.3. 안정형 원삼[편집]


안정형 원삼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에 해당하는 시기의 원삼으로 과도기를 지나 원삼의 형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

파일:원삼(이단하부인원삼).jpg
파일:원삼(안동권씨)_경기도박물관.jpg
이단하 부인 원삼[15]
안동 권씨 원삼

첫째, 전단후장(前短後長)이라고 하여 앞이 짧고 뒤가 긴 형태의 양식이 자리 잡아 앞뒤 길이의 차이가 확실히 나타난다. 둘째, 17세기 말 이단하 부인의 원삼에서 처음으로 겹원삼의 형태가 나타나고, 홑원삼과 겹원삼이 같이 존재하다가 18세기 초 안동 권씨 원삼부터 겉감과 안감이 있는 겹원삼으로 자리 잡는다. 셋째, 무늬가 있는 직물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연화문의 비중이 크고, 그 외에 봉황, 운문, 도류불수, 수자, 호로, 박쥐문 등이 나타난다.


4.4. 정형화된 원삼[편집]


정형화된 원삼은 조선 말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에 해당하는 시기의 원삼으로 형태, 소재, 문양이 매우 정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파일:원삼(영친왕비홍원삼)_국립고궁박물관.jpg
파일:원삼(광화당원삼).jpg
영친왕비 홍원삼
광화당 자적 원삼

특히, 궁중과 반가에서 착용하는 원삼과 민간에서 혼례용으로 착용하는 원삼으로 이분화된다. 첫째, 궁중의 원삼은 전단후장(前短後長)으로 길이가 매우 긴 편이지만, 민간의 원삼은 짧은 편이다. 둘째, 궁중의 원삼은 소매가 넓고 길며, 두 줄의 색동과 한삼이 달리는 반면에 민간의 원삼은 5줄에서 7줄까지 특별한 양식없이 달아 장식적인 효과를 배가한다. 셋째, 궁중의 원삼은 옷의 색과 동일한 색의 깃을 사용하지만, 민간의 원삼은 옷과 다른 색의 깃과 고름을 사용한다. 넷째, 개성 지역의 원삼이나 전라도 지역의 청색 원삼처럼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민간 원삼이 보인다.[16]

파일:원삼(개성원삼)_석주선기념박물관.jpg
파일:원삼(전라도원삼)_전북대박물관.jpg
개성 지역 원삼
전라도 지역 원삼


5. 착용 제도[편집]


원삼은 착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직물과 색깔, 무늬, 부속품 등이 모두 다르다. 본래 《가례도감의궤》에 의하면, 왕비의 원삼은 없고 세자빈과 세손빈의 녹원삼, 왕자의 부인과 공주 등이 입는 녹원삼이 있었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황후는 황원삼, 왕비는 홍원삼, 비빈은 자적원삼, 공주·옹주·민간의 부녀자는 초록원삼을 입어서 구별을 두게 된다. 또한, 조선 말부터 노의와 장삼 등의 다양한 여성 예복이 원삼으로 일원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원삼에는 흉배를 달았는데 1681년(숙종 7) 《숙종인현후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가 봉황 흉배를 달았다고 나왔고, 영조 때의 《국조속오례의서례》에는 왕비는 오조룡을, 왕세자빈은 사조룡을 달았다고 나온다. 초록원삼은 공주와 옹주는 직금 또는 부금으로 만들었고, 민간에서 사용할 때는 금박 장식이 없이 소박하였다. 이 밖에 아청색[17]이나 남색의 원삼도 있었다.

한편, 《정미가례시일기》에 따르면, 1847년(헌종 13)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는 가례 절차 중 삼간택 때 '초록 금수복자 원삼'을 입었고, 수(壽) 흉배를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18] 책빈례(冊嬪禮)[19]와 조현례(朝見禮)[20]때는 '초록 직금 원삼'을 착용하였는데, 이듬해 1848년(헌종 14) 《무신년진찬의궤》에서는 '자적 인화문사 직금 원삼' 을 착용한 것으로 나온다. 이를 통해서 초록 원삼보다 자적 원삼이 더 격이 높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21]

일반적으로 원삼을 착용할 때는 머리에 어염족두리에 어여머리를 하여 가체를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복으로 입을 때는 어여머리를 하며, 명복(命服)으로 입을 때는 대수(大首) 머리를 하고 후수와 대대,하피, 품대, 패옥,폐슬을 착용하고 홀을 든다.

그런데 원삼은 단순히 예복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김장생이 쓴 《사계전서》의 〈상례비요〉편을 보면, "부인은 대수(大袖)를 쓰는데, 대수는 곧 원삼(圓衫)이며, 세속에서는 더러 장옷도 쓴다"고 하였으니 부인이 사망하여 장례를 치를 때는 수의로 원삼을 입히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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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을 가리기 위해서 달아놓은 것으로 한삼의 너비는 30~50cm 정도다. [2] 민간에서 혼례용으로 착용할 경우, 홍색이나 자적색, 노란색은 안되고 오로지 초록색만 허용하였다.[3] 보통 활옷이 선호받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젊은 감각의 한복 디자이너들과 파스텔톤 한복이 등장하는 등 변화를 거치면서 신부들이 활옷 대신 원삼을 선택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4] 단삼이 원삼의 기원이라는 설, ·의 활수의(濶袖衣)가 장삼(長衫)을 거쳐 원삼이 되었다는 설, 소매가 긴 장수배자(長袖褙子)에서 기인했다는 설 등이 있다. [5]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8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6] 출처: 박성실. "적의제도의 변천 연구." 服飾 9.- (1985): 23-52. [7] 《조선왕조실록》에서 단령은 단령삼(團領衫), 원령(圓領), 원령포(圓領袍)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는 것을 볼 수 있다. [8] 출처: 임현주.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국내박사학위논문 暻園大學校, 2012. [9] 출처: 송미경. "조선시대 여성 단령(團領)에 관한 연구." 服飾 52.8 (2002): 151-160.[10] 2000년도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남양 홍씨 예사공파 홍몽남(1534-1574)의 부인 연안 김씨의 옷이다. 직금(織金)에 공작 흉배가 부착되어 있는 화문라(花文羅: 꽃무늬의 얇고 가벼운 직물) 홑 단령이다. [11] 택지 개발 중 용인 영덕동의 무연고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슴과 등에 호랑이 흉배가 부착되어 있는 무문단(無紋緞: 무늬없는 비단) 홑 단령이다. 품은 82cm로 넉넉한데 뒷면에 품을 조절할 수 있는 여밈 단추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12] 사대부 여성의 경우, 남편의 관직과 품계에 따라 흉배를 부착하였다.[13] 2001년도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에서 안동 김씨 문온공파 김확(金穫)과 부인 동래 정씨(1567-1631)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발견된 출토 복식 중 하나이다. [14] 류성구의 부인 전주 이씨(1620-1633)의 묘에서 발견된 출토 복식이다. [15] 조선 중기의 문신 외재 이단하(李端夏)의 부인이 입었던 원삼이다. 이단하는 좌의정까지 역임한 관리로 그의 부인은 남편의 품계를 따라 정경부인까지 올랐다. [16] 출처: 이효선, 박옥련. "한국 지역별 전통 혼례복에 대한 비교고찰." 한국생활과학회 학술대회 2008.하계 (2008): 129-130. [17] 아청색은 검은 빛을 띄는 파란색이다. [18] 수(壽) 흉배는 사극에서도 고증된 적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목판과 종이본으로 확인할 수 있다. # [19] 빈(嬪)으로 책봉하는 의식. [20] 가례를 마치고 대왕대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의식. [21] 당시 경빈 김씨는 간택 후궁으로 일반적인 후궁과는 격이 달랐으며, 무신년 진찬에서도 거의 왕비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