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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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유래
4. 어원
5. 착용 제도
6. 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여성의 혼례복.


2. 특징[편집]


파일:전통 여성 혼례복.jpg

홍색 바탕에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링크

후술하듯이 본래 궁중의 홍장삼(紅長衫)에서 유래하였으며, 공주·옹주의 혼례복이었으나 민간에서도 혼례복으로 착용하였다. 다만, 서민들은 옷 전체에 화려한 자수 장식이 있는 활옷을 마련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원삼을 더 많이 착용하였다.[1] 실제로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만 보더라도 원삼이 활옷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

사극이나 전통 결혼식 장면에서 반드시 나오는 클리셰이다. 활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여인이 나올 정도로 유명하니 누구나 한 번 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3. 유래[편집]


활옷의 유래는 궁중의 홍장삼(紅長衫)이다. 본래 장삼(長衫)은 노의와 함께 궁중의 예복으로 착용하였으며, 왕비세자빈공주, 옹주, 대군·군의 부인, 후궁까지 모두 착용한 기록이 있다. 특히 궁중에서 홍색 장삼은 혼례 시에 반드시 필요한 예복 중 하나였다. 《세조실록》에는 당시 세자였던 예종세자빈을 맞이하면서 보낸 물목에 노의와 함께 '금배 견화 대홍 단자 장삼(金背肩花大紅段子長杉) 1벌'을 포함한 사실이 보인다.[3] 이외에도 왕자의 혼례에 신부의 예복으로 장삼을 마련하게 한 사실들이 이를 입증한다.

상의원(尙衣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귀성군 이준(李俊)이 아내를 얻으니, 그에게······대홍단자 노의(大紅段子露衣)ㆍ대홍단자 겹장삼(大紅段子裌長衫)······만들어 주라."

《세조실록》 세조 13년 10월 22일


"의창군이 아내를 맞는 것을 5월로 정하였습니다. 신부의 노의(露衣)와 장삼(長衫) 감 화문홍단(花紋紅段) 2필······을 상관(象官)으로 하여금 요동(遼東)에서 사오게 하소서. 만약 제때에 사올 수 없다면 시장에서 사오게 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6년 3월 18일


한편, 장삼은 신분과 품계에 상관없이 아무나 착용 가능한 예복은 아니었다. 1412년(태종 12)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5품 이하의 정처는 장삼을 착용하되 노의는 착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고[4], 1433년(세종 15) 양로연을 할 때에 조정 관원의 아내가 아닌 보통 사람의 아내는 장삼을 입지 말라고 하였다.[5]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장삼은 민간에서 함부로 착용할 수 있었던 예복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민간에서도 혼례 때만큼은 홍장삼을 입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규수는 《거가잡복고》에서 "홍삼(紅衫)은 대군·왕자의 처인 외명부 1품복인데 혼례는 섭성(攝盛)하는 것이 옛 예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여기서 섭성(攝盛)은 임금을 도와 제사지낼 때 특별한 날에 신분이나 품계에 관계없이 옷이나 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법령으로 정해지지 않았으나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이다.[6]

윤원거(尹元擧)[7]가 쓴 《용서집(龍西集)》에 보면, 당시 혼례의 사치 풍속을 단속하기 위해 혼례를 치르는 집에 의녀를 보내 이를 탐색케 하는 제도가 있었다.[8] 이때 혼례를 치르는 집에서는 의녀에게 면포로 만든 홍장삼을 보이고 뇌물을 주어 돌려보낸 뒤에 비단으로 만든 혼례복을 입혀 동뢰연을 치렀다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제도였던 모양이다.[9] 이와 같이 홍장삼은 궁중이 아닌 민간에서도 혼례복으로 널리 착용하였는데, 17세기 송시열이 쓴 편지에서도 홍장삼을 가리켜 "현재 우리나라 풍속의 혼례복[是東俗嫁時之服]"이라고 언급하였다.[10]

그러나 19세기로 갈수록 홍장삼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유학자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염의(袡衣)의 제도를 들어 홍장삼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염의는 심의와 비슷하게 생긴 옷으로 검은 바탕에 붉은 선을 두른 옷이다. 유학자들은 염의를 이상적인 혼례복으로 여겼으나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장삼이란 것이 있는데 붉은 비단을 바탕으로 해 두루 연꽃을 가득히 수놓아 그 제도는 비록 화려하고 곱지만 그 넓이와 흩어진 머리로 한 몸을 덮을 뿐이다. 그래 가지고 합근례를 행하고 구고를 배알하지만 옛 예에는 숭상할 근거가 없고, 제가(諸家)를 막론하고 의절(儀節)에 모두 이런 복장이 없다.

박규수, 《거가잡복고》


살펴보건대 옛날에는 혼례에 염의(袡衣)를 입었는데 검은 옷에 붉은 단을 친 것으로 그 뜻이 취할 점이 있다. 지금 세속에서는 홍장삼을 입는데 마땅하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밝히는 집에서는 마땅히 염의를 만들어 씀으로써 풍속을 변화시켜 고례(古禮)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11]

이재, 《사례편람》


왕실의 혼례 관련 기록에서 궁중의 홍장삼에 자수를 놓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박규수가 쓴 《거가잡복고》에서는 홍장삼에 연꽃을 가득 수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덕무가 쓴 《김신부부전》[12]에서도 신부의 모습을 "신씨 처녀는 곱게 단장을 하고, 취교, 금비녀, 보요를 갖추었으며 연꽃 무늬가 새겨진 푸르고 붉은 옷[百子菡萏綠紅 衣]을 입고, 주락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 절하니 어그러짐이 없었다."고 표현한다.[13]

파일:활옷(복온공주활옷).jpg
파일:활옷(홍장삼수본).jpg
복온공주 활옷
홍장삼 수본

현대에 남아있는 복온공주의 활옷과 창덕궁 활옷, 그리고 덕온공주의 혼례를 위해 183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본의 뒷면에 '홍장삼 수초 저동궁'이란 묵서가 적혀있어 홍장삼에 자수를 놓았음을 알 수 있다.[14] 이를 통해서 자수를 놓은 활옷이 궁중의 홍장삼에서 기원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15]

파일:활옷(창덕궁활옷).jpg
파일:활옷(창덕궁활옷복원품).jpg
창덕궁 활옷
창덕궁 활옷 복원품


4. 어원[편집]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활옷'이라는 명칭은 나오지 않는다. 20세기 이후의 근대 한글 소설이나 신문 기사 등에서 '할옷', '슈할옷', '활옷'이라는 복식 명칭이 나타난다.

華制의 옷이라는 데서 나온 華衣는 꽃무늬를 표현하는데서 마침 華와 음이 같은 花衣가 되고, 이는 곧 화의니 발음상 활옷이 되는 가운데 다시 한자화하여 豁衣가 된 것이다.[16]

유희경, 《한국복식사 연구》


활옷의 어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유희경의 경우, 활옷이라는 명칭의 기원을 화의(花衣, 華衣) 등의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활옷은 할옷으로 대의란 뜻이 아닌가 하며, 만약에 이를 華衣라고 한다면 花衣란 뜻이 되나 거연(遽然)히 단정을 못하겠다.[17]

김동욱, 《한국복식사 연구》


김동욱의 경우, '대의' 즉, '큰옷'이라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단정하지는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크다[大]라는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인 '하'와 '옷'이 만나 '혼례라는 중요한 예식에 입는 큰 옷'을 의미하는 '할옷'이라는 순우리말 명칭을 이룬 것으로 정리한다.


5. 착용 제도[편집]


붉은 비단에 장수을 기원하는 '이성지합 백복지원, 수여산 부여해(二性之合 百福之源, 壽如山 富如海)'를, 앞길과 뒷길, 소매에는 모란, 연꽃, 불로초, 어미봉, 새끼봉, 동자, 나비, 봉황, , , , , 소나무, 또는 구름, 거북, , 사슴십장생을 포함한 여러 문양을 수놓았다.

앞자락이 둘, 뒷자락이 하나다. 뒷길이 길고 앞길이 짧으며, 깃이 없고 넓은 동정이 달린 합임이다. 소매 밑선은 꿰매고 옆길은 트여있다. 겉길과 안길 사이에 두꺼운 심을 대었다. 넓은 소매에 색동과 흰 한삼이 붙어있다.

속옷[18]을 모두 갖추어 입고, 상의는 노란 삼회장 저고리와 당의를, 하의는 청색 스란치마와 홍색 대란치마까지 입은 위에 활옷을 입었다. 활옷을 입을 때 같이 입는 다른 옷까지 한데 묶어 활옷이라 하는게 아니다. 활옷을 입은 뒤 가슴 위에 대대[19]를 매는데, 대대 안쪽의 작은 끈으로 묶어 고정시킨 뒤에 대대를 묶는다. 길게 늘어뜨려진 것을 다시 한두 번 가량 묶는다. 머리는 또야머리를 한다. 용비녀를 꽂으며, 앞댕기와 도투락댕기를 드린다. 머리에는 화관을 쓴다. 대대 가운데에 띠돈과 대삼작노리개를 착용한다.

원래 전통적인 장례 예법은 망자에게 삼베 수의가 아닌 습의(襲衣)와 염의(殮衣)를 입혔다.[20] 습의는 평소에 입던 평상복으로, 죽을 때 입던 옷을 그대로 습의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염의는 습의 위를 덮거나 감싸는 여러 벌의 옷으로, 귀한 옷이나 귀인에게 받은 옷, 임금에게 받은 옷,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염의로 삼았다. 활옷을 장만하여 혼인할 경우, 평생 잘 가지고 있다가 사후에 염의로 삼았다.

굉장히 화려한 것이 특징으로, 원삼과 함께 무당들이 입는 무복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6. 매체[편집]


  • 대항해시대 4: 조선에서 만날 수 있는 동료인 설이화가 입고 있던 옷도 이것인데, 본래는 사대부의 옷이었으나 나중에는 결혼식 복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무당의 옷으로 사용된 예가 많을 정도이니 딱히 오류라고 볼 정도는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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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녀의 후손 집안이 몰락하여 영세한 경우, 왕녀의 혼례복인 활옷을 빌려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2] 출처: 신혜성, 김지연. "고종 및 순종연간의 혼례 복식에 관한 연구." 서울학연구 -.35 (2009): 1-58.[3]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 4월 9일 을묘 1번째기사[4]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14일 정묘 4번째기사[5]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8월 29일 기유 2번째기사[6] 사실 박규수는 《거가잡복고》에서 '섭성'의 진짜 의미는 임금을 도와 제사 지낼 때 입는 옷을 개인의 제사에도 입는 것이며, 신분을 올려 옷을 입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개탄하였지만 이미 민간에서는 풍속으로 굳어져 있었다. [7] 조선 후기에 활동한 학자로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여러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매진하였다. 윤선거와 종형제 사이이다.[8] 이 의녀를 금란의녀(禁亂醫女)라고 지칭하는데, 중종실록을 보면 혼인하는 집은 관아에 신고하고 사헌부에서 서리(書吏)를 보내 부정한 행위가 없는지 살피되, 만일 서리가 살펴볼 수 없는 데라면 의녀를 보내라고 나온다. [9] 《용서집(龍西集)》 제5권 〈婦人從夫服〉[10] 《송자대전》 제83권[11] 문옥표(1999). 『조선시대 관혼상제(I)』.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 155. [12] 1791년(정조 15) 정조는 혼기를 놓친 남녀에게 돈을 주어 혼인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이루어진 28세의 노총각 김희집과 21세의 노처녀 신씨의 혼사를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가 전(傳) 형식의 소설로 썼다. [13] 이덕무(2005). 『東廂記』. 서울: 푸른 상사. p. 93.[14] 본래 옷에 자수를 놓는 일은 사치스럽다고 하여 금지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임하필기》의 금제 절목에 따르면,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수놓은 의상을 입는 자는 그 가장(家長)까지 아울러 논죄(論罪)한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수 복식들이 다수 있다. [15] 출처: 권혜진. "활옷의 역사와 조형성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9. [16] 유희경(1975). 『한국복식사 연구』.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 477. [17] 김동욱(1973). 『한국복식사 연구』. p. 335. [18] 상의는 가슴가리개→속적삼→속저고리, 하의는 다리속곳→속속곳→속바지→단속곳→너른바지→무지기치마→대슘치마[19] 홍색 단에 봉황 금박을 찍어냈다.[20] 삼베는 전통적으로 죄인의 의복에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예법대로라면 망자에게 삼베옷을 입히는 것은 죽은 이를 죄인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