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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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魏王
2. 衛王
3. 爲王
4. 僞王


1. 魏王[편집]


중국 전국시대에 존재했던 위(魏)나라의 왕. 본래 위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위나라의 국군(國君)은 자작이나 후작에 봉해졌는데, 기원전 344년에 칭왕하여 혜왕(惠王), 양왕(襄王), 소왕(昭王), 안희왕(安釐王), 경민왕(景閔王), 위왕 가(假)까지 총 6명의 왕이 있었다.

1.1. 왕작[편집]


전국시대위(魏)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통일된 이후로는 황제의 아들이나 제후에게 내리는 봉작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봉토는 옛 위(魏)나라 땅인 지금의 허난성, 산시성(산서성) 일대였다.

한나라 때까지는 위공(魏公)이었으나, 조조 때부터는 위왕(魏王)으로 승격되었다. 위왕에 봉작되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름
국가
책봉년도
시호
조조
후한
216년
무왕(武王)[1]
조비
후한
220년
-[2]
베이르테무르[3]

1324년
-

2. 衛王[편집]


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는 칭왕을 하지 않았으므로, 魏王이 아닌 衛王을 말한다면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황제의 아들이나 제후에게 내렸던 봉작을 말하는 것이다. 봉토는 옛 위(衛)나라 땅인 지금의 허난성 일대였다. 위왕에 봉작되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름
국가
책봉년도
시호
조병
남송
1271년
-[4]

3. 爲王[편집]


왕이 된다는 뜻이다.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5]이나,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6]처럼 한 인물이 현 왕조를 갈아엎고 왕이 된다는 예언적인 말이다.

4. 僞王[편집]


가짜 왕, 즉 왕을 참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전근대에 감히 왕을 참칭한다는 것은 곧 역모나 다름이 없으므로 일반적인 사람이 왕을 참칭하고 다니지는 못 했을 것이고, 반란을 일으켰거나, 혹은 반란을 일으킨 무리에 의해 일시적으로 왕이 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왕이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왕을 칭하는 경우는 대립왕(對立王)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 있는 상황이다. 고려 공민왕 대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켜 왕을 자처한 덕흥군이 이런 경우다. 대립왕이라는 용어는 유럽에서나 썼던 용어이므로 동양에서는 본래 대립왕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괴뢰국의 왕을 위왕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제국만주사변을 일으킨 직후에 만주에 괴뢰국만주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를 데려다 앉혀 놓은 걸 위왕이라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치적인 이유로 위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곧바로 다른 이에게 진압되어 폐위되었거나, 우왕이나 창왕처럼 선왕의 핏줄이 아니라 하여 폐위된 경우이다.[7]

이런 모든 경우를 통틀어서 비정통왕(悲正統王)이라고도 한다. 말인즉 왕통(王統)에서 제외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지라도, 통상적으로는 해당 인물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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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인 조비가 황제로 등극한 뒤에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2] 아버지로부터 위왕 작위를 물려받고, 위왕이 된 그해에 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위왕으로서의 시호는 없다. 시호는 죽어서나 받는 것이고, 조비는 황제로 죽었으므로 문황제(文皇帝)라는 시호를 받았다.[3]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다.[4] 이복형 공제의 뒤를 이어 7살 나이에 황제로 등극했다. 따라서 위왕으로서의 시호는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즉위하고 나서 남송애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멸망하게 되었고, 황제와 신하들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제로서의 시호도 없고, 다만 중국에서 대체로 폐위된 어린 황제를 소제(小帝)라고 부르기에 송소제라고 불리고 있다.[5] 십(), 팔(), 자() 세 글자를 합치면 이()가 된다.[6] 주()와 초(肖) 두 글자를 합치면 조(趙)가 된다. 이는 조광조를 두고 한 말이었다.[7]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진짜 왕으로 쳐 주지도 않았다. 우왕과 창왕을 고려의 제32대, 제33대 국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오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