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1984)/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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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로 시절
2.1. 데뷔 ~ 2010 시즌
2.2. 2011 시즌
2.3. 2012 시즌
2.4. 2013 시즌
2.5. 2014 시즌
2.6. 2015 시즌
2.7. 2016 시즌
2.8. 2017 시즌


1. 개요[편집]


전 야구선수 이로운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이다.


2. 프로 시절[편집]



2.1. 데뷔 ~ 2010 시즌[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80313154416893.jpg
(출처: 포토로)
초라했던 프로 데뷔 시절

2006년 삼성 라이온즈신고선수로 입단[1]해서, 2007년 2군 남부리그 타격왕을 차지하고, 시즌 말에 정식선수로 등록해서 데뷔전을 치렀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51884020.9.jpg
한화 이글스 시절

2008년 시즌 중 심광호와 트레이드돼서 한화로 왔다.[2]

그 후, 2009년에는 초반 오선진에게 2루 자리를 빼앗겼다 이후 오선진의 부진을 틈타 주전 2루수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으나, 홈런만 치면 팀이 패배하는 희한한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나름대로 장타력도 있는 선수라 더 난감한 상황. 어쨌든 한화 내야진의 미래를 이끌 선수로 분류되었다. 2009년말 오른쪽 손목에 공을 맞아 철심을 박았다.

2010년 고작 14경기만 나왔는데 봄부터 허리통증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 결국 9월에 허리 수술을 받고 병역면제가 되었다.#


2.2. 2011 시즌[편집]


2011년 4월 6일. 406 대첩의 함정카드로 자신의 캐릭터성을 다시 한 번 드러내며 대활약한다.

이번 시즌에는 2루수로 시작했으나, 정원석의 3루수 기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내야자원을 모두 돌리는 실험 끝에 이여상이 낙점되었다. 다른 내야수들에 비하면 3루 수비가 훨씬 안정적이라 이범호-송광민 이후의 한화 내야수비의 공백이던 3루를 어느 정도 해결하여 한화의 핵심 내야자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타격도 잘 치는 편은 아니지만 팀 내 다른 내야수들 중 이여상의 2할 5푼대 이상 타율은 정원석뿐이니…더군다나 군 면제까지 받아서 미필 유망주가 수두룩한 한화 내야의 거의 유일한 젊은 피다.

4월 30일 삼성전에서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는데, 팀은 졌다! 이놈의 홈런 징크스는 언제나 깨질 것인가.

2011시즌 들어서 타격폼을 완전 수정하여 그동안 약점잡혔던 변화구에 대처하기가 조금 더 수월해진 듯 싶다.[3] 덧붙여 항상 중요한 시점에 결승타점이나 안타를 치는데 오버하여 2루나 3루에서 죽는건 연례행사다.

현재는 타격에서는 잉여상으로 돌아갔으나 3루 수비를 무난하게 해내면서 2루의 한상훈과 함께 한화 내야진을 안정화시켰다. 이후 3루 경쟁자던 오선진이 5월 29일 두산전에서 정재훈의 공에 손등을 맞아 시즌아웃하면서 유일한 3루 자원으로 남게 되어 책임이 막중해졌다. 사실 3루 자원으로 김회성이 있긴 한데 수비가 워낙 지옥급이라 사실상 이여상 혼자다.

파일:external/pds22.egloos.com/d0092634_4de9a9c75a524.jpg

6월 1일에 경기 도중 이여상의 장갑이 화면에 비춰졌는데 각각 안타장갑과 출루장갑이라고 써져 있었다. 타격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이 많았던 듯. 장갑 외에도 배트에는 불방망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인지 6월 1일 4타수 3안타, 6월 2일에는 4타수 1안타를 쳤고 특히 2일의 1안타는 역전승의 발판이 되는 귀중한 2타점 적시타였다.

그리고 디시에서는 이걸 보고 '이여상 캐쉬템 질렀다', '캐쉬템은 반칙 아닌가여?' 같은 발언이 속출했다. 그리고 여전히 주루능력이 불안불안해서 '돈이 부족해 주루신발은 못샀나보네'같은 발언도.

이후 6월 14일 기아전에서 홈런을 쳤는데, 이 날은 팀이 이겼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홈런 징크스 탈출! 그러나 바로 전 타석에서 이대수가 만루홈런을 쳐서 이여상의 홈런은 거의 묻혔다.

그리고 6월 17일에는 2점 홈런을 때리며 내가 홈런쳐도 팀은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카림 가르시아가 끝내기 쓰리런을 때려내면서 또 묻혔다. 그래도 초반에 두산에 추격의 의지를 꺼뜨리는데 일조했던 홈런이였기에 의미가 있을 뻔 했지만 하필이면 오넬리 페레즈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아아 지못미…

6월 18일에는 무려 4타석 4안타 2타점을 폭발하였으나 팀은 3:13으로 졌다…눈물…

7월 2일 기아전에서도 2타점 적시타로 동점 상황에서 결승타를 쳤으나 역시 강동우가 만루홈런을 쳐서 거의 묻혔다.

위기에 빠진 한화 3루를 맡으며 내야진을 안정시키고, 타격에서도 선전하여 확고한 주전엔트리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어째 MVP급 대활약을 펼치는 날에는 팀 내 다른 선수가 더 큰 인상을 남기거나 혹은 팀이 지면서 경기 후 인터뷰를 하는 일이 없다. 이래저래 불운이라면 불운인가…

그러나 8월 6일 6회 1사 주자 1, 2루 상황에서 결승 3루타를 작렬, 드디어 이 날 묻히지 않고 수훈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다만 이번에도 방송 인터뷰는…

8월 14일 6회 2사만루에서 2타점 적시타를 치며 결승타를 쳤고, 2타수 1안타 3타점으로 활약했다. 드디어 묻히지 않고 수훈선수로 선정되고, 방송인터뷰도 했다. 드디어 불운의 끝이…?

9월 2일에 넥센전에서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올라와 선행 타자주자들이 만들어 놓은 밥상을 걷어차는 만행을 선보이는 바람에 야왕의 분노를 제대로 사서 2군으로 내려갔다. 병살이야 칠 수도 있는 거라지만 그게 참 어이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웃카운트 판단을 제대로 못 해서였다고...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3루 주자가 들어오고 2루주자는 3루로, 1루주자는 2루에서 아웃 당하고 이여상이 1루로 들어와 1아웃과 1점을 맞바꾸려 한 것인데 이여상이 아웃카운트를 잘못 판단하여 1루에 느릿느릿하게 들어오며 병살을 내준 것. 게다가 공이 복잡하게 바운드가 된 터라 2루에서 1루주자가 아웃되더라도 충분히 1루주자는 전력질주하면 들어올 상황. 용전동 이영상씨가 2군가서 정신 바짝 차리고 돌아오길 빌어보자.

2011년 최종성적은 120경기 출장 / 320타수 / 71안타 / 타율 0.222 / 3홈런 / 38타점. 거의 풀타임으로 출장했음에도 거의 바닥을 찍는 타격 성적표를 받아들고야 말았다. 이런 잉여를 3루 고정으로 한해를 보낸 한화 팬들의 심정도 바닥을 내리치는 심정...하지만 이런 이여상을 밀어낼 선수가 없었던지 결국 12년 시즌에도 주전 3루수로 기용이 될듯하다. 한화 3루수의 고유번호였던 7번까지 달았다 이렇게 된이상 결혼한 야구선수에게 내려오는 분유버프가 이여상에게도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2.3. 2012 시즌[편집]


스프링캠프 이후 후쿠하라 코치의 맹훈련과 와이프님 영실씨의 파워 버프로 수비 대각성 한 것처럼 보였다! 시즌 초반 한화 팬덤에선 수비할 때 이여상 혼자 수비하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팔을 덜덜 떠는 중풍타법도 김태균의 하체위주 타법을 배워 대변신하여 커트가 늘고 안타도 늘어났다. 시즌 초반까지는 진짜 이여상이 사고 한번 칠 것 같았다! 그러나...

파일:attachment/2232.png
2012 시즌 한줄요약[4]

개막전인 4월 7일 롯데전 3타수 2안타, 4월 11일 두산전 2타수 1안타 1볼넷을 기록했다.

4월 12일 두산전에서는 2타수 2안타 1볼넷, 1희생번트, 1도루를 기록하여 공격에서도 활약을 하고 수비에서도 활약을 하여 박찬호의 승리에 많은 기여를 해 박찬호의 도우미로 불렸다.[5]

5월 8일 한밭야구장에서 열린 KIA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2:1로 지던 8회말 1사 2, 3루 상황에서 바뀐 투수 유동훈에게 2타점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다! 비록 자신은 2루 진루를 하려다 주루사를 당했지만 한화 이글스가 2:3 역전승을 이루게 한 큰 힘이 되었다. 이 주루사 때문에 약간 말이 많았는데, 한대화 감독이 말하길 느린 2루 주자 최진행의 안전한 홈승부를 위해 벤치에서 일부러 지시한 거라고 하였다. 이여상은 이날 3타수 1안타 2타점 1볼넷을 기록했다.

5월 15일 두산전에서 팀이 스코어 6:1로 이기던 5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허경민의 타구를 잡지 못해 안타로 만들어 줘서 5회말에 3실점하는데 빌미를 제공했고, 팀이 스코어 6:7로 역전당한 7회말 무사 1, 3루 상황에서 최준석의 3루 땅볼을 홈에 악송구하여 1점을 조공하면서 팀의 스코어 8:11 패배에 일조하였다.[6] 타격 성적도 4타수 무안타에 그처 수비에서도 타격에서도 거하게 말아먹었다.

시즌이 진행될 수록 타율이 점점 떨어져 어느덧 지난 시즌 성적에 수렴하여, 6월 26일 기준 타율이 0.211까지 내려갔다. 거기에 시즌 초에는 좋았던 수비도 점점 이전 모습으로 회귀하였고, 결국 6월 들어서는 오선진에게 밀려 거의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다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7월 24일 경기에는 1사만루상황에서 2타점 적시타를 쳤다. 다른 경기도 아니고 류현진의 경기에서 뽑아낸 적시타라 의미가 크다.

7월 27일의 바티스타 경기에서도 1사 23루에 대타로 나와 승부를 결정짓는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었다.

8월 14일 포항 야구장 개장경기 1호 안타, 득점, 홈런을 혼자서 다 해먹었다.

9월 21일 한밭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1:0으로 뒤진 4회 선발투수 강윤구를 상대로 개인 통산 첫 만루홈런을 쳐내며 역전에 성공하였다.

2012년 최종성적은 86경기 출장 / 182타수 / 43안타 / 타율 0.236 / 3홈런 / 19타점. 시즌 초에 받았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주전 자리마저도 빼앗기고 내야 백업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2012 시즌 후 12월 2일 수원야구장에서 열린 양준혁야구재단 주최 희망더하기 자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여 양준혁박한이의 타격자세를 흉내내어 큰 웃음을 주었다. 특히 양준혁 본인도 자신의 타격자세와 99.9% 닮았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정말 비슷했다.


2.4. 2013 시즌[편집]


개막전 엔트리에 등록이 되긴 했으나 주전 2루수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에는 주전에도 끼지 못하며 대타로 간간이 나왔으나 이마저도 대타 성공률 0%를 기록하는 등 타율 0.063을 기록하며 잉여의 모습을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으나 2군에서도 2할 3푼을 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좋지 않다.

예전같으면 어쩔 수 없이 오선진이 부진한 상황에서라도 썼겠지만 주루툴이 있고 타격과 수비가 일취월장한 이학준과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보인 임익준 등에 밀려 효용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동국대 동기 송광민에게 등번호 안 돌려줘서 웨이버공시를 당할 뻔했다.
이 기사가 올라온 날까지의 성적은 22타수 1안타 1득점으로 0.045라는 처참한 수준으로, 김성한 수석코치는 진심이었을지도 모를일.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312011640773064_529ae7ecb6aae.jpg
롯데 납회식 때.

시즌 종료후 2014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1라운드 지명되었다.이제 해운대에서 실컷 튜브타고 파도를 즐길 수 있다 이 지명이 의외인 게, 어느 순간 2군에서도 종적을 감춘 이여상의 이후 행보에 대해 여러 말들이 나오던 중이었기 때문. 개인사업 준비설이 한화팬들 사이에서 나돌며 사실상 전력외로 여겨지던 와중 2차 드래프트로 팀에게 3억의 이적료라도 안겨 주니, 한화팬들은 시원섭섭해하면서도 고향팀 롯데에서의 행운을 기원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여상의 이적이 없었다면 한화 출신 2013년 2차 드래프트 선수는 하나도 없을 뻔했다.

올해에도 다시금 개최된 양준혁야구재단 주최 희망더하기 자선 야구대회에서는 작년에도 선보인 박한이의 버퍼링 동작에 이어 마해영 특유의 오픈스탠스 타격폼으로 제대로 당겨친 안타를 만들어내는 한편 배영수의 투구폼을 안타성 타구를 입벌리고 한 번 쳐다본 뒤에 자책하는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흉내내며 팬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해설진, 팬, 중계를 지켜보는 네티즌 모두 폭소했다. 야구말고 예능을 하지 그랬어 희망자선대회 주전 갓영상씨


2.5. 2014 시즌[편집]


팬들 사이에서도 이해못할 지명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렇게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고 9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콜업된 적 없다. 2군에서도 2할 5푼대 타율로 부진했다.

1군 엔트리를 살펴보면 타격에 메리트가 없는 한 2루-3루자원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특히 유격수자리의 내야 멀티능력을 살펴봐도 오승택, 문규현, 신본기, 박기혁 모두 3-유-2 가능자원이라...

시즌 내내 1군에 콜업되지는 못했지만, 시즌 후 진행된 2014 희망더하기 자선 야구대회엔 참가했다. 2회 초에 타석에 들어서서 우익수 방향으로 친 타구를 우익수 송승준이 놓치면서 파울인지 페어인지 애매한 상황이 되었는데, 심판이 파울을 선언하자 매우 적극적으로 합의판정을 요청하며 시작부터 큰 웃음을 선사했다. 이 요청에 심판들이 향한 곳은 엠스플의 중계석(...) 또한 이 날 마해영, 장성호, 박한이, 양준혁의 타격폼을 흉내냈고,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을 때는 윤성환, 서재응의 투구폼을 완벽하게 복사하며 겨울 특화 야구선수(...)라는 칭찬같지 않은 칭찬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맹활약으로 인기상을 받음은 물론 양준혁에게 희망자선대회 주전으로 낙점받았다.


2.6. 2015 시즌[편집]


6월 9일 롯데 자이언츠 이적 후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다. 퓨처스리그에서 줄곧 지명타자와 1루수로 출장한 것을 감안하면, 타격부진에 시달리는 박종윤김대우, 그리고 포항 삼성전에서 수비불안을 겪던 오승택의 대체자원으로 올라온 듯. 또한 수비 포지션상 황재균정훈의 체력 안배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팬들은 시즌 초 외야수 경쟁 체제에서 팀의 상승세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내야에도 이여상이 비슷한 바람을 불러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1군에 등록된 그날에는 9회말에 문규현의 대타로 나와서 삼진을 당했고, 10일에는 10회초 대주자였던 임재철의 대수비로 들어가서 배병옥의 3루 땅볼을 글러브로 밀어내는(…) 실책을 저질렀고, 그것이 박경수의 투런홈런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이게 유일하게 기록된 실책이다(…).

그후에도 대타와 대수비를 전전하다 5타수 무안타 3삼진 1볼넷이라는 초라한 성적만 남긴 채 6월 15일자로 2군으로 내려갔다.


2.7. 2016 시즌[편집]


5월 14일자로 갈비뼈 미세골절을 당한 문규현을 대신하여 1군에 콜업되었다. 유일한 내야 백업자원(...)이라 정말 절실한 활약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날 삼성전 손용석과 교체되어 2타수1안타를 기록하였다. 고작 1안타지만 손용석보다 훨씬 잘친다. 게다가 내야 포지도 소화 가능.

5월 18일 SK와의 경기에서는, 김광현을 상대로 세 번이나 출루에 성공했다.[7] 수비에서도 어제 손슥슥이 보여준 모습에 비하면 훨~씬 안정감 있는 수비를 해냈다.

5월 22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4회말 1아웃 1, 2루에서 선제 1타점 2루타를 기록했고, 수비에서도 3회초 2아웃 만루에서 양의지의 3유간 땅볼을 잡아내서 실점을 막고 5회말에 불규칙 바운드를 깔끔하게 잡아내며 공수에서 박진형의 데뷔 첫 선발승을 도왔다.

6월 11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4:8로 뒤진 8회초 1아웃 만루에서 1타점 안타를 기록했고 이어 9:8로 역전한 1아웃 1,3루에서 중견수 희생플라이로 1타점을 추가하여 10:8 승리의 MVP가 되었다. MVP 인터뷰에서 보여준 염종석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묘기는 덤.

6월 2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8회초 대타로 나와 삼진을 당한 후 1루수 포지션으로 경기에 나섰는데 2:2 동점 10회초 2아웃 1, 3루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번트[8]를 성공시켜 1타점을 올렸고, 이어 손용석의 좌익수 앞 안타에서 3루까지 달려 아웃되는 사이 2루주자 강민호가 득점에 성공하여 팀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7월 9일 독감으로 인해 1군에서 말소되었다가 19일 손용석과 자리를 바꿔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다만 5~6월 몇 번의 인생경기와 의외의 좋은 수비로 대박을 친 것은 맞지만 롯데의 습자지급 내야뎁스 탓에 비주전에 관대한 롯데팬들의 과대평가를 받는 면도 없지 않다.[9] 어디까지나 빠따가 식물인 김대륙이나 1군만 올라오면 송구장애를 발동하는 황진수, 그리고 이들의 어그로를 한방에 다 가져가버리는 손용석 등과 비교해서 고평가를 받는 것. 오승택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중용되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잠시 타율 3할이던 타격은 7월에 출루율 3할이 붕괴되는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수비도 유틸로 쓸만하다 수준이지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7월에 감기를 전후하여 부진하면서 팀이 김성배-김동한 트레이드를 단행하는 원인이 되었다.

7월 29일 수원 kt전에서는 볼넷으로 나간 최준석의 대주자로 들어와서는 9회초 2아웃도루작전에 의해 단독도루를 감행했고, 정말 여유있게 2루에서 아웃됐다. 롯데 팬들은 지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며 다방면으로 깠다.

8월 6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만루에서의 상대 2루수에게 역동작에 걸리게 만들정도로 빠져나가는 기습번트 안타[10]와 5회초 1사 1-3루에서 허경민의 타구가 머리 뒤로 넘어갔는데 이 타구를 처리하는 호수비로 팀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어쨌든 시즌 전체를 고려하자면 주전감은 절대로 못되지만 내야 백업이라는 역할 내에서 의외로 괜찮은 활약이었고, 암흑기 한화가 버린 선수라는 타이틀을 감안하면 더 기적같은 활약이었다. 타격이야 뭐 한화 시절이나 지금이나 식물 수준이지만 군살을 빼고 벌크업을 하면서 운동능력이 그시절보다 나아져서 의외로 내야유틸로서의 수비력이 준수해진 것이 주효했다. 적어도 지금껏 쌓아온 과대평가를 딱 2년만에 싹 날려버린 0툴의 터줏대감 손용석보다는 나았다. 특히 손용석, 김동한, 김대륙을 위시해 롯데 백업 내야수진의 타격능력이 동등하게 식물급인 상황이라 이들 중에 유일하게 번트라도 잘 대는 이여상에 대한 평가가 높다. 하지만 신본기의 제대와 오승택의 부상복귀로 인해 내야진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고 더 안정적인 문규현이나 타격이 비슷비슷했는데 수비 주루가 더 나은 김동한, 타격은 더 심각하지만 수비력이 어마어마한 유망주 김대륙 등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다음 시즌 전망이 그리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2.8. 2017 시즌[편집]


시즌 시작하고 나서도 소식이 없다가 4월 28일자로 웨이버 공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역 연장 의지가 강한 만큼 다른 팀을 찾고 있다고(보기). 웨이버 공시 이후 일주일 동안 새 소속 팀을 못 구했기 때문에[11] 2017 시즌 잔여 경기는 뛸 수 없게 되었다.

퓨처스리그 성적은 2경기에서 3타수 1안타가 끝. 한편 등번호였던 7번은 신본기가 물려받았다.

[1] 동국대 시절 감독이었던 한대화 당시 삼성 수석코치 덕에 입단했다.[2] 현재윤의 부상으로 삼성엔 백업 포수가 필요했는데 정작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이 먼저 트레이드를 제시했다.[3] 본래 우산들 듯이 거의 일직선으로 들며 팔을 떠는 타격폼이었으나 문제점이 발견되어 2010시즌부터 바꾸기 시작하다가 2011시즌 들어서 완전 변경한 듯.[4] 참고로 이 댓글이 달린 기사는 배영수에게 팬들이 사이영수상을 보내줬다는 내용이다.[5] 뭐 예를 들자면 이런거...#[6] 이날 더 흠좀무하신 족적을 남긴 이대수와 함께 10점을 내줬다고 할 수도 있다.[7] 볼넷 - 볼넷 - 유격수 에러[8] 심지어 2아웃 상황에 초구였다![9] 웃기는건 현재 이여상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드는 손용석도 한때 이런 롯데 팬들의 성향 덕에 혜택을 본 선수다.[10] 이 번트는 푸쉬번트로 일반번트와는 살짝다르다. 타격하듯 툭치는식의번트다.[11] 친정팀인 한화나 신생팀인 kt조차 그 얇은 뎁스에서도 손을 뻗지 않은 것 자체가 이여상이 백업으로서의 가치조차 상당히 애매하다는 뜻이다. 사실 위 항목을 보면 알지만 롯데가 내야 주전도 주전이지만 내야 백업 뎁스가 완전히 붕괴되었기에 약간이나마 좋은 평가를 받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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