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키오스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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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Ἰσαάκιος Κομνηνός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파일:이사키오스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jpg
생몰 년도
1093년 1월 16일 - 1152년 이후
카이사르 재위 기간
1104년 - 1130년
부모
알렉시오스 1세(아버지)
이리니 두케나(어머니)
형제
요안니스 2세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안나 콤니니
마리아 콤니니
에브도키아 콤니니
조이 콤니니
테오도라 콤니니
아내
이리니
자녀
안드로니코스 1세
요안니스 콤니노스
마리아 콤니니
안나 콤니니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카이사르. 1104년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1130년 형 요안니스 2세를 상대로 반역을 꾸미다가 발각당하자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용서를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큰 조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후원했다가 1143년 요안니스 2세 사후 황위에 오른 마누일 1세에게 미움을 받았고, 결국 1150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수도원을 짓고 학문을 후원했다.


2. 행적[편집]


1093년 1월 16일 알렉시오스 1세이리니 두케나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요안니스 2세,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안나 콤니니, 마리아 콤니니, 에브도키아 콤니니, 조이 콤니니, 테오도라 콤니니가 있었다. 1104년 삼촌인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가 사망한 후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1118년 알렉시오스 1세가 붕어했을 때, 누이 안나 콤니니는 모후 이리니 두케나와 함께 남편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새 황제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형 요안니스 2세의 황위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황위에 오른 요안니스 2세는 그를 신임했고, 1122년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krator)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군사 활동에 쏟아부은 형과 달리, 그는 문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제국 전역에서 시를 수집하여 시집을 출간했으며, 호메로스에 대한 3개의 저서와 2개의 논평을 저술했다. 이렇듯 여유롭게 살았으나, 형이 큰아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공동 황제로 내세우자 내심 반감을 품었다.

1130년,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룸 술탄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황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도중에 기밀이 새면서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자식들과 함께 다니슈멘드의 근거지인 멜리테네로 피신하여 에미르 가지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기독교와 무슬림 군주들을 포섭해 요안니스 2세를 타도하려 했다. 1131~1132년 칼디아 지방의 총독이었던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 룸 술탄국 술탄 메수드 1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본 1세,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을 두루 찾아가며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지 않은 데다 요안니스 2세의 능수능란한 전쟁 지휘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8년간 타국에서 떠돌아다니던 그는 1138년 봄 안티오키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요안니스 2세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요안니스 2세는 기꺼이 그를 용서해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갔다. 그러나 1139년 또는 1140년 그의 장남 요안니스가 룸 술탄국으로 망명하자, 요안니스 2세는 그를 헤라클리아 폰티카로 유배보냈다.

1143년 죽음을 눈앞에 둔 요안니스 2세는 넷째이자 막내인 마누일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는 당시 요안니스 2세의 아들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사키오스가 황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기고 그를 후원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악수흐의 활약으로 마누일 1세가 무사히 황위에 올랐다. 마누일 1세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며 그를 용서했지만, 황제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여기고 두려움에 떨었다. 1145년 마누일 1세가 룸 술탄국에 대항한 원정을 감행했다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시 황제의 천막으로 달려가서 병사들이 마누일 1세의 죽음을 확인하고 자신을 황제로 받들어줄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멀쩡히 돌아오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150년 마누일 1세로부터 은퇴를 강요받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트라키아에 있는 영지로 은퇴했고, 1151/1152년에 페레스에 테오토코스 코스모소테이라(Theotokos Kosmosoteira)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후 그곳의 헌장을 직접 집필하는 등 종교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학자들을 후원했다. 사망년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1110년경 페레미슐 공작 볼로다르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남 요안니스 콤니노스는 아버지와 망명 생활을 함께 했고, 1139년 룸 술탄국으로 망명한 뒤 무슬림이 되어 메수드1세의 딸과 결혼했다. 딸 마리아 콤니니는 스트라테고스를 역임하고 있던 요세프 브리엔니오스와 결혼했고, 안나 콤니니는 궁정 관료였던 요안니스 아르반테노스와 결혼했다.

1118년경 태어난 막내아들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아버지처럼 망명 생활을 하며 마누일 1세를 상대로 사사건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조리 실패하고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한 뒤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모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국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서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자신이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중을 선동해 수많은 지지자를 규합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라틴인 학살을 유발했다. 그 후 마리아 황후와 알렉시오스 2세를 차례대로 죽인 뒤 황위를 찬탈했으나, 수많은 정적과 민중을 살해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1185년 민중의 봉기로 폐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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