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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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마케도니아 북동부 지역과 릴라 산맥에서 할거하며 세르비아 왕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를 오가며 자치를 누린 영주. 그의 비문에 요안니스 6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알려진 릴라의 성 이반 수도원을 재건한 인물이기도 하다.
2. 행적[편집]
그의 기원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단지 비문에 이름 불명의 여인과 결혼한 사실만 적혀 있다. 1320년대에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섬겼는데, 이때부터 마케도니아 북동부의 스트루미차, 슈티프 일대와 릴라 산맥을 지배했다. 이 지역은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그는 이곳에 군림하면서 주변 국가들의 명목상 봉신을 자처하며 자치를 누렸다.
1327/1328년에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내전을 치르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했고, 그 보답으로 프로토세바스토스(Protosebastos)에 선임되었다. 이 사실은 흐렐야가 1334~1335년에 재건한 릴라의 성 이반 수도원의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40년에 슈티프의 있는 성 미하일 수도원과 아토스 산에 있는 힐란다르 수도원에 여러 땅을 기증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비문에는 메가스 도메스티코스(Megas Domestikos)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뒤 요안니스 5세의 모후 사보이아의 안나를 따르는 세력과 권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는 1341/1342년에 칸타쿠지노스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카이사르를 수여받았으며, 1342년 봄부터는 멜니크 총독을 역임했다. 1342년 여름 칸타쿠지노스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에게 의탁하자, 그는 세르비아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1342년 가을에 멜니크를 두샨에게 넘겼다.
이후 릴라의 성 이반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지내다가 1342년 12월 27일에 사망했다. 불가리아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두샨이 고용한 세르비아 용병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사후 그의 영지는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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