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석/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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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니어 시절
2. 2005-06 시즌
3. 2006-07 시즌
3.1. 국가대표 선발전
4. 2007-08 시즌
5. 2008-09 시즌
6. 2009-10 시즌
7. 2010-11 시즌
8. 2011-12 시즌
9. 2012-13 시즌
10. 2013-14 시즌
11. 은퇴



1. 주니어 시절[편집]


어릴 때부터 쇼트트랙을 타기 시작했고, 그 실력이 중학생 때부터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당시에는 어린 선수들 사이에서는 라이벌 성시백과 더불어 굉장히 유명했었다.

2002-03 시즌 2003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 김현곤, 성시백, 샤를 아믈랭과 경쟁했다.

2003-04 시즌에는 2004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더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하였다.

2004-05 시즌에는 시니어 대표팀 선발에 도전했고, 1차 선발전은 24위 안에 들었지만, 2차 선발전에는 충분한 포인트를 쌓는데 실패해 대표선발에는 탈락한다. 이후 다시 주니어 무대로 돌아가 김현곤[1]곽윤기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주니어 세계선수권 3연패에 성공하면서 또래에서는 이호석을 상대할 선수가 없다는 걸 보여줬다. 성인무대 경험은 전무했지만 시니어 무대에서 뛰어도 정상급 선수로 성장할만한 재목으로 평가받았고 그는 올림픽이 걸린 2005-06 시즌 국가대표 선발에 다시 한번 도전했다.


2. 2005-06 시즌[편집]



2.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2005년 3월 26-27일날 있었던 1차 선발전에서 1500m에서 우승, 500m에서 5위, 1000m에서 4위를 기록했고, 슈퍼 파이널에서 7위를 기록해 총 49점으로 종합 3위를 기록해 1차 선발 8인에 포함되었다. 선발된 8명 중 안현수[2]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은 모두 비한체대 출신 선수들이었고, 당시 한체대 대 비한체대 (정확히는 전명규vs.반전명규) 파벌싸움이 최고조였던 시절이었다. 전명규 라인인 대표팀 코치 김기훈특정 선수를 편애하고 아버지 회사의 스케이트를 신을 것을 강요한다며 입촌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김기훈이 사퇴하고 한체대파 코치인 박세우와 비한체대파 코치 송재근 이 둘이 같이 대표팀을 맡게되면서 파벌싸움은 여전히 계속됐지만 비한체대파 남자 선수들의 입촌거부는 마무리 되었다.

2차 선발전에서는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우선선발이 되었던 안현수도 참가했으며 이호석은 선발확정 순위인 상위 4위 안에 들어가는건 실패했으나 당시에는 2차 선발 상위 4명 이외에 연맹에서 추천한 선수 1명을 포함시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호석이 추천되어 토리노행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2.2. 월드컵 시리즈[편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5위로 선발되었고 당시에는 개인전 출전에 대한 권한은 감독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월드컵에서 잘 해준다면 개인전 출전권 3개(500m, 1000m, 1500m)를 모두 따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보란듯이 월드컵에서 1500m 종합 2위, 1000m 종합 1위를 해내 월드컵 종합 랭킹 2위를 차지했다. 이 정도면 정말 엄청난 거물급 선수가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주니어 세계선수권을 2003년부터 3연패에 성공했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다들 알고있었고 안현수 이외에 한국의 또 다른 에이스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목을 받고 있었다.[3]


2.3.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편집]


  • 1500m
예선과 준결승을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준결승에서는 마지막 바퀴에서 아웃코스로 샤를 아믈랭을 추월하려고 까지 했으나 아믈랭이 이호석이 추월을 성공시키려는 찰나에 대놓고 손으로 푸쉬하며 밀려나갔고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으며 2위로 통과했다. 만약 한국 선수가 했다면 실격 당할 확률이 굉장히 높은 장면이었지만 역시 ISU 답게 캐나다 선수는 쿨하게 넘어가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참고로 아믈랭도 이호석처럼 당시 대표팀에서 굉장히 큰 기대를 받는 차기 에이스이자 신예였다.

결승에서는 오히려 안현수보다도 일찍 선두에서 자리잡아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나갔고, 2위에서 자리를 잡으려던 안현수쪽이 오히려 샤를 아믈랭의 견제와 코너를 돌 때마다 하는 대놓고 푸싱을 하는 바람에 약간의 어려운 상황을 맞았지만 아믈랭이 결국 중국의 리예에게정의구현 밀려 나가 떨어지고, 이호석과 안현수가 각각 1, 2위로 스퍼트를 해나갔지만 마지막 한바퀴에서 안현수가 인코스로 추월해 이호석이 2위로 뒤쳐지며 그대로 순위 유지해 골라인을 통과했다. 이후 양보를 한 게 아니냐는 사람들의 의견이 많았는데(이호석 문서 '논란' 문단 참고) 나중에 이게 1000m에서도 양보를 했다는 식으로 기사가 양산되어 파벌싸움이 이슈화가 되었을 때 그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호석은 양보를 한 적이 없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은 것 뿐이다. 이미 그정도로 인코스를 내줬을때 안현수 같은 선수가 이런 기회를 놓칠리도 만무하다.

  • 10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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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m 결승
마지막 3바퀴까지 체력을 아끼며 계속 뒤에 있다가 마지막 2바퀴에서 환상적인 아웃코스 패스를 하면서 마지막엔 아폴로 안톤 오노까지 추월했으나, 골라인 경합에서 안현수에게 밀리면서 또 다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지막 스케이트 날 경합이 나올 정도로 1500m 결승 경기보다 경쟁이 훨씬 더 치열했다. 비록 중반에 먼저 치고나간 안현수를 추월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어쨌거나 이호석은 본인의 전매특허 아웃코스 패싱을 보여주며 그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경기다.

  • 500m
준준결승에서 헝가리 선수와 같이 넘어지면서 광탈했으며 다행히 아무런 부상은 입지 않았다.[4] 같이 500m에 참가했던 서호진은 예선 탈락, 안현수는 한국 선수 중 혼자 결승에 진출해 동메달을 수상했다.

  • 5000m 계주
준결승에서는 오세종이 초반에 넘어지면서 위기가 있었지만 17바퀴를 남겨놓았을 때 본인이 다른 선수들을 추월한 끝에 조 2위로 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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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에서는 한국의 4번째 주자로 나섰고 자신의 차례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계주 라이벌인 캐나다의 샤를 아믈랭을 상대하게 된다. 아무래도 3번째 주자였던 구멍서호진을 커버해주기 위해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 이호석의 활약이 상당히 중요했던 게 서호진이 안현수가 벌려놓은 격차를 자꾸 줄여놓으니, 이호석의 분발이 없었다면 2번째 주자인 안현수가 상당히 힘들었을 경기였으며 이호석이 없었다면 아무리 안현수여도 금메달까진 힘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도 이호석이 좋은 활약을 해주면서 안현수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안현수가 8바퀴째 때 추월을 시도하지 않고 체력을 마지막 2바퀴에 비축해둘 수 있게 한 템포를 쉴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자신의 마지막 차례에서는 인으로 파고들어 1번 주자인 송석우를 푸시해 한국이 잠깐 1위로 올라서기까지 했고 여기서 캐나다 1번 주자 에릭 베다르가 송석우를 밀지만 않았다면 이 장면에서 한국이 1위를 굳히는 장면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베다르의 반칙 때문에 송석우가 휘청거리며 위기가 있었지만 마지막에 안현수가 대역전극을 이뤄내 결국 한국 남자 대표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안현수의 원맨쇼에 그의 활약은 상당히 가려졌지만 이호석의 공헌은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비록 안현수가 마지막 바퀴에서 마티외 튀르코트를 추월하는 장면만큼의 임팩트는 아니더라도 아믈랭과 서로 맹추격하고 달아나며 불꽃튀는 레이스를 펼치는 장면도 이 계주 경기의 명장면 중 하나다.


2.4. 2006 세계선수권[편집]


아폴로 안톤 오노가 대회 불참을 선언[5]하면서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 일찌감치 자연스럽게 안현수 대 이호석 구도로 좁혀들었다. 남은 한개의 개인전 출전권은 오세종이 얻게 되었고, 송석우서호진은 계주에만 참가했다.

1500m 결승에서 오세종이 제일 먼저 앞으로 치고 나왔으나 경기 후반 이호석과 안현수가 아웃코스로 나가며 오세종을 한꺼번에 추월한다. 이후 안현수가 살짝 아웃코스로 타면서 이호석을 추월할 기회를 노렸고 마지막 한바퀴를 남기고 주특기인 인코스기술로 이호석을 추월한다. 이 과정에서 살짝 충돌이 있었지만 다행히 넘어지거나 실격으로 이어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호석이 마지막 코너를 돌자마자 재빨리 아웃으로 빠져서 회심의 날내밀기를 했지만 살짝 방심했던 안현수가 이를 보고 순간적으로 반응해 같이 날내밀기를 해서 마치 토리노 올림픽 1000m 결승때를 연상시키듯 간발의 차로 안현수가 승리했다.

500m에서도 둘의 재대결이 펼쳐졌다. 당시 이호석은 500m에서 좋은 성적을 내던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 볼 수 있다. 안현수 입장에서는 이호석이 꽤나 난적으로 느껴졌을텐데 안현수가 속도를 받기위해 트랙을 크게 탈때 이호석이 인으로 파고들어 안현수가 계속 아웃으로 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마지막 코너를 크게 돌며 중국선수와 이호석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 2위로 통과하며 짜릿한 역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호석이 마지막 코너에서 살짝 미끄러질때 코너블록을 건드리고 말았고, 판정이 애매하긴 하지만 주심이었던 제임스 휴이시는 안현수가 블록 안으로 지나간 것으로 판단해 안현수에게 실격을 주었고 이로인해 500m에서 쌓았던 포인트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여담으로 이호석이 안현수의 실격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블록을 건드렸다는 근거 없는 악성 루머가 돌기도 했다.

1000m 결승에서는 오세종이 결승진출에 실패해 안현수와 1대1로 맞붙게 되었다. 사실 이호석과 안현수가 500m에서도 경기를 치뤘는데 안현수가 이호석과 충돌하는 바람에 안현수가 실격당했고 본인이 동메달을 땄다. 그래서 포인트가 같았던 상황이었고 둘다 서로를 이겨야 종합 1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둘 다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자유자재로 선보이면서 미국러스티 스미스를 관광보냈고 마지막 한바퀴를 남길 때 이호석이 안현수를 인코스로 추월하나 했으나 안현수가 자리를 잘 견제하면서 골라인을 통과해 그는 또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3000m 슈퍼파이널에서 결국 안현수를 이겨야만 세계선수권을 종합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안현수와 이호석이 충돌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그리고 모든 불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경기다. 경기 막판에 안현수가 완전히 이호석을 밀어버리는 듯한 모습이 나타났고 이호석이 결국 중심을 잃으면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해당 장면을 분석하자면, 안현수가 마지막 코너를 돌기 전 직선구간에서 안쪽으로 코스를 바꿔 인코스로 추월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를 잘 주시하고 있던 이호석이 때에 맞춰 살짝 안쪽으로 움직여 인코스를 틀어막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속도가 많이 붙었던 안현수가 이호석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주춤하지만 결국 충돌하고 만다.[6] 웬만한 스케이터였다면 코너에서 나오면서 안현수가 아웃으로 치고 나올 것이라 착각해 그의 크로스 기술에 인코스로 농락을 당했겠지만, 이호석은 당시 최고 실력자 중 한명에 안현수를 여러 번 상대해 본 팀동료였고 이미 1500m에서 안현수에게 이러한 추월을 한번 당했기 때문에 이를 모를리 없었다. 안현수에게도 사실 마지막 코너 하나를 돌면 우승 여부가 판가름 나는 상황에서 아웃코스로 추월하는건 특히나 이호석 같은 선수를 상대로는 성공률이 낮은 도박이었을 테니 인코스가 맞는 판단이기는 했다. 만약 아웃으로 돌았더라도 이호석 본인도 코스견제에 굉장히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돌아 인과 아웃 모두 틀어막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 결국 둘 다 실력이 너무 뛰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벌어진 불운이기도 하다.

경기 주심이었던 제임스 휴이시안현수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판단해서 실격을 줬지만, 본인은 넘어져서 5위로 들어와 총점 60점을 받으면서 결국 8점 차이로 안현수가 대회 종합 우승을 했다. 비디오를 보면 안현수가 이호석에게 다가가 사과하는 모습이 나오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때 파벌싸움이 엄청나게 심했던 상황이었다.

이 사건 당시 엄청나게 욕을 먹은[7]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에게 자신의 심경을 하소연했고, 이에 분노한 안기원이 선수들이 귀국하는 공항에서 쇼트트랙 관계자에게 '이호석과 오세종이 짜고 안현수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화를 냈고 멱살잡이를 한다.(일명 공항쇼 사건) 이에 열받은 이호석의 엄마는 정신줄을 놓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아래 영상 앞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YTN과 인터뷰 중이던 안현수가 아버지의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론이 이호석과 이호석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쪽으로 재형성되었다. 이호석의 어머니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이 안타깝게 은메달을 따고 1위를 차지 못한게 아쉬운 처지인데 같은 팀 1위의 선수 아버지가 저런 말을 하니 열 받아서 그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사실이다.

이 사건이 방송을 타게 되면서 우리의 위대하신 빙엿에서는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그리고 비디오 판독에서 오세종이 이호석에게 추월당한 직 후 이호석을 따라 아웃코스로 추월을 하던 안현수의 위치를 미처 판단하지못하고 서로 어깨를 살짝 부딪히면서 선두권 밖으로 밀려나갔다. 하지만 고의성이 없었으므로 이호석과 오세종, 안현수 모두 잘못이 없다는 판정을 내린다. 그리고 안현수의 아버지는 빙상 경기장 1년 출입 금지 처분을 받는 것[8]으로 마무리 지어졌으나, 이 사건 당시 서로의 부모님[9]에게 좋지 못한 말을 들은 양 선수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최악의 결과만 가져오게 됐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 이 대회는 (특히 한국) 팬들에게는 상당히 가치가 있는 대회였다. 경기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호석과 안현수는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의 상승세를 이어가 이 세계선수권에서는 더욱더 수준 높은 레이스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 투톱이었던 두 선수가 종합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기 때문에 결승에서 맞붙은 네 경기 모두 명승부로 평가받고 있다.

5000m 계주 결승에서는 같이 결승에 올라온 나라들은 캐나다, 미국, 중국으로, 마지막 두 나라는 안그래도 전력이 약해서 각각 아폴로 안톤 오노, 리자쥔 원맨팀으로 불리던 팀들인데 리자쥔은 은퇴를 선언한 상황이고 오노는 휴식을 이유로 불참한 상황이었다. 결국 올림픽 계주 결승에 이어 캐나다와 재대결이 성사되었다. 한국팀은 송석우-이호석-안현수-서호진 순으로 토리노와는 다르게 이호석이 마지막 주자를, 안현수가 세번째 주자를 맡게 되었다. 이호석이 결정적인 추월과 마무리까지 담당하며 맹활약한 경기이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두바퀴는 송석우에게 푸쉬를 먼저받았으나 캐나다의 1번주자인 마티외 튀르코트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에게 굉장히 좋은 푸쉬를 하여 트랑블레가 1위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호석이 빠르게 반응해 곧바로 인사이드로 추월해 다시 선두로 나섰고 마지막 반바퀴를 남기고는 트랑블레가 대놓고 팔로 민것을 이호석이 튕겨져 나갈것을 기여코 버텨내며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 코너를 돌았다. 마지막 결승선을 앞두고는 뒤에서 몸싸움을 거는 트랑블레와 날내밀기 경합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런 활약에도 주심이 제임스 휴이시여서였을까 한국이 어이없는 실격을 받고 금메달은 캐나다가 가져가게 된다.


3. 2006-07 시즌[편집]



3.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1차 선발전 개념인 종합선수권에서 성시백에 이은 종합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2차 선발전에서는 안현수가 종합 우승하며 1위로 선발된 가운데 송경택, 김병준, 김현곤과 34점 동률을 이뤘지만 순위 합계 점수에 따라 5위로 턱걸이 승선한다.


3.2. 월드컵 시리즈[편집]


시즌 초기에 안현수와 이호석의 경쟁이 굉장히 더욱 더 치열했고, 월드컵 경기에선 종종 둘의 충돌이 나오기도 했다.[10] 다만 이때는 파벌싸움이 나아지고 있던 시절이었고 이전 시즌과는 달리 한체대, 비한체대 선수들이 따로 나뉘어 훈련하지도 않았지만, 워낙 파벌로 이미지가 나빠진 상황이라 파벌싸움이 지속되어 저런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오해를 사는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쇼트트랙부터가 이미 경쟁자들끼리 접촉과 충돌이 많이 일어나는 스포츠이니 과대해석은 금물.

이호석은 이 시즌부터 부진을 타기 시작해 월드컵에서 1000m 랭킹 1위를 확보한 것 이외에는 모두 다 날려먹게된다. 슬럼프에 빠진 그에겐 상황이 그리 좋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한국처럼 세대교체가 빠르고 경쟁이 심한곳에서는 쇼트트랙 선수에게 슬럼프가 온다는 건 다른 종목의 선수보다도 상당히 더 위험하다. 심지어 국가대표 동료 선수들조차 이호석의 선수 생활이 끝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11] 엎친데 덮친격으로 시즌 막바지인 3월에는 발목부상을 당해 2007 세계선수권에 불참했고, 선발전에서 차순위를 기록했던 성시백이 대신 계주 멤버로 출전했다. 안현수도 부상으로 모든 월드컵 경기를 제대로 치루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2007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폼을 회복해 2006년처럼 압도적이진 못했지만 세계선수권 5연패에 성공했다.


4. 2007-08 시즌[편집]



4.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1500m에서 3위, 500m에서 1위를 기록해 일찌감치 선발에 유리한 지점을 확보했다. 1000m에서 논란이 있었는데 이호석과 친한 선수인 송경택의 선발을 돕기위해 고의적 송경택에게 자리를 내주고 게속해서 추월을 시도해 온 성시백이승훈을 방해했다. 경기는 송경택이 1위, 이호석이 실격을 받으며 끝났지만 이로인해 3위를 기록한 성시백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이호석은 당시에도 근거없는 파벌루머 때문에 이미지가 원래도 안좋았으나 이로인해 더 실추된건 덤이며 그의 팬들조차 쉴드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후 3000m 슈퍼파이널에서는 4위를 기록했고 이승훈이 1위를 기록하는데는 실패해[12] 그와 5점 차로 송경택에 이어 최종 순위 2위로 선발되어 개인전 출전권을 무사히 확보했다.


4.2. 월드컵 시리즈[편집]


지난시즌과는 달리 슬럼프를 털어내고 재기에 성공한다. 팀동료이자 라이벌인 안현수 또한 최고의 폼으로 복귀했으며 송경택과 함께 셋이서 월드컵 중장거리 종목 메달들을 쓸어담았다. 또한 이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장면들이 나왔는데 안현수가 의도적으로 이호석과 송경택이 더 높은 순위를 기록할 수 있도록 도운적도 있고, 반대로 이호석이 저 둘을 돕거나[13] 정면대결에 포기하고 안현수가 선두에 있으면 제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2위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14] 대표팀내 파벌싸움 자체는 사실상 종결되어 불화가 없었을 때고 여러 시즌을 같이 보내며 더 친해졌기에 이런 상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경쟁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며 1차 월드컵에서는 비록 안현수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1500m, 1000m에서 명경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4차 월드컵까지 종료후 안현수가 1500m, 1000m 랭킹 1위[15]를 기록하고 있어 그가 세번째 월드컵 우승을 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5차 월드컵을 코앞에 두었던 2008년 1월, 안현수가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중 무릎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되며 5,6차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이호석이 5,6차 월드컵에서 1500m 종목에서의 활약으로 안현수의 포인트를 역전하여 랭킹 1위로 올라선다. 이후 최종적으로 이호석이 자신의 첫 월드컵 종합우승을 달성하게된다.[16] ISU 공식홈페이지에서는 해당시즌 이호석의 500m 랭킹이 88위라고 되어있지만 사실 이호석은 07-08시즌 500m 경기를 단 하나도 출전하지 않았다.[17] 추측으로는 안현수와 랭킹이 동률이 되니 ISU가 이호석의 06-07시즌 500m 출전을 반영시킨 것으로 보인다.[18]

한때 이호석이 송경택과 함께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봉쇄해서 안현수를 막았다며 파벌싸움이 여전히 지속됐다는 루머가 있었다. 우선 송경택은 안현수와 좋은 친분을 가지고 있던 선수다. 이호석과 함께 힘을 합쳐 노골적으로 안현수를 막으려고 했다는 건 주장은 신빙성이 적다. 대부분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얼빈 월드컵 1500m 결승 경기를 뽑는데, 우선 송경택은 이호석이나 안현수의 스피드를 낼 정도의 선수는 아니며, 앞에있던 이호석을 따라잡기 위해 전력질주를 하고 있던 게 뒤에 있는 안현수를 봉쇄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19] 만약 고의성이 있었다면 안현수가 이미 알았을 테고 경기직후 송경택, 이호석과 서로 격려를 하는 모습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네덜란드 헤이렌베인에서 열린 3차 월드컵 계주 결승에서는 본의아니게 역대급 역전경기가 나오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한국이 계주에서 워낙 막강한 포스를 보여주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고, 같이 결승에 올라온 나라들 중에 상대가 될만한 전력들이라고는 중국과 미국이었지만 이 두 팀들마저도 당시 한국 남자대표팀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레벨이었다. 송경택-안현수-이호석-이승훈 조합으로 출전한 한국은 일찌감치 두번째로 달리던 중국을 엄청난 거리차이로 따돌리고 여유롭게 레이스를 하고있었다. 18바퀴가 남았을 때 이호석이 넘어지면서 중국이 역전을 하게 되고 한국을 거의 한바퀴가량이나 앞지르는데 성공한다. 이 날 빙질이 최악이어서 미국같은 경우는 여러차례 넘어지는 장면을 보여줬고 기록을 봐서는 다른 두 나라도 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이었다면 중국의 1위가 확정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나 한국 선수 네명이 무섭게 전력질주를 하며 중국을 맹추격한다. 이호석 같은 경우에는 2번 정도 자신의 차례를 더 타고 난 후 선수 보호 차원에서 송재근 코치가 이호석을 제외시키고 남은 세 명이서 경기를 이어나가게 지시한다. 10바퀴 남은 상황에서는 이 거리를 거의 반바퀴정도 줄이며 따라오는 한국팀이 같은 카메라 프레임에 잡히기 시작한다. 5바퀴 남은 상황에 터치를 받은 송경택은 이호석이 빠졌기 때문에 한바퀴를 더 타면서 중국이 터치를 할때 인코스로 추월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체력이 소진되어 코너링을 할때 살짝 주춤하며 중국에게 다시 인코스 추월을 허용하지만, 마지막 주자였던 안현수가 마지막 바퀴째에 여유있게 해결사 노릇을 하며 1위로 골인하였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짓는 중국 대표팀 헤드코치 리옌의 모습은 덤이다.

2017년 12월 송경택이 한 방송에서 밝힌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당시 한국팀이 너무 강력했던 나머지 안현수가 실제로 농담삼아 한명이 경기 중에 넘어져서 역전극을 만들자고 제시했고, 송경택과 이승훈은 이에 동조했지만 이호석은 이에 반대하며 안전하게 타자고 했고 결국 하지 않기로 되었던건데 아이러니하게 이호석이 넘어지게 되었다.


4.3. 2008 세계선수권[편집]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던 때 안현수가 훈련 중에 중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한국 남자대표팀의 또 다른 에이스였던 이호석이 그 해 강릉에서 열릴 세계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할거라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대회가 열리고 아폴로 안톤 오노가 저력을 발휘하며 예상했던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 이호석은 1500m 2위, 1000m에서 우승을 기록했으나, 오노 또한 500m 우승과 1000m 2위를 기록해 둘의 포인트가 동률을 이루면서 결국 3000m 슈퍼파이널에서 두 사람 중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종합 우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실력적으로는 이호석이 당연히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여유를 부리다가 오노보다 스퍼트 타이밍이 뒤쳐지게 된다. 하필이면 3000m 종목답게 뒤쳐지는 선수들이 많았고 본의 아니게 이호석의 코스를 막게되어 오노를 추격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오노보다 한순위 낮은 4위로 통과해 어이없게 우승을 내주면서 대회를 종합 준우승으로 마감한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열렸던 대회였는데 종합 우승을 그것도 20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에게 금메달을 뺏은 오노에게 넘겨줘 많은 비난을 받았고, 사람들은 안현수 없이는 안된다며 그는 더욱 더 비교를 받으면서 까였다.

사실 당시에는 안현수, 이호석을 제외하고도 송경택, 이승훈, 성시백, 곽윤기등이 대표팀에 있었을 정도로 남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당시 한참 포텐이 터지고 있던 성시백은 5번째 순위로 선발이 되었기때문에 계주경기에만 참가할 수 있었고, 안현수의 부상으로 덕분에 세계선수권 개인전출전 자격을 얻었던 이승훈(4번째 순위)은 2007-08 시즌 월드컵 활약이 나빴던건 아니지만 송경택보다는 아래였다고 평가받았다. 송경택은 실력이 있는 선수였기는 하나, 안현수나 이호석처럼 정말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최상급 선수는 결코 아니었으며, 덕분에 안현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이호석에겐 가장 큰 경쟁자는 없었던 상황이지만 어떻게 본다면 이호석은 다른 외국선수들을 뒤흔들어줄 '최고의' 파트너를 잃었던 셈이다.


5. 2008-09 시즌[편집]



5.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총 58점을 획득해 1위 곽윤기, 2위 성시백에 이은 3위로 선발에 성공하며 개인전 출전권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5.2. 월드컵 시리즈[편집]


1000m 1위, 1500m에서 3위를 기록해 주종목에서도 여전히 기량을 이어나갔고 취약 종목인 500m에서도 랭킹 5위에 안착해 엄청난 발전을 보여줬다. 하지만 월드컵 종합우승은 당시 최고의 폼을 보이던 성시백에게 가게되어 이호석은 종합 준우승을 하게된다. 당시 유망주들이었던 곽윤기이정수 또한 랭킹 탑 5위권 안으로 들어왔던 상황이었고 저 둘의 기량이 빠르게 발전해 나갔으며 치고올라오는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이호석에겐 세계선수권 경쟁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 시절 대표적인 경기로는 1차 월드컵 5000m 계주 결승, 2차 월드컵 500m 준결승, 2차 월드컵 1500m 결승, 6차 월드컵 500m 결승이 있다.


5.3. 2009 세계선수권[편집]


1500m 결승에서 짜릿한 막판 추월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SBS 해설을 보던 전이경이 그의 1500m 경기 활약을 보며 "이호석 선수의 실력으로 봐서는 진작에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어야 했다." 라고 덧붙히기도 했다. 이후 1000m를 우승했고 3000m에서 2위를 기록해 대활약하면서 지난 두 시즌의 아쉬움을 모두 털어내고 당당히 종합 1위로 본인의 커리어 첫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을 해냈다. 그 덕분에 선발전을 스킵하고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팀에 자동선발이 되었다.

세계 팀선수권에서는 5000m 계주를 포함한 여러 이벤트에서 포인트를 따내는데 성공하며 2006년 이후 3년 만에 한국 남자 대표팀이 팀선수권 우승을 탈환하는데 일조했다.


6. 2009-10 시즌[편집]



6.1. 월드컵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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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월드컵에서는 개인전 금메달은 따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좋은 폼을 보였고, 5000m 계주에서 2번 주자로 나서 금메달을 따는데 일조했다. 2차 월드컵에서는 전종목 메달을[20] 따냈을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2차 월드컵 1000m 결승, 2차 1500m 결승. 특히 2차 월드컵 계주 결승에서 보여준 역전극은 정말 그 밖에는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후 부상을 당해 3차, 4차 월드컵에 불참하게 되었으나, 그가 보여준 활약상을 토대로 부상이 아니었다면 월드컵 종합 우승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올라있었던 상태였다. 결국 3차, 4차 월드컵 불참으로 랭킹이 중간 선두에서 최종 6위로 하락하였지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선수로 예상되었다. 다만 이후 이호석이 밝히기론 이 부상이 올림픽에서 변수가 되었다고 한다.


6.2.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편집]


  • 1500m
우승 후보답게 예선과 준결승을 모두 1위로 가볍게 통과했다. 팀동료인 성시백이정수도 각자 속한 조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결승진출하며 1500m가 올림픽 공식종목으로 채택된 이래로 최초로 한국 남자 선수가 3명 모두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역시 예상대로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가 거친 몸싸움을 걸어왔고, 주로 이와 경합을 벌인 선수들은 이정수와 성시백이었다. 특히 마지막 2바퀴를 남기고는 오노와의 몸싸움 때문에 스피드가 줄었던 성시백을 이정수가 이를 놓치지 않고 아웃사이드로 추월하며 선두로 나섰고, 성시백은 빠른 가속 능력을 지녀 이정수를 재차 추격했으나 오노는 뒤쳐졌다. 이호석은 마지막 바퀴가 돼서야 드디어 승부를 보기 위해 스퍼트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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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그의 주특기이기도 한 크로스기술로 인코스 추월을 시도했으나 공간이 너무 좁았고, 이호석의 스케이트 날이 성시백의 스케이트날에 걸리며 같이 넘어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실 그가 올림픽 전에 이런 움직임으로(일명 '칼치기') 짜릿한 역전 우승을 거둔 적이 꽤 많았지만 이번 만큼은 정말 엄청난 판단 미스였다. 또한 성시백은 이정수와의 날 내밀기 경합을 염두에 두고 인코스로 파고 들기 위해 코너를 살짝 크게 돌던 상황이었다. 또한 공간이 굉장히 좁았기 때문에 성시백 입장에서도 설마 이호석이 그런 식으로 위험하게 파고들 것이라고는 예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본인은 실격당했으며, 성시백은 5위로 들어왔다.

만약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면 매 경기 반칙과 다름없는 거친 플레이를 한 오노가 비난의 중심에 섰을 게 분명했으나[21], 최종 코너에서 자국 선수를 무리해서 제치려 하는 바람에[22] 아폴로 오노와 J.R. 셀스키가 한국이 싹쓸이 했어야 했을 메달을 따면서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다만 단체전이 아닌 개인 경기에서는 자신의 최고 기록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한 것이기에 이호석의 행동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성시백에게 사과하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충격이 컸던 성시백은 이를 외면하며 링크장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성시백의 어머니인 홍경희씨의 중재와 성시백도 이호석의 사과를 받아주면서 일단은 팀원끼리의 불화없이 마무리되었다.

  • 1000m
예선과 준준결승 모두 무난하게 1위로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같은 조로 올라온 팀원인 이정수가 먼저 선두로 치고 나가고 이후 이호석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략을 짜고 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나 선두에서 캐나다의 프랑수아 아믈랭이 선두에서 경기 템포를 빠르게 끌어올린 가운데, 미국의 J.R. 셀스키가 2위에서 아믈랭에게 붙어 계속해 이정수가 치고 올라오지 못하게 견제했고 이 중 한번은 누구한테 배운건지 교묘하게 이정수를 손으로 밀기까지 한다.[23] 이후 마지막 두바퀴 남은 상황까지도 이정수가 치고 올라가지 못하자 이호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인코스로 무려 저 3명을 모두 추월하는 '역시 이호석'이라고 감탄 할만한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선두로 올라간다.

이후 이호석의 움직임으로 인해 급해진 아믈랭과 셀스키가 속도를 바짝 올렸고, 셀스키가 인코스로 추월을 성공했지만 코너를 돌고 난 후 아믈랭이 셀스키에게 뒤에서 충돌하며 넘어졌으며, 이 혼전을 틈타 이정수가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후 셀스키가 실격당하고 아믈랭이 어드밴스를 받아 이 조에서 3명이 결승에 진출했다. 사실 깐깐하게 비디오 판독을 해본다면 셀스키는 이정수를 푸쉬한 것으로 실격받아 마땅했고, 아믈랭은 이미 추월을 당한 상태인데 뒤에서 셀스키에게 충돌하며 셀스키의 속도가 줄게 만들었으니 같이 실격당했어야 됐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열린 올림픽이어서 아믈랭이 구제받는 이상한 판정이 내려졌다.

결승에서는 실패로 돌아간 준결승때 작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이호석이 이정수보다 앞자리에서 경기를 풀어나갔다. 같이 결승에 올라왔던 외국 선수들은 아폴로 안톤 오노, 샤를 아믈랭, 그리고 이전 라운드에서 어드밴스를 받은 프랑수아 아믈랭이었다. 아믈랭 형제는 아주 초반부터 선두에 서서 경기를 빠르게 진행시킨다. 하지만 경기 중반 오노가 프랑수아 아믈랭을 제치고 나서 코너를 돌다가 미끄러지고 선두권에서 균열이 생긴 이 틈을 타 이호석과 이정수가 동시에 아웃코스로 스퍼트하기 시작한다. 초반부터 페이스를 너무 빠르게 이끌었던 아믈랭 형제는 둘다 체력이 떨어져가고 있던 상태였고 이호석과 이정수에게 동시에 추월당한다. 그리고 한바퀴 남은 상황에서 이호석이 선두를 굳히며 본인의 첫 개인전 금메달 따나 싶었으나 뒤에서 바짝 따라오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정수에게 반 바퀴를 남기고 인사이드로 추월 당했고 결국 2위로 골인해서 다시 목에 은메달을 걸었다. 토리노에서 1500m, 1000m 은메달 두 개, 밴쿠버에서 남자 1000m 개인에서 은메달을 받아 개인전에선 은메달만 3개를 땄다. 나중에 이정수의 금메달을 축하하긴 했지만 결승선을 통과한 직후에는 또 한번의 금메달을 놓친 것에 대해 허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준결승과 결승 모두 사실상 이호석이 만들어낸 경기나 다름 없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 500m
500m에서는 2008-09 시즌 때부터 단거리 종목에 신경 쓴 결과가 눈에 띄게 보였다. 예선 통과를 가뿐히 하고 준준결승에서는 캐나다의 올리비에 쟝과 중국의 한지아량을 상대로 신들린 '칼치기' 인코스추월을 성공해내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준결승에서는 곽윤기,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 아폴로 안톤 오노와 맞붙게 되었다. 이호석은 스타트를 2위로 끊어 좋게 출발했으나 마지막 2바퀴를 남기고 트랑블레를 추월하기 위해 스퍼트 하는 과정에서 코너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스케이트날이 헛돌며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호석이 먼저 치고 나가고 이후 뒤에 있던 곽윤기와 함께 결승 진출하도록 판을 짰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둘 다 결승 진출에 실패해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파이널 B에서는 결승 진출실패로 인해 기운 없는 모습으로 스타트 라인 섰고 사실상 경쟁에 포기하며 무려 1분 훌쩍 넘은 시간이 돼서야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 뒤 최종적으로 오노가 결승에서 실격당하며 최종 7위를 기록했다.

  • 5000m 계주
500m가 끝난 바로 당일 5000m 계주 결승이 펼쳐졌고, 이호석은 팀의 최고 실력자였기에 두번째 주자를 맡아 경기를 뒤집는 에이스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으나 예상과는 달리 세번째 스케이터로 출전했다. 또한 5000m 계주에서는 500m 준결승에서 넘어진 것 때문인지 500m 결승에서 넘어졌던 성시백과 함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들의 실력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부진했다. 500m에서 날에 손상이 갔는지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간건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500m 준결승에서 벌어진 일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타격이 있었던 건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호석은 계주에서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추월을 도맡아오던 선수였지만 이 경기에서는 안넘어지는데만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두번째 주자를 맡은 곽윤기 또한 중간중간에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500m 후유증 탓에 한국은 역대 최고의 계주팀을 데리고 최악의 팀워크를 선보인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두바퀴에서는 선두로 달리던 캐나다를 잡기는 커녕 성시백이 곽윤기를 제대로 푸쉬하지 못하는 사고가 벌어지며 꼴찌로 내려앉았고, 곽윤기가 고도의 집중력으로 저력을 발휘해 한지아량과 오노를 마지막 코너에서 제쳐버리며 결국 한국에게 값진 은메달을 선사한다. 경기가 끝나고 별 활약을 해줄 수 없었던 이호석이 곽윤기에게 굉장히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6.3. 2010 세계선수권[편집]


종합 우승을 하면서 2009년에 이어 2년 연속 세계선수권을 제패하며 남자 선수로는 마크 가뇽, 안현수 이후로 나온 세번째 2연속 우승자가 되었다.[24] 하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그것도 유일한 벽이었던 안현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을 실패한 건 정말 아쉬울 뿐이다.

올림픽 시즌에 열린 세계선수권이라 관심도가 떨어지기도 했었고, 결정적으로 남자 대표팀이 우승한 5000m 계주 결승에서 부상으로 대회를 기권했다고 알려졌던 이정수가 진짜로 부상 당한 성시백 대신 출전한 것이 화두가 되어 곽윤기-이정수의 국가대표 선발전 담합 논란에 모든 관심이 쏠리는 바람에 이호석의 대기록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7. 2010-11 시즌[편집]


2010 세계선수권을 우승한 이후엔 성시백과 함께 조금씩 부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후 노진규, 신다운 등의 신예들이 들어오고는 선배로서, 우승을 노리기보다는 잘 적응하게끔 받쳐주기도했으며, 후배들이 주로 참가하는 1000m나 1500m에 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종목이 아닌 500m나 계주에서 활약하며 시즌을 보냈다.

4차 월드컵 계주에서 역대급 활약을 선보였다. 09-10시즌 2차 월드컵 결승과 굉장히 흡사한 방식으로 한국팀에 역전승을 가져다 준다.


8. 2011-12 시즌[편집]


신다운과 곽윤기에 이어 3위로 선발되었으나 노진규가 2011 세계선수권을 우승해 자동선발이 되었기 때문에 이호석은 커리어 최초로 개인전 출전권이 없는 계주멤버로 선발되었다. 기량은 이전시즌보다도 더 떨어진 시점이라 항상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호석답지 않게 활약상이 굉장히 적었다.


9. 2012-13 시즌[편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나이도 2012년 기준 26살이라 쇼트트랙 선수로 치면 아주 많지는 않은 거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었다. 노진규곽윤기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고, 실력있는 신예들이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며 경쟁이 더욱더 힘들어지고 있다.

허나 풍부한 경험 덕에 당시에는 가장 노련하고 기술적으로도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 중엔 최정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발전 탈락 전까지만 해도 7시즌 연속 국가대표로 발탁됐으니 실력을 논하자면 입 아픈건 당연지사다. 아무리 까이거나 올림픽에서 개인종목 금메달이 없을지언정 실력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스케이터임은 사실이다.


10. 2013-14 시즌[편집]



10.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대표팀 선발전에서 5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신다운2013 세계선수권을 종합 우승하여 자동 선발됐기 때문에 사실상 6위나 다름없는 셈이다. 즉 이호석은 소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고, 월드컵에만 참가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쟁쟁한 후배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선발됐다는 것 자체로도 클래스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며 이호석을 또 깠다. 애초에 베테랑들이 신예들에게 매번 양보를 해줘야 할거면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규혁은 벌써 몇년전에 은퇴했어야 됐다. 굳이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이호석을 넘지 못한 젊은 선수들의 잘못이지 이호석의 잘못이 아니다. 이호석은 전성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선발전을 치뤄서 정정당당하게 월드컵 멤버로 선발이 되었고, 신다운의 세계선수권 우승이 아니었다면 노진규가 올림픽에 불참했든 안했든 그대로 계주 멤버로 들어갔을 것이다.


10.2. 월드컵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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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년 만에 다시 펼쳐진 둘의 대결
한국 남자 쇼트트랙 팬이라면 모두들 그리워하는 라이벌 구도다.
월드컵에선 빅토르 안과의 맞대결도 팬들 사이에서 큰 기대를 모으긴 했으나 겨우 500m에서 딱 한번 경기를 펼쳤다.[25] 개인전 출전권이 걸려있는 신다운, 이한빈, 박세영이 기대 이하의 활약으로 올림픽 티켓확보에 비상이 걸리자, 개인전 참가자격이 없는 노진규와 올림픽에 못 나가는 이호석이 출전권을 따기 위해 분전했다.

그런데 올림픽을 불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노진규가 불의의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차순위인 이호석이 노진규 대신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쇼트트랙 대표팀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출전이다. 올림픽 전망이 밝지 않은 남자 대표팀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선수들의 파이팅을 끌어올려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일단 개인전 출전권은 없기 때문에 계주에서만 활약할 가능성이 높지만, 신다운과 이한빈이 단거리에 취약하기 때문에 대신 500m에 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도 있었다.


10.3. 2014 소치 동계올림픽[편집]


그는 사람들의 예상대로 올림픽 5000m 계주 준결승에서 네번째 주자로 나섰다. 원래 대표팀은 이호석보다는 김윤재를 넣을 생각이었지만, 당시 김윤재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대신 베테랑인 이호석을 넣었다.

미국·네덜란드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다가 간신히 선두로 올라섰고 마침 4바퀴가 남은지라 그대로만 유지하면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때, 당시 주자였던 이호석이 코너를 돌던 도중 미국 선수가 이호석의 팔을 손으로 쳤는데[26], 속도가 많이 붙은 상태에서 일어난 접촉이라 결국 미끄러졌다.

그러면서 그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왼팔을 뻗자 미국선수가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3위로 밀려났고 후에 순위 변경 없이 그대로 골인, 5000m 계주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그 바람에 사실상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던 카자흐스탄이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심판진은 미국에게 어드밴스를 받을 자격을 인정해주면서 한국은 12년 만에 올림픽에서 5000m 계주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한국 중계진은 미국 선수가 팔을 밀어 이호석이 넘어졌으니 한국이 어드밴스를 받아야 한다고 해설했다. 미국 선수가 먼저 이호석의 팔을 쳤으니까 미국 선수에게 잘못이 있다고 본 거 같다. 실제 느린 화면을 보면 미국 선수가 손으로 어깨를 친 것 자체는 고의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고 가벼운 신체 접촉으로 볼 정도의 수준이었고, 이호석이 왼팔을 내민 거 역시 고의적이진 않았지만 미국 선수가 이 때문에 넘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이 어드밴스를 받긴 했으나 한국이 실격 처리되지는 않았으니, 딱히 미국에 유리한 판정이라기보다는 이호석의 과실이 인정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대한민국이 쇼트트랙 단체 경기에서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12년 만에 일어난 일로, 이호석은 넘어진 바람에도 욕을 먹고 있지만, 과거 안현수/빅토르 안과의 관계에서 나온 루머가 더해져서 나노 단위로 까이고 있는 건 덤이다. 그리고 그 뒤 남자 대표팀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굴욕까지 당했다.

일단 그 후 여자 500m 결승전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이호석에게 향한 까임의 화살 대부분이 박승희가 넘어지는 원인이 된 영국엘리스 크리스티에게 향하긴 했지만, 2010, 2014 두 번의 올림픽에서 그가 넘어진 게 큰 실책으로 이어졌으니 네티즌에겐 까야 제맛, 영구까임권의 반열에 오르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본문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원래 잘 넘어지기도 하고 파벌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였지만, 한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4년에 한 번씩 쇼트트랙을 접하는 사람들이라서 이런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으니. 특히 위에도 적혀 있는 예전의 어머니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면서 빙상연맹과 함께 공적(公敵) 수준으로 까이고 있다.

준결승 다음날인 2월 14일 후배 신다운이 선배 이호석에 대한 지속적인 루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글을 썼다가 오히려 역으로 더 까였다. 다만, 이 때는 이호석을 욕하기 보다 "왜 너가 눈치없이 나서냐?"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10.4. 2014 세계선수권[편집]


5000m 계주 준결승에서 올림픽 때처럼 네번째 주자로 나섰다. 올림픽에서의 사건 때문인지 초반에는 조심스럽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나, 경기 후반 레이스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아직 녹슬지 않은 자신의 전매특허 아웃코스 패싱을 보여주면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팀을 2위에서 1위로 끌어올렸다. 물론 계주는 인코스를 잘 점유해야 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이한빈에게 밀어주면서 다시 2위로 내려앉았지만, 마지막 박세영의 활약으로 대한민국이 1위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는 본인 대신 김윤재가 네번째 주자로 나섰으며, 박세영이 빅토르 안, 잭 웰본, 싱키 크네흐트와의 마지막 경합 끝에 계주 은메달을 차지했다. 유독 김윤재 차례에서 우리나라가 힘을 못 썼기 때문에, 차라리 이호석과 김윤재의 준결승, 결승 출전 순서를 바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1. 은퇴[편집]


2013-14 시즌을 끝으로 조해리와 함께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그렇기에 그에겐 이 세계선수권 계주 은메달이 의미있게 다가올 것으로 보여졌다. 원래는 올림픽에 나갈 후배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주기 위해 훈련 파트너로만 활동하다가 퇴촌 후 은퇴를 할 계획이었는데, 노진규가 대표팀에서 낙마하면서 대타로 출전하게 되었다. 선수 생활 내내 시끄러운 일들과 구설수에 오르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커리어뿐만 아니라 실력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났던 선수고 세계 수많은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아왔던 선수며 쇼트트랙 역사에 크게 남을 인물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2015-16 시즌 2차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한때 이호석이 코치하고 있는 박지원김한울[27]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는데, 둘다 이호석이 구사하던 스케이팅과 흡사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박지원의 경우에는 김한울보다도 이호석의 스케이팅과 더 비슷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2015-16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좋은 가능성을 보여줘서 큰 기대를 받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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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04시즌에 시니어 대표팀이었다.[2] 세계선수권 우승자 자격으로 1차 선발전을 건너뛰고 우선선발.[3] 참고로 이 시절에는 주니어 때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 선수들은 시니어 무대에서도 성공할거라는 걸 당연시했던 때다.[4] 참고로 이호석은 4년 후에 2010 밴쿠버 올림픽 500m 준결승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계주 결승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영향을 끼쳤다.[5] 심지어 미국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 대회다.[6] 더군다나 이호석은 마지막 코너 이전 코너에서 안현수에게 인코스각을 내어주지 않기위해 인코스에 바짝 붙어 코너를 돌았는데, 이렇게 되면 인코스 방어에는 유리해지지만 코너를 크게돌때보다 가속은 떨어지게 된다.[7] SBS에 해당 장면이 방송됐다.[8]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담합설 때문이 아니라 빙상연맹 부회장을 상대로 멱살 잡은 것 때문에 받았다.[9] 아래의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안현수와 이호석의 친분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10] 흔히 나도는 2006-07 월드컵 1000m.[11] 성시백이 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12] 1위는 성시백이 따내어 기적적으로 선발에 성공했다.[13] 그 중 4차 월드컵에서는 1000m 결승에서 미국의 조던 말론에게 진로방해를 했다고 이호석이 실격받은 경기도 있다.[14] 사실 이게 서로에게도 윈윈이긴 하다. 월드컵보다는 결국 중요한 대회는 세계선수권이기도 하고 올림픽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둘이 무리해서 부상의 위험을 만드느니 차라리 안전하게 타는게 더 현명하다.[15] 이호석은 두 종목 모두 2위.[16] 다만 안현수가 부상으로 이탈하기 전까지는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이며 선두에 있었기 때문에 이호석이 세계랭킹이 1위를 달성했으나 안현수가 없어서 우승했다는 시각때문에 임팩트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17] 안현수도 마찬가지로 07-08시즌 500m에 참가하지 않았고, 대신 안현수는 이호석과 달리 06-07시즌에도 500m 참가기록이 없다.[18] 다른 예로 바로 직후 시즌인 성시백도 1000m 경기를 하나도 뛰지 않았으나 07-08시즌 1000m를 두 번 출전한 것을 반영해 118위로 기록되어 있다.[19] 당연히 2위가 3위보단 나으니깐 2위를 유지하려는 의도는 있었을 테지만, 이호석이랑 짜고 막았다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는 얘기다.[20] 500m 한 종목만 동메달을 땄고, 나머지는 모두 1위를 기록했다.[21] 준결승에서 이정수가 피니시 라인 진출 전에 오노의 몸싸움에 항의하는 모션을 했으며, 결승에서도 상당히 막장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이후 27일에 있었던 500m 결승에서도 오노는 비슷한 행동을 했고, 주심이 이에 그를 실격 처리해 성시백은 은메달을 쟁취했다.[22] 심지어 이 때 성시백은 아직 군면제 혜택을 받기 전이었다. 다행히 500m에서 은을 따긴 했고 최종적으로는 계주 결승에서도 올림픽 메달을 땄다.[23] 나중에 실격당하지만 이 장면이 실격 사유가 된 것은 아니다.[24] 이후 무려 12년 이후에야 리우 샤오앙이 2연패를 기록했을 정도로 유독 나오기 힘든 기록이다.[25] 그런데 하필이면 이호석이 레이스 도중 넘어졌다.[26] 이호석의 팔이 미국 선수의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가벼운 접촉이었다. 개별 트랙이 없는 쇼트트랙의 특성 상 어느 정도의 신체적 접촉은 허용된다.[27] 신다운 폭행사건의 그 김한울이 맞다. 그리고 그 후의 이번엔 순전히 본인 잘못으로 사건을 터뜨려 아무 잘못 없는 이호석이 김한울을 지도하는 코치라는 이유로 욕을 먹기도 했다.[28] 본인도 이를 알고 있고 이호석의 스케이팅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이호석의 스케이팅을 어느 정도 모방하려면 이호석이 주니어 시절부터 보여줬던 과감함이나 아웃코스 기술은 아직 개선할 필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