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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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황해남도

재령군
載寧郡
Jaeryŏng County
}}} ||








상위
황해남도
하위
1읍 24리




대의원
[ 펼치기 · 접기 ]
파일:wpk.jpg 최휘 (제339호 재령선거구)
파일:wpk.jpg 리혜숙 (제340호 삼지강선거구)
파일:wpk.jpg 김용애 (제341호 장국선거구)
파일:wpk.jpg 김대성 (제342호 북지선거구)

시당
파일:wpk.jpg 김창수[1]
(재령군당 책임비서)
인민위
파일:wpk.jpg 김효삼[2]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면적
328.4㎢
시간대
UTC+9
인구
125,631명 (2008년)
인구밀도
383명/km² (2008년)
관청
소재지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치 미상)



재령읍내(2010년 11월)[3]

1. 개요
2. 역사
3. 교통
4. 지리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6. 기타



1. 개요[편집]


황해남도.

황해남도 동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황해북도 은파군, 봉산군, 사리원시, 서쪽으로 신천군, 남쪽으로 신원군, 북쪽으로 안악군과 접해 있는 군이다.


2. 역사[편집]


고구려의 삼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유력한 곳이다. 두번째로 유력한 학설이 현재의 서울이라는 학설이다. 또 원래 서울이었다가 나제동맹에 밀려 서울 지역을 잃으면서 재령으로 한성이 옮겨졌다는 학설도 있다. 고구려 때는 평양 국내성과 견줄 만한 도시였다.

이 때문인지 과거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로 불리던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도시 유적지가 나온 바 있다.#. 다만 고대의 대도시는 기존의 도시를 바탕으로 확장되었고 과거 재령지역이 한사군 중에 대방군의 영역이었음을 고려해보면 대방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안승검모잠은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펼친다.

통일신라 경덕왕이 762년 5월 성을 쌓고 태수를 두어 정식 군현으로 만들었다.

재령(載寧)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인 1217년에 붙었는데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장수산성이 있다 하여 성(城)의 옛말인 재로부터 유래하여 재령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부터 경기도에 속했지만 조선 개국 후 새 수도로부터 너무 멀다는 이유로 태조 3년(1394년)에 도로 서해도로 복귀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 땅이 되었다. 농민에게 땅을 주겠다는 말을 하여 농민을 북한 당국이 속이고서는, 그 땅에 현물세 25%를 물리는 쌀 수탈과 이를 외세인 소련에 넘기는 행위가 심하다고 하여 "의혈청년들이 현물세 창고와 벼 5천 가마에 기름을 붓고 방화했다가 체포돼 주동자가 사형을 당했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군의 남부 지역(신원면, 하성면, 상성면, 은룡면 일부)을 분리하여 신원군을 신설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3. 교통[편집]


도로는 51번 국도54번 국도(대한민국 기준)가 지나간다.

철도는 은률선이 지나가며 금산역, 재령역이 있다.


4. 지리[편집]


파일:재령평야.jpg
재령평야

동쪽으로 재령강이 흐르며 은파군, 봉산군, 사리원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군의 대부분은 재령평야 지대이다. 재령평야는 삼국시대에는 대부분이 (灣)이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재령만의 융기와 재령강, 서강, 은파천 등의 지속된 퇴적작용으로 인해 습지로 바뀌었다.

이를 조선 인조 대부터 김자점의 주도로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원래 만이었던 재령평야가 오늘날의 곡창지대로 탈바꿈하였다. 그래서, 재령군 출신의 실향민이었던 연예인 송해가 증언하길, 자신의 고향이었던 재령군을 이야기하면서 "남한 지역의 쌀보다 재령군의 쌀을 조선 총독이 직접 사 먹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유명한 곡창지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재령평야에서는 해발 20m를 넘는 곳이 드물고 만조시에는 해발 -3m가 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산이 전혀 없는 이 군 북부를 지나는 신천사리원간 고속도로는 직선이다. 다만 이 도로는 북한에서는 고속도로가 아니고 김일성 가문의 별장으로 가기 위한 도로다.

지명 중 '김제원리'(金齊元里)라는 곳이 있는데 원래 '대홍리'였던 것을 1961년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지역 출신인 '김제원'이라는 농민이 소군정 하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배받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여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바쳤다는,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편집]




재령군
載寧郡 / Jaeryŏng County

파일:재령군기.png


파일:재령군.jpg

광복 당시 면적
739㎢
광복 당시 행정구역
1읍 10면

  • 재령읍(載寧邑)
    • 관할 리: 일신(日新), 고산(孤山), 국화(菊花), 남정(楠亭), 내야(內野), 문창(文昌), 벽산(碧山), 봉천(蓬泉), 부성(富城), 석정(石井), 수창(壽昌), 신대(新垈), 신정(新井), 양산(陽山), 유화(柳花), 임천(林泉), 한천(漢川), 향교(鄕橋)
    • 읍의 진산인 검산(劍山) 아래 펼쳐진 일신리에 군청과 읍사무소가 있었다. 은율선 재령역이 있다.

  • 남률면(南栗面)
    • 관할 리: 해창(海昌), 강교(江橋), 고잔(古棧), 내림(來臨), 방성(方盛), 신연(新延), 야두(野頭), 좌곡(左曲), 진곡(津曲)
    • 북률면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낮은 평지이며, 재령읍과의 경계에 석산(52m) 같은 구릉이 있을 뿐이다.

  • 북률면(北栗面)
    • 관할 리: 장하(長河), 강서(江西), 굴해(屈海), 남지(南芝), 내종(內宗), 대홍(大洪), 동신흥(東新興), 무상(武尙), 북지(北芝), 서신흥(西新興), 석포(石浦), 석해(石海), 신지(新地), 쌍교(雙橋), 진초(進礎)
    • 고대에는 바다였다. 따라서 산이 단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해발 5m 이하의 평지이다. 면 서쪽에 서강(西江), 동쪽에 재령강이 흐른다.
    • 나석주 의사가 북률면 출신이며, 전술된 '김제원리(옛 대홍리)'가 이곳에 있다.

  • 삼강면(三江面)
    • 관할 리: 청룡(靑龍), 광탄(廣灘), 금산(金山), 당원(堂院), 상해(上海), 설산(雪山), 용소(龍沼), 은산(銀山), 은정(銀井), 학교(鶴橋)
    • 재령읍에서 사리원시 가는 길에 있다. 은율선 금산역이 있으며 부근 금산광산에서는 철광이 산출된다. 삼강역·광탄역도 있었으나 철거.

  • 상성면(上聖面)
    • 관할 리: 청석두(淸石頭), 관암(冠巖), 병암(屛巖), 상신(上新), 수원(水院), 신촌(新村), 월당(月堂), 율라(栗羅), 중곡(中曲), 천정(泉井)
    • 군의 동부 지역에 있으며, 과거 황해선 신하성·구하성역이 있었으나 철거됐다.

  • 서호면(西湖面)
    • 관할 리: 신환포(新換浦), 무덕(武德), 석산(石山), 신전(新田), 신탄(新灘), 신호(新湖), 왕현(旺峴), 작도(鵲島), 재천(財泉), 창석(昌石)
    • 재령평야 지대. 면소재지인 신환포는 서강(西江)에 맞닿아 예로부터 농산물과 수산물 집산지이며, 다리를 통해 안악군 대원면으로 통한다. 1902년(광무 6)에 신환포 사건이 일어났다.

  • 신원면(新院面)
    • 관할 리: 신원(新院), 가국(佳菊), 가려(佳麗), 계남(桂南), 기양(岐陽), 무학(舞鶴), 백우(白隅), 송림(松林), 송학(松鶴), 신대(新貸), 신정(新亭), 염탄(鹽灘), 원고(元古), 화석(花石)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상류면(上柳面)·하류면(下柳面)·하방면(下方面)이던 것을 1938년 통합하였다.
    • 북한 행정구역상 신원군 옛 소재지. 재령강을 막아 세운 하성저수지(장수호)를 하성면과 공유한다. 염탄천(鹽灘川)이 하성저수지로 흘러간다.
    • 염탄리에 황해청년선(사해선) 염탄역이 있다.

  • 은룡면(銀龍面)
    • 관할 리: 신창(新昌), 구련(龜蓮), 봉오(鳳梧), 서창(西倉), 석탄(石灘), 수남(壽南), 신덕(新德), 신유(新鍮) 옥현(玉峴), 용지(龍池), 운양(雲陽), 창전(蒼田)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용산면(龍山面)·은산면(銀山面)·화산면(花山面)이던 것을 1938년 통합하였다.
    • 면소재지인 신창리를 포함한 재령강 연안은 북한에서 은파호를 건설하면서 수몰됐다.
    • 동쪽에 황해청년선(사해선) 운양역, 하성역이 있다.

  • 장수면(長壽面)
    • 관할 리: 장국(墻菊), 동락(東洛), 동림(東林), 두목(杜木), 서림(西林), 서원(書院), 식성(食城), 양계(陽溪), 양현(凉峴), 용천(龍泉), 용평(龍坪), 재궁(齋宮), 천마(天麻), 청천(淸泉), 학현(鶴峴)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상방면(上方面)·하방면·화산면·청수리면(淸水里面)이던 것을 1938년 통합하였다.
    • 신천군과의 사이에 전탄천(箭灘川)을 막아 1927년 축조된 명수(明水)저수지[4]가 있다. 과거 황해선 장수역·금강역이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 면 동쪽 은룡면·하성면과의 사이에 있는 '황해도의 금강산'이라는 장수산(해발 747m)에는 현암(懸庵), 석동십이곡(石洞十二曲) 등의 절경과 장수산성이 있다.

  • 청천면(淸川面)
    • 관할 리: 부덕(富德), 곤산(崑山), 망월(望月), 부천(富泉), 송암(松巖), 신곶(新串), 양대(陽垈), 원내(垣內), 청천(淸川)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청수리면·화산면·우두천면(牛頭川面)이던 것을 1938년 통합하였다.

  • 하성면(下聖面)
    • 관할 리: 아양(峨洋), 갈산(葛山), 검촌(儉村), 대청(大廳), 덕현(德峴), 벽화(碧花), 삼학(三鶴), 송향(松香), 신덕(新德), 영월(靈月), 용호(龍湖), 운대(雲垈), 입암(立巖), 장금(長錦)
    • 1938년 상류면(폐지)의 5개리를 편입하였다. 북한 행정구역상 신원군 현 소재지.
    • 재령강을 막아 세운 하성저수지(장수호)를 신원면과 공유하고 있다. 황해청년선(사해선) 신덕역(현 칠만산역), 신덕역(현 신원역), 하성역이 있다.


6. 기타[편집]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송해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5] 그는 재령에 대해 "곡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재령은 물이 흔하고 교육, 교통, 종교의 도시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 재령의 좋은 쌀[6]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총독도 재령군의 쌀을 사 먹었다고. 또한 이곳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고 싶다는 소원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나, 본인이 사망함으로써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7]

재령군의 한자 표기 '載寧郡'에서 '寧'의 본음은 '녕'으로 원래대로라면 '재녕군'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활음조 현상에 따라 '재령군'이라고 읽는다. 비슷한 사례로 보령시, 의령군, 부령군, 회령군, 무령왕 같은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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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2] 2022년[3] 썸네일이자 영상 1:03에 나오는 2층 한옥은 "해림상회"라는 곳으로, 1910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실측할 수는 없으나, 당시 건물이 맞다면 등록문화재급 건물이다. 좌표는 북위 38도23분52초15, 동경 125도37분18초43.[4] 구 재신저수지. 재령군과 신천군에서 각 한 글자씩 딴 이름[5] 공부는 해주에서 했다.[6] 미식가로 유명한 김정일은 생전에 재령의 쌀로 만든 밥만을 먹었을 정도였다.[7] 2003년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 특집편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 때도 고향에는 끝내 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