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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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2. 상세
3. 사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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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행사 직후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 조치 없이 달아나자 성난 시민들이 경찰서에 몰려갔고 항의하던 시민을 경찰이 폭도로 오인하여 발포한 사건. 제주 4.3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당시 경찰은 다수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으로 그들에게는 해방조국의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인식하던 것이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

2. 상세[편집]


파일:3.1 대시위.jpg
파일:발포.jpg
강요배 화백 - 3.1 대시위
강요배 화백 - 발포
파일:피살.jpg
강요배 화백 - 피살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5,000~30,0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는데 이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200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오후 2시 45분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 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가 타던 말의 발굽에 채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1]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2]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3]

경찰에게 돌을 던진 건 잘못이긴 하지만 이에 대응한 경찰의 발포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으며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경찰은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으며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 1일 저녁부터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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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망자[편집]


거주지는 사건 당시 지명으로 표기한다.
  • 송덕윤 나이:49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도남리(현 제주시 이도2동)
  • 김태진 나이:38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도남리
  • 양무봉 나이:49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오라3리(현 제주시 오라동)
  • 오문수 나이:34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아라리(현 제주시 아라동)
  • 허두용 나이:15세, 직업:학생, 거주지:제주읍 오라1리(현 제주시 오라동) - 사망자 중 최연소자. 사망 당시 시위대의 집결 장소였던 제주북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다.
  • 박재옥 나이:21세, 거주지:제주읍 도두리(현 제주시 도두동) - 사망자 중 유일한 여성. 사망 당시 젖먹이를 안고 있었다. '상세' 문단에 등장하는 그림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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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경찰 관련 사건사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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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 대해 아이가 말에 채인 사건 자체가 없었고 좌파 분자에 의한 선동으로 경찰서 습격 시도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사건은 목격자가 엄연히 존재하며 시위 중에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피해자 무덤까지 있다. 하술할 허두용의 묘비를 찍은 사진이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2] 당시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들이 경찰서에 있었는데 아마 이들은 대구 10.1 사건 같은 봉기를 겪으면서 신경이 꽤나 곤두서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날 발포로 인한 부상자들이 제주도립병원으로 몰려왔는데 마침 교통사고를 당한 순경을 경호하고자 병원에 온 경찰들이 이에 놀랐는지 군중에게 발포해 민간인 3명이 다치기도 했다.[3] 부상자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5, 6, 8, 10명으로 각각 다르게 나온다. 2003년 정부보고서는 8명으로 규정하고 있다.[4] 공교롭게도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날에서 불과 하루 전날인 2월 28일은 대만판 4.3 사건이라고 불리는 2.28 사건이 일어난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