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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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인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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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남우주연상 - 드라마(영화)
제26회
(1969년)


제27회
(1970년)


제28회
(1971년)

피터 오툴
(겨울의 라이온)

존 웨인
(트루 그릿)

조지 C. 스콧
(패튼 대전차군단)





존 웨인
John Wayne


파일:gettyimages-3225931.jpg

본명
매리언 로버트 모리슨
Marion Robert Morrison[1][2]
출생
1907년 5월 26일
아이오와 주 윈터세트
사망
1979년 6월 11일 (향년 72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직업
배우, 감독, 가수
데뷔
배우: 1926년, 〈Brown of Havard〉
감독: 1960년, 〈The Alamo〉
활동
1926년 ~ 1977년
신장
193cm
종교
개신교(장로회) → 가톨릭(세례명: 요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서명
파일:John_Wayne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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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어머니 메리 앨버타 브라운 (1885~1970)
아버지 클라이드 레너드 모리슨 (1884~1937)[1]
형제
남동생 로버트 E. 모리슨 (1911~1970)[2]
배우자
조지핀 웨인 (1933년 ~ 1945년, 이혼 / 1908~2003)
에스페란자 바우어스 (1946년 ~ 1954년, 이혼 / 1924~1961)
필라 팔레트 (1954년 결혼 / 1928~)
자녀
아들 마이클 웨인 (1934~2003)
메리 앤토니아 웨인 (1936~2000)
아들 패트릭 웨인 (1939~)
멀린다 웨인 (1940~)
아이사 웨인 (1956~)
아들 이선 웨인 (1962~)
마리사 웨인 (1966~)


1. 개요
2. 소개
3. 영화
4. 여담
5. 작품들
6.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배우.


2. 소개[편집]


파일:external/images5.fanpop.com/John-Wayne-john-wayne-30462302-338-450.jpg
젊은 시절.

193cm의 큰 키와 장대한 체구, 서부극에 주로 출연하는 커리어, 마초적인 이미지로 가장 미국적인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 대배우이다. 실제로 배우 본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이미지가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마초성 강한 Badass였으며 존 웨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서부극 역시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전통적인 영화 장르였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할리우드 남배우들 중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항상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배우이며, 연기력 또한 우수했던지라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이기도 하다.[3]

그 체구에서 알 수 있듯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본래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소품담당 스태프로 일하다가 B급 영화 전문 배우로 활약, 이후 존 포드 감독을 만나고 포드 감독은 그를 단역배우로 기용하다가 역마차를 기점으로 그에게 계속 주연을 맡겼고 이후로 그는 승승장구한다.


3. 영화[편집]


대부분의 영화 내용이 지금 보면 뻔한 스토리의 서부극인데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출연한 대표작 중 하나인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 같은 영화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인디언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처럼 보여 당대에는 인종차별적인 영화라는 오해가 있었으며 크게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태그 갤러거 같은 평론가의 끊임 없는 노력으로 오해가 점차 풀리고 현대에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월간 플래툰지의 필진 니미셀은 웨인을 다른 장르의 영화도 서부극으로 만드는 사나이라고 할 정도다. 서부극이 아닌 전쟁영화 혹은 서커스단의 단장(...)으로 나온 영화들도 서부극의 포스를 풍긴다. 심지어는 칭기즈 칸으로 나온(!) 영화까지 그렇다. 즉, 좋게 말하면 성격파 배우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타입캐스트(Typecast)다.

게리 쿠퍼에 라이벌 의식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출연한 '하이 눈'을 평가절하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가진 하워드 혹스 감독과 함께 '리오 브라보'를 만든다. 참고로 혹스 감독도 하이눈 까. 후세에선 하이 눈, 리오 브라보 모두 걸작으로 평가 받고있다.[4] 2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쿠퍼의 최고 걸작으로 하이눈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캐스팅 제의가 오지 않은 게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전시 선전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도 작품성이 존재하는 것은 "싸우는 해군공병대(The Fighting Seabees)"와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 정도. 웨인 사후 이 작품에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를 추가해서 3부작으로 컬러 작업을 해서 비디오 및 DVD로 출시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매우 지지하였기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그린베레(영화)'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당연히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만들던 영화이자 실제 그린베레 대원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베트콩은 무조건 악. 미군이 이기며 전쟁 홍보영화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정치성향을 제외하면 의외로 재미 있어서 유럽에서는 앞부분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정치성이 농후한 장면을 삭제한 채 개봉했다...로빈 무어 원작의 '그린베레'라는 논픽션을 느슨하게 영화화 했으며 배경이 되는 연대는 1965년 미군의 본격적 개입 이전의 시기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 삽입곡인 '그린베레의 발라드'는 당시에 꽤나 유명곡이 됐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그린 베레 대원들은 그다지 안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인기있던 곡 중 매우 드물게 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노래였지만 문제는 노래 가사가 전사하는 그린베레 대원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기장을 아들 가슴에 달아주고 미국 최고의 그린베레 대원으로 만들어 달라'란 유언을 전해달라는 내용이다.[5]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다. 당시의 실제 그린 베레 대원들의 수기를 보면 가끔 이 영화와 존 웨인이 언급이 되는데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존 웨인은 멋있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유황도의 모래는 49년작 흑백영화였다. 저걸 보고 자원입대한다는 건 굉장히 영화 마니아였다는 것이다. 아니면 옛날 영화들을 싸게 틀어주는 허름한 극장에서 봤을 수도 있다. 이 유황도의 모래는 일본군과 싸우는 미 해병대를 다루는 내용으로 저 병사의 후일담도 있다. 위문공연 온 배우에게 면박을 줬다는 이유로 나중에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병사들이 제일 신나는 때가 위문공연할 때인데 그때 분위기를 깼으니...

그의 마지막 영화는 《마지막 총잡이》(원제 : The Shootist,1976)[6]였다. 이 영화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총잡이로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진짜 암으로 죽었다. 그래서인지 죽기 얼마전에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지인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고른 영화가 내 미래를 상징했을 줄 몰랐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총잡이는 돈 시겔 감독의 영화로, 한국에는 '최후의 총잡이'란 제목으로 수입되었다. 초반부에는 웨인이 찍었던 서부영화들이 조금씩 나온다. 주인공 J.B 북스(존 웨인)는 암으로 죽어가는 건 사실인데 죽을 때 모든 원한관계를 정리하려고 총싸움을 하다가 기습으로(더블 배럴 샷건) 맞아죽는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존 웨인 영화의 정리판은 앞에서 언급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로 보면 된다. 시대와 함께 쓸쓸히 퇴장하면서 영웅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인물을 연기해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4. 여담[편집]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게 병역을 기피한 군 미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징병 대상이었지만 연령과 부양가족 때문에 면제를 받았고,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자원입대를 공언했음에도 한편으론 영화 한 편만 더 찍고 입대하겠다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원입대를 연기했다.[7][8] 비슷한 나이에 자원입대한 영화배우 헨리 폰다제임스 스튜어트[9]와 비교하면 겉모습만 터프한 겁쟁이인 셈이라 나중에 군필인 존 포드와 영화를 찍다가 미필이라는 이유로 스탭들이 보는 앞에서 갈굼을 겪고 나서야 이 문제로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전쟁영화 <They Were Expendable> 촬영 때 있던 실화이다. 참고로 당시 공동 주연인 로버트 몽고메리는 2차대전 동안 함정 근무를 하며 무공 훈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이었고, 포드는 전투원이 아니다 뿐이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한 경험[10]이 있는 참전 용사다. 또 로버트 몽고메리는 영화 촬영 막바지 존 포드가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자 자신의 실전 경험을 요긴하게 살려 남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감독해서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기에 존 포드와 공동감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영화 사이트도 몇 군데 있다. 존 웨인이 촬영장에서 3살 연상인 몽고메리의 연기력에 지적질을 하며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가르치려 드는 꼬라지를 본 존 포드가 "니가 뭘 안다고 자꾸 나대냐!"며 직접 혼냈다. 그리고 존 웨인의 병역기피가 못마땅했던 포드는 그 후 촬영 내내 존 웨인을 갈궜다. 보다 못한 몽고메리가 뜯어말려서 간신히 넘어갔다.#

존 포드 감독과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었던 존 웨인은 포드 감독한테만큼은 언제나 깍듯했다고 한다. 포드는 존 웨인이 유일하게 꼼짝 못 했던 사람이었다고.[11] 존 포드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던 거장으로 천하의 시민 케인을 재낀 장본인이다. 그리고 당시 할리우드 유명 영화 제작자들은 모두 존 포드를 거쳐갔대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그 당시 할리우드에서 포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했다고 한다. 이런 포드의 승은이 오늘날 존 웨인을 만들었대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럼에도 존 웨인의 지랄맞을무례한 행동들과 과격한 인종차별 발언들은 포드 감독으로 하여금 인종주의자 논란에 시달리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단 사실을 부정하기만 해선 안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존 포드 장례식장에서 존 웨인이 추도문을 읊었다.# 반면 존 웨인의 장례식은 추도문 하나 읊어줄 동료 배우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비공개 가족장이었다. 다만 존 웨인의 3번째 부인 필라 팔레트(Pilar Pallete)는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1973년부터 존 웨인과 별거로 사실상 남남이었는데 일단 단역배우였고, 장례식장엔 참석했으므로 동료 배우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굳이 따지면 아니지만 자기 딴에 쌓아온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장례식인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살이 많이 덧붙여진 존 웨인 냉동인간설은 일단 사망 직후 나온 부고엔 없다.# 존 웨인 스스로만 라이벌로 의식한 게리 쿠퍼[12]의 장례식이 라이프(잡지)의 표현대로 왕족의 장례식이라 평가받은 것과 대조적.

캐서린 헵번, 존 레논, 스파이크 리, 클라크 게이블, 프랭크 시나트라는 공개적으로 존 웨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출처

존 웨인은 후배 배우 진 해크먼매우 싫어했다.로버트 듀발이 촬영장에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며 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치킨 호크도 못되고 걍 싸움닭(...) 그 외에 영화 <혼도(Hondo)>(1953) 촬영 당시 10살짜리 아역배우 리 에이커(Lee Aaker)가 연기를 못한다며 현장에서 학대했던 적도 있는 등 존 웨인이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1976년 필 도너휴와의 인터뷰에서 존 웨인 스스로 선정한 영화 인생 최고작은 모두 3작품으로 역마차, 히타리(1962)[13],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 또 1977년 'The People's Almanac'이 보낸 설문조사에 보낸 답장에서 존 웨인이 꼽은 영화 역사상 최고 걸작은 모두 5작품으로 A Man for All Seasons(196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962), 수색자,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스펜서 트레이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헵번, 로런스 올리비에, 라이오넬 배리모어 순으로 역대 최고의 배우를 선택했다.#

스파게티 웨스턴에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피자나 먹으려고 이탈리아로 갔냐?"라고 했다. 하지만 꽤 당찬 성격인 이스트우드는 되려 "선배님은 그럼 늘 햄버거만 먹습니까?"라면서 반격했고 웨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월간 키노에서 할리우드 스타들 대사로 나온 바 있다. 그밖에도 나중에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평원의 무법자를 미국이 무슨 지옥같은 서부 시대를 거쳤다고 왜곡했다며 흥분하여 악평한 것도 유명하다. 이스트우드도 열성 공화당원이지만, 진보적인 면도 크던 터에 "어디건 자기 나라가 가장 멋지고 위대하게 포장하기 마련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외면하고 죽어라 못 본 척하고요."라는 말로 까면서 선배의 발악적인 비난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열성 공화당원인 것과는 별개로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찬성파로 까이기도 했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도 빚었다. 이로 인하여 퍼블릭 에너미의 대표곡인 Fight The Power에서 대놓고 까인다.[14]

1971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흑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교육을 받을 때까지 백인우월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광활한 이 땅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부당하게 취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고 이 땅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데 인디언들은 이기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헨리 폰다한테 뺨 맞을 소리하고 있네 이외에도 1973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말런 브랜도가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하고, 할리우드의 아메리카 원주민 차별을 비판하며, 대리자인 서신 리틀페더를 통해 수상식장에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에는, 존 웨인은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수상식장에 올라가 직접 리틀페더를 끌어내리려 하기도 했다가 진행요원 6명에게 본인이 들려서 내려왔다.(...)

KKK 소속이거나 거기 간부와 잘 안다는 소문도 많았는데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래도 엘리아 카잔처럼[15] 위증이나 무고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매카시즘으로 심하게 비난받지는 않지만,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자적 행보를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소수인종 배우들과 인종차별문제를 비판하는 배우들이 매우 싫어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여기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적극적으로 모병 운동을 펼치기도 해서 히피 세대가 주축이 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쪽에서도 백안시 당했다. 심지어 존 포드는 좋아하더라도 존 웨인은 싫어한다는 식의 영화인도 많은 편.

그래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로 인한 인종차별 재조명 중 존 웨인 동상 철거 요구가 등장했다.# 이에 아들이 반박하는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웨인은 심지어 자신과 데이트를 한 여자들을 영화에 기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고 세금 탈세 혐의도 있다든지 여러 모로 안 좋은 일로 욕먹을 짓도 좀 저지른 바 있다. 성격도 좀 욱하는 면이 커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가지고 탈세라든지 여러 모로 논란이 큰 후배 프랭크 시나트라와 사이가 안 좋았다. 한번은 웨인이 머무른 호텔에 바로 시나트라 일행이 머물며 신나라 잔치를 하는데 웨인이 잠 좀 자자고 짜증내자 시나트라는 경호원을 내보내 내쫓았다. 그러자 분노한 웨인은 의자를 갖고 와 그 경호원을 내리쳐 기절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의자로 맞고 싶은 개색히 있냐고 일갈하는 통에 시나트라는 깨깽...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오렌지 카운티 공항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존 웨인 공항으로 불린다. 말년을 보낸 곳이 공항 근처의 뉴포트비치였기 때문이다.

중국계로 미국에서 활동중인 조이럭 클럽, 슬램댄스의 영화감독 웨인 왕은 바로 존 웨인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정작 자신은 "존 웨인 영화 싫어하는데..."라며 쓴 웃음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를 유난히 싫어했다. 'Lust For LIfe(열정의 랩소디,감독-빈센트 미넬리. 1956년작)'에서 영화에서 고흐 역을 했던 후배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게 "그딴 미치광이 역은 왜 했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정작 더글러스는 이 고흐 역을 위해서 고흐에 대한 책자도 엄청 읽어보고 연구도 하면서 연기하여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니 무척 기분나빠했던 건 물론이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고갱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까지 받은 배우이자 실제 화가이기도 한 앤서니 퀸은 이 말을 듣고 치를 떨었고 살아 생전 존 웨인을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대체 역사 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잠깐 언급만 된다...대체 역사 세계에서 2차 멕시코 전쟁의 영웅이자 현직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문배우로 북부에서 활약 중. 본편에서는 실명으로 언급만 돼서 자세한 사항을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위에서도 언급됐다시피 그의 사망 원인은 이다. 영화 '징기스칸'을 촬영한 무대였던 미국 황무지/사막지대가 당시 미군이 실험을 한 장소들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에는 잔류방사능에 의한 후유증이나 발암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그러나 존 웨인 자신은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고 그저 매일 담배 6갑을 피워서 폐암에 걸렸다고 믿었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렇지만 그는 원발 폐암은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순조롭게 극복했고 사인이 폐암도 아니었다. '징기스칸' 찰영 당시 같이 있었던 스태프 220여명 중 절반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된 후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꽤 유명한 일화이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선 존 웨인의 무덤이 비석만 있는 빈 무덤인 상태이고 워싱턴 DC 지하벙커에 냉동인간 상태인 존 웨인이 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를 주제로 방송을 한적이 있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1976년, 존 웨인은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는데, 바로 무려 4000톤짜리 군함을 맨 몸으로 민 것이다. 정확히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초도함인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이하 '페리 호'라 지칭)의 진수식이 1976년 9월 25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하필 쭉 밀려 물에 풍덩 빠져야 할 페리 호가 조선대(Slip-way)에서 걸려 멈춰 서버린 것(...). 미 해군의 하늘을 책임질 최신예 방공 호위함이, 그것도 하필 초도함이 진수식에서 걸리게 된 거다. 미신징크스에 민감한 뱃사람들로 가득한 해군의 특성상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고, 몇몇은 당시 '배가 물을 거부한다' 내지는 '물이 이 배를 거부한다'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수식에 참관 중이던 존 웨인이 직접 나서서 밀자, 배는 잘만 밀려 바다에 무사히 떴던 것이다. 당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존 웨인이 직접 깬 것.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페리 호는 1997년 2월 20일 퇴역될 때까지 큰 사건 없이 잘 운용되었고, 기타 자매함들도 여러 사건사고들에 휘말렸을지언정 전량 퇴역이 결정될 때까지 1대도 격침되지 않은 채 적어도 제 밥값은 잘 해냈다. 그리고 일부는 현재도 미국의 몇몇 우방국들의 바다를 잘 지키고 있다.


5. 작품들[편집]


존 포드 감독의 첫 유성 서부극. 존 포드 영화의 상징적인 장소인 모뉴먼트 밸리가 처음 등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존 웨인은 이전의 B급 이미지를 탈피하고 서부극의 아이콘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포드는 한 파티에서 존 웨인을 만나 이 영화를 준비하는데 주연배우로 누가 좋겠냐고 물었을때 존 웨인은 "글쎄요..."라며 말을 흐렸지만 포드는 "자네가 해"라고 해서 존 웨인이 놀랐다고 한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로, 코만치족에게 납치된 조카 '데비'를 찾는 삼촌 '이든'(존 웨인 분)의 여정을 담은 서부극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서부극이 가지고 있던 '선한 백인과 악한 미국원주민'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허물고, 두 인종/문화권을 비교적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부극의 두 아이콘인 존 포드와 존 웨인이 만나, 이런 진보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꽤 고무적이다. 상영 당시에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현재는 존 웨인은 물론, 포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미국영화연구소는 이 영화를 '최고의 서부극' 1위로 꼽았다. 영화사 전체에서 최고의 작품을 뽑을 때도 종종 거론된다.

존 포드 감독이 1952년 아카데미상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작품. 기존의 서부극에서 보여진 웨인의 거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 리오 브라보
1959년작 하워드 혹스 감독 영화. 폐쇄된 환경에서 적을 상대하는 건 훗날, 존 카펜터의 분노의 13번가에서 오마주한다.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를 찬양하는 성향의 혹스가 하이 눈을 보다 주인공이 주위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만들었다고 한다. 121만 달러로 만들어 575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 알라모
존 웨인이 직접 제작, 감독, 주연을 겸한 작품이다. 알라모 요새를 장악한 미국인들이 멕시코 땅에서 난리부리며 결국 멕시코군에게 패해 다 죽는 실화 알라모 요새 전투(실상은 폭동이다.)를 다룬 국뽕 영화임에도 제작비를 겨우 넘기는 흥행 실패(제작비 2배를 뽑아야지 그나마 본전치기이니)를 당했다. 존 포드 감독이 촬영 도와주겠다며 촬영장을 방문했고, 영화의 10% ~ 15%를 촬영했지만, 존 웨인은 포드 감독에게 이야기하지도 않고 포드가 촬영한 장면들을 모두 잘라냈다.(...) 2004년에 월트 디즈니에서 1억 달러 이상 제작비를 들여 리메이크했으나, 적어도 제작비라도 건진 존 웨인판 알라모와 달리 제작비 1/4도 못 건지는 흥행 대실패로 묻혀졌다.

자신의 인생이었던 서부극 자체에 대한 회고록이자 서부극 시대에 대한 종언. 훨씬 후에 나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견될 수 있는 작품이다.


존 웨인이 한 눈이 먼 방탕한 보안관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로 그는 1970년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2010년 코엔 형제가 원제목대로 트루 그릿으로 리메이크 하였다. 물론 코엔 리메이크작은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닌 원작소설의 영화화. 코엔형제가 어렸을 적 이 69년 작을 보긴 했지만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 하타리
존 웨인이 동물 사냥꾼으로 등장하는 1962년작 영화이다. 감독은 하워드 훅스로 리오 브라보 다음에 이걸 다시 같이 찍었다. 300만 달러로 만들어 1292만 달러 흥행으로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1964년 1월에 개봉했으며 지상파로 여럿 방영되었는데 1976년 7월 24일,31일 주말의 명화로 2부로 나눠 방영(157분)했으며 1983년 5월 12일과 1987년 6월 21일 명화극장 재더빙 방영,1991년 2월 15일 설날특선으로 오후 12시 10분에 MBC로 재더빙 방영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비디오나 DVD로도 나오지 않다가 2013년에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헨리 맨시니가 맡은 OST아기코끼리 걸음마(Baby Elephant Walk)는 아 그 음악!? 이라고 할 정도로 지상파에서 많이 나오던 음악이다.

  • 형사 맥큐
하드보일드 영화가 대세가 되자 나온 영화. 존 웨인은 잉그램을 들고 적을 잡는 탐정으로 등장한다.

모스 아이슬리 장면에서 스톰트루퍼들에게 루크 일행의 방향을 알려준 가린단의 목소리로 카메오 등장했다.


6. 기타[편집]



  • 뱅!에서 '존 인'이라는 이름으로 패러디되었다.

  • 국내에서는 최규하, 아자개 역할로 유명한 배우 김성겸전담 성우[16]였다.

[1] 보통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이름이 남자에게 붙었다.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는 본명.[2] 소속사는 그의 본명이 Marion Mitchell Morrison라고 실수를 했지만 존 웨인은 'Mitchell'이 좋아서 지적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든 자료들에는 이름이 Marion Mitchell Morrison이라고 되어있다.[3] 실제로 그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동시에 수여받았는데 이를 모두 받은 배우는 밥 호프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존 웨인뿐이다.[4] 하이눈: IMDB 평점 8.2 / 썩은 토마토 평점 96%, 리오 브라보: IMDB 평점 8.1 / 썩은 토마토 평점 100%[5] 이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배리 새들러는 그린베레 베트남 참전 용사이며 가사는 1962년 베트콩에게 처형된 하와이 원주민 출신의 그린베레 대원인 제임스 게이브리얼 2세를 추모하며 쓰인 것이다.[6] 월간 키노에선 "마지막 카우보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7] 기피한 가장 큰 이유로는 존 웨인이 데뷔 연차에 비해 늦게 뜬 스타라는 점에 있다.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데뷔후 라울 월시 감독의 주역을 맡았다 크게 실패하고, 역마차(영화)로 각인시키기까지 13년이나 걸렸고 겨우 궤도에 올랐다 생각했더니 곧바로 전쟁이 터진 것이다. 때문에 참전했다가 죽거나 잊힐 공포감이 상당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8] 근데 존 웨인보다 나이도 더 많고 더 늦게 데뷔한 영화인들 중 자원입대한 영화인들은 많다. 이들도 죽거나 잊힐 공포감은 엄청났다. 존 웨인만 특별 대접받을 이유는 없다.[9] 자고로 폰다는 민주당원, 스튜어트는 공화당원이었다. 정치 성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은 똑같은 셈. 실제로 둘은 무명 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는 등 절친이었다고 한다.[10]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가할 당시 포드의 연세가 이미 만 50세였다.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관 계급을 달고 OSS소속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노르망디, 베를린까지 누비며 준장까지 올랐다. [11] 포드는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걸로 유명하다.[12] 정작 게리 쿠퍼는 존 웨인을 그닥 의식하지도 않았다. 대신 쿠퍼는 동갑내기 클라크 게이블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둘 다 185cm가 넘는 장신, 굉장한 미남 등등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실제로 하나의 배역을 두고 경쟁도 많이 했다고.[13] 하워드 혹스 감독작.[14] 무려 Motherfuck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극딜했다. 함께 극딜당한 대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인데, 그는 흑인음악을 따와 백인음악으로 빌려와서 록 음악 자체를 백인의 전유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극딜당한다.[15] 카잔이 까이는 것은 전향 때문이 아니라 무고죄 때문이다. 매카시즘 문서에도 보이듯이 실제로 밀고된 사람중에 공산주의에 깊이 관여했거나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카잔은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들에게 가짜 혐의를 덧씌워 팔아넘긴 것이다.[16] 단, 성우로 활동했던 1980년대까지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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