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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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е отношения(사볘츠카-키타이스키예 아트나셰니야)
  • 中蘇關係(정체자) / 中苏关系(간화자) / Zhōng sū guānxì(한어병음)



1. 개요[편집]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2. 중화민국 - 소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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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화인민공화국 - 소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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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가오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소밀월을 찬미한 소련 노래 <모스크바-베이징(Москва–Пекин)>. 모스크바 방송국(후에 러시아의 소리) 중국어 방송에서도 이 노래의 후렴구가 인트로였다. 하지만...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시대부터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나라이다.[1]

소련은 국공내전 당시 중국 공산당의 물주 역할을 할 때도 있었지만, 레닌의 경우 상술한 것처럼 미하일 보로딘을 보내서 중국 국민당을 적극 도운 바 있고, 스탈린마오쩌둥을 위험 인물로 보고 마오쩌민을 사망하게 만드는 등 견제가 심했다. 아직 진위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북한에게 (6.25 전쟁 이전) 간도와 요동을 떼어주려고 했다는 가설마저도 있다.

1950년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맺음으로서 양국 간 관계가 강화되었다.

3.1. 흐루쇼프 시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소결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집권으로 소련이 수정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념적인 대립을 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반수정주의 문서 참조. 이를 계기로 중소결렬이 일어나고 1962년 중인전쟁 당시 소련은 인도를 지원하였다.

1956년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최고위 보좌관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찾아가 북한 김일성의 정적인 연안파(친중파)와 친소파에 대한 김일성의 무자비한 숙청극을 중단시키는 문제를 놓고 서로 자신들은 영향력이 없다며 상대에게 해결책임을 떠넘기는 일도 있었는데, 당시 중국과 소련의 대북 개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후 김일성은 도전자 없는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이 대화 기록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러시아 기록보관소에서 새로 비밀해제된 문건들을 2017년 7월 초 공개한 것에 들어있다. 기사


3.2. 브레즈네프 시대[편집]


1960년대 말까지는 이런 노선 싸움이 그저 양국의 선전기관들에 의한 말다툼에 그쳤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에 1969년 3월,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노선대립이 무력충돌로 악화되었다.

이후 중국은 마오주의 이념을 전파하며 제3세계와 연대하고, 소련의 영향력을 제3세계에서 배제하는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린 쿠데타로 피노체트가 집권하자, 아옌데 정권을 지지했던 소련은 이를 규탄했지만, 중국은 이를 환영했다. (...) 피노체트 : 나는 공산주의가 싫다는 핑계로 쿠데타를 했는데 왜 쟤네가 나를 지지하는 거야? 폴 포트 : 우리킬링필드까지 벌여도 미국은 중국하고 같이 우리를 지지해주던데? 마찬가지로 친중이었던 당시 쿠바 경제장관이었던 체 게바라에 대해 소련은 싸늘한 태도로 일관,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처형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한국전쟁 이래 계속적으로 중국을 적대시 했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핑퐁외교(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를 통해 중국과 친분 관계를 강화한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79년, 미국은 결국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고 여러가지 군사교류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중국 그리고 친중정권이 들어선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하며 소련에 빅엿을 먹이게 되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빌미로 중국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의 올림픽 데뷔는 늦어지게 되었다.

소련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고 중국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랑 연대를 강화하기도 했다.

친소
친중
중립
베트남[2]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라오스[3]
아프가니스탄[4]
니카라과[5]
에티오피아
캄보디아[6]
콩고 공화국
몽골
캄보디아[7]
미얀마
소말리아[8]
알바니아[9]
루마니아[10]
쿠바[11]
유고슬라비아[12]
남예멘[13]
모잠비크[14]
앙골라[15]
베냉[16]
북한[17]
탄자니아


3.3. 고르바초프 시대[편집]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다며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했고, 모든 군사교류를 취소했다. 이러자 중국은 소련에 다시 접근, 1989년 극적으로 중소는 화해하였다.


3.4. 소련 해체 이후[편집]


이후 중국과 소련의 후신 러시아는 공통의 적 미국을 두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한편 초강대국의 패권을 위해 경합하고 있다. 다행히 냉전시의 중소결렬은 어느 정도 봉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더욱 기울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갈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는 중소결렬이 그대로 이어진 게 아니라 소련 해체 후 오늘날에 일어난 새로운 갈등에 가깝다.

1992년 이후의 자세한 설명은 중러관계 문서를 참고.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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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명목상으로는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니까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명목상으로는 공산권의 맹주가 되긴 했지만 이미 공산권이 무너진 마당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엄밀히 말해 소련은 자멸(?)하여 해체되었고 중공은 명목상으로만 공산주의 국가고 실제로는 자본주의화되었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의 양국 관계는 중러관계를 참조[2] 1975년까지는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중립을 유지했고,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반중정책을 취한다.[3] 공산정부 수립 직후에는 중국과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종주국인 베트남이 중국과 대립하면서 냉전 기간동안 가까워하기 어려웠다.[4] 다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지역 사회에서는 반소 감정이 컸다.[5]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중국 대신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친소였다.[6] 베트남 괴뢰정부 시기[7]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만. 이후 베트남 괴뢰정부 성립[8] 본래 친소였으나 에티오피아와 전쟁이 나자 소련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는 바람에 친중으로 변했다.[9] 60년대에 친중으로 선회했지만, 호자마오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으며, 70년대에 중국이 미국과 교섭하자 이를 비판하면서 사실상 중국과의 밀월을 중단해, 그 어느 쪽의 편을 들지않았다.[10] 바르샤바 조약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매우 가까웠다.[11] 마찬가지로 엄청난 친소국가였지만,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2]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진행하여 소련과 중국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았다.[13] 중국을 남예멘을 어떻게 보나? [14]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모잠비크 해방전선은 소련과 중국 양측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독립 이후 공산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양측과 수교하여 중립을 유지했다.[15] 초기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 시기에는 친소 성향을 띄었으나 네투 대통령이 소련 방문 도중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중국에 유화적인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집권하면서 중국과 수교하여 중립으로 선회하였다.[16] 쿠데타로 집권한 마티외 케레쿠가 1975년 베냉을 공산국가로 선포한 이후에도 기존의 수교 관계로 있던 소련과 중국 두 국가와의 관계를 유지하여 중립에 머물렀다.[17] 오락가락했다. 1970년대는 친중, 1980년대는 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