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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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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개신교[2] 에 호의적이었다.
2. 생애[편집]
페르디난트 1세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의 맏아들로 어린 시절 백부 카를 5세가 통치하는 스페인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다가 1548년 사촌인 스페인 공주 마리아[3] 와 결혼했다. 본래 카를 5세는 자기 아들 펠리페에게 모든 합스부르크 영토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자신만의 입지[4] 를 다졌던 페르디난트 1세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카를 5세 세력과 페르디난트 세력이 크게 대립하였다. 1552년에 막시밀리안은 갑자기 아픔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웠다. 펠리페 지지 세력의 독살 의혹이 있었던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정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결국 펠리페가 스페인 국왕이 되고 막시밀리안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친해졌다. 모리츠는 비록 개신교도였지만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개신교파 제후의 대표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공격했다. 모리츠 군영에서 신교도 제후들과 친해진 막시밀리안은 전쟁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자신도 신교도로 개종하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부왕으로부터 상속권 박탈로 협박을 받자 개종을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로 맹세했고 이를 인정받아 교황과 아버지에게 여러번의 약속끝에 결국 1562년 선제후 회의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했다. 그리고 1564년에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앞서 모리츠를 비롯한 신교도 제후와 친했고, 자신도 신교도 신학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다가 빈에 있을 때도 루터교의 전도사인 제바스티안 파우저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파우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도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런 막시밀리안의 행동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얼마 되지 않아 파우저를 해임하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등 겉으로는 가톨릭을 다시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제국내에서도 개신교는 루터파 신앙만이 공인되었음에도 자신의 영지 오스트리아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서 당시 이단 취급을 받던 재세례파[5] 들은 자유로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막시밀리안 2세는 종교적 중립을 유지했다. 막시밀리안은 임종 직전 다시 루터파 신앙으로 개종하려고 시도 했으나 선대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유언에서 절대로 개종치 않는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결국 개종하진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성체성사 등 성사를 일반 신도들도 주관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교황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56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루터파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566년 막시밀리안 2세는 오스만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10만의 오스만 제국군을 이끌고 헝가리에 왔다. 하지만 71세의 고령이었던 쉴레이만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쉴레이만 1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었고 1568년 오스만 제국과 아드리아노플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조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헝가리 서부 영토의 관할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서부 헝가리는 이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기에,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샀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에게 3만 두카트의 연공을 바치기로 했기에 실질적으론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1570년 동헝가리 왕국의 야노시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양도받아 단독 헝가리 왕이 되었다. 그리고 헝가리 왕위를 양도해준 대가로 야노시 2세를 에르데이 공작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되었다.
1575년에는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되었으나 가톨릭교도라는 것 때문에 폴란드 칼뱅파 개신교도 귀족들의 반발을 사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6] 폴란드를 침공하던 준비를 하던 중 1576년 10월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 제위는
3. 가족 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아내와 자녀[편집]
1548년 9월 13일, 카를 5세의 장녀이자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인 사촌 스페인의 마리아(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와 결혼했다. 결혼 이전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던 막시밀리안 2세였지만, 결혼 후에는 마리아에게 충실하였다. 이후 마리아의 아버지인 카를 5세, 오빠인 펠리페 2세와 대립하면서도 마리아와는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였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아는 1548년부터 1551년까지 스페인의 섭정을 맡았다. 마리아는 오빠인 펠리페 2세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스페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남편의 종교적 관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막시밀리안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갔는데, 이를 두고 '이단자가 없는 나라'에 살게 되어 기쁘다고 평했다. 이후 마리아는 라스 데칼자스 레알레스 수녀원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살았다.
4. 여담[편집]
오스만 제국과의 굴욕적인 조약으로 황제로서의 권위가 떨어졌는데, 막시밀리안 2세가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주세페 아르침볼도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사계 연작(봄, 여름, 가을, 겨울.)
4원소 연작(불, 공기, 물, 흙)
당연히 기괴한 모습을 본 신하들은 크게 놀랐으나, 막시밀리안 2세는 오히려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했다. 그리고 궁정 연회에서 초상화처럼 꾸미고 나왔다고 한다. 링크 이 부분은 2015년 7월 5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다뤘다.
쇤브룬 궁전의 터를 닦은 인물로 알려졌다. 또한 슬로베니아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리모시 트루바르(Primož Trubar 1508~1586)의 신약성서 슬로베니아어 번역을 후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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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버지.[2] 더 정확히는 루터파. 칼뱅파를 신봉한 팔츠 선제후국은 탄압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날렸다.[3] 카를 5세의 장녀[4] 1531년에 이미 독일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1세는 사실상 차기 황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5] 30년 전쟁 후 완전히 박멸되어 에르데이 공국이나 오스만 제국 산하 왈라키아 공국이나 몰다비아 공국으로 탈출했고 나중엔 신대륙으로 이주했다.[6] 현재 폴란드 국민은 2011년 기준으로 87.5%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현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7]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이다.[8] 펠리페 3세 등[9]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10]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다.[11]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대관을 치르지는 못했다.[12] 아내와 함께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13] 펠리페 2세의 장녀이자 앙리 2세의 외손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