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샤를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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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1세의 황후
프리데리케 루이제 샤를로테 빌헬미네
Charlotte von Preußen

이름
독일어
프리데리케 루이제 샤를로테 빌헬미네
(Fridericke Luise Charlotte Wilhelmine)
러시아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출생
1798년 7월 13일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사망
1860년 11월 1일 (향년 62세)
러시아 제국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장례식
1860년 11월 5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배우자
니콜라이 1세 (1817년 결혼 / 1855년 사망)
자녀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형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프리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알브레히트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2. 결혼
3.3. 러시아의 대공비
3.4. 황후
3.5. 황태후
3.6. 사망
4. 어마무시한 가족관계
5. 가족관계
5.1. 자녀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황후 초상화.jpg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황후.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장녀이다.

애칭은 로트헨(Lottchen).


2. 작위[편집]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자녀들.jpg
어린시절 부모, 형제와 함께 있는 초상화. 루이제 왕비 바로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샤를로테다.

1798년 7월 13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의 장녀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프리데리케 루이제 샤를로테 빌헬미네(Fridericke Luise Charlotte Wilhelmine)로 지어졌지만, 공식적으로 샤를로테 공주로 불렸고 가족들에게는 '로트헨(Lottchen)'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어머니 루이제 왕비는 영국조지 3세의 왕비였던 조피 샤를로테의 조카였다.

로트헨이라고 불리던 샤를로테의 어린시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강인하지 못해서 전쟁을 치르는데 매우 힘들어했다. 반면 어머니 루이제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와 강인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이는 샤를로테 공주가 평생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궁정에 적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예나 전투에서 패배하자 루이제 왕비는 자식들을 데리고, 프로이센 동부 지역으로 가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1809년에 프로이센의 왕족들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루이제 왕비는 발진 티푸스로 인해 사망했다. 어머니가 사망했을 당시 샤를로테는 고작 11세였고, 평생 어머니의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살았다.

루이제 왕비의 사후 샤를로테 공주는 프로이센의 궁정에서 제일 높은 신분의 여성이 된다. 샤를로테는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신분을 알고, 궁정에서의 의무를 하나씩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샤를로테는 의무에 매우 충실한 사람으로 자랐다고 한다.


3.2. 결혼[편집]


파일:니콜라이 1세와 샤를로테의 결혼식.jpg}}}
파일:니콜라이 1세와 샤를로테의 결혼식2.jpg}}}
니콜라이 대공과의 결혼식을 묘사한 그림

프로이센러시아나폴레옹 전쟁 이후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정치적 동맹을 위한 혼담이 오갔다. 이윽고 1814년알렉산드르 1세늦둥이 남동생들이었던 니콜라이 대공과 미하일 대공이 프로이센으로 왔다. 프로이센 왕족과의 러시아 황족과의 혼담이 정해지면서 니콜라이 대공은 다시 프로이센으로 왔지만 이 두 번째 프로이센 방문에서 니콜라이 대공과 샤를로테 공주는 서로 사랑에 빠졌다.

1816년에 니콜라이 대공과 샤를로테 공주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이듬해인 1817년에 샤를로테는 작은 오빠 빌헬름 왕자와 함께 러시아로 향했다. 1817년 7월 러시아에 도착한 샤를로테 공주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식 이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개명했다. 이후 1817년 7월 13일[1]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서 샤를로테는 니콜라이 대공과 결혼식을 올렸다.

파일:니콜라이 1세의 자녀들 어린시절.jpg}}}
니콜라이 1세와 샤를로테의 자녀들
남편 니콜라이 1세와의 금슬은 매우 좋았으며 4남 4녀라는 많은 자녀를 낳았다.


3.3. 러시아의 대공비[편집]


러시아의 대공비가 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시어머니 마리야 황태후[2]와 잘 지냈지만, 큰 손윗동서인 옐리자베타 황후[3]와는 잘 지내지 못했다. 애초에 옐리자베타 황후는 나이만 알렉산드라보다 20살 가까이 연상이었고, 러시아 황실의 다른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파일:샤를로테 황후와 알렉산드르와 마리야.jpg}}}
장남 알렉산드르 2세와 장녀 마리야와 함께

이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대공은 각각 가정생활과 군대에 집중하며, 궁정보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머무는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이듬해인 1818년에 장남 알렉산드르를 낳았고, 1819년에 장녀 마리야를 낳았다. 하지만 이후 한번의 유산을 하면서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이때 의사가 휴양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자 니콜라이-알렉산드라 부부는 오랫동안 러시아를 떠나 알렉산드라의 친정인 프로이센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알렉산드라의 시아주버니이자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니콜라이 대공 부부를 불러, 다음 황위를 본인의 둘째 남동생 니콜라이 대공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알렉산드라는 이 사실을 듣고 매우 놀랐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바로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안심시켜줬다고 한다.[4]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궁정의 유명한 시인인 바실리 주코프스키에게서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당시 러시아 황실 일가는 주로 독일어로 말했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기에 소통의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5]

알렉산드라는 독서와 음악을 좋아했으며, 특히 마주르카를 비롯한 춤추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한데다 정치적 견해도 풍부했다고 한다. 다만 대공비라는 위치를 의식해서인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어머니이자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다.


3.4. 황후[편집]


1825년 11월에 평소에도 건강하던 알렉산드르 1세옐리자베타 황후와 요양을 갔다가 급사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유언장에는 첫째 남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은 폴란드 귀족과 귀천상혼하여 계승권을 잃을 예정이니, 자신의 둘째 남동생인 니콜라이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적혀있었다. 때문에 법적으로도 관습적으로도 니콜라이 대공의 즉위가 알맞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귀족들은 인기가 없는데다 나이도 어린 니콜라이 대공보다는, 아직 계승권이 남아있던 콘스탄틴 대공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 정작 폴란드의 총독을 맡고있던 콘스탄틴 대공은 애초에 계승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25일 후 동생 니콜라이에게 제위를 양보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 인해 니콜라이 대공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로 즉위하고, 알렉산드라 역시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공에게 충성하던 일부 신하들이 니콜라이 1세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새로운 황제가 된 니콜라이 1세는 처음엔 즉위식 날 부터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반란군 측은 니콜라이가 사신으로 보낸 사람까지 살해하며 그의 즉위를 격렬히 거부했다. 이에 보수주의 사상파였던 니콜라이 1세도 태도를 바꿔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으로, 반란군 3천 명을 진압하면서 그들의 반란을 마무리했는데 이것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파일:니콜라이 1세부부와 자녀들 초상화.jpg}}}
니콜라이 1세 부부와 자녀들
황후 시절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러시아의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에 전력을 다했다. 이렇게 가정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에 대한 니콜라이 1세의 애정은 상당했다. 1837년에 어느날 겨울궁전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때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의 대신에게 알렉산드라가 자신과 약혼했을 때 보낸 편지가 든 상자만은 꼭 구하라고 명령할 정도.

알렉산드라는 매우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특히나 더했다고 한다. 또 완고한 남편에게 무척이나 순종적인 아내였으며, 니콜라이가 바라는 아내이자 어머니상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니콜라이의 견해를 동경하는 지지자였다. 또 자신의 친정인 프로이센을 개인적으로 애착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원래부터 몸이 매우 허약했고, 4남 4녀를 낳을 만큼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더욱 건강이 악화되었다. 1842년 주치의는 알렉산드라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부부관계를 금지했다. 이에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드라의 시녀 바르바라 넬리도바를 정부로 두었다라고만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1842년 이전부터 바르바라 넬리도바 말고도 니콜라이 1세의 사생아를 낳은 정부는 2명 더 있었으며 총 3명의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3명을 두었다. 사생아를 낳은 정부만 이렇고, 그 외 다른 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 마리안느 코베르바인(1791 ~ 1856)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조제핀 코베르바인(1825 ~ 1923)
  • 바르바라 야코블레바(1803 ~ 1831)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올가 카를로브나 알브레히트(1828 ~ 1898)
  • 바르바라 넬리도바(1814 ~ 1897)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알렉시스 파슈킨(1831 ~ 1863)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의 건강은 갈수록 위독해졌다. 가끔씩 건강을 회복할 때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워낙 힘들었기에, 말년의 알렉산드라는 신경질적이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고 한다.

말년의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비록 니콜라이 1세가 정부를 들이고 사생아까지 낳았지만 부부간의 금슬은 좋아서 별 문제는 없었다.정부를 들여도 마누라가 1순위


3.5. 황태후[편집]


1856년 초상화
사망 당시 해인 1860년에 찍은 사진

건강이 계속 악화된 알렉산드라는 1854년에 거의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회복했다. 하지만 1855년에 남편 니콜라이 1세가 인플루엔자로 먼저 사망했고, 남편을 매우 사랑했던 알렉산드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장남 알렉산드르 2세의 즉위 이후에도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았다.

왼쪽부터 둘째사위 카를 왕태자, 알렉산드라, 차녀 올가 왕태자비,
둘째 오빠 빌헬름 왕태제,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다.(1856년)

황태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주로 겨울 궁전과 짜르스코예 셀로에 머물렀으며, 주변 사람들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3.6. 사망[편집]


알렉산드라 황태후의 죽음
니콜라이 1세의 사망 이후 알렉산드라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가야만 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조국이었던 러시아를 그리워했다. 의사는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알렉산드라는 계속 러시아의 겨울 궁전에 머물렀다.[6] 1860년 11월 1일에 알렉산드르 궁전에서 머물던 알렉산드라는 죽기 전날 밤에,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듯이 "니키[7], 이제 저는 당신에게로 가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자던 중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어마무시한 가족관계[편집]


육촌 빅토리아 여왕처럼 가족관계가 어마어마한 편인데, 어머니 프로이센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가 영국 조지 3세의 왕비 샬럿의 조카였다.[8]

그녀의 자녀들 일부가 영국 왕실이나 덴마크 왕실 등 다른 왕족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장남 알렉산드르 2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사돈관계를 맺었고,[9] 차남 콘스탄틴 대공과 막내아들 미하일 대공도 형 알렉산드르 2세처럼 크리스티안 9세와 사돈관계를 맺었다.[10] 차녀 올가는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되었다.

또한 그녀의 조카들도 국왕이 되거나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시조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11]가 샤를로테의 작은 오빠 빌헬름 1세와 결혼하여 독일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었고, 아우구스타의 장남 프리드리히 3세가 빌헬름 1세 이어 황제가 되었다. 막내 시누이 안나의 장남 빌럼 3세빌럼 2세를 뒤를 이어 네덜란드 국왕이 되었고, 네덜란드의 루이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칼 15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국왕으로 즉위하고 있는데,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스페인펠리페 6세,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이다.[12]


5. 가족관계[편집]



5.1. 자녀[편집]


파일:39a5edc8ab9ec29f035bfecc2199a52d.jpg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1818년 4월 18일
1881년 3월 13일
헤센의 마리
슬하 6남 2녀[13]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14]
슬하 2남 2녀
1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Maria, Duchess of Leuchtenberg)
1819년 8월 18일
1876년 2월 21일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15]
슬하 4남 3녀
스트로가노프 백작 그리고리
슬하 1남 1녀
2녀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올가
(Olga, Queen of Württemberg)
1822년 9월 11일
1892년 10월 30일
카를 1세
3녀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1825년 6월 25일
1844년 8월 10일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1827년 9월 21일
1892년 1월 25일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슬하 4남 2녀[16]
3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1831년 8월 8일
1891년 4월 25일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
슬하 2남
4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1832년 10월 25일
1909년 12월 18일
바덴의 체칠리에
슬하 6남 1녀[17]


6. 여담[편집]


  • 어머니 루이제 왕비의 미모를 물려받았던지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작은 머리와 우아한 외모를 가진 미녀였다. 푸른 눈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의 소유자였다고. 특히 3녀인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어머니를 빼닮은 굉장한 미녀였다고 한다.[18]
  • 원래부터 몸이 병약했던지라 추운 기후인 러시아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잦은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난 뒤엔 건강이 더욱 나빠져서,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가기도 했다. 이는 큰 며느리인 헤센의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 남편 니콜라이 1세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외모를 2차 업그레이트를 해준 황후. 니콜라이 1세의 친할아버지 표트르 3세와 아버지는 파벨 1세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쌍으로 키도 작고 못생긴 추남이었지만, 장신의 미녀[19]였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가 파벨 1세와 결혼하여 로마노프 왕조에게 키 크고 잘생긴 뷔르템베르크의 외모를 물려줬다. 때문에 파벨과 조피 도로테아의 자녀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이전 세대보다는 외모가 상향되고 키도 컸지만, 그래도 자녀는 어머니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니까(...) 어머니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아버지의 추남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다. 다행히도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전자에 속했고, 역시 뛰어난 미녀인 샤를로테와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과 후손들부터는 진짜로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게 된다.
  • 최초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 황후(국가원수 배우자)다. 사진 자체는 남편의 재위기간 당시에 나왔는데 정작 남편인 니콜라이 1세는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참고로 사진이 나온 이후 국가원수중에서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1842년 촬영)였고,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1843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4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7년)가 그 뒤를 따랐다. 때문에 최초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의 황제(국가원수)는 장남 알렉산드르 2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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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로테의 생일이기도 했다.[2] 마리야 표도로브나(Мария Федоровна). 본명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3]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Елизавета Алексеевна). 본명은 바덴의 루이제. 옐리자베타 황후의 조카 헤센의 마리는 알렉산드라의 맏며느리가 되었다.[4] 사실 알렉산드라도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이 제위를 물려받을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파벨 1세 이후 러시아는 살리카 법을 도입해서 아들만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파벨 1세의 아들 4명 중 아들이 있는 사람은 니콜라이 1세밖에 없었다. 그 외에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의 황제라는 자리를 힘들어하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모습을 보고, 시아주버니가 황위에 대한 부담을 떨쳐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게도 알렉산드르 1세 역시 자기 대신 니콜라이 대공과 알렉산드라가 황제와 황후가 되고, 자신은 그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며 만세를 부르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5] 알렉산드라 본인과 시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시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 모두 독일 출신이었기에, 러시아 황실의 가족들 사이에서는 독일어로 대화하면서 소통이 충분히 가능했다. 또한 당시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었을 정도로, 국제공용어나 다름없었기에 읽고 쓰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6] 건강이 매우 악화돼서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터라 더이상 삶에 미련이 없었던 걸로 보인다.[7] 남편의 애칭.[8] 샬럿 왕비의 손주들 중에서 웨일스의 공녀 샬럿, 빅토리아 여왕, 메리 애들레이드 등이 있는데, 이들 역시 샤를로테의 육촌이다.[9] 차남 알렉산드르 3세의 부인 다우마 황후가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였고, 차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빅토리아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와 결혼했다.[10] 콘스탄틴의 장녀 올가가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요르요스 1세와 결혼하여 그리스 왕비가 되었고, 미하일의 큰외손녀 알렉산드리네는 크리스티안 9세의 장손 크리스티안 10세와 결혼하여 덴마크 왕비가 되었다.[11] 셋째 시누이 마리야 여대공의 차녀.[12] 찰스 3세와 펠리페 6세는 올가의 후손들이고, 마르그레테 2세는 아나스타샤의 증손녀이다.[13]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야[14] 귀천상혼.[15] 사별. 외젠 드 보아르네의 차남이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요세피나 왕비의 남동생이다.[16] 그리스의 올가 왕비,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등.[17]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아나스타샤,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등.[18] 이후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지만 결핵을 앓아 건강이 매우 안 좋았고, 결국 아들 빌헬름을 출산한 직후 사망했으며 아들 역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요절했다. 니콜라이 1세 부부는 유달리 아끼던 딸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다고.[19] 심지어 남편 파벨 1세보다도 키가 더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