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버트 험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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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미네소타 주 클래스 2)
제78~80대
조지프 H. 볼

제81~88대
휴버트 험프리


제88~94대
월터 먼데일[1]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미네소타 주 클래스 1)
제86~91대
유진 매카시

제92~95대
휴버트 험프리


제95대
뮤리얼 험프리[2]









미합중국 제38대 부통령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주니어
Hubert Horatio Humphrey Jr.


출생
1911년 5월 27일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월리스[1]
사망
1978년 1월 13일 (향년 66세)
미국 미네소타 주 웨어벨리
재임기간
제38대 부통령
1965년 1월 20일 ~ 1969년 1월 20일
서명
파일:휴버트 험프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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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휴버트 험프리 1세
어머니 라그닐 크리스티네 산네스
배우자
뮤리얼 험프리[1]
자녀
휴버트 "스킵" 험프리 3세[2]
낸시 험프리
로버트 험프리
더글러스 험프리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B.A.)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M.A.)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신체
180cm
소속 정당
|
의원 선수
5 (상원)
의원 대수
81, 84, 87, 92, 95 (상원)


1. 개요
2. 약력
3. 생애
4. 선거 이력
5. 대중 매체에서
6. 여담



1. 개요[편집]


The President has 190 million bosses. The Vice President has 190 million and one.

미국 대통령은 미국인 전부를 섬기기 위한 직책이다. 미국 부통령은 미국인 전부에다 한명을 더한 것을 섬기기 위한 직책이다.

미국의 38대 부통령으로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2기 행정부에서 재임했다.[2]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민주당 대선후보로서 리처드 닉슨과 맞붙어 패배한다.

생전에는 앨 스미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더불어 행복한 전사(The Happy Warrior)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8년부터 민권법 제정에 힘 썼고 흑인 민권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정치인 중 하나였다. 린든 B. 존슨이 은퇴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 민주당의 실질적인 보스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3] 베트남 전쟁 폭격 반대와 연방 민권법 제정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으로 고평가받지만, 동시에 유진 매카시, 조지 맥거번 같은 당내 좌파를 소외시켜 196~70년대 기득권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는 등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2. 약력[편집]


  • 1945.7. 제35대 미니애폴리스 시장 (1945.7.2. ~ 1948.11.30.)
  • 1949. 제81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 1955. 제84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 1961. 제87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 1961.1. 상원 민주당 지도부 (1961.1.3. ~ 1964.12.29.)
  • 1965.1. 제38대 미국 부통령
  • 1968. 제37대 대선후보 (민주당 / 낙선)
  • 1971. 제92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1부 / 민주당)
  • 1977. 제95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1부 / 민주당)
  • 1977.1. 상원 임시부의장 (1977.1.5. ~ 1978.1.13.)


3. 생애[편집]


1911년 5월 27일 사우스다코타 주 에서 약사였던 아버지 휴버트 험프리 1세와 노르웨이 이민자 출신인 어머니 라그닐 크리스티네 산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미니애폴리스 시장을 거쳐 1948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의원 임기중 민권법 통과에 기여했다. 1960년 대선에서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으나 경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1964년 대선에서는 재선 도전에 나선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공화당배리 골드워터와 윌리엄 밀러 콤비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해 부통령이 된다.

1968년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민주당 경선에서 존슨 대통령이 지지율 악화로 재출마를 중도포기한 가운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과 유진 매카시 연방 상원의원이[4] 치열하게 맞붙었다. 이때 출마를 선언한 험프리는 자신이 예비 선거에 출마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해 전당 대회를 통한 선출을 노렸고, 존슨 대통령은 험프리를 지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전 반대파의 지지를 선점한 매카시와 후발주자 케네디가 대립하다가 한참 경선이 진행중이던 6월 6일 케네디가 암살되면서 반전파는 그 동력을 잃었고, 케네디 지지자들은 상당수가 매카시 대신 케네디파이자 뒤늦게 출마를 선언한 조지 맥거번에게 이탈하였다.

당시 민주당 경선은 프라이머리를 실시하는 주가 14주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오하이오, 플로리다 등 일부 주는 존슨 대통령이 포섭한 각 주의 유력 정치인들이 차지하는 등 프라이머리를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반전 시위대의 규탄에도 불구하고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험프리는 압도적으로 매카시와 맥거번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미 험프리와 반전파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 후였다.

한편 상대 공화당에서는 넬슨 록펠러, 로널드 레이건 등등의 거물들이 출마한 가운데 전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이와중 민주당에서 뛰쳐나간 남부 보수파들의 모임인 미국 독립당 역시 조지 월리스를 독자후보로 내세웠다.

선거 결과는 케네디에게 패배한 뒤 절차부심한 8년간 리처드 닉슨의 승리.[5] 험프리는 득표율로는 닉슨과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선거인단에서 닉슨의 남부 전략과 월리스의 남부 팀킬로 과거 민주당의 텃밭이엇던 남부 5개주에서 완패한데 이어 캘리포니아와 오하이오에서 3%정도의 격차로 패배한게 치명적이었다. 만약 남부 5개주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두 주에서 승리했다면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험프리였을 것이다. 물론, 선거 전술적인 면에서도 포지티브한 선거 운동을 펼치며 늘상 자신있는 모습을 보인 닉슨에 비해 험프리는 자신을 어필하기보다는 네거티브 중심의 선거 운동에 집착해 오히려 닉슨에 대한 인지도만 높여준 실책이 컸다.

그럼에도 20%대 초반까지 낮아졌던 자신의 지지율을 카리스마로 되살리는데 성공한 "10월 돌풍"으로 실제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보다 꽤 접전이었다. 또 맥거번 등 당내 진보파를 달래기 위해 베트남 전쟁 폭격 반대를 내세운 것이 도움이 되어 불과 1%p 차이로 낙선했고, 1972년 대선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1972년, 험프리는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출마했고, 존슨을 비롯한 당내 원로와 중진들의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6]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청년 당원들과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이 근소하게 험프리를 꺾고 경선에서 승리해 후보가 되지 못했다.[7] 1976년 대선 출마를 고려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출마를 포기했고 대신 지미 카터를 지지했다.

대선 패배후 잠시 정계를 떠났다가 1970년 중간선거에 다시 출마해 연방 상원의원으로 복귀, 77년 상원 원내대표에 도전했으나 경선에서 또 낙선(...)한 그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정/부통령 출신 상원의원이 당연직으로 역임하는 상원 임시 부의장(Deputy president pro tempore)이란 명예직이 만들어졌으나, 험프리 사후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사실상 유명무실한 직위가 되었다.[8] 이후 1978년 상원의원 재직 중 사망하게 된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43
미니애폴리스 시장 선거
미니애폴리스


54,350 (47.49%)
낙선 (2위)

1945


86,377 (60.99%)
당선 (1위)
초선
194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네소타
729,494 (59.78%)
초선
195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642,193 (56.39%)
재선
196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884,168 (57.53%)
3선
1964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43,127,041 (61.05%, 486명)
초선
1968
미국 대통령 선거
31,271,839 (42.72%, 191명)
낙선 (2위)

197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네소타


788,256 (57.75%)
당선 (1위)
4선
197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290,736 (67.51%)
5선[9]

5. 대중 매체에서[편집]


  • 스티븐 킹의 11/22/63에선 존 F. 케네디의 후후후임 대통령이 된다.[10] 그러나 전임자들의 임기동안 황폐해진 미국을 다스리며 번잡한 임기를 보내다가 로널드 레이건한테 개털리고 재선 실패.


6. 여담[편집]


조 바이든이 1970년대 초선 상원의원 시절 보스로 모시던 인물이었다.

메트로돔의 정식명칭은 그의 풀네임이 들어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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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지는 사우스다코타 주 돌랜드.[2] 존슨이 승계 대통령인지라 1기 부통령은 없음.[3] 그는 죽어서도 로툰다 홀에서 유해가 대중에게 공개되는 영광을 누렸는데, 현재까지 부통령 출신으로 로툰다 홀에서 유해가 공개된 부통령은 헨리 윌슨을 제외하면 휴버트 험프리가 유일하니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정도였는지를 감안할 수 있다.[4] 베트남 전쟁의 반대자로 유명한 정치인. 매카시즘의 조지프 매카시와는 별 관계 없다. 험프리와 같은 미네소타 출신이다. 극우파인 조지프 매카시와 달리 유진 매카시는 강경 좌파 성향이기도 하다.[5] 선거인단 301:191:46[6] 이 당시 험프리는 존슨으로부터 존슨의 계파를 물려받아, 조지 맥거번테드 케네디가 이끄는 당내 좌파, 존 코널리조지 월리스가 이끄는 당내 (극)우파와 맞섰다. 조 바이든이 대표적인 험프리파 출신.[7] 삐진 험프리가 이때 맥거번의 선거 운동을 별로 안 도와줬다는 뒷말이 있다. 다만 험프리는 존 코널리처럼 아예 닉슨을 지지하지는 않았다.[8] 참고로 상원의장은 부통령이지만 상원 임시의장(president pro tempore)이 실질적 상원의장 역할을 하게 된다. 험프리에겐 상원 서열 3위의 예우를 해준 셈.[A] 대통령 후보는 린든 B. 존슨[9] 1978.1.13 임기 중 사망[10] 이 작에선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으나 인종문제 해결에 실패해 분리주의자인 조지 월리스가 후임 대통령이 된다. 월러스는 임기 중 암살되고 부통령(명확히 언급이 나오진 않지만 실제 월러스의 러닝메이트였던 커티스 르메이일 것으로 추정)이 승계했다가 험프리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