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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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가발루스의 장미>. 로렌스 알마-타데마, 1888년 작(作)[1]

1. 개요
2. 상세
2.1. 결혼 생활
2.2. 쾌락주의적인 성문화
2.4. 동성애



1. 개요[편집]


고대 로마성문화에 관해 정리해놓은 문서. 고대 로마 제국의 문화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야들 중 하나다.


2. 상세[편집]



2.1. 결혼 생활[편집]


로마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가부장제를 유지했다. 로마 시대에 결혼과 부부 생활은 남녀가 서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고, 남성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관계였다. 당시 결혼한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남편의 결정에 조용히 순응하는 아내가 곧 현모양처였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설령 남편이 바람을 피우며, 밖에 나돌아다닌다고 해도 이에 뭐라 하는 것은 기쎈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었고 제대로 된 아내라면 가만히 인내할 줄 알아야만 했다.[2] 아내에게 잡혀사는 남편은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으로 여겨졌으며, 사회적으로도 욕을 먹었다. 성관계를 가질 때에도 쾌락은 남편의 몫이었다. 아내의 역할은 훌륭한 자식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지, 아내가 부부관계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당대에도 결혼식 제도는 있었으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결혼식과는 많이 달랐다. 애초에 전근대의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가 사랑해서 한다기보다는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 특히 여자의 경우, 아버지가 짝을 정해주면 웬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대 로마에는 크게 3가지의 결혼 제도가 있었다. 첫째가 콘파레아티오(Confarreatio)라고 해서 전형적인 귀족식 결혼이다.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직접 신랑에게 건네주는 결혼이 바로 '콘파레아티오'이다. 현재의 우리가 하는 결혼식 방식과 그대로인 것을 보면, 역사가 엄청 긴 결혼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귀족도 아니고 형편도 그닥인 평민들은 코엠프티오(Coemptio)라는 방식으로 결혼을 했다. 이건 간단히 말하자면 신랑이 돈으로 신부를 사오는 매매혼이었다. 마지막으로 우수스(Usus)라고 하는 사실상의 동거혼이 있었다. 귀족들은 당연히 이런 동거혼을 극도로 불명예시했기에 하지 않았고, 평민들이 하는 결혼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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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파레아티오 결혼식의 모습.

가장 복잡하고 절차가 까다로운 건 당연히 귀족 결혼식인 '콘파레아티오'였다. 결혼이 결정되면 길일을 잡아 신부의 집을 꽃과 태피스트리로 장식했고, 10명의 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피터 사제가 결혼을 주관했다. 신랑신부가 신에게 바치는 결혼 서약문을 낭독하면, 신관이 제물을 바치는 동안 신랑•신부는 서로 밀로 만든 빵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결혼을 축하했다. 이때 수많은 하객들이 신부에게 축복을 빌어줬고, 식이 끝나면 하객들은 모두 밀빵 한 조각씩을 챙겨갔다.

하객들이 참석한 성대한 연회가 끝나면 신혼집으로 줄을 지어 행진했다. 신부는 미래를 기원하는 의미로 길에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고, 남편의 영혼을 위해 동전 하나, 그의 육체를 위해 동전 하나를 남편에게 건넸다. 신랑이 신부와 함께 신혼집으로 행진할 때 신랑과 행진 행렬들은 둘러싼 군중들에게 견과류와 과자를 던졌다. 일단 신혼부부가 신혼집에 도착하고 나면 신랑은 신부를 문지방 너머로 들어올려[3] 옮겼다. 신부가 더이상 친정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신랑의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다. 그리고 신혼집에 신랑•신부가 들어오면 신부가 화로에 불을 지피고, 하객들이 따라들어와 또 다시 연회를 열었다. 밤이 깊어지면 연회를 끝내고 첫날밤을 가지는 걸로 결혼식이 모두 끝난다. 대부분의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26세 정도, 여자는 10대 후반~20세 정도였다.[4]

결혼생활이 시작되면 아내는 남편을 가장으로 따르며 살아야 했다. 다만, 의외로 아내가 친가에서 물려받은 성씨는 평생 지킬 수 있었고, 아이를 낳았을 때도 흔하지는 않았지만, 모계쪽의 성을 붙이는 것도 가능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은 여성이 남성에게 죽을 때까지 순종하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간통은 존재했고, 남자와 여자 모두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간통을 저질렀다면 아내는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혼을 하면 아내는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을 몽땅 회수해서 돌아갔다. 반대로 여자가 간통을 저질렀다면 지참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그대로 쫒겨났다. 로마 사회는 남편보다 아내의 불륜에 훨씬 엄격했다. 남편이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아내와 그 애인을 죽일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졌다.[5] 죽이지 않는 대신 법정에 기소할 수도 있었다. 법원에 기소할 경우, 아내의 재산 3분의 1, 그 애인의 재산 절반을 박탈했다. 간통죄로 이혼 당한 여성은 재혼도 불가능했으며,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했다. 또한 만약 결혼한 여성에 대한 강간이 입증될 수 없다면, 간통죄를 범죄로 규정하는 아우구스투스 법에 의해 여성에게 간통죄가 적용되었다.

굳이 간통이 아닌 다른 사유로도 이혼이 가능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유는 불임과 성격 차이. 이 경우는 합의이혼처럼 아내는 지참금을 되찾고 남편의 집을 떠났으며, 그걸로 부부관계는 끝이었다. 의외로 이혼의 절차는 끼다롭지 않아서 당사자들의 합의가 있다면 굳이 공공기관에 가서 이혼을 신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도 제정 초기의 민법에 의하면 남자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고 여자에게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지만, 서기 2세기경에 들어서 법이 개정되자 여자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재혼의 경우, 귀족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지도 않았다. 아내와 사별한 경우, 애도 기간 없이 바로 재혼이 가능했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는 최소 10개월 정도 텀을 두었다가 재혼이 가능했다. 굳이 10개월의 간격을 둔 건 임신상속 문제 때문이었다. 남편이 죽기 직전 아내와 아이를 가진다거나 했다면 상속 문제가 불거질 수 있었으니 일부러 최대한 시간을 늦춰 10개월 동안 임신 유무를 가려내고자 한 것이다. 어쨌든 과부도 이 기간이 지나면 완전히 자유로워 진다. 돈이 많은 과부들은 원하는대로 남자를 골라 잡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사망률이 높고 평균 수명이 짧았기에 재혼은 오히려 장려되는 일이었다.[6] 재혼 가정은 여기저기 넘쳐났고, 종종 계모가 의붓 자식들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도 있었다.


2.2. 쾌락주의적인 성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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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고대 로마에서는 여장이 유행했다. 로마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도 카프리 섬에서 연회를 즐기는 과정에서 직접 여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증손자이기도 하는 제3대 황제 칼리굴라도 가끔씩 미의 여신 비너스 분장을 하고 연회에 등장했다.

꼭 자신이 여장을 하는 게 아니라 예쁘장한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폭군의 대명사 네로. 네로는 제 임신한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를 발로 차서 죽여버렸는데, 정작 죽이고 나서는 후회막심해서 아내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사비나 황후와 닮은 사람을 발견했는데 하필이면 그게 여자가 아니라 남자 노예였던 포피루스였다. 죽은 아내와 똑 닮은 포피루스에 홀딱 빠진 네로는 그를 거세시킨 뒤 자유인으로 해방한 후 반쯤 아내로 삼다시피 했다. 네로는 또다른 자유노예들과 함께 침실에서 포피루스와 서로 즐기는 걸 좋아했다고.

고대 로마 최고의 지략가이자 장군으로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타고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카이사르는 '만인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바람꾼이자 유부녀 헌터였다. 오죽하면 카이사르가 지나갈 때 장난조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난봉꾼이 지나가니 마누라를 숨겨라!'라고 외칠 정도였다. 가장 유명한 연인은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였지만 이 외에도 삼두정치의 동료였던 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아내,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의 아내들까지 두루 후리고 다녔다. 카이사르가 더 대단한 것은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는 점인데, 그는 칼같이 업무와 여자관계를 구분했고[7] 자기 관리에 엄청나게 철저했다. 탁월한 관리 능력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와 헤어진 다음에도 그를 싫어하는 여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자식 복은 없었는지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카이사리온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 외에 젊은 시절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에게 뒤를 개통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두고두고 그의 정적들에게 까일거리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가장 유명한 애인 소동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 사건' 당시 카틸리나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카이사르가 스캔들을 이용해 그 의심을 한번에 떨어버린 이야기이다. 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웬 서신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서신을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내통하는 증거[8]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카이사르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서신의 내용은 사실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책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혹은 "(당신 편지나)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라고 나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기세등등하게 카이사르를 몰아붙였다가 망신당하게 생겼으니 비난을 쏘아붙였다는 건 동일.

매춘도 유행했다. 당시 고대 로마에서는 상당히 매춘이 성행했는데, 당시 매춘의 대명사로 알려진 위인이 바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다. 메살리나는 황후라는 고귀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욕으로 유명했다.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황제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메살리나는 애인들과의 성관계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밤마다 팔라티노 황궁을 빠져나가 고급 매춘부로 일했다. 심지어 이도 모자라서 천민들이 이용하는 최하급 매춘굴에서 놀았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과감하게 남근의 고리가 달린 '리시스카'(Lisisca)라는 창녀로써의 예명까지 적힌 문패까지 걸어놓고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은 만큼 악의적인 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메살리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 학자인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살리나가 로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매춘부를 선택해 밤샘 섹스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쟁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메살리나는 무려 1시간에 1명씩 총 25명의 남자들을 상대해서 섹스배틀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 세대 후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55년~140년)는 자신의 시에서 매음굴에 다니던 시절 메살리나의 행각을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황제가 잠든 것을 알았을 때 하녀와 함께 동행해서 매음굴로 떠나곤 했으며 그때마다 창녀의 두건을 쓰고, 팔라티노 황궁의 침대보다 매음굴의 매트를 선호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녀는 금발 가발로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을 감추고, 오래된 더러운 시트 냄새가 나는 창가에 들어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젖꼭지에 금박을 입힌 것 외엔 벌거벗은 채 자신을 암컷 늑대라고 칭하며 손님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돈을 챙겼고 그런 다음 모든 남자들의 쓰다듬을 즐기면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포주가 창녀들 해산시킬때가 오면 그녀는 마지못해 그녀의 방에서 끝날때를 기다리며 가능한 마지막 시간까지 지칠때까지 섹스를 하며 욕정을 불태우고 황궁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그는 메살리나를 창녀 황후(meretrix augusta)라고 칭했는데 이 부분은 로마의 정계에 간섭한 악명으로 이름 높았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를 비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9]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수식어답게 로마 시대에도 매춘부는 가장 흔한 직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매춘부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다. 아름답고 교양있는, 단순한 육체미 뿐만 아니라 기예도 두루 갖춘 고급 매춘부의 경우 메르트리세스(Mertrices)라고 따로 불렀다. 이들은 정부에 공식 등록이 되어있는 사업자였고[10] 세금도 납부했다. 반면 단순히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들은 프로스티불라에(Prostibulae)라고 뭉뚱그려 불렀다.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프로스티불라에'와는 달리 '메르트리세스'들은 꽤나 풍족하게 살았다. 메르트리세스들은 악기 서너 개쯤은 가뿐히 다룰 줄 알았고 아름다웠으며 재치도 있었다. 당연히 후원자들이 돈이나 팁을 그득그득 뿌려줬고, 덕분에 메르트리세스들은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11]아우구스투스의 간통죄는 유부남과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창녀를 면제했는데 간통을 도덕성보다 법의 문제로 생각했던 일부 사회 저명 여성들은 간통죄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창녀로 등록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창녀(메르트리세스)로 등록하고 활동할 용의가 있는 간통인은 적어도 그녀의 권리와 지위상실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다.[12]

매춘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아예 알몸으로 다니기도 했다. 만약 남성 전용의 옷인 토가를 입고 다닌다면 그건 100% 확률로 고급 매춘부였다. 후원자가 선물한 황금 장신구나 보석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악세사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기가 많다는 증거였기에, 매춘부들은 제 인기를 과시할 목적으로 일부러 극도로 호화롭게 차려입고 다녔다. 또한 매춘부들은 꼭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남자 매춘부, 즉 남창들도 많았다.

그러나 모든 매춘부들이 화려한 삶을 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매춘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당시 이들은 최소 14세, 심지어는 더 어릴 때부터 매춘을 강요받아 매음굴로 끌려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매춘부들은 자유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노예 출신이었는데, 로마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사유 재산으로 취급받았기에 매춘부가 번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손님이 매춘부 본인에게 돈을 직접 쥐여주고 싶어한다면 가끔씩 예외를 두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거 없었고, 매춘부들은 돈을 주인에게 빼앗기며 성노예로 학대받는 일이 잦았다. 강간은 로마 사회에서 범죄였지만 일반 여성과 달리 매춘부들은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키케로의 경우 여배우를 집단 강간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 혐의의 의뢰인을 변호했다.

도시에서 창관들이 밀집한 유흥가는 루파나리움(Lupanarium)이라고 불렀다. 보통 분주하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했고, 사람이 하도 많이 다니는 통에 더럽고 비좁았다. 매춘 업소 내부에는 외설적인 벽화들이 가득했으며 손님이 매춘부를 지정하면 그 매춘부가 있는 작은 방 안에 들어가 일을 보는 식이었다. 좁은 방의 문에는 분필로 소녀의 예명과 가격이 쓰여있었고, 안에는 작고 희미한 조명만이 있었다. 화대는 굉장히 저렴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매춘부의 화대가 빵 한덩이 가격보다 쌌다. 정말 극심한 거지가 아니라면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어서 일반적인 로마 시민들은 매춘 업소들을 자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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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퇴폐>. 토마 꾸뛰르. 1847년 작(作).[13]

로마 제국 최고의 막장 황제들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엘라가발루스다. 14세라는 역대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세상물정 모르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방탕과 사치를 부리느라 재위 5년도 안되어 보다못한 제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게 살해당했는데, 정말 기발할 정도의 성욕과 기행으로 유명하다.

"그는 제 몸 모든 구멍에 정욕을 품었다. 제 저열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내 큰 성기를 가진 남자들을 찾아오라 시킬 정도였다... 남자의 성기 크기에 따라 그자의 직급이 결정되었다... 연회장에서 취해 곯아떨어진 친구들을 몰래 끌고가 사자와 표범, 곰 등이 들어있는 방에 처넣은 뒤, 사람들이 깨어날 때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을 즐겼다.[14]

몇몇은 지나치게 충격을 받아 죽기까지 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15]

엘라가발루스는 트랜스젠더의 시초 격 인물로 불린다.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양성애자 성향이었던 그는 평소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싶어했고, 자신에게 여성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에게 제국의 반을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어린 나이에 여자와 3번 결혼했으나[16] 누구와도 아이를 갖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자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그는 눈에 짙은 화장을 칠하고 뺨에 분을 발랐으며 여성의 옷을 차려입고 다녔다. 제 궁전 안에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질 별도의 방을 마련했고, 궁전 안 모든 사람들이 제 알몸을 볼 수 있도록 벌거벗은 채로 궁전을 돌아다녔다.

엘라가발루스처럼 막장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동성 연인을 둔 황제는 많았다. 가장 유명한 건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안티노우스의 로맨스. 안티노우스는 기원후 123년 경 처음 하드리아누스를 만나 뛰어난 아름다움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총애하는 애첩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가는 곳마다 안티노우스를 데리고 다니며 끼고 살았다. 하지만 안티노우스는 130년 경에 이집트 순방 도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다.[17] 안티노우스의 죽음을 극도로 슬퍼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곳곳에 그를 기리기 위한 사원을 세워 신격화하기까지 했다. 그를 모시는 신앙은 상당히 인기가 많아서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안티노우스가 죽고 100년이 흐른 뒤에도 종교가 남아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도 이쪽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 섬에 들어박혀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는데, 고립된 섬에 괴팍한 황제가 주구장창 죽치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체 황제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소문이 무성했다. 특히 소아성애와 관련된 소문이 많았다. 티베리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 있으면 어린 소년들이 그의 허벅지 사이를 헤엄치고 그의 성기를 빨도록 훈련시켰다는 소문, 카프리 섬의 황궁 벽에는 온통 음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소문, 3명의 미소년들을 한 조로 짜서 그 앞에서 한꺼번에 교합하도록 시켰다는 소문, 두 미소년을 강제로 취한 뒤 그들이 불평하자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소문 등 거의 괴담 수준으로 그에 대한 악소문이 넘쳐났다.[18]

동성애는 아니지만 근친 의혹이 있었던 황제도 있다. 네로와 함께 로마 폭군의 양대 산맥인 칼리굴라는 유난히 3명의 여동생들을 총애한 것으로 유명했다. 개중에서도 여동생 드루실라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 그녀를 항상 연회에서 곁에 앉히고 심지어 여신으로 부르도록 시켰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근친상간에서 풍기는 부도덕성이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와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 대부분은 이걸 사실로 믿었다. 다만 현대 들어 로마 사학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칼리굴라가 여동생들을 성적으로 좋아했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고, 오히려 칼리굴라의 정통성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깎아내리기 위한 음모론에 불과했다는 설이 주류다. 칼리굴라를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것.

로마 시대의 개방적인 성문화는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쭉 유지되었다.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 창녀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사례도 있었다. 동로마 최고의 성군들 중 하나로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가 바로 그 주인공. 그녀는 어릴 적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술집에서 춤을 추고 몸을 팔기도 했는데, 타고난 아름다움과 압도적으로 명석한 두뇌로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하여 황후라는 최고의 신분까지 올라갔다.[19] 그녀가 어린 시절 가장 즐겨 공연하던 내용이 바로 '레다백조'다. 그녀가 헐벗은 채로 누워있으면 동료들이 그 사타구니에 보리 낱알을 뿌렸다. 그러면 백조[20]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흩뿌려진 보리알들을 쪼아먹는 게 공연의 하이라이트. 그 외에 공연장 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배우들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흔히 로마식 연회하면 난교와 온갖 음란한 짓거리가 벌어지는 퇴폐적인 장소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연회를 실제로 주최한다고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절대 없었고 사적으로 비밀리에 은밀한 취향으로만 남았다. 그나마 이런 난잡한 연회를 주최한 황제가 칼리굴라엘라가발루스 정도인데, 성적 타락에 가까운 연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이런 지나칠 정도의 성적 탐닉은 그 당시에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검투사들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당시의 최고 연예인이자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고위 계급의 여성들이 말그대로 검투사들에게 환장했다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명 검투사들과 같이 잠을 자고 싶어했고, 종종 엄청난 거금을 지불하고 하룻밤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는 이피아라는 원로원 의원의 아내가 검투사와 함께 도주한 일화를 시로 적기도 했으며 저명인의 아내가 검투사와 잤다는 스캔들이 터지는 경우도 흔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검투사들과의 불륜으로 유명했는데, 하도 아내의 성욕이 심하자 보다못한 황제가 아내의 불륜 상대 검투사들을 죄다 죽여버리고 그 피로 아내를 목욕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자 더이상 검투사들과 놀아나지 않았다고. 다만 이 이야기가 신빙성은 거의 없는 뜬소문이기에 흥밋거리 정도로 귀흘려 들으면 된다. 어쨌든 당시에 우람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검투사들이 성적으로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3. 콜로세움수간[편집]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유흥거리였던 콜로세움에서는 정말 별별 구경거리가 넘쳐났다. 맹수들을 풀어 검투사들과 싸우게 하는가 하면 아예 을 경기장에 그득 채워놓고 배를 띄워 모의해전을 벌이는 등 로마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를 만했다. 게다가 각지에서 잡아온 노예전쟁포로, 범죄자들을 경기장에 집어던져넣고 그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인간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즐기던 변태스러운 경기들 중에서도 끝판왕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수간였다.

맹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물들을 어느 정도 길들이고 조련할 사람이 필요했다. 개중에 가장 유명하고 능력이 좋았던 인물은 로마 역사상 최고의 베스티아리[21]로 꼽히는 카포포루스(Carpophorus)였다. 카포포루스는 기원후 1세기 경의 인물로 원래는 가난한 하층민 계급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경기장에서 불타는 짚단 한 움큼으로 을 물리친 걸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후 타고난 재능으로 사자, 여우, 코끼리, 표범 등 사나운 동물들과 맞서 싸우는 법을 익혔다. 카포포루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맨손으로 맹수들의 목을 꺾어 죽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심지어 한 경기에서 20마리가 넘는 맹수들을 무기도 없는 혈혈단신으로 싸그리 죽여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카포포루스의 인기는 엄청나서 시인 마르티알리스가 그를 찬양하는 를 써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그가 경기장에 떴다하면 25만 석의 경기석이 꽉꽉 들어찼다.

파시파에황소와 접했던 일을 오늘에야 보았노라! 우리가 그 것을 오늘에야 보았노라! 고대의 전설이 사실로 드러났노라. 전설이 무엇을 노래하든,[22]

이 경기장이 그 것을 보여줄 것이라.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글.

카포포루스는 타의추종을 불가하는 동물 조련 능력, 그리고 싸움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또다른 쪽으로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바로 동물들이 인간을 수간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 사실 함성이 빗발치고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경기장 한복판에서 극도의 흥분공포 상태에 싸여있는 동물이 인간을 덮치도록 만든다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동물들에게 성적 흥분을 교묘하게 불러일으키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최적의 상태로 흥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워낙 까다로운 작업이라 콜로세움에서조차 이런 쇼가 벌어지는 건 상당히 힘들었는데, 이걸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카포포루스였다.

카포포루스는 사자, 멧돼지, 얼룩말, 종마 등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을 덮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동물이 종 자체가 다른 인간을 처음부터 교미 상대로 생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카포포루스는 일부러 암컷페로몬이나 냄새를 경기장에 들어갈 여성들에게 묻히는 편법을 썼다. 일부러 발정기에 다다른 암컷에게서 냄새을 채취한 다음, 그걸 여자들에게 묻힌 뒤 오랫동안 교미하지 않은 수컷 동물들과 함께 경기장에 들여보내는 방법이었다. 수간을 하기도 전에 여자를 죽여버리면 곤란하니 일부러 소음에도 놀라지 않고 상대적으로 온순한 수컷들을 썼다. 관중석 아래에서 여자가 거적떼기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로 있으면 동물이 여성을 덮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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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디르케(The Chiristian Dirce). 헨리크 시에미라츠키 작(作).[23]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이 수간 쇼에 동원되었는데 개중에서 황소기린 같은 거대한 동물들과 짝지어진 여성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동물들이 교미 도중 지나치게 흥분해 발톱을 여자의 에 박아넣는 경우도 있었고 지나치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아예 여성의 척추가 부서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 끔찍한 쇼에 지원하면 을 지급했던 터라 스스로 자원하는 빈곤층이나 노숙자 여성들이 많아 여성의 공급은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포포루스가 주최한 첫 수간 쇼의 희생자는 5명의 남성을 독살해 죽인 여성이었다. 그 죄로 전 군중이 보는 앞에서 수탕나귀에게 강간당했는데, 군중들이 그걸 보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열기가 엄청났다는 후문이 있다.[24] 여자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자 결국 야생동물들을 풀어 여자의 고통을 끝내주었다고 한다. 그 외에 침팬지에게 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말뚝에 묶여있는 소녀들을 강간하게 만드는 쇼도 있었다.

여자만 수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도 수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남성 죄수들을 수탕나귀에게 수간당하도록 한 뒤 그 앞에 표범을 풀어버리는 등 상당히 끔찍한 처형 방법들을 쓰기도 했다. 반대로 죄수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암염소와 죄수들을 수간시키기도 했다. 수간이라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사티로스로 분장한 남자들이 경기장에서 어린 미소년들을 덮치도록 하는 행사도 있었다.[25] 그당시에는 나름 보기힘든 특급 행사였다고. 현대인들이 생각하면 수간 자체가 완전히 미친 짓이지만 색다른 유희를 즐겼던 로마인들에게는 그저 한낱 오락거리일 뿐이었다.

수간 쇼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도 있었다. 주신 제우스는 여러 동물들의 형상을 하고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는데[26], 이걸 재현하겠답시고 수간 쇼를 공공연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행사 주최자들은 이 수간 행사가 단순한 여흥거리일 뿐만 아니라 제우스를 경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포장해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당연히 군중들은 열광했고 수간 쇼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행사들 중 하나였다.

2.4. 동성애[편집]


고대 로마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의 선례를 본받아 동성애가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와는 큰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로마 시민이라면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에로메노스'와 '에라스테스'라고 해서 동성애가 단순히 유희가 아니라 교육과 사회화의 단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대 로마에 들어서는 이런 교육적인 면모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그냥 색다른 쾌락을 추구하는 일종의 유희에 불과했다. 가부장적인 면모가 있었던 로마에서는 로마 시민권자가 공격하는 건 괜찮았지만 수비하는 건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동성관계에서 남자 역할을 맡는 건 사회적인 수치가 아니었지만 반대로 여자 역할을 맡는 건 천박하고 수동적으로 봤다. 여자 역할을 맡는 남성들은 대개 남창, 노예 정도 취급을 받았다.

로마 사회는 가부장적이었고 로마인들은 남성성을 중요시했다. 당시의 남성성이란 남들을 지배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였고, 그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 파트너의 사회적 신분이었다. 교양있는 로마 시민이라면 연애대상이 소년이든 소녀든 상관이 없었으나 만약 그 연애대상이 같은 로마 시민권자라면 그건 문제였다. 자유로운 로마 시민으로 태어난 남성이나 그의 딸, 아들과 교제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여자 역할을 해줄 동성 연인을 두고 싶다면 반드시 천한 신분의 노예나 매춘부를 대상으로 해야했다. 다른 남자의 노예를 성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인의 허락을 받고 써야했다. 지나치게 동성애에 탐닉하는 것도 좋게 보진 않아서 제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속물로 봤다.

동성애가 고대 그리스만큼 로마에 퍼지지 않았던 것은 여성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여성들은 정말 그 권리가 열악해 가정대소사에 큰소리를 내지 못했고 자식 교육에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고대 로마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이보다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자식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자식 교육에 주도적으로 나서니 굳이 어린 소년들이 타인 남성에게 교육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사회의 주류 문화도 아니었다.

동성애가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시기는 12~20세 사이, 즉 사춘기 시기였다. 육체미를 숭상했던 고대 로마는 소년들의 풋풋한 몸을 최고로 쳤다. 보통 소년들은 엉덩이에 털이 나기 전까지가 최적의 시기였다. 털이 부숭부숭 난 몸보다는 부드러운 남자의 몸이 더 선호됐다. 다만 이에도 그리스와의 차이점이 있었는데,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의 몸 그자체를 숭배했던 그리스와는 다르게 로마인들은 알몸을 야만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체를 공공에 보여주는 건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를 알몸으로 묘사했다.

당시 동성 관계에서 바텀을 부르는 용어는 키나이두스(Cinaedus)였다. 여자 역할을 하는 남성을 부르는 경멸적인 단어였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는 명칭이기도 했다. 보통 잘생긴 미소년을 '키나이두스'라고 불렀는데 이때문에 키나이두스는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단순히 동성 애인을 부르는 명칭만은 아니었고, 중성적인 미를 가진 남자나 예쁘게 생긴 소년들을 놀리는 단어이기도 했으니 한국식으로는 기생오라비 정도의 의미도 함축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적이고 주도적인 남성이 이상적이라고 보았지, 여자처럼 곱게 생긴 남성을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보진 않았기에 가문 간에 결혼을 주선하거나 할 때에는 오히려 키나이두스가 선호되지 않았다.

키나이두스에서 조금 더 관계가 진지해진 게 '동침하는 자' 콘쿠비누스(Concubinus)[27]였다. 여자와 결혼하기 전에 지위 높은 남성들이 들였던 남성 의 개념인데, 연회에 함께 참석하거나 을 따르기도 했다. 총애를 많이 받으면 본처의 위치까지 위협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귀족 남자가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보통 남성 첩의 미모도 빛을 잃었기에 버림받는 경우도 많았다. 카툴루스가 남긴 <결혼 찬가>에는 귀족 남성이 결혼하고 나면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남첩의 모습이 등장한다. 더이상 주인이 그를 원치 않으면 길게 길렀던 머리는 짧게 자르고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주인의 아내를 제외한 집안의 하녀들 중 하나와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의 남첩을 원한다면 상속해줄 수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연인 안티노우스, 제우스의 연인 가니메데가 이 콘쿠비누스다.

키나이두스나 콘쿠비누스가 나이가 들면 엑솔레투스(Exoletus)라고 불렀다. 보통 신체적 전성기가 끝나 소년미가 완전히 사라진 성인 남첩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당연히 소년 시절만큼 잘 대우받지는 못했고, 쫒겨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계속 데리고 살거나 주인이 해방시켜서 다른 곳에 정착시켜주기도 했다. 엑소레투스가 되면 키나이두스나 콘쿠비누스에 비해 그 대접이 확연히 안좋아졌기에 키나이두스들은 최대한 털이 늦게 나길 기도했다고 한다. 참고로 보통 남첩들이 여자 역할을 맡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있는 엑소레투스들은 남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고위 남성들의 은밀한 취향을 만족시켜주었던 것. 여자 역할을 고집했던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궁전을 잘생긴 엑소레투스들로 가득 채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적 취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양했던지 소년기~청년기 남성들 뿐만 아니라 중년~노년기의 남성들도 동성애에 참여했다. 귀족 계급 남성 노인들 중에는 박히는 게 취향이었던 사람들도 존재했는데, 이 사람들은 보통 위에 설명한 엑소레투스를 애용했다. 로마인들은 이런 노인들을 노망이 났거나 역병에 걸린 것처럼 취급했다. 로마인들은 바텀 취향의 사람들은 모조리 경멸했지만 개중에서도 젊은 남성 노예들에게 박히는 나이든 노인들은 더더욱 혐오했다. 잘생긴 남자를 여자 역할을 해줄 파트너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남자 역할을 해줄 파트너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모르부스'(morbus), 즉 질병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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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e673 '워렌 컵' A면에 새겨진 금속 부조[* Warren Cup. 기원후 1세기 경 만들어진 은제 컵이다. 1999년 대영박물관이 무려 18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는데, 이는 대영박물관이 단일 유물 구입비로는 최고가를 지불한 사례였다. 크기는 높이 11cm, 너비 10cm 정도다. A면에 새겨진 부조는 두 남성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옆에 문 사이로 빼꼼히 훔쳐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푸에르 델리카투스를 희롱하는 귀족 남성의 모습
안티노우스의 흉상
소아성애도 존재했다. 로마 남성은 14세에 어린이 딱지를 뗐고, 17세 정도부터 공직 생활에 참여 가능한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14세나 17세 정도의 소년들보다도 더 어린 소년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성적 욕망의 대상들이 되는 소년들을 푸에르(Puer)라 불렀다. 주인이 어린 소년들을 강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대등한 연인관계라기보다는 악질적인 착취 관계에 더 가까웠다. '소년 장난감'이라는 뜻의 푸에르 델리카투스라 불리기도 했으니 그 대접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푸에르들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취약한 위치에 있었고, 겉만 번지르르한 미동(美童)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종종 악랄한 주인들이 푸에르의 소년미가 최대한 오래 보존되도록 푸에르들을 거세하기도 했다.

동성 간의 결혼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남자와 남자 간에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성결혼을 묘사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을 조롱하는 내용이고, 참석자들이 진지하게 남긴 기록은 없다시피하다. 서기 3세기 초에 엘라가발루스 황제도 신부 역할을 맡아 결혼식을 올렸고, 그 네로 황제도 남자와 함께 한 번은 신부 역할로, 한 번은 신랑 역할로 결혼식을 올린 적이 있다. 카시우스 디오가 남긴 기록에는 네로의 동성결혼보다 그의 공연을 추악한 것으로 묘사했으니 생각만큼 동성혼이 아예 금기시되는 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기원후 4세기 경 기독교가 유입되며 동성혼은 완전히 금지된다.

로마 법전에는 동성간 강간을 다룬 조항이 존재했다. 자유로운 권리를 가진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강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간범은 고대 로마에서 보기 드문 형벌이었던 사형에 처해졌고, 강간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았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제 몸을 팔거나 바친 남성들의 경우는 완전 반대였다. 이들은 법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없었으며 노예는 강간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노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재산에 가까웠기에 주인이 노예를 강간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고, 대신 다른 사람이 타인 소유의 노예를 취했을 시에는 주인이 직접 고발이 가능했다. 죄목은 당연히 강간이 아니라 재산손괴죄였다.

폼페이 목욕탕에서 발굴된 동성 관계를 묘사한 모자이크 유물.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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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도 강간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 내 같은 자유시민들끼리 강간을 하거나 성교하는 것은 사회적인 죄악이었으며, 걸리면 엄격하게 처벌받았다. 그대로 방치하면 규율이 느슨해질 수 있었기에 다른 죄목들보다도 더 가혹하게 처리했다. 관계를 맺은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었다. 만약 타인이 자신을 덮치려 든다면 죽을 힘을 써서 저항하는 게 권장되었다. 대표적인 예시를 소개하자면 공화정 말기 시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하 군인 중에 '트레보니우스'라고 잘생긴 병사가 하나 있었다. 백부장 루시우스는 트레보니우스를 그의 막사로 불러 강제로 취하려 시도했는데, 격앙된 트레보니우스는 되려 칼을 뽑아 루시우스를 죽여버렸다고. 일반적으로 상관 살해는 무조건 처형이지만 트레보니우스는 예외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심지어 루시우스는 당대 로마 최고의 권력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친척이었다. 마리우스가 직접 트레보니우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 용기를 칭찬하면서 면류관을 씌워주었다고 하니 강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알 수 있다.

남성 간 동성애만 써놓았지만 여성 간 동성애도 충분히 많이 일어났다. 남성 간 동성애에 비하여 남은 기록이 압도적으로 적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분명 존재하긴 했던 것이다. 로마 시대에 레즈비언은 헤타이리스티리아, 트리바스, 레스비아 등등 다양하게 불렸다. 로마인들은 성행위를 할 때에는 반드시 남자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레즈비언들 사이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 작가들은 여성-여성끼리 관계를 할 때 서로 딜도를 사용하거나 한 명의 음핵이 유별나게 클 것이라 상상했다고 한다. 여성들을 묘사한 유물들을 봐도 여성 둘이서 관계를 갖는 모습을 그린 유물은 단 한 점 밖에 없지만 딜도를 사용하는 여성의 모습은 생각보다 꽤나 많다.

로마의 동성애는 시간이 흘러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완전히 끝장난다. 동성 연애에 개방적이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과는 달리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도 동성애를 지극히 혐오했다. 동성애가 곧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사악한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4세기 들어 동성애를 규제하는 수많은 법률들이 반포되었으며 동성 연애 자체가 사회적으로 터부시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동성애는 배척되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성애를 공식 비난하며 남창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성애자를 화형에 처할것을 명하는 등 동성애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정책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종언을 맞았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도 성적인 유혹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남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서구에서는 이 문서의 내용과 같이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하던 문화가 비교적 많이 사라졌었으나, 현대에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며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국가들이 점점 이 시절의 성문화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1] 세베루스 왕조의 변태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연회를 묘사한 작품.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장미 꽃잎들을 그려놓았다. 199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21억 원에 낙찰되었고, 현재는 멕시코계 억만장자가 소유 중이다.[2] 다만 로마 공화정이 끝나고 로마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불륜이나 혼외 관계는 썩 좋지 않은 짓으로 여겨졌다. 대표적인 예시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 대 율리아가 애인 사이에서 임신을 하자 크게 분노해 딸을 배에 태운 다음 섬으로 보내버렸다.[3] 이 풍습 자체는 아직까지도 서양 결혼식에 그대로 남아있다.[4] 여성의 결혼 법정 최소 연령은 12세, 남자는 15세였지만 보통 이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5] 다만 이건 그 애인이 천한 신분일 때 한정이었다. 게다가 애인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뿐이지, 실제로는 대단히 복잡하고 절차도 까다로웠기 때문에 실제로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6] 당시 의사들은 여자가 지나치게 오래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자궁이 수축하고 히스테리에 걸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라도 재혼을 권고했다.[7]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자란게 확실한 카이사리온도 혈통 덕을 딱히 보진 못했다. 오랜 애인의 이들이자 자신의 사생아란 소문도 돌았던 브루투스를 이뻐했고, 본인의 혈육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신 했지만 이 둘 모두 능력이 탁월한 것 때문에 중용한 것이다.[8]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 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패라는 의심을 받았다.[9] 물론 주요 불륜 상대로 원로원 귀족들을 고르는 여인이 그 정도까지 막나가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소문이 시중에 돌 정도였다면 그녀의 성적 방종에 대한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하게 만든다.[10] '아에딜레'라고 부르는 공공기관에 가서 매춘부임을 신고하고 이름과 인적사항을 적어내면 됐다. 한번 아에딜레의 인명부에 올라가면 무슨 짓을 해도 지울 수 없었다.[11]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지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뜻은 아니었다. 메르트리세스도 본질적으로는 창녀였고, 사회적으로는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제 몸을 팔아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배우가수도 천한 대접을 받았다.[12] 출처: Adams, J. N., Words for "prostitute" in Latin, University of Koeln, 1983, p. 342[13] 로마 제국 말기의 지도층의 퇴폐함과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유명한 그림으로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성경》의 영향을 받아 로마 제국 시대를 퇴락하고 문란한 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상징하는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14] 이 동물들은 모두 조련되어 있어 실제로 위험하거나 그러진 않았다.[15] 아우구스투스부터 누메리아누스까지 황제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역사서. 단 이 책은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위서라고 한다.[16] 심지어 개중 두번째 아내는 절대적 순결의 의무가 있는 베스타 여사제였다. 망나니 엘라가발루스가 그녀를 강간하고 강제로 결혼한 것이다.[17]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가설이 다양하다. 음모에 휘말려 죽었다는 말도 있고, 아니면 나이가 들어 하드리아누스에게 버림받을 걸 두려워해 일부러 젊음을 보존하고 있을때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8] 참고로 위의 소문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 이 소문들을 남긴 인물은 수에니토우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열렬한 공화국 지지자로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극도로 증오했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는 이 사람이 쓴 역사책의 내용에 대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티베리우스는 그런 소문은 있었을 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철혈 황제로 매우 인내심이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19] 테오도라 황후는 로마 역사상에서도 손꼽힐만큼 영리한 황후이자 여장부로 유명하다.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겁먹은 황제가 항구로 도망치려 하자 오히려 그를 꾸짖으면서 당장 돌아가 반란을 진압하라고 설득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유능해 그 누구보다 황제에게 신임받았던 인물이다. 어렸을 때 비참한 경험을 잊지 않고 창녀들의 처우 개선에 힘쓰기도 했다.[20]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그녀와 아이를 가진다.[21] 동물과 싸우는 사람을 "베스티아리(Bestiarii)"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직종만을 가리키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들은 대개 수입해온 흔치 않은 동물들과 싸웠다. 제국 각지에서 잡아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카스피호랑이, 코뿔소, 시리아코끼리, 아틀라스불곰, 유라시아불곰, 아시아사자 같은 희귀한 맹수들도 잡아 왔다.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기에 이들은 ,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칼레도니아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 못지않게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22] 파시파에는 미노스 왕의 왕비였다. 하지만 파시파에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하얀 황소를 사랑하게 되었고, 장인 다이달로스를 시켜 나무로 된 암소의 형상을 만들도록 했다. 형상이 완성되자 그 안으로 들어가 발굽에 치이거나 깔려죽을 걱정 없이 황소와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다. 이 사랑의 부산물이 반은 사람 반은 황소의 모습을 갖춘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네로는 이 전설을 실제로 경기장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여성을 암소 모습의 특수 제작 틀 안에 집어넣고 황소가 덮치게 했다고.[23]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 여성을 죽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디르케는 리코스의 아내이자 테베의 여왕이었는데, 남편의 조카 안티오페를 학대하다가 그녀의 아들들 암피온과 제토스에게 복수를 당했다. 최후는 달리는 황소의 에 묶인 채 그대로 바위에 처박히는 방식으로 사형당했다. 속설에 따르면 네로가 그 방법으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해 죽였다고 한다. 그 설화를 묘사한 게 바로 이 그림이다.[24]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지만, 잘 생각해보자. 만약 고대 로마인이 현대인만큼 수간을 죄악시하고 역겨워했다면, 이런 '수간 쇼'는 충격 받은 관중들에게 호응은커녕 야유지탄을 받고 없어졌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사람들끼리 죽이는 걸 보면서 박수치는 관중들인데, 이런 건 팝콘거리였을 것이다.[25] 로마인들은 하반신은 염소,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인 신화속의 동물 사티로스성욕이 왕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동성애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적 기질이 있었던 로마인들이 일부러 이런 행사를 기획했다고 한다.[26] 황소로 변신헤서 에우로페를 납치하고, 사티로스로 변신해서 안티오페를 덮치고, 백조로 변신해서 레다를 덮쳤다.[27] 여성 첩의 경우 Concu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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