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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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기존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지붕을 덧씌워 방어력을 높이고 포문을 많이 설치하여 사격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조를 변경, 앞에는 용머리 형태의 충각 겸 포문을 달아 돌격전에도 용이하게 설계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전술은 배에서 직접 사격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성이 빠른 소형 배를 타고 적함에 난입하여 근접전으로 배를 뺏거나 횃불을 던져 태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곡하게 박은 거북선에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하여 통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근접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화력[3] 으로 적함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말 그대로 해상 요새 수준의 위용을 자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는 전라 좌수군 방답진에 소속된 방답 귀선, 전라 좌수영 본영에 소속된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건조된 통제영 귀선의 3척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당시 모두 침몰했다.
2. 역사[편집]
2.1. 개발[편집]
'거북선을 개발'했고, 이에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은 있으나,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은 아니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 통제원 남교에서 머무르다.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2월 5일 갑인 1번째 기사)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 좌대언 탁신이 병비에 대해 올린 사의 조목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7월 16일 신해 2번째기사)
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어 적을 방어해내기 위한 방호 장비는 갖춘 것 같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나대용 설을 채택했는지? 이 사람이 어느날, 그의 '동생이 이순신 앞에 설계도를 가져와 설명한다.'고 하며, 또다른 야사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도인송구봉'이 '임란을 예견'하고 '설계도를 만들어두었다가 주었다는 설'도 있다.
2.2. 해골선과 창선 개발[편집]
이후 거북선의 후계함으로 매의 형태를 한 해골선(海鶻船)[6] 이란 배가 개발된 기록이 있으나, 그 모양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
하지만 2007년 해골선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발굴되어 그 귀여운 외모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이 그림이 진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학계의 연구가 이쪽으로 쏠리는 일도 있었다.
다른 후계선인 창선은 1606년 나대용이 만든 것으로, 판옥선이나 거북선하고는 다른 배로 배에 창검을 빽빽하게 꽂아놓은 쾌속선이라는 것이 실록에 나오나, 여타의 자료는 없다.
2.3. 이후 운용[편집]
정확히 언제까지 운용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가 없다. 다만, 1791년 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 거북선을 운용했다는게 보이고, 4년 후인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선의 그림이 남아있어 조선후기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다.누선을 거북선으로 고칠 것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최동악이 치계하다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최동악(崔東岳)이 치계(馳啓)하기를,
"누선(樓船)은 거북선처럼 민첩하지 못한데, 본영에는 누선만 많고 거북선은 적습니다. 누선 6척을 거북선으로 고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누선 10척 가운데 3척을 거북선으로 만들면 적절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21일 임진 2번째 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이충무공전서의 귀선도설(龜船圖說)에는 두 가지 거북선 그림과 함께 각 부재의 치수가 상세히 나와 있어, 우리는 비로소 거북선의 구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 사후 200여년이 지난 후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대에도 이런 모습으로 운영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자료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공충 전 수사(公忠前水使) 임상준(任商準)의 보고를 보니, ‘본 영에서 전선(戰船)·귀선(龜船)·방선(防船)·병선(兵船) 등 배 6척을 모두 개조하였으며, 전선 2척은 배 위에서 가장물을 설치하여 조운선(漕運船) 모양으로 만들어 통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2월 28일 계축 1번째기사 (1866년)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종대인 조선 말기에도 거북선은 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나주(羅州)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니, 전선(戰船) 1척(隻),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아무 모양으로 배치하되 전선 1척에는 원래의 방수군(防水軍) 800명과 사부(射夫) 90명을 부근의 각읍(各邑)에 있는 군병 가운데에서 편리에 따라 떼 주어 급할 때 달려가서 모이도록 하소서.
-- 고종실록 23권, 고종 23년 4월 20일 계미 3번째기사 (1886년)
그외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실패한 이후인 1888년에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인 '건백서'에서 “삼면이 바다인 조선엔 반드시 해군이 필요하다.”라는 글을 남기며 거북선과 관련된 글을 기록했는데, “예전엔 거북선 같은 함선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여서 수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은 수군의 명장이었습니다.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기이했고 병사를 부리는 데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 법을 끝내 익혀서 새롭게 만들지 못했고, 배를 손질하여 더욱 정밀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그 병법과 함선이 함께 없어졌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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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상소문이 올라오기 불과 16년 전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거북선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거북선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는 그 운용 수량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3. 구조와 운용[편집]
3.1. 구조 및 재질[편집]
자세한 내용은 거북선/구조 및 재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무장[편집]
진주성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 시대 총통과 대장군전 모형.# 거북선도 이런 총통들을 사용하였다.
조선의 주력 화포였던 총통을 주로 장비하고 있던걸로 보이나,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천자총통은 임란을 거치면서 조선 수군 전반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걸로 추측된다.
난중일기에도 초기에는 천자포에 관한 기록이 보이다, 뒤로 갈수록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왜선이 워낙 약해서(...) 현자총통, 지자총통, 황자총통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점차 사라졌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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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완전한 형태가 남아있지 않아서 앞에 달려있는 거북이 머리(용머리)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많다.
입에 총포가 달려있는 총포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대포문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불을 뿜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8]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독가스를 뿜는 화학전 분사기라고 방영하기까지 했다.
독가스 분사구까지는 아니지만, 적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용머리 안에서 유황 등을 태워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설로 다른 배를 부딪쳐서 파괴하는 충각설도 있지만 학술적 근거는 없으며, 고 김재근 선생의 저서 <한국의 배>에 기초해 보면 전라 좌수영 귀선의 용머리 외에 선체 하부에 설치한 귀면의 용도에 관한 설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총포문이나 대포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1980년대에 복원되어 다시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3.3. 편제[편집]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2월 24일 무오 3번째기사 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하다
"수군의 제도는 《대전(大典)》을 상고하여 보니, 대맹선(大猛船) 1척에 수군 80명, 중맹선에는 60명, 소맹선에는 30명이라 하였는데, 대맹선은 지금의 전선(戰船)이요, 중맹선은 지금의 귀선(龜船)이고, 소맹선의 지금의 방패선(防牌船)이니, 병선(兵船)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선제(船制)가 차츰 커져서 큰 것은 좌우 노로(櫓櫨)[9]
사이가 혹은 24간에 이르고 노젓는 군사가 1백 20명이 필요하니, 고제(古制)의 80명의 노군(櫓軍)으로는 결코 운용할 수가 없고 귀선과 방패선의 노군 역시 그 수로 기준을 삼기가 어려운데, 토졸(土卒)로서 구차하게 수를 채워 실제로 허술하게 되었으니, 한번 변통하는 것은 사세상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중략..)
각 선군(船軍)의 제정(制定)한 액수에는 전선(戰船) 1척에 선직(船直)·무상(舞上)·타공(舵工)·요수(繚手)·정수(碇手)·사수(射手)·화포장(火炮匠)·포수(砲手)·포도장(捕盜將)·노군(櫓軍)이 도합 1백 64인이요, 귀선(龜船)은 1백 48인이며, 정탐선(偵探船)은 79인이요, 병선(兵船)이 17인이며, 사후선(司候船)은 5인입니다. 각영과 진의 방군(防軍)에서 군포(軍布)를 마련한 수효에는 통영(統營) 8전선(戰船)의 원방군(元防軍)은 방군을 세우지 않고 사부(射夫)와 첨사부(添射夫)가 모두 7천 6백 36인으로 매인당 면포(綿布) 2필씩을 받는데 풍고(風高)와 풍화(風和)의 각 6개월에 대한 급대(給代)의 수량 및 각선(各船)의 육물가(陸物價)와 우후(虞候)에 속한 급대(給代)와 삭포(朔布)의 수량을 공제하면 여포(餘布)가 6천 5백필 남짓합니다. 좌수영·부산(釜山) 등의 진과 전라(全羅) 좌·우수영 및 방답(防踏) 등 진의 여포도 이에 준하여 다과(多寡)는 다르나 각기 정수(定數)가 있습니다. 각선의 육물가(陸物價)를 또한 마련하였고, 전선·병선·사후선·정탐선·귀선(龜船) 1척에 대해 1년에 드는 물건과 초둔(草芚) 진석(眞席) 같은 종류에까지도 모두 차등을 두어 값이 메겨져 있고, 심지어는 사후선(司候船)에 쓰는 표주박 2개의 값까지도 면포 3척 6촌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 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12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정청에서 오군문의 군제를 고치고 수군을 변통하는 절목을 올리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1척에는 판옥선의 약 125명 보다는 더 많이 승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시 병력 부족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승선했던 숫자로 보인다. 전후 숙종 대의 기록에 따르면 정상적인 편제라면 약 150여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부선장만 추가하면 오늘날의 중령급 함장이 지휘하는 함과 편제가 거의 일치한다.
이순신 하면 거북선이지만 이순신 함대에서 거북선은 주력함이 아니었으며 현재 알려진 만큼 함대 내에서의 전략적 중요도도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의 건조는 극소수만 이루어졌고, 이를 칠천량에서 다 잃고 난 다음 명량 해전 이후 건조할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단 1척도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순신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큰 손상을 입은 수군을 시급히 재건해야 하는 입장에서 건조비와 시간이 많이 드는 거북선을 후순위로 미루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4. 인식[편집]
4.1. 한국[편집]
부계 후손인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에서 보관 중인 귀선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자긍심의 상징물로도 쓰인다. 비유하자면 영국에서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12]
한때 경상남도에서는 임진왜란 때 침몰했을 거북선을 찾기 위해 수중 탐사 중이라고 했으나,[13] 현재 중단되었다.
지금은 안 쓰이는 지폐인 500원짜리 지폐와 5원짜리 동전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다.
또한, 이 지폐에는 정주영 회장과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이 제대로 된 현대식 조선소조차도 없음을 이유로 들며 입찰도 못 해보고 거부당하자 정주영 회장은 한국 정부에서 곧 전폭적인 지원을 해 현대식 조선소를 지을 테니 그 화물선은 우리가 수주해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갖고 있던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도 보여주며 할 수 있다고 어필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분 부대 마크에 필수 요소다. 각 해역 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 등 주력 부대, 제7기동전단, 충무공이순신함 등 전단, 함정 마크에도 사용된다. 또 장교 정모[14] 와 함정에 근무하는 승조원 뱃지에도 들어가며[15] , 사관실 식기에도 전부다 거북선이 박혀있다.
또한, 여천시의 삼여 통합 전의 마지막 휘장에도 사용되었다.
4.2. 일본[편집]
'이순신과 히데요시' 일본에선 과장 보태서 이런 이미지인 듯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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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또 다른 그림.
실제로 에도 막부 시대에 거북선을 복카이센沐海船(=목해선)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을 가토 기요마사가 퇴치한다는 내용의 연극[17]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충격이 심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뛰어난 활약을 본 일본군은 거북선과 비슷하게 상부 구조를 덮은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이것. 메쿠라부네도 참고.
https://youtu.be/AO2784ica20?feature=shared
일본내에서 종종 한국 반일의 상징이라하여 혐한성향 일본인들이 만든 프로파간다 영상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4.3. 중국[편집]
직접적으로 거북선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문헌에 응선(鷹船)이라는 배 역시 이 거북선을 닮았다. ( 이 배는 임란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인 <회본태합기>에 조선 거북선으로 등장: 일본인은 중국과 조선을 구별할 줄 모른 듯?? );
4.4. 기타 외국[편집]
세계 최고의 해군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함선으로, 조선 함대와 이순신 장군의 전공 및 전략전술을 상징하는 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해군연구소의 조사결과를 비롯해 각종 칼럼이나 분석 기사 등에서 거의 예외 없이 USS 엔터프라이즈 같은 전설적 수훈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사상 최고의 군함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5. 문화 및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거북선/문화 및 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경상남도 짝퉁 거북선 논란[편집]
김태호 전 경상남도지사가 2007년 역사 및 문화자원 개발 사업인 '이순신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실제 1592년 당시 모습과 똑같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각각 제작하기로 했다.[18] 여기에 국비, 도비 합쳐 총 20여억원 가량의 사업비가 들어갔다.
그런데 2011년 7월 경상남도의회에서 원래 쓰기로 한 금강송 대신 미국산의 저가 소나무[19] 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고, 이후 경찰수사에서 실제로 수입산 목재를 80% 이상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결국 경상남도는 해당 제작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소송 진행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법원의 화해 권고를 받아들였고, 경상남도는 제작업체에게 약 7억원의 계약 보증금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2척의 배를 인수했다. 이후 거북선은 거제시에, 판옥선은 통영시에 넘어갔다.[20][21]
문제는 거북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거북선을 바다에 띄우자 바닥에서는 물이 새고(..)[22] , 균형이 맞지 않아 기우뚱했다고. 결국 2011년 6월 7일 거제 앞바다에 띄워졌던 거북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2012년 뭍으로 끌어올려 조선해양문화관 마당에 전시했다. 이후 관리비로 1억 5천여만원이 사용되었지만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비에 노출된 거북선은 빠른 속도로 부식되었다.
결국 감당이 되지 않아 민간에 매각을 결정하고 감정가액 1억 1750만원으로 경매 입찰 공고를 냈으나 무려 7차례나 유찰되면서 입찰가는 계속해서 떨어졌고 8차 입찰에서 154만 5380원에 낙찰되었다[23] . 평가금액의 1.31%라고(..)..관련기사
하지만 거북선이 주인이 바뀌면서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는데, 거북선을 옮기는 것이[24]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낙찰자인 신씨는 칠천량해전공원 같은 이순신 장군 관련 시설에 거북선을 기부할 생각이었고, 처음에는 받아주겠다는 곳도 많았으나 이동과 관리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국은 대부분의 시설에서 기부 받기를 거절했다. 결국 거북선을 조선해양문화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로 옮겨 역사교육용 현장체험 시설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신씨의 땅이 한려해상국립공원 구역 안에 있어 공원계획 변경 허가 등 번거로운 절차가 남아있었기 때문에[25] 이마저도 요원했다. 게다가 선체가 워낙 낡아 옮기는 과정에서 선체가 손상되거나 사고가 날 위험성도 컸다고. 거제시와 신씨는 대금 완납 이후 30일 이내에 거북선을 이전하지 않으면 계약을 취소하고, 철거하기로 했는데 결국 이동을 포기하게 되면서 철거하게 되었다.[26]
2023년 7월 11일, 20억원이 들었고 154만원에 낙찰된 이 기구한 운명의 거북선은 결국 철거되었다. 부식이 워낙 심한 나무는 소각장에 불태우고, 철물은 고물상에 보내기로 했다.[27] 철거 자체에만 3000만원의 비용이 소모된다고 한다.##
7. 여담[편집]
-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내 해양전시관의 역사관에 "인류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타이틀로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SHOW ME THE MONEY 4에서 지코 & 팔로알토 팀의 미션 곡 이름으로 '거북선'이 등장했다. 그냥 단순히 제목 딱지만 붙인게 아니라 노래에서도 국악 느낌의 독특한 비트가 흘러나오며, "우린 거북선 다른 배들 통통 그냥 통통 떨어져라 똥통"이란 가사도 있다. 이 노래는 공개 당시 음원 차트에서 장기간 TOP 10에 오르는 등 나름 흥행하기도 했다. 후에 팔로알토의 리믹스 버전도 그에 못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레코즈의 멤버가 다수 빠져나간 후 Remix 2 버전이 나왔다.
- 1974년에 전매청(현 KT&G)에서 거북선 담배를 출시했다. 당시 가격은 200원으로 고급담배였으나, 1980년 솔(담배)가 나온 뒤에 인기가 주춤했고, 결국 1989년 단종되었다. 영어로 GEOBUGSEON이라고 써져있는데, 간혹 주한미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이것을 '조벅선'이라고 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키보드 제조사인 DECK에서는 한국 소비자의 니즈를 맞춘 거북선을 출시했다. 시리즈명이 전부 함선이고, 회사이름이 배의 갑판을 뜻하는 DECK이다보니, 한국향 제품의 이름이 거북선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 대한민국 해군 정복의 모자와 옷의 단추, 벨트의 버클에 거북선을 새겨놓고 있다.
- 조선군은 거북선과 유사한 다른 화약 병기들도 사용했다. 특히, 바다 위에서는 창선, 해골선의 기록물이 육중하고 무거워서 사용하기가 힘든 거북선을 소형화 하여 만들어낸 돌격 함종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 거북선과 학익진을 보고 무술을 창시했다는 사람도 있다. 뫄한뭐루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