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권씨(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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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덕종의 간택 후궁. 덕종이 의경세자로 있을 때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소훈이 되었으며, 인수대비의 존중을 받아 궁중 내 후궁들의 교육을 도맡았다.
2. 생애[편집]
2.1. 세자의 후궁[편집]
1456년(세조 2) 세조는 행 태일전직 윤기(尹沂)의 딸, 전 사직 신선경(愼先庚)의 딸, 그리고 권씨를 뽑아 동궁의 소훈(昭訓)으로 삼았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자식도 얻지 못하고, 일찍 과부가 되었다.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권씨 또한 종2품 숙의로 봉작되었다가 종1품 귀인으로 품계가 올랐다.[1]
2.2. 왕비 폐위 사건[편집]
1477년(성종 8) 당시 권씨는 궁중에 새로 후궁으로 뽑혀 들어온 성종의 후궁들을 가르치고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권씨의 집에 3월 20일 언문으로 된 투서가 떨어졌다. 성종의 두 후궁 정 소용과 엄 숙의가 왕비 윤씨와 원자를 해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2]
세상에 오래 살게 되면 보지 않을 일이 없다. 이달 20일에 감찰(監察) 집에서 보냈다고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언문을 던지는 자가 있었는데, 권숙의의 집에서 주워 보니 정소용(鄭昭容)과 엄숙의(嚴淑儀)가 서로 통신(通信)하여 중궁(中宮)과 원자(元子)를 해치려고 한 것이다. 생각건대, 정소용이 한 짓인 듯하다. 그러나 지금 바야흐로 임신하였으므로 해산한 뒤에 국문하려고 한다.
《성종실록》 성종 8년 3월 29일
궁중의 삼전(三殿: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은 왕비 윤씨를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비가 침실에 있는 작은 쥐구멍에 비상(砒霜)과 굿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 담긴 상자를 숨겨 둔 것이 적발되었다.[3] 이에 3월 29일 대왕대비가 언문으로 쓴 교지를 내린 것이다. 투서가 떨어지고 열흘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 언문 교지에는 "내가 당초에 사람을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말까지 있었다.[4]
당시 조정 대신들은 '왕비 폐위'에 찬동하지 않았고 극구 만류하면서, 별궁으로 물러나는 별거 수준을 권하였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 결국 왕비는 폐출되어 사가로 내쫓겼다.
2.3. 불교 신봉[편집]
권씨는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5] 그래서 1484년(성종 15) 절터만 남아 있었던 안암사(安巖寺)[6] 를 다시 중창할 뜻을 드러냈다. 귀인 권씨의 발원이었지만, 사실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의 의지였다. 여기에 성종이 절을 다시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절에 민전(民田)을 지급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 국가가 나서서 이단(異端)을 숭상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경국대전》을 예로 들어 옛터에 중창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하다고 하였다.[7]
우여곡절 끝에 안암사는 완공되었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1504년(연산군 10)에 폐사되고 말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4. 죽음[편집]
1494년(성종 25) 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성종은 내일 모레 연회를 베풀어야 하지만,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다며 중지하도록 하였다.[8]
3. 사후에 일어난 문제[편집]
3.1. 추문[편집]
1494년(성종 25) 권씨가 세상을 떠나고, 1498년(연산군 4) 김일손이 쓴 사초가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초 때문에 권씨는 죽어서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 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12일
이 말은 시아버지 세조가 며느리와 간통하려고 했다는 소리다. 당장 피바람이 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며, 관련자들이 줄줄이 소환당했다. 김일손은 이 말을 귀인 권씨의 허반(許磐)[9] 에게 들었다고 하였으나 사실 허반은 전혀 다른 말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허반(許磐)은 공초하기를,
"신의 처음 초사(招辭)에 '회간왕(懷簡王)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께서 권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했는데, 권씨가 먹지 아니하니, 상이 노하시자 권씨가 달아났다.’는 일은 집안에서 항상 말해 오기로 신이 이를 일손에게 말했다 하였사온데, 그 실상인즉 당초에 윤씨의 일을 말할 때에 권씨의 일까지 연속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말이 오가는 사이에 착오가 생겨서 과연 일손의 기재한 바와 같이 되었사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20일
김일손 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로 상중에 고기를 먹으라고 권한 일이 침실로 부른 일로 되고 말았으니 죽은 사람 입장에서 해명할 수도 없고 억울한 일이다.
심지어 무오사화가 더 크게 번지는 바람에 귀인 권씨는 지금까지도 이런 불명예스러운 이야기에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3.2. 가짜 무덤[편집]
회릉(懷陵)이 폐위당할 때, 언문 글 쓴 자는 나인(內人)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 없으며, 《실록》에 오르지 않은 것은 상고할 근거가 없습니다. 나인으로서 그 일에 간섭한 자는 권 숙의(權淑儀)ㆍ엄 숙의(嚴淑儀)ㆍ정 숙원(鄭淑媛)이며, 일을 의논한 사람은 전에 벌써 상고하여 아뢰고 빠진 자는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윤4월 5일
연산군이 즉위한 뒤에 투서 사건이 다시 들춰졌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권씨의 집에 떨어진 투서였으므로 권씨도 똑같이 치죄의 대상이 되었다.[10] 그런데 권씨는 이미 죽어 땅에 묻힌 뒤여서 묘를 파내게 하였더니 안은 텅 비었고 빈 널빤지 뿐이었다. 사실 권씨는 불교를 신봉하여 비구니 혜명(惠明)을 시켜 비밀리에 자신의 시체를 화장하게 만들었고, 무덤은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은 가짜였다.[11]
평상시 권씨가 조카 허반(許磐)의 처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불태워야 한다"고 말해두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