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타자)/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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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편집]
고교 시절엔 저래보여도 늘씬한 유격수였다. 주장의 임무로 천재 야구선수로 유명했으며,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뛰었다.[1] 물론 주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유격수였다. 유격수로 뛴 경험을 바탕으로 벌크가 붙은 프로시절까지 3루 수비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은 시기 신일고에서 맹활약하던 김재현과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2] 고교 졸업 당시 대학이나 프로나 할 거 없이 김동주와 김재현을 잡으려고 구단들과 대학의 물밑작업이 치열했다. 결국 프로로 직행한 김재현이나 대학을 거친 김동주나 모두 잠실을 홈으로 쓰는 팀에 입단했고 각각 팀의 주축이 되었다.
투수로서는 최고 145km/h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었고,[3] 타자로서는 정교한 컨택능력과 강력한 파워를 모두 갖춘 대형 내야수감으로 각광받았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는데, 1학년 애송이가 그 군기잡힌 고려대학교 야구부[4][5] 의 감독에게 "공격력을 살릴 수 있게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2016년 5월 23일, 더그아웃에서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고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고려대 야구부의 군기가 군대보다 셌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단지 김종국, 홍원기(이상 92학번) 같은 선배들에게 밀린 거라고 한다. 이 인터뷰에서 두리뭉실하게 넘겼던 가정사 부분과, 당연히 부인할 수밖에 없는 국밥사건과 달리 20년 전의 일이자 따로 부인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인한 부분이기 때문에 김동주 본인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당시 고려대학교 투수 인스트럭터였던 김인식[6] 은 그를 투수로 키우려고 했으나, 본인은 타자 쪽으로 의향을 굳혔다고 한다.[7] 그리고 감독의 결정에 따라 김동주는 최고의 아마추어 타자로 이름을 높였다. (1학년때 우익수, 2학년 이후로는 2루 및 3루수로 출장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아마추어 시절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김성근 감독이 고교야구를 보러갔을 때 김동주가 당겨서 홈런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자 당시 배명고 감독이 "밀어서 치라고 해볼까요?"라고 하고 김동주에게 밀어치라고 말했더니 다음 타석에 바로 밀어서 홈런을 쳐냈다고 한다. 2학년땐 충암고와의 경기에서 8-0으로 지는 경기를 만루홈런 두 방으로 동점을 만들더니 끝내 연장에서 쓰리런 홈런을 쳐서 혼자 11타점으로 경기를 11-8로 뒤집어 버린 적도 있다. 고려대 4학년 시절이던 1997년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중앙 전광판을 깨트리는 159m짜리 초대형 홈런을 쳐냈고, 당시 일본의 에이스이자 후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게 되는 우에하라 고지를 상대로 대회기간 동안 3홈런을 뽑아냈다. 이 대회에서의 최종 성적은 26타수 14안타 9홈런 19타점.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한국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대회 MVP까지 차지했다. 정말 무시무시했던 4번타자.
2. 프로 경력[편집]
2.1. 두목곰의 전성시대[편집]
1998년 고려대(체육교육과 1994학번)를 졸업하고, 1998 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OB 베어스[11] 에 입단했다.[12]
그리고 개막전[13] 부터 연타석 홈런[14] 을 치는 등 데뷔 첫해부터 심정수, 타이론 우즈와 우동수 트리오를 구축하며 베어스의 전성기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 심정수가 현대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심재학, 타이론 우즈와 우동학 트리오, 혹은 우재주 트리오를 구축하여 두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데뷔 첫 해 24홈런이었으니...
프로 입성 첫 해에는 좌익수로 뛰었고 게임인 마구마구에서 3루수로 줘버렸는데 담당자도 이걸 실수했는지 듀얼포지션 추가로 좌익수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부터 3루수로 전향하였다. 프로에 와서도 그 활약상은 계속 이어져서 통산 타율 .312을 자랑했고, .405의 통산 출루율, 0.514의 통산 장타율을 기록한 대타자로 거듭났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고 2000년대 초중반부터 투고타저 성향의 시즌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기록이다.[15]
허나, 프로 초년병 시절은 팀메이트였던 친구처럼 김동주 역시 헤매다가 시즌 초 전반기에 아예 2군으로 보내버릴 작정이었는데, 김인식 감독 특유인 믿음의 야구로 계속되는 무한신뢰를 쌓아 첫 해 저런 성적이 나왔었다. 트리오 동료였던 우즈 역시 외국인 선수 제도 초창기에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심판들에게 잦은 구설수와 부진으로 김동주처럼 몰릴 위기였으나 똑같이 무한 신뢰 받고 이 분은 장종훈 이전 41개의 기록에 한 개를 더한 42개의 홈런을 쳐냈다.
이후 타격 포텐이 만개된 99년부터~2004년 3할과 20개를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 그야말로 타격과 파워를 겸비할 정도로 대단했다. 물론 홈 구장이 잠실야구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대단한 기록이다. 아직도 국내 토종 타자 중 3할 30홈런 및 장외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김동주[16] 밖에 없다. 물론 팀 후배 김재환이 40홈런을 넘겼지만 그에게는 과거 도핑 반응이 있기에 대부분의 팬들은 그냥 약런이라 부정하고, 성적의 일관성 부분에서도 김동주같은 꾸준함은 없었기에 진정한 잠실 홈런타자는 김동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7]
홈런 숫자는 이승엽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도 한 시즌 20여개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장타력을 갖췄으며, 2000년 5월 잠실구장에서 최초로 장외홈런을 기록한 일도 있다.[18] 통산 기록만 보면 홈런을 제외하곤 양준혁의 기록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 김동주는 부족한 홈런 수에 대해 넓은 잠실을 홈으로 쓰기에 타격 어프로치를 다르게 가져간 데 기인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이가 들면서 노쇠화가 진행되긴 했으나 3루 수비 또한 매우 안정적이었다. 벌크를 불린 탓에 좌우 횡 수비 폭은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포구와 순간적인 대쉬능력, 투수를 볼 수 있었을 정도의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좋은 3루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2010년 시즌부터는 이원석이나 윤석민 등에게 3루를 맡기고 지명타자로 주로 나왔다.
또한, 의외로 주루 플레이도 거포라는 이미지에 비해 뛰어났는데 벌크업에 의해 스피드가 막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편이었고 주루 센스가 매우 뛰어났다. 2007년도에는 두자리수 도루를 기록할 정도.[19] 그의 뛰어난 주루 센스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베이징 올림픽 조별에선 일본전 9회초 김현수의 역전 적시타 장면이다.[20]
단점이라면 신인시절부터 잔부상이 많은 유리몸이라서 경기에 빠질 때가 많았다. 17년 프로 생활 내내 어깨, 손목, 허리, 발목 등에 부상을 달고 살았고, 전 경기 출장 시즌은 한 시즌도 없다.[21] 심지어 2009년 여름에는 봉와직염으로 2군으로 내려갔던 적도 있다. 그리고 2010년에도...
공/수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1998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국제대회가 열리면 꼬박꼬박 차출되었다. 베이징올림픽을 기점으로 신규유입 된 팬들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4번타자는 김동주였다.[22]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고 밝힌 바 있다.[23]
삼성 라이온즈 김한수와 함께 최고의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타격 성적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기자단 인기투표라는 특성상 골든글러브 부문에서는 2000년에만 김동주가 수상하였고, 이후 2001~2004년까지 모두 김한수가 수상.[24] 김한수가 노쇠화를 보이며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엔 이렇다 할 경쟁자 없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나 했지만 2005, 2006년에는 3루수로 탈바꿈한 젊은 선수 이범호가 수상하였으며, 2009년에는 시즌 중 트레이드 되어 당해년도 최고 성적을 찍은 김상현이, 2010년에는 7관왕 이대호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1, 2012년에는 신예 최정이 수상. 하지만 골든글러브를 제쳐두더라도 김동주의 커리어는 역대 한국 3루수 중 단연 최고[25] 다. 단지, 인기투표로 인한 골든글러브는 받지 못했다. 역대 골든글러브 수상은 2000년/07년, 08년 시절의 3루수 및 2003년 타격왕을 먹던 시절 지명타자로 받은 것이 전부다.
대체로 큰 경기에 약하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당치도 않은 소리. 전술했듯 신인시절 올림픽 초청경기에서 우에하라 고지를 떡실신 시킨적도 있었고, 전성기 시절마다 국가대표팀의 4번 타자로 활약 했다. 투수들에게 가장 위압감을 주는 타자로 꾸준히 거론되기도 하고, 역대 포스트시즌 성적도 좋은 편. 포스트시즌 타점 1위이다.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김거김을 생각해보자.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박동희를 상대로 2점차로 앞선 상황에서 만루홈런을 쳐서 대역전극을 화려하게 장식했다.[26] 허나, 2007년 한국시리즈만큼은 부진했는데 이유는 SK가 너무 견제 했었다. 특히나 그 시절에 두산은 팀내 홈런 1위가 김동주였을 만큼 그 뒤에는 못치니깐 거의 승부를 보지 않고 무시했다. 대신 이듬해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출장 .556 .619 .778로 대활약했다. 2차전에서 실책을 두 개 저지른 것이 옥의 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6안타 4볼넷 1타점 3득점, 타율 .316, 장타율 .368, 출루율 .435를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0년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0으로 지던 2회말 무사 1, 3루에서 상대 선발 투수 장원삼을 상대로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포스트시즌에서 37타점째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타점 1위에 등극했다. 이날 김동주는 4타수 3안타 2볼넷 1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연장 11회초에 2점을 내줬으나 11회말에 3점을 뽑아 스코어 8:9로 이겼다.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1타수 10안타 1홈런 3볼넷 8타점[27] 3득점, 타율 .476, 장타율 .714, 출루율 .542로 맹활약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40타수 16안타 1홈런 7볼넷 9타점 6득점, 타율 .400, 장타율 .550, 출루율 .489를 기록했다.
2011년 7월 21일 롯데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장원준에게 동점홈런을 뽑아내면서, 5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2.2. 두목곰의 몰락[편집]
김진욱 감독이 부임한 2012년 시즌에는 부진과 부상 때문에 1군 경기에서 뛰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28]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시즌 두산 타선의 무게감이 많이 줄었다.[29][30] 9월 이후로 부상은 다 나은 듯했으나, 여전히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였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의 이름은 엔트리에 없었다. 대다수의 두산 팬들은 김동주를 그리워하면서 김진욱 감독을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만 기용한다면서 깠다. osen의 박현철 기자가 2012년 9월 9일 라디오볼에서 "김동주는 언제 올라오나요? 1군에서 볼수 있나요?"라는 청취자의 질문에 "2군에서 깽판친 게 김진욱 감독 귀에 들어갔다. 팀케미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1군에 올라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2년 시즌 후 두산 구단이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필요하다는 언플과 함께, 팀분위기를 어지럽히고 롯데로 떠났던 홍성흔에게 오버페이마저 안겨주는 삽질과 함께 다시 영입한 이유로, 김동주가 프론트나 코칭스탭들에게 찍힌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김진욱 감독은 2013년에도 김동주를 끌어안고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
2013년 스프링캠프 기사에서 당뇨병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31][32] 당뇨가 있음에도 몸관리를 소홀히 하여 선수생활을 일찍 접은 사례가 있는지라 팬들은 걱정. 결국 시즌이 시작된 후 예년에 비해 부진하다가 5월 17일 또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 2012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량 저하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2011년까지만 해도 팀내 최다 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던 4번타자가 바로 다음 해부터 벤치도 아닌 2군에만 머무르는 모습은 과거 그의 모습을 아는 두산 팬들이라면 마음이 씁쓸한건 당연지사.
그러나 본인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2014년 시즌 초부터 다시 2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 3일 기준 퓨처스리그에서 22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463 출루율 .516 장타율 .722 3홈런 14타점 OPS 1.238의 맹활약을 하였다.
그런데도 송일수 감독은 시즌 초 부진한 홍성흔을 꾸준히 5번타자로 기용하면서도 김동주를 1군에 콜업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7월 5일 인터뷰에서 지금 김동주는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두산팬들은 단 한 타석 만이라도, 제발 단 한 타석만이라도 김동주를 보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또 높였으나, 송일수 감독은 냉랭했다. 아예 김동주라는 선수를 없는 선수로 생각하고 있는 셈인듯 싶었다. 아무래도 팀의 레전드인 김동주와 이렇게 이별을 하는 것은 팬 입장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것이기에..
2014년 10월 14일 "김동주, 짐 싸서 두산 떠났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가 뜨고난 뒤 몇 시간 뒤 두산 프런트는 김동주가 떠난 것이 아니며, 이천 베이스볼 파크에 있는 2군 선수들이 일본으로 훈련을 가 지금 10명 남짓 남아 있기에 김동주가 개인훈련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결국 2014년 11월 20일, 구단과 본인의 합의 하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두산을 떠나게 됐다.
2.3. 두산 퇴단 이후[편집]
두산과의 동행이 끝난 이후 김동주에 부정적인 기사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그중 예를 들면 경험 많은 베테랑이 부족한 KT에서 "김동주가 이호준처럼 팀내 어린 선수들의 롤모델이 되거나 다독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며, 우리 팀에는 김동주를 컨트롤할 만한 고참선수도 없다."라고 비난에 가까운 보도를 낸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선수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기량이 떨어져서 전성기 시절보다 못한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선수들에게 고참으로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면서 팀 케미스트리를 향상시키는 선수들도 많지만, 이 시기에 언론을 통해 비춰진 김동주의 이미지는 팀 케미스트리를 망친다는 쪽 이었다.
이에 팬들은 도대체 구단 및 언론과의 사이가 얼마나 좋지 못했길래, 구단의 레전드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하는 것이냐며 안타까움을 표시하였다.
KT 조범현 감독은 원한다면 입단테스트 기회는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김동주에 부정적인 KT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은 편이고,11월 26일 KT가 베테랑 역할을 할 선수로 롯데에서 방출된 장성호를 영입하면서, 김동주의 KT 입단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 상황.
그리고 김동주에게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를 더 고착화시킨 인터뷰들이 연이어 보도되었는데...
kt든 한화든, 어느 팀이든 믿어주시면 헌신이라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기사 말미에 늦게 얻은 아이들에게 야구선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바람에 엠엘비파크 한게는 순식간에 화이야. 전처 소생의 자녀들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인터뷰는 결코 비난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어서 언론 인터뷰에서 2군 후배가 선배밥을 안 챙긴다는 이유로 15일간이나 꽁하니 지켜보다가 국그릇을 엎었다는 일화를 미담이랍시고 자랑한게 사실이라면 인터뷰 스킬또한 야구실력에 비해 처참한 것을 볼 수 있다. 논란이 일자 국그릇 부분이 기사에서 삭제됐으나 이미 엎질러진 국. 그리고 국동주, 국밥갑이라는 별명이 추가로 생겼다.
결국 은퇴를 선언할 것으로 보였으나...
12월 11일 놀랍게도 kt와 계약 직전까지 갔던 것이 드러났다. "팀 케미스트리를 해칠 수 있다"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조범현 감독이 김동주를 만나보고 멘탈면에서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계약을 추진했다고한다. 그러나 세부 조율에서 김동주가 사인을 하지 않아서 계약이 물건너갔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kt행 무산 기사 김동주의 입장 어쩌면 김동주가 더이상 야구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음을 볼 수도 있는 부분. 물론 국그릇 인터뷰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여전히 비난을 퍼붓고있었다.
12월 15일 엠스플 스포츠투나잇에서 박동희가 밝힌 바에 따르면 kt와의 결렬 원인은 전적으로 금액차이라고 한다. 김동주는 기존에 받던 금액의 절반을, kt는 1억을 제시했다고. 링크 '기존에 받던 금액'을 명목연봉인 7억으로 보느냐 14시즌 2군에 내내 있어서 절반으로 깎인 금액인 3.5억으로 보느냐에 따라 김동주가 얼마를 요구했는지가 갈리겠지만, 3.5억을 요구했든 1.75억을 요구했든 kt가 제시한 1억도 은퇴 직전의 베테랑 예우로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며[36] , 한화에서는 입단 테스트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테스트해서 뽑은 선수에게 1억 이상을 줄리가 만무하다는 점에서 김동주가 아직도 제대로 현실 인식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37]
물론 2015년 시즌이 시작된 후 kt wiz가 소홀한 전력 보강 등으로 빈약한 타선 등의 문제가 이어지며 1할대 승률을 올리면서 김동주를 영입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일부 팬들도 있었으나 그래도 김동주 같이 팀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는 선수를 일찌감치 영입하지 않은 것이 잘 된 것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오히려 두산 팬들은 김동주의 현역시절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울 지언정, 비록 타의가 더 강한 경우지만 두산의 원클럽맨으로 남은 부분만큼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2014년 5월의 기사에 의하면 연봉은 7억이지만 실수령액은 2억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동주가 요구한 '기존 연봉의 절반'의 기준이 실수령액이 아닌 명목연봉(7억)일 가능성도 있다. 실수령액의 절반을 요구했다면 kt의 1억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
12월 18일 kt는 '백의종군'을 기대하며 1억을 책정해놓고 있었으나 김동주의 요구와 큰 차이가 있었다는 기사가 났으며, 장성호는 비슷한 제안을 받고 kt행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19일에 나온 새 기사에 따르면 "김동주는 kt에 고액 연봉을 요구했다. kt는 베테랑을 예우하는 상징적인 액수를 제시했고 당연히 도장을 찍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객관적인 평가와 팀 내부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김동주가 요구한 금액이 명목연봉 7억의 절반인 3.5억일 거라고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 거기다 26일 "김동주는 kt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은 차이는 만나면서 천천히 조율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 양측이 확인한 금액의 차이는 그런 수준을 크게 뛰어 넘었다. 단번에 무산된 것이 당연하다고 보일 정도였다."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확인사살.
2015년 1월 27일 정수근이 자신의 SNS에 김동주가 복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으나, KT에서는 낮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영입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라!라는 반응과 정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손민한이나 박명환처럼 5천만원이라는 푼돈[38] 이라도 계약하라는 반응이 있는데, 김동주의 자존감은 결국 현역시절을 그만두는 방향을 선택했다.
결국 1월 31일, 선수 생활 16년을 끝마치는 은퇴를 선언했다. “현역 생활 동안 정말 최고의 팬들과 함께 했다. 팬들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끝까지 믿어준 김인식 감독님과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로써 여러 의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선수생활은 17년만에 막을 내렸다. 관련기사 그러나 해당 기사 마지막에 실린 사진의 플래카드는 2014년 7월경의 것이며, 국밥 사건이 터진 후 조강지처와 아들을 버린 과거사가 재조명되면서 우호적인 여론은 사그러드는 분위기라는 의견이 있지만 타팀팬들은 사생활이 밝혀진 이후 현역시절 내내 김동주에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다. 여기에 은퇴 발표 후 이어진 2군에 관심 가져달라, 가족들이 받을 상처가 두렵다라는 기사들은 떠나는 김동주에 부정적인 이미지만 더할 뿐 이었다.
\선수로 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선택하지 않고, 결국 그렇게 야구계를 떠났다. 결국 이렇게 타의가 더 작용한 모습으로 [39] , 두산베어스의 원클럽맨으로 남게되었다.
(반전 밑밥) 2019년 6월 4일 새벽 정수근이 박명환의 방송인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40] 김동주의 kt 계약관련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언급했는데, 김인식 감독이 kt 구단과 직접 컨택하여 연봉 1억으로 계약을 하려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김동주는 최종적으로 연봉 2억으로 계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다. 그러나 계약당일 모종의 이유로 김동주는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kt와의 계약은 결렬되었다라 한다.. 당연히 김인식은 물론이고[41] 정수근 또한 크게 실망했다고. 같이 한 발언으로 보았을 때[42] 이번에도 노쇼에 대해 열이 받아 터트린 것으로 보인다.[43]
김동주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은 잠적이 아니라 스카우트 팀장과 집 앞 카페에서 만나서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했고, KT에서도 미안하다며 서로 잘 헤어졌다고 한다. 또한 구단에서 1억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제시했다고도 한다. 김동주 본인이 직접 그 팀장과 통화시켜 줄 수도 있다고 얘기할 정도. 참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동주는 계약현장에 KT의 스카우트 팀장에게만 말하고, 그냥 사전에 계약 파토를 내 버린 것이었다. 다만 그의 현역연장을 도우려고 한 김인식 감독에게 말하지 않은 건 오해를 부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3.1. 1997 타이베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편집]
대학교 4학년 때 참가한 대회로, 팀의 우승을 이끔과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김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각인시킨 대회였다.
3.2. 1998 방콕 아시안게임[편집]
우승하면서 병역 면제를 받았다.
3.3. 1999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편집]
2000 시드니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로 우승하고 진출권도 따냈다.
3.4.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승엽이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이병규와 박진만을 불어들이는 2타점 2루타를 치고 난 뒤 쐐기 1타점을 보내면서 3:1이라는 스코어를 만든데 공을 세운 적이 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이병규에게 엉덩이를 맞은 것은 덤.
3.5. 2002 부산 아시안게임[편집]
유일하게 대표팀에서 홈런을 1개 쳤다. 역대 아시안 게임 경기 중 가장 갯수가 적은 대표팀 합산 성적 1홈런이었다.
시즌 홈런왕인 이승엽은 홈런이 없었다.
3.6. 2003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편집]
2004 아테네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였으나 탈락했다.
3.7. 2006 WBC[편집]
대만과의 1라운드 1차전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45] 하다 왼쪽 어깨가 탈골되어 남은 경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체선수로 정성훈이 합류[46]
3.8. 2007 타이중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편집]
2008 베이징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로, 아쉽게도 올림픽 본선티켓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이듬해 3월 열리는 올림픽 대륙별 최종예선 티켓을 따냈다.
3.9. 2008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최종예선[편집]
올림픽 본선티켓 획득에 성공한다.
3.10.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국가대표 대회. 인터뷰에서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이 대회를 기준으로 은퇴하겠다는 말을 했다. 이어서 메달을 따겠다는 말은 덤.
특히 일본과의 두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으며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보여준 기가 막힌 슬라이딩은 지금도 회자된다. 9전 9승으로 금메달을 획득 하면서 약속을 지켰다. 시상식때는 그간 보이지 않았던 눈물까지 흘렸다고 허구연 위원에게 보였었다.
4. 은퇴 이후 근황[편집]
2015년 12월 중순에 호프집에서 팬들이 조촐하게 은퇴식을 해주었다.#
최근 박재홍 야구 해설위원이 출연중인 엠스플 구구절절 프로그램에서 김동주가 화장품 사업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인터뷰에서도 '아내의 화장품 사업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더그아웃 매거진 과의 인터뷰가 2016년 3월호부터 5월호까지에 실렸다. 2016년 5월 23일자 더그아웃에 나온 인터뷰에서는 아래에 나온 국그릇 사건이 왜곡되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47]
한 때 KBO 영구결번까지 노릴 법했고, 두산 베어스를 17년간 이끌었던 선수치고는 초라하게 떠난 셈.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비판들을 고려하면 분명 자업자득이니, 누굴 탓할 일은 못된다.
2017년 11월 29일 다음 웹툰 사회인 야구 이야기에 출연 현재 야구 레슨장을 운영중이라 한다.[48] 1편 2편 3편
2018년 서울 S-리그 개막전에 김용수와 함께 참여했다.# 현역 시절부터 지병으로 앓아온 당뇨병 때문인지 살이 엄청 빠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2018년 9월 17일에 열린 호주 야구 리그 질롱 코리아 공개 트라이아웃에 객원 코치로 참가해 야수 선발을 도왔다. 트라이아웃에서 선수 선발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49] 합류했다고 하며 현재도 초, 중, 고등학생을 비롯한 유소년 야구레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 코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기사
2019년 6월 14일, 더그아웃을 통해 간만에 모습을 보였는데...현역 시절과 비교하면 완전히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영상 대부분의 사람들도 누구세요라 할 정도로 살이 많이 빠졌다. 오히려 더 젊어진거 같은 느낌마저 든다.
2019년 7월 12일 공개된 더그아웃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밑에 적혀있는 각종 루머들을 부인했다.[50][51] #, ##
위 영상에서 김동주 본인이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공격력을 위해 고려대 야구부 감독님께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 그런 적이 없다. 그랬다면 고려대에서 맞아 죽는다.[52]
그 당시 군기가 심해서 이런 말 자체를 꺼낼 수가 없고, 말이 안 된다.2. 야구실력이 출중하니까 훈련도 잘 안하고 재능만으로 야구를 한다?
: 그런 말은 많이 들었지만, 재능만으로는 야구를 할 수 없다. 나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는 1시 이전엔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아닌 것 같다.
3-1. 당뇨로 인한 체중감소로 몸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당뇨가 있는 건 맞다. 유전인 것을 알고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관리했다. 오히려 당뇨 때문에 관리를 했다. 시합 전에 쌀을 절대 먹지 않고 과일, 야채, 플레인 요거트만 먹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동안 많이 아프고 피곤했기에 내가 체중조절을 한 것이지, 당뇨 때문이라면 이렇게 선수생활을 오래 못했을 것 같다.
3-2. 2군에 있을 동안에는 의도적으로 살을 뺀 것인가?
: 맞다. 일부러 살을 빼고 그 몸무게를 유지한 것이고, 2군에 있는 어떤 다른 선수들보다도 운동량이 많았던 것이라고 확신한다.
3-3. 살을 왜 뺀 것인가?
: 내 베스트 컨디션은 88kg일 때였다. 1군에 있을 때 체구가 크던 때에도 92kg-93kg였다. 처음 5년-10년은 100kg였고 06년 WBC 나가서 다쳤을 때 쉬니까 108kg까지 불었다. 한참 뛸 때는 95kg를 넘기지 않았다. 이건 당뇨 관리가 아니라 체중 관리다. 하도 몸무게가 빠지니까 사람들이 말을 하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야구아카데미 일을 하면서 2년간 이틀 밖에 안쉬었는데, 몸이 안 좋았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건강하니까 걱정할 것은 아니다.
4-1. 경기 중 라커룸에서 리니지를 한 적이 있다?
: 이건 정말 많이 들은 말이다. 하지만 리니지라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경기 도중에 리니지를 했다? 회원가입 이력이 있는지 주민번호 넣어서 NC소프트에 확인해봐도 좋다.
4-2. 게임하다 시비를 붙어서 현피뜨러 가서 싸인만 해주고 온 적이 있다?
: 무슨 소리야.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 싸인받은 사람이 있으면 나오겠지. 있으면 나올 것이고 없으면 나올 것 아니냐. 신경도 안쓰는 말이다. 안한 것을 했다 할 수 없고, 한 것을 안했다 할 수도 없다.
5.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단체 운동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야구한다?
: 어떻게 혼자 야구를 하는가. 권투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보면 민병헌, 김현수, 최준석 등 좋아하는 후배들과 함께 장난치는 장면이 찍힌 것은 무엇이지? 그런 건 얘기 하지 않고 이상한 것만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
6. 후배의 배트티켓 요구에 현금화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 배트티켓은 잘 준편이다. 선수들에게 배트티켓이든 배트든 다 줬다. 배트티켓이란 구단에서 주는 티켓인데 방망이가 부러질 때마다 주는 것인데, 나중에는 이 제도가 없어져서 티켓이 어디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현수나 준석이가 티켓이나 방망이 달라고 하면 다 줬다. 그리고 나는 배트를 스폰서십으로 받아서 주는게 아깝지도 않았고, 내 배트는 길고 무거운 것이라 내 것은 준석이나 현수만 썼고 나머진 달라고 안했다.[53]
7. 2014. 10. 14.에 김동주가 짐을 싸서 두산 떠났다?
: 맞긴 한데, 그 날은 2군 시즌이 끝났던 날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휴가였다. 그래서 나는 구단에 방출을 요구하고 구단에서 짐을 싸서 나오는게 맞았다. 그냥 나온게 아니라 2군에 있던 스태프, 감독님, 선수들에게 모두 인사를 하고 나온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후배들이 커 나가야하는 것인데 내가 계속 시합 나가는 것도 민폐였고.
8. 벤치클리어링에서 항상 선봉장으로 있었고, 늦게 나오는 선수를 혼냈다?
: 혼내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안나오는 선수가 있었으면 진짜로 혼냈을 것이다. 그것은 팀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상대가 고의로 맞히려고 하면 싸워야지.
9-1. 말년에 두산과 결별한 후 kt wiz와의 협상 결렬이 돈때문이다?
: 아니다.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18년을 두산에서 뛰었는데 kt로 가는 것이 웃기다고 생각했고, 팀을 옮긴다는 결정이 쉽지가 않았다. 구체적으로 액수까지 협상했는데 구체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고, 그렇게까지 계속해야하냐는 말에, 생각을 접었다.
9-2. 소문에는 연봉 1억을 제시했다던데?
: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은퇴를 결심한 것은 가족의 관계때문이다.
9-3. 계약 당일 잠수를 탔다던데?
: 전혀 아니다. 스카우트분께 정중하게 마지막으로, 집 앞까지 찾아오셔서 카페에서 말씀 드렸다. 잘 헤어졌었다. 잠수 탈 것이 뭐가 있는가, 내가 뭐라고. 그 팀장님과 내가 통화도 시켜줄 수 있다. 그 부분은 제게 열의를 다 해주셨고 너무 고마웠다.
10. 팬들은 두산을 싫어할거란 생각을 하는데?
: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다. 좋은 선후배를 많이 만났고, 나는 좋았을 때, 나빴을 때 다 있었다. 나왔는데 당연히 아쉽지. 시간이 지나면 그립기도 하고.
11. 준비한 질문들을 다 물었는데, 본인은 이런 오해를 다 모르는 것 같다?
: 원래 신경을 잘 안쓰는 성격이다. 몇 개는 들어봤는데, 이걸 일일이 해명하고 다닐 수가 없다. 내가 아니면 아닌것이지.
2022년 09월 25일, KBO 레전드 40인 시상식으로 은퇴 이후로는 처음으로 약 9년 만에 홈 팬들 앞에 섰다. 사실 원래는 시상식 계획이 없었으나 팬들의 여론 때문에 두산 구단에서 열어 준 거라고 한다.[54] 현역 때에 비하면 살이 정말 많이 빠진 모습이다. 대역이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또한 마지막에는 김동주의 응원가가 무려 9년만에 잠실에서 울려퍼지며 2000년대 두산의 옛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