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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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외교관. 노무현 정부 시절의 마지막 외교통상부장관으로 재직하며 이종석 통일부장관, 윤광웅 국방부장관 등과 함께 당시 외교안보 정책을 이끌던 인물로 꼽힌다.
2. 생애[편집]
1948년 경상남도 진주부에서 태어났다.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봄에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 있을 적에 자신이 왜 군대에 와 있나 생각하다 주변의 원심력을 우리 스스로가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원심력을 줄이고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해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탄약고 옆의 작은 창고에서 춘천 시내의 헌책방에서 산 책들을 밑줄 쳐가며 읽었다고 한다.[1]
3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3년 학교로 돌아와 외교관 시험을 준비했다. 1975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주 독일, 인도, 미국, 싱가포르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90년대에는 SOFA 개정 작업을 수행하였다. 2000년대 초반에는 4자회담, 6자회담 등의 북핵 관련 다자협상에 참여하였다.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의 9.19 공동성명 타결 직후의 모습. 가운데가 송민순이다. 맨 왼쪽은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크리스토퍼 힐 미국측 대표.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은 북한측 대표였던 김계관 외무성 부부상)
노무현 정부 전기 외교통상부(현 외교부)에서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북핵 6자회담의 한국측 대표로 활동하며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무현 정부 후기인 2006년 1월부터 11월까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을 역임한 데 이어서, 2006년 12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로 공석이 된 외교통상부 장관직에 임명되어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난 2008년 2월까지 재직했다. 외교통상부 장관 재임 중이던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이념적 성향이 다수의 진보 인사로 구성된 참여 정부 내에 김병준과 더불어 보수 인사로 알려져 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외교통상통일위원회(현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유엔 평화유지활동 파견절차법안, 공적개발원조기본법안 등을 제출하였다.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였고, 2015년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북한인권결의안 논란이 커지자 2017년 4월에 사임했다.
3.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 논란[편집]
2016년 10월 자신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언론이 이 책의 한 구절을 포착했다.[2] 자세한 내용은 2007년 UN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논란 항목 참조.
4. 선거이력[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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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들이 내린 '선고'에 의하여 나라가 분단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선고를 받아야 했을까. 주변국들의 이익에 따라 한민족이 나뉘어서 이용당했다. 주변의 원심력을 우리 스스로가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원심력을 줄이고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탄약고 옆의 작은 창고에서 춘천 시내의 헌책방에서 산 책들을 밑줄 쳐가며 읽었다.' (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창비, 2016, 21쪽.)[2] 동아일보가 최초 보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에 대해 그가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해 회고록을 낸 것 아니냔 의혹이 일자, 그는 고작 몇 페이지 들먹이자고 550p 가까운 회고록을 썼겠냐며 이런 논란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