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화/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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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외국과의 비교
4. 사례
4.1. 교육 관련
4.1.1. 유아 세뇌
4.1.2. 역사 관련
4.2. 초상화 관련
4.3. 동상 관련
4.4. 지도자의 이름 관련
5. 북한 사람들의 반응


1. 개요[편집]


파일:김일성김정일동상.jpg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인근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동상[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를 일컬을 때 쓰는 표현. 북한에서는 지도자의 이름을 나타낼 때 굵은 글씨로 강조해서 표기해야 한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1996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선전 가요. 김일성이 쓰던 축지법을 김정일도 쓸 줄 안다는 내용으로, 북한의 우상화 실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에 대해 다룬 문서.


2. 특징[편집]




"김일성·김정일나라아버지" - 조선중앙TV [2]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쳐다보며 우상화하면 자기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능히 자체의 힘으로 할수 있는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는 무엇을 하나 하자고 해도 비굴하게 낮추 붙어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꼭두각시노릇을 하게 된다.

2023년 1월 18일 로동신문 기사 <자주성은 나라와 민족의 생명이고 존엄이다>의 일부. 북한의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것과는 무관한 내용으로, 외국을 의존하며 우상화하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있으나 북한은 자주권을 견지하며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켰다는 내용이긴 하다.[3]

그러나 이 문단의 내용만 보면 북한이 김씨 3대를 신격화하여 북한 주민들을 김씨 3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에 너무나 적합한 표현이다.


북한은 전근대의 신권정치 국가들을 제외하면 국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인류 역사상 존재한 모든 국가 중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북한에서는 아예 지도자가 곧 신으로 간주되며, 지도자에 반기를 드는 행위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처형으로 다스리게 된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걸쳐 이루어지는 3대 세습의 결과다.

북한에서 우상화를 주도하는 기관은 선전선동부이다. 그래서 당에서 조직지도부와 함께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양대산맥으로 군림하고 있다. 선전선동부가 지시를 내리면, 만수대창작사에서 우상화 선전물을 제작하는 식이다.

이 우상화의 모든 방법이 담긴 것이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으로, 이는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교시, 당의 로선과 정책을 사업과 생활의 지침으로, 신조로 삼고', '글을 쓸때에는 언제나 수령님과 장군님의 교시, 당문헌을 정중히 인용해 그에 맞추어 전개'하며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유훈, 당의 로선과 방침, 지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겨야 한다는 등의 내용, 즉 수령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요지의 글이다.

특히 김일성 부자에게 붙이는 호칭과 별별 행적을 묘사하는 데에는 구역질이 나는 것은 물론 진지하게 김씨 3대가 애정결핍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로 터무니없이 진부하고 과장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묘사한다. 로동신문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문서에서 이런 광신적 찬양들을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우상화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하느님이며, 그의 말이 복음이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가 찬송가, 성가이고, 그가 쓴 책이 경전(성경)이며 그의 가족들의 조형물들이 있는 건물들이 성당, 교회이다. 그리고 북한에 내는 각종 잡비들[4]은 대체로 김씨 부자 우상화 시설에 사용되기에 그 돈을 헌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는 3위1체[5]까지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내로남불성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북한은 지도자에 대한 광신적인 우상화를 전혀 우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전인 2005년에는 김씨 일가 우상화에 대해 '개인숭배가 아닌 영웅숭배'라는 궤변을 남겼다. 애초에 김씨 3대가 '영웅'인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3. 외국과의 비교[편집]


20세기의 많은 국가들은 최고 지도자들의 미덕을 칭송하는 데 있어 극단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로마 제국 말기[6]

나 심지어 고대 이집트 시대[7] 이후로 세계는 개인숭배가 그토록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마오쩌둥의 중국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러시아와 비교하더라도 여전히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눈에 띕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


한 국가에서의 지도자 우상화를 다루는 항목이 아예 별개의 문서로 분리될 정도로 길어진 것 자체가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하술할 내용을 보면 북한은 농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거대한 사이비 종교 국가라 봐도 될 수준이다.[8] 일례로, 8월 종파사건 당시 소련 대사였던 이상조(李相朝, 1915~1996)은 자신이 숙청될 것을 직감하고 1958년에 김일성의 진상을 폭로하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서는 "북한에선 스탈린 따위는 가볍게 넘어설 수준의 김일성 개인숭배가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말은 북한 헌법의 대대적 개정으로 인한 주체사상의 절대화는 물론이고, 갑산파가 완전히 숙청되기도 전인,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 나온 말이다.[9][10] #

북한은 지도자를 신으로 추대하기 위한 별의별 희한한 짓들을 벌인다. 이미 냉전기 당시부터도 196-70년대 김일성 일인 독재체제 확립 이후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조차 북한을 조롱거리로 삼았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안드레이 란코프박노자가 전한 것처럼 소련 사람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북한의 선전매체를 개그 잡지라면서 일부러 구독해 읽을 정도였을까?[11]

특히나 대부분의 국왕들이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어 공화제나 입헌군주제가 된 20세기 중반 이후 강한 우상화가 이루어진 국가들은 상당수가 제2세계에 포함되었던 상황에서, 북한은 압도적으로 심한 케이스로, 대표적으로 우상화된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엔베르 호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하다못해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12]도 북한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의 적도 기니는 아예 북한도 능가하는 수준의 지도자 우상화를 펼치긴 했으나,[13] 응게마가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처형당하면서 마시아스 응게마의 우상화는 고작 10여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4. 사례[편집]


  • 북한이 김씨 3대에게 붙이는 표현 중에서는 '어버이'라는 말이 가장 유명한데,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일컫는 말로, 다시 말해 부모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즉,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은 북한에서는 김씨 3대가 친부모와 같은 위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은 각각 태양절광명성절로 불리며 성대한 행사들이 열리고, 특히 김일성의 생일은 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누렸을 시기인 1974년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으로 공표되었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망일은 '민족 최대의 추모의 날'로 간주되고 있다.
  • 김일성이 죽었을 때 3년의 애도기간을, 김정일이 죽었을 때 100일의 애도기간을 선포했고,[14] 이때 진정을 다해 김일성을 추모하지 않거나 노래 같은 오락거리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면 처벌을 받았으며,[15][16] 탈북하는 것조차 '역적'으로 간주되었다.[17]
  • 아기가 지도자의 생일과 죽은 일에 태어나면 무조건 생일을 바꿔야 한다.
  • 해외 인물들을 내세워 우상화를 하기도 한다. 지미 카터가 '김일성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라함 링컨을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는 발언을 하는 것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에덴동산이 아니라 주체의 낙원이 지구 위에 피어난 민중복락의 동산'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예이다. 물론 두 발언 모두 아무 증거도 없는 날조된 발언들이다.
  • 1982년 4월 2일자 더 가디언지와 1978년 10월 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패배'[18]와 여성문제의 해결, 사상 최대의 곰의 사살, 희귀한 난초의 발견, 중성 꿩의 발견, 심지어 양계장의 닭들이 달걀을 많이 낳는 것까지 모두 김일성의 공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19] 물론 수해가 없고 풍년이 든 것도 모두 유일사상의 신봉과 이의 창조적 발전 덕택이 되었다. #
  • 김씨 3대를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20]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을 '접견자'라고 부르며 핵심계층으로 대우하며, 진학, 취업, 승진에도 혜택을 주고 있다.
  •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찾아 읽는 어린이들은 언어 영재로 취급받고 있다.[21] 이하 출처
  • 김정일이 원수로 추대된 1992년 4월부터 단 반년 동안 김정일을 찬미하는 문학 작품들이 1,600편(시 600편 포함)에 달하며, 김일성 생전에 발표된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학 작품은 최대 6천 편으로 추정된다. #
  • 김일성이 썼다는 책을 세계 106개국에 수출했다.
  • 김정일의 호칭은 공개된 것만도 1,200여개에 달한다. 예시
  •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 등 지도자가 명시한 교리에 대해 주기적인 시험과 암기 과정을 거친다. #

파일:화성-13 명판 확인.jpg

화성-13 TEL의 김정일, 김정은 찬양 명판
  • 군사장비는 물론이고 전동차, 노면전차 등 각종 장비에 김씨 일가가 탑승하거나 봐주기만 해도 기념 명판이 붙는다.
파일:102183178-vert.jpg
김정은이 장성들에게 특별하사한 백두산 권총
  • 최고지도자들이 특별 하사한 무기들도 당연히 엄중히 관리되어야 하며, 혹여나 관리가 엉망이거나 분실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
  • 사전 준비를 거쳐 김씨 3대가 현장지도로 방문한 가정에는 집의 안팎으로 '주체○○년 김○○ 수령동지께서 ○○○현장지도 중 찾아와주신 집'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리는 것은 물론, 김일성이 앉은 벤치와 현장지도 때 몸을 기댄 나무까지 강화 플라스틱 덮개로 씌워 보존하며, 심지어는 김정은이 직접 만진 간장병까지 '원수님이 간장 맛을 직접 봐주시였다'며 따로 전시해 놓기도 한다. 이렇듯 김씨 3대가 한 번 만져봤던 물건들도 전시된다.[22] 예시
  •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고용되었던 외국인마저 고작 김일성 우상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CIA 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23] #
  • 외국인이 개발한 멀쩡한 꽃에다가 김일성화,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 2018년에 위성 이미지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외부적인 김씨 3대 기념물과 벽화는 약 11,200개라고 한다.
  • 김일성의 사후에 '수령 영생론'을 내세우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으로 만든 영생탑이라는 구조물이 모든 시군 중심지에 설치했다. 이는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도 마찬가지다. 영생탑은 김포나 교동도의 높은 장소에서 좋은 카메라로 북한을 촬영해도 잘 보인다. 연구소 수는 약 4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24] 영생탑은 2019년 기준 전국의 모든 시, 군, 읍, 리, 주요 공장의 중심지 약 5,175곳에 세워져 있다. 영생탑이 오벨리스크 마냥 크기 때문에 위성으로 잘 보여서 셀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탑에 크게 새겨진 문구는 모든 영생탑끼리 정확히 일치한다.[25]
  • 영생찹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주요 지역과 시설들에 김일성김정일동상명제비를 건립했으며, 그 수도 영생탑에 비견될 수준으로 많은 편이다.
  • 정일봉[26]의 경우처럼 멀쩡한 바위들에 우상화 문구를 파내기도 한다. 금강산 한 곳만 해도 총 80여개소 4500여자의 김씨부자 우상화 글귀들이 적혀있다고 하며, 묘향산 등 다른 명산에도 우상화 문구가 파내졌다고 한다. #
  • 2022년 11월 기준으로 매주 1회 1시간씩 열리는 김정은의 사상과 영도를 '신념과 양심'으로 받아들일 데 대한 주민 대상 '집중학습'에서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보인다면 진짜 충성하지 않는 것이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의무이기 전에 신념과 양심, 의리로 표현되어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주민들이 학습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인 죄를 뒤집어 씌우기에 주민들은 이에 불만을 품으면서도[27]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된다. #
  • 주민들이 쓰는 언어의 뉘앙스까지 참견을 가해서, 최고지도자가 가르치는 것만 일깨워주는 의미로 '가르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고, 일반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배워서 전해준다는 뉘앙스의 '배워준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나서다'에는 자신의 의지가 담긴 찾던 것이 나타난다는 의미를 없애고 '중요한 과업이 나선다'라고 표현하며 의무가 나타난다는 식으로 쓰이게 되었다. '짜고들다' 같이 업무 계획 같은 걸 짜려고 든다는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담은 신조어도 만들어 냈다.
  • 국립국어원의 '남북 언어예절 비교 연구'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최고 지도자의 행동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시-'라는 선어말 어미를 용언마다 붙여야 하고, '께서'라는 어미도 최고 지도자에게만 쓰일 것이 권장되며, 북한에서는 이를 "인민들의 언어사용의 지향과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르쳐주다', '배워주다'의 구분[28]이나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구분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도 있으며 '교시', '성함(존함)', '안광', '안색', '신상', '저택', '몸소', '친히', '손수', '배려', '심려', '부르시다', '보살피시다' 같은 단어는 대개 최고 지도자를 높이는 경우에만 쓸 수 있으며 부모에게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한다. 그리고 1990년에는 '선물'은 김 부자가 하사하는 물품에만 쓰고, 주민들끼리 주고 받는 것은 '기념품'이라고 하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백두혈통'이 태어난 것은 '태어났다'가 아닌 '탄생하셨다'로 표현해야 하고, 이들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것도 '걸어놓다'가 아닌 '모신다'라고 표현해야 한다.[29]
  • 평양문화어보호법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2023년 1월부터는 최고지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직무 뒤에 '님'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는 것은 '괴뢰식부름말'을 쓰는 것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공개처형까지 각오해야 하는 행동이 되었다.[30]
  • 김정일 시기까지는 서가에 김일성, 김정일의 노작과 문헌을 비롯한 정치서적들을 대량으로 비치해야 했다.[31]
  •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한 주체년호를 만들어, 이를 1997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연도 표시 방식으로 사용한다.
  • 2004년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데에 전체 국가예산의 최소 38.5%를 사용했다. 출처
  • 2001년에는 잡지 '조선예술'에 익명의 재미교포 풍수학자를 내세우며 '평양의 풍수는 김일성 덕분에 세계 제일이 된 만큼 북한은 천년만년 거뜬히 갈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고 반대로 서울은 땅의 기운이 쇠한 만큼 남한은 곧 쓰러져서 북한의 자비만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출처
  • 평양역에서는 매일 아침에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자정에는 2010년대 중반경부터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라는 제목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그 음악을 크게 틀어놓기에 북한에 방문한 해외 관광객도 들을 수 있다. 곡조가 섬뜩해서 외부인들은 처음 들으면 기겁한다.
  • 1974년부터는 3월마다 만 10~11세 정도의 학생들에게 '김일성의 고생[32]을 따라 배워야 한다'며 배움의 천리길이라고 김일성이 머물렀던 여관, 우체국을 그대로 거치게 하는데, 그것도 아이들이 김일성이 언제 어느 날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히 모방하게 한다.[33] 번외편(?)으로 '광복의 천리길'도 있는데, 이것도 북한에서 매년 1월마다 학생들에게 김일성이 1925년에 조선독립의 뜻을 품고 평양 만경대~압록강가 포평나루터까지 13일 동안 천 리를 걸었다는 것을 그대로 걷게 한 거다.[34] 이렇듯 북한에서는 학생들에게 김일성 부자 관련 행적이나 '혁명사적지'를 가도록 강요하고 있다.[35] #
  • 1993년에는 북한 군인들이 해변가에서 골뱅이 껍질 50만 개를 골라 김정일의 '혁명 업적'을 형상화한 골뱅이 만년화를 만들었으며 나비 450만 마리를 잡아 군인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김정일의 모습을 만들어 생일 선물로 바쳤다. #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져 다녀간 벤치뿐만 아니라 현장지도 때 몸을 기댄 나무에도 강화 플라스틱 덮개를 씌운다.
  • 조선중앙TV가 하루 방송을 시작할 때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도입부를 느리게 늘어뜨린 선율이 먼저 나오고, 그 후에는 국가 아나운서의 멘트 뒤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의 기악 편곡판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태양상'이 태양이 떠오르듯 떠오르는 모습과 함께 흘러나온 후에야 오늘의 방송 순서가 나온다.
  • 북한의 거의 모든 음악의 가사에는 직간접적으로 김씨 3대와 조선로동당을 찬미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36] 오죽하면 "북한에서 체제 선전이 없는 노래는 애국가[37] 한 곡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일까?
  • 북한의 몇몇 사이트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을 검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
  • 결혼 과정에서 신랑, 신부 일행이 처음으로 향하는 곳은 김씨 부자 동상[38]이며, 군과 리처럼 동상이 없는 지역에서는 김씨 부자 초상화 앞에서 꽃다발을 놓아야 한다. 그 후 신혼부부들은 김씨 부자에게 마음속으로 '저희가 결혼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날을 축복해주세요'라고 빌어야 한다.
  • 그렇다고 무조건 심한 딸랑이 짓을 하는건 아니다. 김철웅은 5과가 기쁨조라고 불리우게 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유래에 대해서도 설명 했는데 5과 공연조 소속은 결혼하면 은퇴하게 돼서 대부분 20대 초반을 넘기는 사람이 없는데 2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데도 공연을 하는 공연자를 보고 김일성이 "저 아이는 나이가 꽤 돼보이는데도 아직 결혼을 안했어?"라고 묻자 5과 간부가 수령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결혼이 대수겠습니까? 저희는 인민들을 위해 밤낮 고민하시는 수령님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북한 기준으로도 심한 딸랑이 짓을 했다. 김일성은 딱히 별 다른 대답은 안하고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이것을 본 다른 과 간부들이 아무리 김일성 앞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아첨을 하냐하면서 비아냥 삼아 5과를 너희들이 무슨 엘리트냐 너희는 그냥 '기쁨조'라고 놀린게 퍼졌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정춘실(1941~~2015)이 있는데, 그녀는 김일성이 죽은 이후 오라버니 김정일을 위해 죽겠다는 둥 아버지 김일성을 위해 3년상을 치르겠다는 둥 떠들며 정말로 3년이나 상복을 입는 둥 유난을 떨었으나 김정일의 심기를 거슬러서 "난 그런 누이 둔 적 없다!"라는 김정일의 짜증과 함께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4.1. 교육 관련[편집]


우상화 교육 과정에서 자행되는 악행들도 가히 가관인데, 북한의 우상화 교육은 비교육적인 허위 정보 유포와 정치적 사상 세뇌로 점철되어 있어 육체적 폭력만 없을 뿐이지 엄연한 아동학대나 다를바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39] 하다못해 무기개발 인력, 해킹 인력, 농업 같은 분야의 자신의 '과제'를 이해하는 인력 등을 양성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내용도 가르치기는 하지만 저런 내용이 곳곳에 있는 것이 문제다. 특히 예술 분야가 이런 경향이 아주 심하다.

하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북한 수준의 세뇌 교육을 한 독재국가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어린이들을 세뇌시킨 국가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국가로 꼽히는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민주 캄푸치아, 지도자가 심각한 괴짜였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시기의 투르크메니스탄 정도밖에 없다.[40] 사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치 사상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거의 독재자들의 클리셰 수준으로 흔한 일이지만, 북한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아동 세뇌가 독보적인 수준이다.

  • 1976년 4월 제정된 어린이보육교양법에 따라[41] 아이들에게 보육원, 탁아소에 들어갈 때부터 강제적으로 김씨 3대를 신격화하는 내용들을 정규 과목으로 배우게 해, 이 과목을 학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그 과목의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대학 입학을 아예 막아버린다. 물론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렇게 배우는 내용들은 모두 날조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 유명한 축지법 사용이 가장 양호한 편으로 보일 정도로 허황되고 유치하다는 말로만으로는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지도자에 대해 우상화를 자행한 수많은 나라 중 지도자의 생애를 정규적인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 이 날조 에피소드들은 조선사회과학원 산하 력사연구소가 날조한 에피소드들을 당에 소속된 '유포담당책임일꾼'들이 구전을 통해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유포하고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언론매체를 통해 선전하고는 출판사를 통해 '입증'한 뒤 교과서와 일반 서적에 소개하여 신빙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고 한다.[42]

  • 2013년 제정된 12년제 의무교육강령에 따르면 궁극적인 교육 목표가 "백두산절세위인들(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 이론의 위대성, 영도의 위대성, 풍모의 위대성에 대한 원리적인 인식과 인간적인 매혹에 기초하여 투철한 혁명적 수령관을 지니고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제일 생명으로 간직하며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결사옹위하는 총폭탄 정신, 육탄 정신이 체질화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 결사옹위(決死擁衛)란 한국어에서 '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옹위'는 좌우에서 부축하며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니 김정은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총폭탄, 육탄도 생각하는 그대로의 뜻이다.[43]

  • 전국의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에는 특별히 김씨 3대를 다루는 교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 방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가의 모형이 놓여진 사판(沙板)과 방의 크기에 비례하는 크기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북한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그 모형판의 주변시설들, 즉 김일성 부자의 생가 주변에 있던 시설들을 하나하나 익히게 해야 한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이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며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

  • 학교 교과서의 매 장(章) 절(節)마다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의 유시가 실려 있으며, 교과서의 문제들은 전반적으로 북한의 우상화 선전과도 연관된다. 설령 그것이 우상화 과목이 아닌 교과서라도. 국어 교과서 영어 교과서 수학 교과서 과학 교과서

  • 초등학교 1학년용 국어 교과서에 대놓고 '우리는 짧은 글을 하나 지어도 아버지 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을 우러러 받드는 마음이 나타나게 지어야 합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44]

  • 학술 논문까지도 우상화를 피하지 못했다. 서문은 언제나 '김일성 수령님/김정일 장군님은 이렇게 교시하시였다.'라는 말로 시작하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인용해야만 하며, 마지막도 언제나 '따라서 수령님/장군님의 말씀은 맞다.'로 끝난다.[45] 북한에서 인문 계열 학술지의 논문이 평균적으로 편당 2~5페이지인데, 서문을 빼면 그것의 쪽수까지 줄어든다.

  • 북한에서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생명'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육체적 생명'은 부모에게서, '정치적 생명'은 수령과 당이 내려준 것이므로 '육체적 생명'보다 '사회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가르친다.[46]

  • 김일성의 생전에는 김일성의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이고 동생, 삼촌, 외조부, 외숙부, 심지어는 사촌 동생까지도 교과서에 실어 놓고 학생들에게 이를 외우게 했다. #

  • 탈북 청소년은 국어 성적이 많이 높지 못해 처음에는 연구자조차 정치 선전을 믿어 이들을 외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취급을 하며 국어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연구가 진척되자 한국어 암송 능력이 뛰어나다든가, 학교 교육의 배경지식이 필요 없는 직관을 묻는 한국어 문제에서 남한 출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적인 글의 이해도는 남한 출신과 엇비슷했다. 왜 이렇게 국어 성적이 낮았냐면 북한에서는 민족 문학, 민주주의 대신 이공계 자료를 제외하면 김일성 가문 우상화 자료를 달달 외우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말과 글은 ‘혁명과 건설의 무기’라는 전제 아래 쓰기를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교육하면서, 글의 마지막에 반드시 김일성 일가에 대한 찬사를 적도록 교육하던 트라우마에 쓰기를 잘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어 자체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처럼 한국어를 교육하니 역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 극심한 단속에도 한류가 퍼지는 것도 한국어의 진심이 담긴 감정 표현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 학교에서의 우상화 교육의 실태에 대해 보다 자세한 것은 2015년 6월 16/23일에 방영된 MBC 통일전망대의 북한은 왜? <어린이 우상화 교육> 2부작을 참고하도록 하자. 1부 2부


4.1.1. 유아 세뇌[편집]


북한에서는 영유아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부모님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더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라고 교육하고 있다.

  • 북한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 처음에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가 아닌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일 정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북한의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이름보다 국가원수 일가의 이름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이렇게 북한의 어린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김일성을 진실한 아버지로, 친아버지는 '동거하는 가짜 아버지'로 생각하게 되며, 낳는 어버이도, 그들의 아이도 아버지가 같게 된 꼴이 되었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를 "얼마나 인민들이 수령님을 존경하면 한결같은 진심을 담아 수령님을 '아버지'라고 부를까? 인민들에게 이런 사랑을 받은 지도자는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김일성 수령님 1명밖에 없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 탁아소[47]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간식을 받을 때에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 앞에서 일렬로 서서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방법을 반복해서 훈련받아야 한다.

  • 유치원생들은 유치원에 들어갈 때, 복도 중앙에 '어린이들을 사랑의 한 품에 안으신 경애하는 대원수님들'을 형상한 대형 유화판에 머리 숙여 인사하고 교실에 들어서서는 교실의 정면에 비치된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인사를 하고 다음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48]

  • 첫 의무교육 시설인 유치원에 다니는 만 4 ~ 5세밖에 안 된 아이들은 하루에 최소 3시간 동안 '사상교육'을 받아야 하며, 유치원생들이 배우는 동요와 율동조차 김일성, 김정일의 개인사와 '혁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부분은, 과거에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어느 탈북자의 증언을 참고하자.#

  • 사실 이조차 김일성 시절에 비해 완화된 것으로,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의 유치원 일과는 김일성 가족의 '혁명사'를 가르치는 정치사상교육 6시간, 자본계급과 남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심는 계급교양 3시간, 김일성 찬양가 교육 2시간에 군사무용교육 2시간, 심지어는 총검술 제식훈련 등의 군사훈련도 1시간 했다.[49] #

  • 유치원과 소학교에서 한글 모음과 자음을 배우게 하는 첫 경로가 문자 그대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미하는 동요와 시를 배우는 것이다. 이 노래들을 각각 '모음가', '자음가'라고 하는데, 북한은 이 노래가 '남조선 어린이들'이 김정일을 흠모해 만들어 북한에 수입된 것이라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
  • 김일성 시기에는 탁아소의 아이들이 입는 옷 모양, 신발 형태, 먹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수령님께서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면 어린이들의 생활 하나하나를 자상히 돌봐주실까?'라는 식으로 선전하지만, 실상은 어린이들의 의식주 하나하나마저 김일성의 기호와 취미에 맞춰져야 했던 것이다.

이런 세뇌 교육의 결과, 4살짜리 아이에게 엄마 보고 싶냐고 하자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던가,[50] 동갑인 다른 아이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김일성 원수님"이라고 답했다거나,[51] 이름을 부르면 말을 겨우 할 정도의 아이가 지도자의 출생과 약력을 달달이 외우는 등[52] 북한의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주입식 인간개조'의 피해자가 되었다. 덤으로 이 기자는 뒤이어 "인간의 정이 있는 곳에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인상이었다." "낳은 자식에게 젖을 물리며 새근히 잠든 아기의 미소를 보는 엄마의 특권, 보람찬 모습은 없어야 한다는 북한의 오늘이었다."라고 북한의 유아 세뇌를 표현했다. 1972년 9월 5일자 경향신문 기사


4.1.2. 역사 관련[편집]


북한에서 가르치는 한반도의 역사는 과장 안 보태고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의 '혼돈'의 시기와 김일성이 태어난 후의 '창조'의 시기로 나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김일성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이고, 동생, 작은아버지, 조부모, 외삼촌, 외할아버지, 심지어는 증조부 김응우까지 한반도 내의 주요 사건을 주도했다는 역사 왜곡을 벌였다.#[53]
  • 북한의 실태를 보면 지극히 당연하겠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54]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8.15 광복을 맞게 해준 인물이라고 선전된다.[55] 그러나 이러면 한반도 남부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제를 패망시킨 미국에 '점령'당한 이유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김일성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을 일부러 봐주고 재무장시켜 부랴부랴 38선 남쪽을 점령했다'는 말같지도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1 #2
  • 김일성의 독립운동 중 유일하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보천보 전투[56]는 그야말로 한국에서 인식하는 살수 대첩,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을 합한 것을 능가할 정도로, 2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격파한 것처럼 선전된다고 한다.
  • 1999년에 북한을 방문한 일본인[57]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출신 여성 가이드[58]가 "조선혁명투쟁은 좁은 의미로 포착하면 1925년 김일성 주석이 항일혁명투쟁을 일으키기 위해 고향을 뒤로 했을 때 시작됩니다"[59]라고 말하며 김일성이 한반도 독립운동의 시작인 것마냥 말했고, 더구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힘도 없는데 무모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여 자신은 체포되어 처형될 뿐만 아니라 한일병합의 계기를 만들어 버려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식민지 지배에서 조국을 해방한 것이 김일성 주석이다."라고 폄하하고는 김일성 우상화에 역이용했다.[60] # 이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서도 판박이로 나온다. #
  • 김일성 휘하의 유격대원들이 나무에 김일성을 찬미하는 구호를 새겼다는 구호나무를 무려 2천여 개나 날조해 만들어가며, 여기에 외국산 통유리와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산불을 막기 위해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벌채한 것도 모자라 컴퓨터로 온도를 조절해가며 이 조작물을 보호한다. 이렇게 1년에 낭비되는 돈이 무려 한 그루당 2천만 원이다.
  • 북한에서는 3.1 운동도 김일성의 친부인 (골수 반공주의자) 김형직이 주도했으며,[61] 3.1 운동의 중심지는 김일성의 고향인 평양이고, 한국 나이로 8세의 김일성이 민중들의 선두에 서서 '조선 독립 만세!'를 열렬히 외쳤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은 3.1 운동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이라는 훌륭한 '수령'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3.1 운동에 대해 만약 김일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해줬다면 당연히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마디로 '조선 민중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봉기였으나 수령의 부재 때문에 실패한 봉기'라고 주장한 데다가 진정한 독립운동은 김일성이 이끌었던 항일유격대 무장투쟁 단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62] #1 #2
  • 북한에서는 원래부터 김일성파였거나 김일성파로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하면 과장 안 보태고 죄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후 독립운동 기록이 말소되었으며, 북한에서 역사 속의 독립운동가들이 마땅히 가져가야 했을 공적들은 전부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이 가져간 상황이다. 상술한 것처럼 북한에서도 존재를 인정하는 하얼빈 의거, 3.1 운동 같은 독립운동조차 '김일성이 없었으니 실패했다'며 폄하당하는 상황이다.[63]
  • 1995년 1월에는 중앙인민위 정령을 통해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고등중학교를 '김기송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동년 8월에는 동상까지 만들면서 김정숙의 동생 김기송을 '김정숙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영웅적 위훈을 세운 소년혁명가' '항일아동단원들의 전형'으로 찬양했다. #
  • 북한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존 권력층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건과 신미양요처럼 외세와 전투를 벌이는 일인데, 이 사건들 모두가 '김일성 같은 사람의 영도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되며 역사적 사건들까지 뜬금없이 김일성과 엮는다. 다만 왕실의 인물이라도 흥선대원군과 같이 쇄국정책을 펴면 그 부분은 나쁘지 않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여하튼 기존 권력층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고구려의 왕조차도 '동명왕', '광개토왕'은 각기 한 페이지 정도 서술되어 자기들이 추구하는 군사력 강화 정도만 칭찬한다. 이는 다른 장군, 기타 동학농민운동 같은 사건보다도 서술이 적은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이 종교여서 그런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부른다.
  • 고조선의 발생지가 만주가 아니라 평양임을 강조하면서, 평양에 태어난 김일성을 제 2의 단군, 즉 새민족의 창시자임을 드러낸다.
  • 김정일의 출생지를 소련우수리스크에서 백두산 근처의 백두산 밀영으로 날조했다[64][65]
  • 본격적으로 김씨 부자의 우상화가 자리잡은 70년대 중후반에는 김씨 부자가 다녀온 곳들은 '사적지'로 개발되어 이곳에 살던 수천 가구의 주민들이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
  • 북한에서는 한글세종대왕이 아닌 김일성이 창제했다고 가르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실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데다가 사실 진상은 이보다 더 터무니없다. 북한에서도 한글을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다고 가르치기는 하는데, 그 뒤에 일부 '미숙한' 글자들은 김일성이 '더욱 아름답게, 문화적,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2019년 4월에 로동신문에 실린 "민족의 자랑 조선어'에서는 '조선어의 우수성과 민족적 특성은 절세 위인들의 현명한 령도아래 더욱 더 빛을 뿌리게 되었다." "(김일성이) 우리 민족어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식민지 동화 책동을 감행하던 일제를 때려 부수고 잃을 뻔했던 우리의 말과 글을 찾아줬다. 우리 말 속에 남아있던 사대주의, 교조주의적 잔재들을 말끔히 가셔내고 그것이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문화어로 활짝 꽃펴나도록 세심히 이끌어줬다." "절세 위인(김일성·김정일)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사상과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의 말과 글은 발전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말과 글은) 오늘 최고령도자 동지(김정은 국무위원장)에 의하여 더욱 세련되고 풍부화되고 있다."라면서 한글을 김일성 일가가 발전시키고 완성시킨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니, 북한 사람들이 한글을 김일성이 창제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1 #2 쉽게 말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이를 느닷없이 김일성과 엮은 셈이다.
  • '한민족'이라는 표현을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으로 일컫는데, 그 일례로 1995년에는 평양방송에서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이 송출되었다. 북한 정권의 관점에서는 남한도 자기 땅이며 미국이 '강점'하고 있는 곳이기에 남한 주민도 김일성 민족이며 남한은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의 일부라는 망상적인 세계관을 나타낸다.

4.2. 초상화 관련[편집]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는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초상화도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지도자 그 자체'로 대접을 받는다.

  • 기차역과 공항 등의 모든 공공시설과 교실은 물론이고 모든 집, 심지어 배의 갑판과 지하철 객차 안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걸어야 한다. 북한의 유일한 항공사 고려항공 여객기의 기내[66][67]정치범수용소완전통제구역[68]을 제외하면 북한의 모든 곳에서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봐야만 한다.
  • 김일성 시절에는 지도자의 초상화가 걸린 벽에는 다른 어떤 것도 걸 수 없도록 했으나, 그나마 이는 현 시점에서는 폐지된 상태이다.[69]
  • 초상화를 '제대로' 매달지 않으면 하루 동안 강제로 건설현장에서 중노동을 해야만 한다.
  • 매일 아침, 저녁마다 집에 있는 사람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에 머리를 내리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지도자 사진과 체제 선전물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지도자 사진을 관리하는 행위를 정성사업 이라고 하는데, 이 정성사업은 '매일 충성심에 티끝만한 먼지라도 앉지 않았는지 반성하면서 닦아야' 한다며 김부자의 사진을 그냥 걸레도 아닌 정성걸레라고 하는 부드러운 재질의 걸레로 매일같이 닦아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강요한다. 그리고 각 가정으로 불시에 당직자(당일꾼)들이 방문해 검사를 하게 되는데, 당연히 바로 후술하듯 제대로 관리가 안되면 불순분자 취급받는다.
먼지가 쌓인다거나, 잉크가 살짝이라도 튀었다던가 하는 이유만으로 3대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아예 처형된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긴 하나,[70] 대신 이 사실은 반드시 생활총화에서 언급해야 하고, 언급하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들어야 한다. 대신 초상화가 찢어지거나 구겨지거나 눈이 찔리는 등 초상화가 크게 훼손됐으면 진짜로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게 되며, 심지어 지도자 사진이 들어간 신문이나 책을 깔고 앉는다거나 하는 행위도 처벌받는다. 실제로 무고한 유대계 미국인 청년 오토 웜비어는 겨우 김정은 사진이 실린 신문을 흙 묻은 신발을 싸는 데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어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 심지어 이것도 김일성의 생전보다는 완화(!)된 것이다. 1987년에 남한으로 탈북한 김만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청소할 때에는 먼저 '정성함'에 들어있는 청소도구 중 닭털로 된 먼지떨이로 초상화의 먼지를 털고, 그 다음에는 세면수건으로 유리와 사진틀을 닦은 뒤, 가제수건으로 한번 더 닦아내고는 다시 솜으로 부드럽게 손질을 하고 융걸레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때 물걸레를 사용하면 절대로 안 됐는데, 이는 물기가 있으면 '수령님'의 초상화에 곰팡이가 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초상화 보위사업'에 쓰이는 청소도구만 20종류나 됐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경악할 만한 점이 있다. 김일성 초상화 청소를 위해서는 붉은색 비단천[71]향수병도 필수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했는데, 이는 "'수령님'의 초상화에서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72] 심지어 향수병 증언은 탈북자 기자 주성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까지 된 사실이다. #1 #2 물론 이는 북한 입장에서도 너무 과한 행동으로 여겨졌는지 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 교실 벽면을 도색할 때에는 초상화를 떼어 투명 기름종이로 감싼 후 적색 나일론 보자기로 싸서 교탁 안에 보관해야 한다.
  • 1993년 초에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유사시 김일성 부자와 김정숙의 동상[73], 석고상, 초상화를 대피시킬 수 있는 특제 승강기와 지하보관고를 전국적으로 건설했는데, 지하에 갱도을 뚫고 약 15~20평의 공간을 '1호모심실'이라는 이름으로 마련한 후 수령(김일성)관, 지도자(김정일)관, 어머니(김정숙)관을 만들고는 각 방을 카펫과 호화로운 벽지로 치장했다. 유사시에는 동상과 석고상은 철제 상자에 넣어 포장한 후 이동해야 한다고 한다. # 심지어 2022년 남한에서 '김일성 전기'를 출판한 표도르 째르치즈스키(1988년생)[74]가 입수한 2004년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지시에 따르면 전쟁이 발생할 경우 인민의 첫 번째 의무는 민간인 대피가 아니라 김씨 일가 우상화물을 1호모심실에 이동시켜 보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 북한에서는 휴지 또한 꽤 귀한 물건이라 휴지를 사서 쓸 형편이 안되는 가정에서는 로동신문 따위의 신문지를 휴지 대용으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때 김부자 의 사진이 인쇄된 부분은 절대로 휴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들의 얼굴이 나온 페이지는 특별히 좋은 잉크로 인쇄되며, 아예 접으면 안 된다.
  • 김만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의 생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김일성 초상화를 주례삼아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놓고 큰절을 올린 뒤 '위대하신 수령님께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고 하고는 돌아서서 김일성 초상화를 배경삼아 결혼 기념사진을 찍어야 했다. #
  • 자식이 실수로 김일성 초상화를 훼손한 것이 발각되면 부모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과장 안 보태고 북한에서 실수로 김일성 초상화를 훼손한 사람의 가족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힌 독립운동가의 가족들보다 더한 탄압을 받는 셈이다! #[75]
  • 집에 불이 나면 금은보화, 가족보다 지도자의 사진을 먼저 챙겨서 탈출해야 한다. 지도자의 사진을 챙기려다가 재해에 휩쓸려서 희생되고, 안 챙기면 끌려가서 처형당하고... 실제로 초상화를 건지려다가 정작 중요한 인명이 희생되어 공분을 사는 뉴스도 나온 적이 있다.[77]
    • 2007년 8월 집중호우가 일어났을 때 평안남도 성천군의 광부 김승진은 집이 물속에 잠긴 상태에서 가족보다 초상화를 먼저 구했고, 평남 양덕 임업설계연구소 설계원 김덕찬은 산사태가 집을 덮치자 아내에게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먼저 건네고[76] 자신은 흙더미에 묻히고 말았으며, 평강군 정동협동농장 농장원 박종렬은 아내와 자녀를 산사태에 잃으면서도 초상화를 먼저 건져냈고, 강원도 회양군 회양읍의 1천여 가구 주민들은 가구집기를 한점도 건지지 못하면서도 집안의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만을 갖고 안전지대로 피했다.
심지어 이천기초식품공장 노동자 강형권은 홍수를 당하자 초상화가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 봉투에 담아 옮기는 동안 다섯 살 먹은 딸이 물에 휩쓸렸는데, 로동신문은 강형권이 딸보다, '성스러운' 초상화를 더 꽉 붙잡고 있었다고 보도했고,[78] 딸이 살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초성화가 무사했다고 전했다.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언론들은 강형권을 '진정한 영웅' '살아 있는 영웅'으로 미화하며 주민들이 이런 모습을 본받기를 권했다고 한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런 끔찍한 이야기들에 대해 "가정보다도 자기 수령, 영도자를 옹위하는 길에 남 먼저 뛰어들었다"고 말하며 "바로 오늘 자기의 존재도, 값높은 존엄과 행복도 수령결사옹위의 길에서 찾는 조선인민의 인생관"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는 피해지역 그 어디에나 있었다"며 "조선 인민은 수령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도 기꺼이 바칠 줄 아는 의리 깊은 인민"이라고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참고자료]
  • 2012년에는 만으로 겨우 14살밖에 안 된 소녀가 새벽에 산사태 속에서 집이 무너질 때 피난가라는 어머니의 말도 안 듣고 김씨 부자의 초상화부터 구하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실이 김정은에게 보고되자 김정은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애도하기는 커녕 '영웅적이고 고귀한' 소녀를 키워낸 공로로 소녀의 어머니와 학교 교장에게 1급 공화국 훈장을 수여하고 아버지와 몇몇 교사들에게도 다른 훈장들을 수여하도록 지시했다. #1 #2
  • 2016년에는 홍수 속에서 회령시의 한 고등중학교에서 초상화를 구하려다가 무려 13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기도 했는데, 홍수 속에서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해 처벌받을 게 두려웠던 학교 교감이 교사 7명과 학생 6명에게 물이 불어난 학교에 들어가 초상화를 구해오라고 시켜서 학교에 들어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변을 당했다고 한다. #[79] 북한은 이에 대해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보위하는 길에 서슴없이 목숨을 내댄 회령시 송학고급중학교 10명[80] 교원, 학생들의 최후를 영원히 기억하리라"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 때 북한은 물에 떠내려가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건지고 숨진 주민의 일화를 "습기 한 점 배지 않은 20여 상의 초상화, 한목숨 바쳐 신념과 의리를 지킨 그 충정의 인간 앞에 누구나 숙연히 머리 숙였다"며 칭송하였다. #
  • 2019년에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집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불길을 뚫고 들어가 어린이 3명을 구한 여성이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위부의 취조를 받은 반면 폭력 사건으로 교화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옆집으로 뛰어들어가 초상화를 건져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화마의 불길 속에서도 초상화를 모셔 내온 청년 영웅'으로 포장되었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있다. #
  • 1979년부터 2014년경까지 북한 원에는 김일성의 얼굴이 그려졌다.[81] 오늘날에도 북한의 5000원권에는 김일성의 유년 시절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이 그려져 있다.
  • 우리민족끼리로동신문 등 북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김정은이 있는 사진 위로는 마우스 커서가 못 올라가고 숨도록 설정해놓았다. 반대로 김정은이 나와있지 않은 사진은 그 위로 커서가 잘만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최고존엄'은 항상 앞에 노출되어야 하고 커서가 김정은을 가리는게 모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이유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

여담으로 김일성 초상화는 갑산파 숙청 사건 후인 1968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굳은 표정의 정면상 초상화를 썼다가[82] 1년 뒤에 약간 몸을 비껴선 모습[83]으로 변경되었고,[84][85] 이 초상화는 26년간 쓰이다가 김일성 사후에 우리가 잘 아는 '태양상'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정일 초상화도 사후에 전술한 무뚝뚝한 모습에서 '태양상'으로 변경되었다. #


4.3. 동상 관련[편집]


김일성은 집권 직후인 1948년부터 만경대혁명학원에 젊은 자신의 동상을 세울 정도로 동상을 좋아했는데, 후계자들도 이를 물려받아 북한은 세계에서 지도자 동상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김일성 하나만의 석고상과 흉상, 동상 다 합쳐서 3만 5천 개(!)나 될 정도로[86] 하도 많이 만들어서 북한은 이런 거대 동상의 제작 기술만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다.[87]

  • 1972년 4월에는 김일성의 60세 생일을 기념하고자 높이만 23m[88]인 거대 청동상을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인근에 세웠는데, 원래 이 동상에는 문자 그대로 37kg의 금박을 입혔으나[89] 당시 실제 사진 1978년 9월에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돈이 없다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구하는데 왜 이런 데에 쓸 금은 있나?'고 지적하자 '금색은 햇빛에 너무 번쩍이므로 좋지 않다'며 금박을 모두 떼어냈다고 한다.[90]
  • 김일성 부자의 동상은 김일성 부자와 그 자체로 동일하게 여겨지기에 동상에 손을 대는 것은 김일성 부자에게 손을 대는 것으로 여겨져 금지된다. 그러다보니 유지보수 등을 할 때 아예 동상에 하얀 천을 씌워서 동상을 만지는 모습을 주민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
  • 김일성 부자의 형상작품은 각 도 미술창작사 및 만수대창작사의 '1호작품과'에서 전담 제작하는데, '1호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일성 부자 초상화, 동상·석고상, 배지 및 각종 출판물의 형상들은 '1호작품과' 소속의 1호작품 미술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작할 수 없으며 1호작품과 소속 미술가들은 특별히 당성 및 기량을 심사받은 후 엄격하게 선발된다. 제작도 당 선전선동부에 계획을 제출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야 시작되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아 우상화물 제작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를 걸어야 한다고 한다.
  •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은 '살아 있는 수령'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건립장소까지 운반되는 동안 현지지도 때와 마찬가지로 보안원들이 쫙 길에 서서 동상에 경례를 하고, 동상이 지나가는 도로는 차단되어 다른 모든 차량들을 일절 움직일 수 없게 하며 보행자로 하여금 건립장소로 운반되는 김일성 부자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 2013년 기준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평양시 기관조직별로는 남성 성인 평균 신장 크기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80여개나 있었다고 하며, 구글 어스로 확인한 결과 평양 시내에 김일성 부자의 동상은 정확히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
  • 고영환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 부자의 동상을 세척할 때에는 '수령님과 장군님이 추워하지 말고 더워하지 말라고' 정확히 36.5도로 체온과 똑같이 따뜻하게 데운 물로 세척을 해야 한다고 한다. # 그나마 향수를 안 뿌린 게 어디냐.
  • 평양에 들어오면 외국인도 예외없이 저 김일성 동상에 경례를 강요한다. 거절할 시에는 불경죄 혐의로 오토 웜비어처럼 된다.
  •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발가락 하나라도, 0.001nm라도 잘리면 안되며 동상 뒷모습을 찍으면 안 된다.
  •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충성심의 표현'을 명분으로 매일 당번을 정해 새벽에 동상과 그 인근을 청소해야만 하며 이를 소홀히 하면 매주 토요일에 있는 생활총화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 지도자의 동상, 초상화 주변에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많은 편이며 이는 그 동상을 훼손하려는 자를 잡기 위함이다. 그 감시카메라가 다른 범죄를 잡는데 사용되는 지는 불명.
  • 전력난이 극심한데도[91] 지도자의 동상의 야간 조명은 계속 켜져 있고 꺼지지 못하도록 남아있는 전력을 모조리 다 끌어다 쓰고 갑작스럽게 전력이 끊기는 경우를 대비하여 비상용 발전기를 5대 이상 구비한다. 2002년에는 평양시 보안부 청사 내 김일성 동상의 야간 조명이 17분 동안 꺼졌다는 이유로 부국장이 총살형에 처해지기도 했다.[92] #


4.4. 지도자의 이름 관련[편집]


북한에서 지도자는 곧 '신'이기에, 지도자의 이름도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사실상 피휘의 대상이 된다.

  • 체제 선전을 위해 몇몇 지명을 지도자 일가 및 정권 기여자, 정권 주요 인물의 이름 또는 선전, 선동 목적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 지도자 일가 또는 정권 기여자, 정권 주요 인물과 관련된 자의 이름을 딴 경우. (예시) (성진시 + 학성군김책시), (신파군김정숙군), (후창군김형직군), (풍산군김형권군), (재령군 대홍리 → 김제원리[93]) 등이 있다
    • 선전, 선동 목적의 이름으로 바꾼 경우. (예시) (오로군영광군), (퇴조군락원군), (영흥군금야군) [94]
    •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에는 평양을 문자 그대로 '김일성시'로 바꾸려고 했으나[95] 이는 '보류'되었다. 취소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보류'된 이유도 가관인데, 북한 수뇌부들도 어이없어해서 보류한 게 아니라 적화통일에 성공하면 서울을 '김일성시'로, 평양을 '김정일시'로 개명하려는 계획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었다. #
  • 글을 쓸 때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에서 줄바꿈을 하면 안 된다.
  • 지도자의 이름은 볼드체로 강조하거나 좀 더 크게 적어야 한다.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적어야만 한다.[96] 국규 9566에는 아예 이들의 이름을 특수문자로 넣어서 치면 자동으로 볼드로 변환되게끔 효과를 주게 한다.[97] 휴대전화 메시지로 김씨 3대의 이름을 적어도 자동으로 볼드체로 입력되어 나온다. 외국어로 이들의 이름을 적을 경우에는 기종에 따라 바뀌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지도자의 이름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은 사용할 수 없으며, 이들의 집권 이전에 태어나 이름을 정한 사람은 개명해야 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이렇게 이름의 글자를 피하는 것을 '피휘'라고 하는데, 조선에서는 저런 사태로 인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왕의 이름을 지을 때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자를 쓰거나 아예 한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고, 이방원처럼 너무 흔히 쓰여서 피휘가 곤란한 경우 그냥 무시하거나, 왕이 자기 이름을 잘 안쓰이는 한자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과거보다 더 심해진 격.
    • '일성', '정일', '정은'은 절대로 안 되며, 김정은의 장녀의 이름인 '주애'도 안 된다.[98]
    • 지도자의 가족이나 지도자와 관련된 사람 이름도 쓸 수 없다. 민주조선의 책임주필 김정숙(金貞淑)처럼 김일성의 사촌누이 정도는 되어야 개명을 피할 수 있다. 다만 뒤집은 이름까지 잡지는 않고.[99]
    • 진짜 피휘도 왕이 이름을 개명하면 개명하기 전의 이름에 대해서는 하지 않았는데, 북한은 지도자가 개명해도 예전 이름까지 피휘한다. 김정일의 옛 이름 '유리'가 예시. 다만 김일성의 원래 이름 '성주'의 경우 2020년에 '박성주'가 소장 진급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피휘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는 오히려 김일성은 태어날 때부터 김일성이었던 걸로 하기 위해 '성주'라는 이름을 일부러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5. 북한 사람들의 반응[편집]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21세기로 넘어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데다가 북한 당국이 일반인의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는 와중에도 해외 정보가 어느 정도는 퍼져 있기에 북한의 허무맹랑한 우상화 선전이 더 이상 젊은 세대들에겐 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0년에는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김일성을 단순히 '옛날 할아버지'로만 취급하며 김일성 일가에 대한 존경심은 커녕[100] 우상화를 위해 만든 장소들의 인근을 데이트 장소 정도로만 여긴다고 하며(#), 2022년 10월 기준으로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김정은의 '위대성' 선전에 대해 '희극배우'라는 말로 조롱한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의 우상화 선전 중에는 너무나 허무맹랑한 내용이 많다 보니까 이제는 북한 내에서도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거기다가 북한 내부에서도 북한의 우상화 선전들에 대해 옛날에나 이런 거에 속아넘어가지 요즘 어린애들이나 젊은이들은 안 믿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뒤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욕을 한다는 말도 있다.

2015년 고급중학교(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출판된 김정은 우상화 교과서는 '김정은은 3살 때 총을 쏘고 운전을 시작했다'는 등의 내용들이 나와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와 북한 당국은 이 책들을 회수하고는 내용을 정정해서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 김정은이 지도자가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는 내용으로 지도자를 우상화한다면 북한의 대외적인 인상도 안 좋아지고 북한 주민들도 믿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보다 현실적인(?) 능력들을 뻥튀기해서 선전한 건데도 이런 반응이 나왔다. 사실 김정은 시기 북한도 로동신문에서 축지법이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지도자의 '사상정신적 풍모'를 강조하는 등 진짜로 현실적인 감각을 가미한 우상화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더 이상 지도자와 지도자의 후계자가 비현실적인 능력을 쓴다는 내용의 우상화 선전을 새로 볼 일은 없을 듯하다.

사실 김정일의 사망 직후인 2012년에도 북한 주민들은 인권 단체로부터 외부 정보를 접해 김정일의 실상에 대해서도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었기에 당시에도 김정일 우상화를 믿는 북한 주민들은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 그리고 2015년 3월 자유아시아방송평안북도의 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일단 북한의 가정마다 있었던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있는 저작들과 김일성의 회고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휴지와 땔감으로 애용되었다고 하며,[101] 김정은 정권이 새로 만든 김일성•김정일 배지는 장마당에서 입쌀 1kg 값도 되지 않는 5천 원에 팔리고,[102] 덤으로 이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존엄'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북한 주민들도 자본주의의 맛(?)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언급했다.

사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든 서적을 땔감과 휴지로 애용하는 것은 선전부 소속 간부들의 주기적인 도서검열 과정에서 서가에 김일성 부자의 서적이 없는 것이 발각되어도 지적만 받는 것으로 완화되었기에 관리 소홀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데,[103] 당시 검열에 동원된 선전부 간부들은 한 개의 인민반[104]에 한두 집만 김일성 부자의 서적이 없는 줄 알았더니 거의 모든 집에 없어서 난감해할 정도라고 하며, 간부들은 상부에 보고하면 도리어 선전일꾼들이 처벌받을 것 같아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묻어두고 있다고 한다. #1 #2

심지어 2016년 기준으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의 생일에 일어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 대해 '한날한시에 태어난 '수령님'이 몰고 온 재앙'으로 여겼다고 하며, 4월에 세월호 사고2015년 네팔 대지진, 2016년 구마모토 지진 같은 참사가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다 태어나선 안 될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다"라고 여겼다고 한다. 즉, 북한 사람들은 오랜 세뇌교육 때문에 겉으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척을 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김일성을 '태어나선 안 될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105] # 애초에 김일성이 살아있던 1990년에도 북한의 고등학생들은 김일성 부자의 명령에는 무조건 절대복종, 관철해야 한다며 인식하면서도 김일성이 가졌다는 초자연적 재주에 대해서는 단지 '신화'로만 여겼다고 한다. # [106]

2022년 11월 18일 김정은의 딸 김주애화성-17 시험 발사 현장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만으로 9~10세 정도밖에 안 된 아이를 '존귀하신 자제분' '존경하는 자제분'이라고 치켜세우고는 그 표현 뒤에 '께서'라는 말을 붙이며 우상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김주애에 대한 강연회나 학습회는 열리고 있지 않다고 한다.[107] # 물론 북한도 허황된 초능력 선전은 중단했기에 김주애가 무슨무슨 능력을 가졌다고 선전할 일은 앞으로도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2023년 8월경부터 북한 당국에서 김주애가 '천재', '만재'라는 소문을 유포하는 중이라고 한다. # 결국 김주애가 2023년 11월 23일부터 공식적 차원으로 조선의 샛별이라고 불린 것이 알려지며 김주애 우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

2023년 8월 21일부터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지에서 '사회주의 붕괴는 당의 후비대 청년들의 사상이 자본주의 문화에 물드는 순간부터 시작되니 청년들에 대한 사상교양은 하루도 멈추면 안 된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사상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공화국을 허물려는 적대세력과 대결할 수 있다.'는 취지에 따라 청년들에게 '사상교양'이라며 항일빨치산의 회상기를 자자구구 읽고 청년동맹조직에서 빨치산 회상기를 읽고 느낀 점을 발표하도록 강요하고 있는데,[108][109] '대내외 복잡한 정세 속에서 항일빨치산의 투쟁 정신을 따라 배워 최고존엄결사옹위하는 것이 청년들의 중요한 사명이고 조선청년운동의 역사적 전통'이랍시고 청년들에게 맨손으로 산에서 연길폭탄[110]을 만들어 수령을 목숨으로 보위하였던 항일빨치산의 정신과 김일성이 축지법으로 일제와 싸워 승리했다는 '전설'[111]을 가르쳤는데, 당연히 장마당 세대들에게 우상화 선전이 먹힐 리가 없어 '인공위성 만들어 우주에 쏘아올리는 시대에 연길폭탄 만들었던 빨치산 회상기를 학습해야 하냐' '우리도 축지법을 배워 경계가 상엄한 국경을 탈북했으면 좋겠다'며 비웃고 있다고 한다. #

상술한 바와 같이 현 시점에서 북한의 '혁명사적지'들은 데이트 장소로 전락한 판인데, 그 이유는 북한의 지방도시에는 젊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야외 공원과 대중문화장소가 많지 않은 것은 물론 전기도 극히 부족한데, 이런 상황에서 수림과 잔디밭이 넓게 조성되고 365일 밤에도 조명이 들어오는 공간은 혁명사적지와 혁명전적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북한 당국은 이런 행동들이 '청년들의 사상이 변질되어 일어난 일' '혁명사적지가 자본주의 날라리 문화의 장소로 변질된다'고 우기며 앞으로 이러한 행위가 적발되면 반당반혁명 분자로 엄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보면 북한이 처벌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할 정도로 '혁명사적지', 넓게 보면 북한의 우상화 선전물들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무시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만 이 소식을 전한 함경북도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에서 배급제 시대에 성장한 주민들은 아직도 '혁명사적지'나 '혁명전적지'를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

김일성 우상화의 핵심인 해방전 주도조차 간부들과 지식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큼 의식 있는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몰래 구매한 금서를 통해 진실을 파악하게 된 판이다. 사실 속칭 '장마당 세대'들은 짬만 있으면 손전화에 SD카드를 끼워 제2차 세계 대전 등을 다룬 외국영화를 보면서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배우기 때문에 8.15 광복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북한에서 배우는 역사교과서의 내용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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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8주년을 맞아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동상에 헌화하는 모습이다.[2] 상단 영상 속 기사 초반에 북한의 선전용 동요 세상에 부럼없어라가 나온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북한의 어린이들은 김일성과 (북한은 일당제 국가라 조선로동당을 그냥 '당'이라고 부른다)의 품에서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의 동요로, 후렴에 대놓고 "우리의 아버진 김일성원수님 / 우리의 집은 당의 품"이 나온다.[3] 이 구절 다음에는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주성이 없이 남을 쳐다보며 의존하고 그 나라의 눈치를 보면 궁극에는 눈뜨고 망국멸족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4] 세금이 아니다. 이미 1974년에 세금을 폐지하여 공식적으로 무세국가다. 무세국가임을 선전하고 있기에 '좋은일하기운동'(간단히 말해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무임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군량미', '애국미' 등의 별의 별 명목으로 세금 아닌 세금을 '세외부담'이라며 주민들로부터 뜯어가고 있는 것이다.[5] 사회주의 대가정론도 수령‐당‐대중의 삼위일체가 얀상된다는 의견이 있으며, 당, 행정, 기술일군(기업소) 등으로도 언급된다.[6]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며 황제를 로마의 수호신 그 자체로 일컬었다.[7] 파라오를 태양신 의 현신이자 라의 아들로 일컬었다.[8] 주체사상을 '김일성교'라는 문자 그대로의 종교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후세계의 부재를 통틀어 종교라고 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많지만 이는 (정상적인 종교인) 유교도 마찬가지이므로 주체사상을 사실상의 종교로 보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9] 심지어 스탈린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위압적인 수준의 우상화로 악명이 높았는데, 북한의 우상화는 6.25 전쟁 휴전과 스탈린 사망으로부터 겨우 5년밖에 안 지난 1958년에 이를 압도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렇게나 위압적인 우상화를 경험한 소련 사람들조차 러시아어로 번역된 북한 선전 잡지들의 김일성 우상화 내용들을 보면서 너무 웃기다는 이유로 이 선전 잡지를 '유머 잡지'로 여기며 일부러 구독하고는 밥상머리에서 가족끼리 읽으면서 같이 웃을 정도였다는 것에서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 수준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10] 참고로 이상조는 이 문서를 소련에 보내고는 1961년에 소련으로 망명을 갔으며, 1989년 9월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6.25 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한 남침이라는 사실을 증인으로서 전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11] 어떻게 보면 이는 남한에서 우상화 선전가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12] 투르크메니스탄은 원래 소련에 속해있던 국가였다. 니야조프 역시 인류 역사상 가장 우상화를 극단적으로 시행한 지도자 중 하나로 꼽히며 전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13] 응게마는 북한과 유사하게 자신에게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국민들에게 선전했으며, 심지어 1978년에는 국가 모토를 대놓고 '마시아스 응게마 외의 신은 없다'로 바꾸기도 했다.[14] 다만 공식적으로는 10/11일이 선포되었다. 아마 암묵적인 애도기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5] 물론 이때 술을 마셔놓고 '장군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버티냐'고 해서 빠져 나간 경우도 많다.[16] 한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사망 당시에는 3개월 동안 애도기간이 선포되었으며, 인민무력부 간부 중에서도 술을 마시다가 적발돼 공개처형당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7] 김정일 사망 공표 거의 직후인 2011년 12월 19일 밤 11시 30분에 탈북하다 체포된 일가족에 대한 소식이 김정은에게 전해지자 김정은은 "이런 때에 월경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이니 그 일족의 3족을 멸족해버리라."라는 막말을 내뱉었다. #[18] 전자를 패배시킨 것은 미국이었고, 후자는 오히려 북한이 미국에게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19] 출처: 강광식 편저, 북한의 실태 - 분야별 경험자료 및 예비적 고찰 , 198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42쪽[20] 물론 이들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몇 달 전부터 미리 뽑아 놓고 모의접견에서는 김정은은 닮은 사람을 접견관으로 나오게 하는 등의 엄격한 훈련을 거치게 한다.[21] 물론 책이 책인지라 책을 펴자마자 골아떨어지는 어린이들도 있다고 한다.[22] 이러한 방문의 대상이 되는 가정은 이를 반기는 마음 절반, 싫어하는 마음 절반이라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방문준비로 인해서 집 안팎이 정돈되고(페인트 칠부터 시작해서 동네 진입로까지 싹 다 새로 깔린다고 한다.) '수령님께서 직접 만난 사람'이라는 북한에서 최고의 끗발을 날릴 수 있는 뒷배가 생기기 때문에 절반은 기쁜 마음이고. 방문 이후 다녀간 집 자체를 전술한 벤치처럼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돈이 있건 없건, 지원이 있건 없건 항상 그 상태 그대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같이 생긴다고 한다.[23] 이 사람이 지적한 내용이 참으로 가관인데, 바로 김일성이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피난한 거리 총합은 자구 둘레의 2배인 8만km다였다고 한다.[24] 대규모 혁명박물관과 기념물을 넘어 모든 공장, 기관, 학교, 농장, 군대에 설치되어 1990년 기준으로 정확히 37,950개에 달했다고 한다.[25] 김일성의 생전에 영생탑은 '만수무강탑'이라고 불렸으며, '위대한 수렁 김일성 대원수님의 만수무강을 삼가 축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26] 김정일의 날조된 생가인 백두산 밀영 인근에 있다.[27] 이게 사실 매우 중요한 것으로, 실제로 '집중학습'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김정은이 그처럼 탁월하고 세련된 영도로 적대세력의 도전을 짓부시고 자력 부강한 나라를 열어 놓았다면서 왜 우리에게 식량도 땔감도 공급해주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우상화 선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 사실 후술하듯 이제 북한도 해외 정보가 많이 유입되어 북한 체제의 진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기에 우상화 선전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28] 북한의 문헌에서는 최고지도자가 어떤 신화 속 인물 마냥 무지몽매한 인류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모습을 '가르친다'고 묘사한다. 나머지는 그것을 배워서 전해줄 수만 있다는 뉘앙스다.[29] 물론 북한에서는 이를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심이 강한 우리 민족의 심리적 습성을 드러낸다"고 포장하고 있다. #[30]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조치는 '혈육관계가 아닌 청춘남녀들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거나 직무뒤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을 통제한다고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직무가 아닌 '혈육관계'인 '부모님'이라는 단어는 사용해도 된다고 하며,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학교 선생님에게도 '님'을 붙이는 것은 허용된다고 한다. #[31] 다만 2015년 기준으로는 이 책들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후술.[32]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23년에 김일성이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친부 김형직의 뜻에 따라 만주 팔도구-평양 만강도까지 14일 동안 천리길을 걸었다. 참고로 이때 김일성은 만 10세였다.[33] 예를 들어, 김일성이 강계 우체국에서 부모한테 강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보를 쳤으니 이 행군 중 강계에 도착한 학생들을 다 우체국에 데리고 가고는 김일성과 똑같이 집에다가 전보를 다 치라고 한다.[34]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다 학생 대표로 특별히 엄선된 사람만 갈 수 있게 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이 행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둘 다 북한의 주장 외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는 완벽한 날조다.[35] 가장 신성시(?)되는 답사지는 김정일의 거짓된 생가인 백두산 밀영이라고 한다.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백두의 칼바람을 맞아봐야 선대의 혁명성을 알 수 있다'며 백두산 답사를 강요하는데, 애초에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백두의 칼바람'을 맞기는 커녕 스위스에서 편안한 유학 생활을 보낸 김정은이 자신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다 통달한 것마냥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36] 반갑습니다감자자랑에서조차 간접적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구절이 막절에 등장한다.[37] 김일성 우상화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인 1947년 만들어져서 가사가 북한 곡이라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전(?)하다.[38] 평양에서는 만수대 동상, 각 도에서는 도청 소재지 인근의 동상[39] 실제로 서양권에서는 사리분별력과 판단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는 어린이들에게 정치적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정서적 학대로 여겨진다. 그런데 북한은 이 정서적 학대를 북한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그것도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고 이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40] 특히 니야조프의 국민 세뇌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1 ~ 2세대 내에 완전히 쓸모없고 현대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북한의 세뇌는 그보다 훨씬 극심하다. 이후 니야조프의 후임 독재자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대기를 가르치는 등의 세뇌 교육을 자행했다.[41] 내용은 대략적으로 '국가는 모든 어린이들을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주체형의 혁명가로 교육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다'이다.[42]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들어간 날조들을 "이것들은 모두 조선의 사회과학자들이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수백번이나 돌아다니며 힘들게 자료를 찾아가면서 겨우겨우 발굴해간 검증된 사실들이며, 이 이야기들의 진원지는 남조선과 외국이다"라고 선전한다고 한다.[43] 이런 교육을 시키다보니 외부 전문가들은 김정은은 인민이 제 아무리 많이 죽어도 자신의 권위를 훼손시킨 주민이 죽는 등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전혀 개의치 않을 인물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44] 물론 이것은 현재는 변했을것이다. 김일성은 1992년 대원수로, 김정일은 2012년 대원수가 되어 현재 '아버지 원수님'은 김정은뿐이다[45] 이는 논문에서 다루는 내용이 북한 체제에 반하지 않으며, 따라서 연구해도 괜찮다는 근거가 있음을 김씨 일가의 어록을 통해 증명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46] 사실 북한의 실태를 보면 김씨 3대에 밉보이는 행동을 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이 끝나면 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사실상 '육체적 생명'은 곧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끈만 힘겹게 잡아가며 연명하고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매일매일 느껴야 하는 참혹한 꼴이 되니 어느 의미에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47] 김일성 시기 기준으로 태어난 지 75일이 된 아이들은 누구나 탁아소에 보내졌다고 한다. 김정일 시기에도 이런지는 불명.[48] 링크 속 글 위에서 두 번째 사진에 후술할 '특별 교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특별 교실'에 있는 건물 모형은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를 본뜬 것이다.[49]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교련을 하긴 했으나 고등학생에게만 적용되었지 유치원생, 초등학생은 커녕 중학생에게까지 교련을 시키지는 않았다.[50] 아이들이 부모님을 보고 싶다면 연계를 지어줬다고는 하나, 부모님을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 '불편이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당시 북한의 보육원은 일반적인 집보다는 시설이 좋았다고 하나, 애초에 국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친부모와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분리한다는 것은 김일성 시기 북한 외에는 민주 캄푸치아 정도만이 할 수 있던 일이다.[51] 다만 이는 아이의 진심이 아니라 보육원이 강요한 대답이긴 하다.[52] 이런 모습들을 본 북한 특파원은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어린 꼬마들이 요절(要節)을 암송하는 것과 닮았다'고 표현하며 북한 우상화의 종교성을 알아차렸다.[53] 사실 김일성의 증조부는 묘지기, 조부는 농부였고, 김일성의 친모인 강반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친부인 김형직은 한술 더 떠 한의원을 운영할 때 공산주의자들은 치료해 주지도 않은 초강경 반공주의자에 공산주의 단체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었다.[54]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고 이 군대가 지금의 북한군인 조선인민군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냥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중간간부나 소련군 대위였다. 외국 조직과 친했기 때문에 외국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뽑힐 수 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인민혁명군은 실존하지도 않은 가공의 군대이다.[55]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선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을 위해 함경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1945년 5-6월에 근거지를 만들고, 6월에 백두산에 비밀 근거지를 만들어 한반도를 사실상 해방시켰으며, 8월 9일부터 '인민'들과 함께 총공세를 벌여 일본군, 일본 경찰, 헌병들을 전부 쓸어버리며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8월 15일에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물론 이는 북한의 주장 외에는 아무 근거도 없는 100% 허위 날조이다.[5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는 170명 정도로 순사 5명(보조원 2명 포함)이 있는 작은 마을을 침투해 오발로 2살짜리 아이와 요리사를 죽인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성과도 전혀 없는 민망한 수준이었다.[57] 참고로 1991~2002년에 북한의 항공사 고려항공평양-나고야를 잇는 전세 노선을 운항하기도 했다.[58] 고등학교까지를 일본에서 살았고,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정황상 재일교포 북송의 피해자로 보인다.[59] 그 가이드는 뒤이어 "더 넓은 의미로 포착해 조선에 침입 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적 외국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혁명투쟁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1866년의 샤먼호 사건이나 1875년의 강화도 사건 등에까지 빠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운요호 사건을 모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막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아무 근거도 없는 북한의 허위 날조이며, 무엇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고작 만 18세의 새파란 소년이었다.[60] 그 일본인의 말로는 전술한 발언이 "안중근은 김일성 주석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그런 일을 한 바보이기에 (한일병합을 막는 데에) 실패했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 같았다고 한다.[61] 실제 역사 속에서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북한에서는 '태화관에서 먹자판, 놀자판만 벌이고 조선총독부에 스스로 투항한 매국노'로 간주된다.[62] 애초에 3.1 운동 당시에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수백만 규모의 전국적 시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63] 북한에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이 말소되었다는 것의 일례로, 북한에서 신채호를 소개할 때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가담하고 조선혁명선언을 썼다는 것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64] 김정일은 1984년 6월에 자기 이름이 소련식 '유라'로 학적부에 등재된 모교를 손수 지시를 내려 폐교했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백두산 밀영'이 북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날조란 것을 어느 정도는 의식한 모양인지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은 호적이 아니라 백두산의 잎갈나무들의 구호로만 기록되었고 장군님의 존함과 생년월일은 출생증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새겨지게 됐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바가 있고, 심지어 김정일은 '생가'를 방문해도 기념사진을 단 1장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북한은 이것도 '우리 '장군님'께서 오로지 우리 인민들을 위해 사셨다는 증거'로 포장한다. 출처[65] 그리고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아예 출생지 성역화도 없으며, 심지어 북한은 대내적으로도 김정은의 출생지를 그다지 알리지 않는데, 이는 김정은은 김정일이 몰래 동거하던 재일동포 고용희의 차남이었기에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김정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한다.[66] 대신 기내 안내방송에 이들을 찬양하는 프로파간다가 들어간다.[67] 그러나 북한 못지않게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유일한 항공사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의 기내에는 최근까지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초상화를 걸어야만 했다.[68] 이는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를 북한 사회인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69]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지는데, 1984년경에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온 중국인 유학생들이 자신들이 그린 평양 풍경화를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걸린 기숙사 벽에 걸었다가 이를 본 북한인 동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다가 굴복하고 풍경화를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는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걸린 벽에서 그림을 내리도록 요구한 북한인 학생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70] 안드레이 란코프는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국인이 과속 딱지를 끊어도 처형될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으며, 북한에서도 이런 것은 '경미한 범죄'로 취급된다고 언급했다. # 사실 지도자 초상화에 먼지가 묻었다고 사람을 가두거나 죽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크메르 루주도 능가하는 집단이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인 만큼 북한도 어느 정도는 현실과 타협(?)한 셈이다.[71] 하필이면 빨간색인 이유는 빨간색을 '공산혁명의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72] 이를 위해 북한 주민들은 암시장을 돌아다니며 초상화에 뿌릴 향수를 구해야 했으며, 중국에 사는 동포들이 향수를 북한에 수출하여 이득을 본 경우도 있었다.[73] 화강석 단까지 한꺼번에 대피시킬 수 있다고 한다.[74] 중학생 때부터 한 민족이지만 너무나 다른 길로 간 남북한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2011년 남한으로 이주한 후 2017년 서울대학교에서 북한 군대의 사회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 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75] 하다못해 그 일제마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후 그들의 일가족들을 감시할지언정 '불령선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인 셈이다. 사실 북한의 인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제강점기를 몸소 겪은 노인들 중에서는 "차라리 왜정 시기가 낫다"라고까지 하는 경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북한/인권 항목 참조.[76] 그나마 초상화를 건지면서 아내의 목숨도 똑같이 건지라고 했던 것이기에 다른 사례들보다는 훨씬 나은(?) 셈이다.[77] 연구에 따르면 이런 의무는 일제의 천황 숭배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일본 제국 시기의 일본에 판박이 수준으로 똑같은 예가 존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78] 다만 정확히는 양손으로 둘 다 잡고 있었는데, 거센 물살 때문에 딸의 손을 놓치면서도 초상화만큼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딸보다 초상화를 더 꽉 잡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참고자료] #1 #2 #3 #4 #[79] 그 교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명의 목숨을 미필적 고의로 앗아간 것이 아닌,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80] 아마 전술한 인원 중 3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다.[81] 그런데 이 정도면 북한의 우상화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스케일이 작은 편이다.[82] 옆에 있는 김정일 초상화는 김일성 집권기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라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등극한 직후인 1997년 10월 9일에 공개된 초상화다. #[83] 즉, 북한 국민들이 향수를 뿌려야 했던 초상화가 바로 이것이다.(...) 여담으로 링크에 건 사진은 1968년 4월 15일 김일성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해 만든 우표이다. 출처[84] 전문가들의 의견은 정면 사진은 죽은 사람의 초상 사진처럼 보이기에 재제작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은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정면이 아닌 비껴선 자세여서 김일성도 신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면 주체사상에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스며들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셈이다.[85] 이 초상화는 1960년대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86] 이 중 전신 동상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으로만 72개 정도고, 나머지는 흉상이나 석고상이라고 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겠지만.[87] 가격 대비 퀄리티가 훌륭해서 아프리카 이곳 저곳에서 동상 제작 수주를 받아 외화를 벌어들였을 정도다. 2022년 7월 30일에도 북한의 만수대창작사가 베냉 코토누에 30m 높이의 여군인상을 만든 것이 알려지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88] 기단 3m+본체 20m[89] 대략적으로 환산하면 무려 29억 2천만 원의 금이 들어간 셈이다.[90] 또는 금박을 그대로 두고 동색을 칠했다는 말도 있다.[91] 한반도의 야간 위성지도를 보면 밝은 빛이 빽빽하게 들어찬 남한과는 정반대로 북한은 평양 외에는 희미한 점들만 보이는 거의 섬나라처럼 보일 정도이며, 그나마 평양의 불빛도 인구가 평양의 1/10 정도인 춘천만도 못하다.[92] 원인은 전력난 때문에 비상용 발전기 5대가 모두 가동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부국장은 평소에 발전기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보안부 청사 내 동상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7개로 늘었다고 한다.[93] 이 지역 출신인 '김제원'이라는 농민이 소군정 하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배받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여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바쳤다는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94] 여긴 심지어 김일성이 "조선 왕조의 흥업을 바란다"라는 뜻이라는 이유로 바꾸었다.[95] 의외로 북한은 '김일성시'라는 도시는 없다.[96] 1970년대 초부터 이랬다고 한다. 사실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원조이다.[97] 이걸 처음에는 국제 유니코드에 등록을 신청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때문에 외국 프로그램으로 북한 논문 등을 열어보면 pdf가 아닌 이상 지도자 이름이 □□□의 형태로 깨져서 보이지가 않는다.[98] 2023년 4월 14일, 영어권 기자들이 만든 북한 전문 매체 NKNews는 조선의 오늘에서 '김주애'의 동명이인들을 검열해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99] 2021년 현재 함경남도당위원회 책임비서가 김성일이며, 군정지도부장이 오일정이다. 또한 은정이라는 이름도 북한에서 여자 이름으로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멀리 갈 것 없이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기계체조 여자 도마 금메달리스트가 다름아닌 북한의 홍은정이며, 비록 지역 이름이긴 하나 평양에도 은정구역이 있다. 그 외에도 북한에서 지도자의 '은정'을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100] 애초에 이들은 고난의 행군 이후 '장마당세대'로 태어난 세대라 당의 신격화 선전이 먹힐 리가 만무하다.[101] 북한 주민들도 이런 책들을 훼손하는 것이 처벌을 받는 '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책 한 권을 모두 태워버리며 증거(?)를 인멸하기에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한다.[102] 사실 장마당에서 책을 파는 장사꾼들도 실용적인 책들을 선호하지, 김일성 부자 초상화가 들어간 책은 절대 사지 않는다고 한다.[103] 김일성 부자의 노작과 문헌까지 뜯어 화장실 휴지로 사용해 초상화만 남고 너덜너덜 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검열로 적발되면 반동분자로 몰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각해 버린다고 한다. 초상화를 남겼다는 것은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휴지로 썼다가 당할 후환이 어마어마한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예감케 해준다.[104] 人民班, 북한 행정 조직의 가장 작은 단위로, 20~40가구 정도로 구성되며, 한국으로 치면 동, 반과 유사하다. 양육문제, 청소 노력동원, 공공질서 유지 등 해당 거주지역 내의 현안들을 담당한다.[105] 북한에서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와 김일성의 탄생이 동시에 일어난 1912년 4월 15일에 대해 '('자본주의의 상징'이 침몰하며) 서방세력의 몰락을 알리고 ('인류의 태양'이 떠오르며) 동방세력의 부상을 알리는 길조' ''위인'의 탄생은 충격적 사건을 동반한다' 등 소름끼치는 고인모독 발언을 태연하게 하고 있다.[106] 다만 권력과 물질적인 이해 관계에 의해 정치적인 상류층 중에서는 아직 이 우상화를 진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기는 하다. 일반 인민을 이렇게 착취하여 그 대가로 김정은에게 월급으로 비유되는 것을 '성과'에 따라 타는 개념이다.[107] 하다못해 김정은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 2009년부터 북한에서 '발걸음'과 같은 김정은 찬양가를 유행시키거나 '청년대장'이라는 말을 쓰는 강연회 등을 많이 열게 했는데, 김주애에 대해서는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108] 김정은이 손수 전국의 청년들에게 "강성국가건설의 어려운 부문에서 혁신을 창조한 청년들의 성과를 축하하면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전시를 의미)에 직면한다면 전 세대(항일빨치산과 6.25참전세대)의 정신세계를 본받아 조국수호전에 나서라"는 축하문(?)을 보낼 정도였으면, 김정은이 직접 이런 행위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09] 사족으로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빨치산 회상기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정신질환 환자들과 아편 중독자까지 낫게 해준다고 한다.(...) #[110] 해방 전 김일성이 화약제조법을 창안해 제조했다는 폭탄을 일컫는 북한말이다.[111] 다만 현 북한의 우상화 방침을 보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활동이 민중들에겐 마치 축지법처럼 느껴졌다'는 비유적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