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칭호 표기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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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1.1. 현황
2. 쟁점
2.1. '천황'과 '일왕'의 격에 관한 문제
2.1.1. 일본 역사에서의 '천황'에 대한 '왕' 칭호 사용
2.2.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2.2.1. 일본의 식민지 지배 과거사와 관련하여
2.2.2. 구 추축국 일본의 과거사와 '천황' 인식에 대하여
2.3. 언론의 방송 보도상 용어로써의 '일왕'과 관련하여
2.3.1. 영문 기사의 'Emperor' 번역에 관련하여
2.3.2. 일본 황실 궁중용어 표기에 관련하여
2.3.3. 중국의 한국 '총통' 표기와 비교하여
2.3.4. 민주 공화정의 시민으로서의 '천황' 인식에 관련하여
2.3.5. '천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언론 보도에 관련하여
3. 결론
4. 보론(補論): 학술 용어로서의 '천황' 사용에 대하여


1. 개요[편집]


'\[팩트체크\] "우리도 일본 천황이라 부르는 게 원칙"? 따져보니'
JTBC 뉴스룸 2019. 8. 21. 보도


일본의 군주인 천황칭호를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대한민국 내의 정치, 언론 및 사회적 쟁점과 사례를 다루는 문서.


1.1. 현황[편집]


본 항목을 읽기에 앞서 천황 항목의 한국과의 관계를 한 번 읽고 오는 것을 권한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 표기는 '천황'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도 일본의 덴노를 천황이라고 불렀고,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한동안은 '일왕' 등이 사용되었으나,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1]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1945년 01월 01일 ~1999년 12월 31일까지 데이터베이스로 검색해 보면 수치만 가지고 볼 때 일왕(日王)이 1778건, 천황은 1,500건, 일황(日皇)은 762건, '왜황'은 22건이며, '일왕'이라는 칭호는 1988년을 전후해 갑작스럽게 그 빈도가 높아진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표기해 부르고 있다.(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2. 쟁점[편집]



2.1. '천황'과 '일왕'의 격에 관한 문제[편집]


일왕이란 표현은 일종의 신문 용어다. 1980년대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과 재일동포 지문날인 강요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천황을 격하시켜 일왕으로 표기했다. 대통령은 천황이라 부르는데 신문과 방송은 꼬박꼬박 일왕으로 바꾸어 쓴 게 2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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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2008년 4월 24일자 오피니언 '일왕과 천황'에서#


본보 역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한다. 예외적으로 직접 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이라고 돼 있거나 ‘천황제’를 설명할 때만 천황으로 쓴다. 그러나 ‘큰 나라 미국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작은 나라 한국도 대통령인 게 말이 되느냐’며 일본의 극우 언론이 한국은 ‘소통령’이라고 한다면…. 불쾌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도 ‘천황’을 일왕으로 낮춰 부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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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2]


한국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천황에 대해서는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심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 즉 문자 그대로 한자를 뜻풀이해 '하늘의 황제'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어서 거부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에서 비롯된 황제 칭호가 '왕중왕'의 의미나 '신의 대리자', 하늘의 아들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황은 대리자도 아닌 아예 '하늘의 황제' 그 자체라는 뜻의 칭호에서부터 너무 과장이 심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황제는 영토가 넓은 나라의 군주의 이미지가 있으며, 민족주의적 감정과 더불어 일본이 매우 넓은 영토를 갖는 나라는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천황을 '황제'라 인식하지 않는 편이다. 그 밖에도 미디어물, 영화, 게임 등에서 큰 영토를 가지고 수많은 민족, 문화를 아우르는 국가의 수장에 대해선 대부분 '황제'라고 칭한 것 또한 이러한 호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높였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영화, 게임 등에서 등장하는 황제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는 방법 등으로 드넒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의 출신들이고 이러한 미디어물 게임 속의 황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보기엔 천황과 이를 떠받드는 일본에 대해 나라도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 황제를 칭하는 자뻑질로 보인다는 것이다.[3]

아울러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왕' 즉 '일본 국왕' 표기가 한국인의 편협한 민족주의와 과거사 컴플렉스의 발로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논리는 황제를 왕이라 부르는 것이 일종의 '격하'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왕이라는 호칭에 천자로부터 분봉되는 제후왕으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독립국 군주로서의 왕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천황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감정적인 비하이고 격하이며 왕은 비하하는 호칭이라고 한다면 다른 국가의 '왕'이라고 불리는 군주들도 똑같이 '황제'라고 높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조건 비하니까 말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왕'이라는 호칭이 비칭이고 격하라고 주장하며 '천황' 호칭을 내세우는 논자들은 일본 천황만을 '천황'이라고 부르며 띄워 주고 그 외의 국가들은 모두 '왕'이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것이 된다.

일단 실제 역사는 게임과 미디어물과 다르게 황제/왕 칭호를 쓰는 것은 단순한 영토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은 말기에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겨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 남부의 몇몇 공국들을 가진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했으나, 황제(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라는 직함만큼은 유럽 세계에서 엄연히 유지되었고, 이는 왕도 마찬가지여서 대영 제국처럼 소국으로 출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주변 여러 민족을 복속시킨 뒤에도 황제라고 칭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왕(King) 칭호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천황/일왕 표기에 관련한 논점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례로 가져다 "동로마도 영토가 줄었지만 황제 직함은 유지했는데 일본은 왜 천황이 아니라 일왕으로 부르느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비교 대상 자체를 잘못 가져온 억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동로마 즉 로마가 구미권에서는 '세계' 그 자체였고[4] 그 로마의 황제가 곧 세계의 황제로 간주되었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3세기에 야마토 왕권이 수립되고 그 통합된 왕권의 수장인 히미코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이래 1,700년의 세월 속에서 일본 왕 즉 덴노는 단 한 번도 동남,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그저 변방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5]

또한 황제/왕 칭호가 영토 크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지, 황제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동양만큼은 아니어도 서양에서도 엄연히 명분상 자격 요건이 존재했다. 그것은 동양에서는 '천명(天命)'이라고도 하고 '대의명분'이라고도, '정통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아무 나라나 너도 나도 황제를 자칭하면서 의미가 바래서 그렇지, 서양에서도 '황제'는 세계에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황제' 칭호 사용에 있어서는 '로마 제국의 후계자' 또는 '교회로부터의 인정'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으며, 이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대개는 앞에서 언급한 대영 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한 것처럼[6] 자칭 내지 참칭 취급을 당했다. [7] 유럽의 이러한 '황제' 자격 요건은 유럽 안에서 엄격하게 적용되었고, 때문에 영토에 상관없이 애초에 '로마 황제'로서 로마 그 자체에다 기독교 교회의 인정까지 두루 갖춘 '정통 of 정통' 황제였던 동로마는 영토가 줄어들든 말든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유럽에서 '황제'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이라는 그들의 문명권 바깥으로 넘어가면 오스만 튀르크술탄이나 러시아짜르[8] 또는 중국의 천자처럼 "황제? 그러든지 말든지..." 정도로 치고 넘어갔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구미권에서 일본 천황을 직역해서 'Emperor of Heaven'이 아닌 'Japanese Emperor'라고 번역하는 것에는 이러한 '유럽'과 '유럽 외부 세계'에 대한 구미권의 인식도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아무리 자국의 덴노를 Emperor라 부르며 구미권을 향해 Emperor라 불러 달라고 떠들어 봐야, 유럽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덴노나 그냥 유럽 안에서 힘 좀 있다고 으스대는 고만고만한 '왕'(또는 '자칭 황제')들과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유럽이라는 자신들의 문명 세계에 속하지 않은 '제3세계'의 장외적인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외왕내제. 어차피 유럽 세계의 관점에서는 Japanese Emperor라고 부를 때에 유럽의 역사에서와 같은 Emperor[9]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근세 유럽의 '황제'를 자처했던 고만고만한 국가들과 같은 참칭 정도로 간주되는데, '일본 왕'이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황제라는 단어만큼이나 '왕'이라는 단어 역시 충분히 오해를 사고 있는 단어인데, 왕은 흔히 황제보다 아래이며 황제에게 분봉된 제후왕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애초에 황제라는 용어가 진시황에 의해 등장하기 전에 황제 즉 '천자'는 왕이었다. 중국의 경우 여러 농민반란의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유명한 진승의 경우에도 세력을 갖춘 뒤에 스스로를 초왕(楚王)이라고 칭했고, 항우가 진 왕조를 부정하고 초나라의 후손인 의제를 옹립해 부활을 선언할 초기에도 의제는 '왕'으로 초 회왕(楚懷王)이라 불렸으며, 항우나 유방도 이후 회왕이 '의제'가 된 뒤에 봉해진 제후왕의 한 명이었다. 패자(覇者)처럼 강제적인 무력(폭력)을 포함한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해서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성격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을 포함한 '덕망'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하는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왕자(王者)라는 개념어에 담긴 의미가 한대 이후 중국 사회에서 2천 년 넘게 위상을 누렸던 유교의 지위만큼이나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엄연히 통용되었던 정치, 사회 이념이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관념어를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맹자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고는 해도[10] 엄연히 중앙인 교토의 구게들은 공자나 맹자 등 유교 경전을 주요 소양으로 익혔을 뿐 아니라[11] 유교의 왕자와 비슷하게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상인 전륜성왕의 존재도 있었으므로[12] 일본의 천황 역시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금륜왕'으로 여겨져 '왕'이나 '왕법'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개념어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적 군주와 관련해서는 십선지왕(十善之王) 또는 십선지군(十善之君)이라는 말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십선(十善) 즉 열 가지 선행을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국왕을 달리 불러서 '십선지군' 또는 '십선지왕'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천황가를 소개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는 일본의 황실입니다"(世界最古の王家は日本の皇室)라고 쓴다면, 이 문장에서 일본의 황실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도 비하나 격하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사적으로 이 문장에서 '왕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군주의 일가'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고 '왕'이 천황 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군주국의 헌법상 수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왕'이라는 말도 '영국 왕'이나 '태국 왕'과 마찬가지로 군주국의 헌법상 수장이라는 의미로 보다 중립적인 인식을 위한 '거리두기' 표현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기에 마냥 비하라고 보긴 어렵다. 중립적인 인식을 위한 거리두기에 대해서는 후술.


2.1.1. 일본 역사에서의 '천황'에 대한 '왕' 칭호 사용[편집]


또한 일본 국왕이라는 칭호가 무조건적인 비하이고 격하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이 이미 전근대, 그것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도 일본에서도 천황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왕'이 함께 쓰였다는 점이다. 중국 제도를 복붙해서 천황이라는 칭호를 도입한[13] 그 이후에도 자국의 군주를 가리킬 때에 '왕'이라는 말도 같이 사용하였으며 '일본국왕'이라고 하면 엄연히 교토에 머무는 덴노(천황)여야 한다는 인식이 전근대까지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 자국 내에서 자국의 군주를 높이는 칭호로서 '왕'이 사용되었다면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조건적인 격하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우선 헤이안 시대에 천황이 거주하는 수도 헤이안쿄 즉 지금의 교토는 '왕성(王城)' 즉 '왕이 머무는 성'[14]이라고도 불렸다. 헤이안 시대에 헤이안쿄의 동북쪽 히에이 산에 세워진 사찰 도지(東寺)는 '왕성진호(王城鎮護)'의 역할이 맡겨져 있었고#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헤이케의 무장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教経)[15]는 당시 왕성 제일의 강궁 정병(王城一の強弓精兵)이라고 불렸다.

또한 일본의 고전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나 「태평기(太平記)」, 공식 법령집 「다이호령」(大宝令)이나 「요로령」(養老令), 구게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나 「신황정통기」(神皇正統紀), 그리고 「쇼토쿠 태자 전력」(聖徳太子伝暦) 등, 일본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기록들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夫王家之為王家, 在佛法之擁護, 佛法之為佛法, 任王家之歸依. 又云佛云神, 保護天下, 其誓是同, 譬猶牛二角, 鳥之雙翅而已.

무릇 왕가가 왕가임은 불법(佛法)의 보우하심 때문이요, 불법이 불법임은 왕가가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또한 '부처'니 '신'이니 하지만 천하를 보호하리라 하신 그 맹서는 다 같았으니, 비유하면 소의 두 뿔이요, 새의 두 날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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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유문』(平安遺文) 3837호 문서 「지쇼 2년 6월 기이 국 대전법원 중도해안」(治承二年六月紀伊国大伝法院衆徒解案)


九州之地者, 一人之有也、王命之外、何施私威.

구주[16]

땅은 한 사람의 것이라. 왕명 이외에[17] 그 누가 사사로이 위엄을 부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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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겐(保元) 원년(1156년) 윤9월 18일(양력 11월 2일)에 발호된 이른바 '호겐 신제' 7개조의 제1조 첫머리에서


"저는 왕실을 위하여 생각하고 있으니, 임금(君)에게 변이 생기면, 그것을 사심없이 제 일처럼 여깁니다. 이는 스케노하치로 히로쓰네[18]

를 죽인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히로쓰네는 도고쿠의 유력자로 요리토모가 거병하여 임금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히로쓰네를 아군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히로쓰네는 공적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도대체 요리토모 그놈은 무슨 까닭으로 왕실만을 그리 볼썽사납게 챙기는가? 그냥 반도(坂東)에서 지내면 될 것을 누가 멋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운운하며 모반할 마음을 품었던 자입니다. 이런 자를 노토(가신)로 둔다면 요리토모까지도 신불의 가호를 잃게 될 것이라 여겨 죽여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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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인에게, 구칸쇼(愚管抄)


국왕은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일본국에서는 국왕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神代) 이후로 정한 관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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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慈圓)[19]

저 구칸쇼[20] 제7권


その先祖を尋ぬれば桓武天皇第五の皇子、一品式部卿葛原親王九代の後胤、讃岐守正盛が孫、刑部卿忠盛朝臣の嫡男なり。かの親王の御子、高見王、無官無位にして失せ給ひぬ。その御子、高望王の時、初めて平の姓を賜はつて、上総介に成り給ひしより、たちまちに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その子鎮守府将軍良望、後には國香と改む。國香より正盛に至る六代は、諸国の受領たりしかども、殿上の仙籍をば未だ赦されず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9대(代)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 마사모리(正盛)의 손자요, 형부경(刑部卿) 다다모리(忠盛) 아손(朝臣)의 적남(嫡男)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 하여 세상을 떠나셨더라.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21]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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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同廿日、法皇の宣命にて、四宮、閑院殿にて位につかせ給ふ。摂政はもとの摂政近衛殿かはらせ給はず。頭や蔵人なしおきて、人々退出せられけり。三宮(さんのみや)の御(おん)めのと泣きかなしみ、後悔すれども甲斐ぞなき。「天に二つの日なし、国に二人の王なし」と申せども、平家の悪行によッてこそ、京田舎に二人の王はましましけれ。

[22]

20일, 법황의 선명으로 시노미야(四の宮)가 간인도노(閑院殿)에서 즉위하시게 되었다. 셋쇼(摂政)는 옛 셋쇼인 고노에 님(近衛殿)으로 변함이 없었다. 토(頭)[23]나 구란도를 임명함에 있어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산노미야(三の宮)의 유모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시고 후회하셨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24] 하였거늘, 헤이케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교토와 시골에 두 사람의 왕이 계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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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이야기 권8 나토라(名虎)#[25]


天下将乱時、妖霊星と云悪星下て災を成すといへり。而も天王寺は是仏法最初の霊地にて、聖徳太子自日本一州の未来記を留給へり。されば彼媚者が天王寺の妖霊星と歌ひけるこそ怪しけれ。如何様天王寺辺より天下の動乱出来て、国家敗亡しぬと覚ゆ。哀国主徳を治め、武家仁を施して消妖謀を被致よかし。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때, 요령성(妖霊星)[26]

이라 하는 악성이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다 하였다. 더구나 덴노지(天王寺)는 바로 불법이 처음 일어난 영험한 땅인데, 쇼토쿠 태자께서 몸소 일본 한 주의 미래기(未来記)[27]를 남기셨다. 그렇다 하면 그 미혹하는 자가 '덴노지의 요령성'이라 노래한 것도 괴이한 일이다. 실로 덴노지 주변으로부터 천하의 동란이 일어나 국가가 패망할 것을 깨우치려 함이다. 이제 국주(国主)[28]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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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나카노리(藤原仲範)의 발언, 《태평기》 권5 '사가미 뉴도가 덴가쿠와 투견에 빠진 일(相摸入道弄田楽並闘犬事)' 중에서[29]


王家之恥, 何事如之哉? 天下静謐, 尤雖可悦, 一朝之恥辱, 又不可不歎

왕가의 수치가 어디 이와 같은 것이 있으랴? 천하가 평온해짐이야 매우 기쁜 일이라 하나, 하루 아침의 치욕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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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겐코 원년(1331년) 별기 10월 1일조[30]


우리 나라는 왕종(王種)이 바뀐 적은 없지만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치세의 연수가 짧아지고 (황위가) 직계로 전해지지 않는 예를 여러 곳에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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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31]

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중권, 제52대/제29세 사가 덴노


왕위를 떠나 석문(釈門)에 들어간 예는 지금까지도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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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중권, 제59대/제34세 우다 덴노


호겐, 헤이지의 난 이래로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무용(武用)이 중시되고 왕위(王位)가 경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태평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명분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이 문란해진 탓이리라. 헤이지의 난 이후 잠시 정국이 진정되었지만, 천황과 상황의 사이가 나빠졌다. 니조 천황의 외삼촌인 다이나곤 쓰네무네【훗날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대신, 대장까지 되었다.】와 천황의 유모의 아들인 벳토 고레카타 등이 고시라카와 상황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상황은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이들을 체포하고 유배보내 버렸다. 이후 기요모리는 천하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고 이윽고 다이조다이진이 되었다. 그 자식들도 대신, 대장이 되었으며 게다가 형제까지 나란히 좌우에서 대장에 올랐다.【니조인 치세에 있었던 사항뿐 아니라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도 여기에 다 같이 기술하였다.】 천하의 구니의 절반 이상이나 헤이케 가령으로 만들고 많은 관위를 일족과 그 가신들이 독점하니, 왕가의 권위는 없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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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제78대 니조인(順徳院)[32]


요리토모는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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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폐제(廃帝)[33]


메이지 유신 직전의 근세인 에도 막부만 놓고 보더라도 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에는 승정(僧正)의 임명 규정을 정하는 14조에 「국왕」(国王)이라는 문언(文言)이 보이는데,

僧正【大、正、權】、門跡院家可守先例。至平民者、器用卓抜之仁希有雖任之、可爲准僧正也。但、國王大臣之師範者各別事。

승정(僧正)【대(大)、정(正)、권(權)】과 몬제키(門跡), 인케(院家)는 선례를 지킴이 가하다. 평민에 이르는 자까지 그 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질 만큼 인하여 찾아 보기 드문 자로 임명하되 승정에 준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다만 국왕 대신의 사범(師範) 되는 자는 별개의 일로 한다.


18세기 후반에 성립된 금중병공가제법도의 주석서 『게이초 공가제법도 주석 전』(慶長公家諸法度註釈全)에는 국왕이란 「천자(天子, 즉 천황) ・ 쇼군」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1617년에 막부의 자문을 맡았던 승려 이신 스덴(以心崇伝)[34]은 조선에서 보내 온 국서에 도쿠가와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 미나모토 아무개」(日本国源某)로 칭하고 「왕」을 쓰지 않았는데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권역인 조선의 입장에서 보아 일본의 왕은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책봉을 받은 왕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왕(이 경우는 천황)과 조선의 왕은 국서의 교환을 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35] 여기서 왕은 대중국 관계에서 조공-책봉의 형태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중국 입장에서 보아) 제후왕을 의미하는 왕이 아니라 군주국의 주권을 가진 통치자를 가리키는 의미로써의 왕으로 쓰였으며, 일본에서도 천황을 가리켜 왕으로, 즉 제후왕으로써의 왕이 아니라 '한 독립된 주권국가의 군주로서의 왕으로 보는 인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일본 학계에서도 전근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고 부른 전례를 이미 당대의 기록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36] 여기에서 쓰인 왕은 엄연히 중국의 책봉을 받은 조공국 군주로서의 왕이 아니라 당당한 독립국의 군주로서의 왕이었다. 일본 천황의 계보를 설명하는 저술도 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처럼 황(皇)자를 써서 제목을 붙인 책도 있는가 하면,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林鵞峰)의 일본왕대일람(日本王代一覧, 1634년)처럼 왕(王)자를 사용한 책도 존재한다.

에도 시대 중기에 아라이 하쿠세키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있었던 논쟁도 주목할 만한데, 대조선 외교에 있어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대군에서 일본국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에 대해 쓰시마 후추 번의 아메노모리 호슈는 '왕'이라는 단어에 가즈사나 히타치 같은 지역이나 방위[37] 명칭을 붙인다면 가즈사의 왕 또는 동쪽의 왕 식으로 그 지역에서나 행세하는 자칭 왕으로 허용해 줄 수 있지만,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일본의 왕'이라는 뜻이 되어[38]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며 하쿠세키가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하쿠세키는 쇼군이 대조선 외교에서 칭하는 '일본국대군'이라는 칭호에서 '대군'은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39]를 부르는 말인데 일본의 쇼군이 그럼 조선 국왕의 아들이란 소리냐며 엄연히 일본국왕으로 불러서 조선국왕과 격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도 왕은 제후국의 군주라는 해석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아메노모리 호슈는 막부의 쇼군은 엄연히 일본이라는 '왕국'의 정당한 주권자인 천황 즉 '왕'으로부터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무력으로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며 일본에서 '일본국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엄연히 교토의 천황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일본에서도 '일본국왕=천황'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쿠세키 실각 뒤에 다시 '일본국대군'으로 칭호가 돌아갔으며[40] 이후 일본국대군은 일본의 개항 이후에까지도 쇼군의 칭호로 쓰였다. 그리고 막부가 사라진 뒤에는 비공식적으로 덴노를 가리키는 칭호로도 '일본국 대군'이 사용된다.

또한 미토학에서 비롯되어 막부 말기 서양 세력에 맞서 천황을 일본의 '국부'로까지 격상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해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의 대표적 슬로건이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역시 '존왕(尊王)'의 대상 즉 왕을 '일본의 천황'으로 지목하였다. 존왕양이는 이후 글자 하나만 바꾸어 존황양이(尊皇攘夷)로 바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왕'이라는 단어나 왕이라는 단어 안에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의미가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에도 막부 말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행한 뒤에 메이지 천황게이오 3년(1868년) 1월 3일 에도 막부와 기존의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삼직(三職)[41]의 설치로 천황이 중심이 되는 새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선언 역시 황정복고(皇政復古)나 제정복고(帝政復古)가 아니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었다.#

이상을 통해 이미 일본 자국에서도 천황을, 심지어 천황 본인마저도(!) '왕'이라고 부른 전례가 몇 번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덴노의 자리와 그 일족, 나아가 덴노 자체를 가리켜 '왕' 혹은 '왕가', '왕위'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을 격하나 비하라고는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천황'/'황'이라는 말은 굳이 '국왕/왕'과 구별되어 어느 쪽이 격이 더 높거나 낮다는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며 평상시에 어느 한쪽만 쓰거나 어느 한쪽은 불경하다고 쓰지 않거나 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일본 중세만 한정하더라도 일본이라는 왕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가 특별히 '천황'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천황을 가리켜 '국왕', '미카도(帝)', '슈조(主上)' 등을 써서 불러도 문제가 없었다. '국왕'은 현실에 존재하는 직위로써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드러내는 말이었고, 그 사람에 대해 위엄을 더하는 표현법으로써 '천황'이라는 말이 쓰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금중병공가제법도' 및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보아도 그러한 인식은 근세,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도 별 변화가 없었다.

2.2.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하여[편집]



2.2.1. 일본의 식민지 지배 과거사와 관련하여[편집]


한일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을사늑약경술국치로 시작해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에 걸친 한국의 일제 식민 통치 시기와 그 식민 통치 시기를 전후해 벌어졌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그로 인해 야기된 각종 사회적, 경제적[42] 그리고 문화적 마찰과 탄압에 관한 문제들이다. 한국 외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국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동남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난징대학살로 대표되는 중국이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을 잃었던 미국, 심지어 한때는 일본과 유일하게 교류하는 구미 국가였던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다.[43]

천황 표기를 지지하며 '일왕’ 표기는 단순히 격하이고 폄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한국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나라들도 많은데 그들은 '일본 황제(천황)'를 '왕' 이라고 격하해 부르지 않는다며 '러시아 황제'니 '독일 황제' 같은 표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쓰면서 일본 황제만은 부득부득 '일왕'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알량한 자격지심과 민족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한다.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도 수많은 잔학 행위와 해악을 저질렀는데[44] '일본 제국주의는 해악을 저질렀으므로 그 상징을 천황이라 부를 수 없다'고 한다면, 러시아 황제(차르) 또한 노왕으로, 독일 황제(카이저) 또한 독왕으로 격하해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지이다.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한국 대통령을 소통령(…)이라고 억지로 비하하지는 않지 않느냐, 그러면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당태종도 수양 또는 당태으로 불러야 하는 거냐는 매일경제 노원명 기자 같은 논자도 있다. #

일단 영국 제국주의는 혐성국 밈이 부각될 만큼 충분히 잔혹하였으며, 벨기에는 '손목국' 이라는 멸칭이 나올 정도로 레오폴드 2세콩고 자유국 내 잔학 행위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였는데 영국 왕은 영국 공작으로, 벨기에 왕은 벨기에 공작으로[45] 격하해 부를 것이냐, 미국은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냉전 시기에는 반공을 목표로 독재 정권을 쿠데타로 만들도록 후원했다. 그럼 미국 대통령은 소통령으로 격하할 것이냐, 중화인민공화국티베트, 위구르, 홍콩 등에서 압제를 벌이고 있으니 '중국 주석'은 '말석'으로 격하해 부를 것이냐, 독재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대통령은 어떻게 할 거냐 등 별의 별 문제를 제기하며 이런 이들도 있는데 왜 일본 천황만 집어서 일왕으로 격하해서 부르느냐, 그러면서 교황의 원어는 Papa이고 군주 또는 황제라는 의미 자체가 전혀 없는데 한국인들은 Papa를 '황제'로 격상(?)시키는 건 웃긴 일 아니냐며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왕' 표기는 한국인들의 '몰지각'한 컴플렉스이고 과거사 열등감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지나치게 비판을 위한 비판이고 끌어오기이며,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것은 천황 비하를 위한 감정적인 표현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논점 이탈의 오류일 뿐이다. 영국이나 벨기에가 일본 정도로 무리하게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얽힌 과거사를 미화하거나 감추기, 덮어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미국은 자국 건국 직후부터의 서부 개척 과정에서 1억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수많은 흑인 노예를 혹사시키면서 농장을 경영했으며 근현대까지 인종차별이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자국 내에서 자행되었다는 것과, 자국이 제3세계에서 벌인 외교적 실책들을 일본 정도로 숨기거나 왜곡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놓고 대중에 공개하고 가르치며 이에 대한 학계와 언론, 대중의 대정부 비판도 버젓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교황 역시도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몇 명의 교황이 대를 물려가며 "과거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많은 범죄들에 대해 사죄한다"는 목소리를 냈다.[46] 이러한 나라들을 들먹이면서 일본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건 비하 표현이라고 열을 올리는 것은 근거를 잘못 끌어와 무리하게 일대일로 대비시켜 빗대려는 논리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국가의 사례를 끌어다 천황/일왕 비하 표현을 운운하기 전에 이들 국가가 자행한 범죄에 대해서 각국이 표면적으로라도 어떤 조처를 했고 일본과는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분석이 일절 빠져 있는 것은 물론, 그 나라들과 피식민지국 사이의 관계가 한일관계 설명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21세기 현재 유럽의 군주정 국가 가운데 자국 군주를 '황제'라고 칭하는 나라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 왕이라는 존재가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격하로 볼 수는 없고, 그런 점에서 소통령 운운하는 예시를 들고 나와서 천황 표기를 주장하고 일왕 표기를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교 대상도 예시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11년공화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황제 제도 자체를 없애 버리고 황제라는 단어나 그 개념이 말 그대로 역사 속의 유물이 되어버린 나라와 서구식 근대화를 거쳐 근대 국가로 도약한 이후에도 엄연히 그 용어 및 개념, 관련 제도가 온존할 뿐 아니라 그걸 앞세워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불법 침략과 강제 병합을 벌인 과거사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나라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 같은 표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쓰면서 일본 황제만은 부득부득 '일왕' 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알량한 자격지심과 민족적 감정에 불과하다는 일각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나 독일도 중국처럼 더 이상 '황제'는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역사 교과서 속 존재일 뿐이다.

물론 저들 국가들이 완벽하게 과거사 청산을 끝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 피지배국에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지불한 바 없으며,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알제리 식민지배에 프랑스의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보수 우파 세력에서 "대선 후보 자격 없다"고 반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벨기에는 2020년대까지 '위대한 망각' 이라고 콩고에서의 잔학행위를 '왕 개인 책임'이라고 떠넘기고 아무런 반성도, 교육도 없다가 2022년에야 유감은 표하되 배상은 않겠다고 하는 판국이다.

하지만 이 점을 가지고 "일본은 제국주의 청산을 '비교적' 잘 한 편에 속한다"[47]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저만큼도 안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천황이라는 칭호를 정당화할 근거도, 일본 국왕(일왕)이라는 칭호가 자격지심이니 열등감이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할 근거도 될 수 없다. "쟤들은 더했는데 왜 얘만 갖고 뭐라고 하냐"라는 전형적인 피장파장의 오류, 논점 이탈의 오류라는 얘기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마구 끌어다 한일관계를 설명하면서 일본을 '비교적 식민지배 청산을 잘했다'고 두둔하려고 봐야 부질없는 것이, 첫째로 한일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일대일로 매칭되기는 어려운 사례들을 가져와서 일대일로 매칭시켜 봐야 의미가 없다. 둘째로 한국과 일본의 일대일 관계에 있어서 한국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주체'로서 존재하는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식민 국가들, 그리고 벨기에와 콩고 양국간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최종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주도하고 결정할 책임은 그들 직접적 당사국에 있고, 한국은 그들의 문제와 관련해 어디까지나 제3자다. 세계적인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발언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원론적인 책임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그것을 위해 '어느 국가의 정부가 주도해서 타국에 외교적인 지지와 동조를 호소하고 촉구할 권리'와 '제3자의 입장에서 국가와 국가간 문제에 어떤 형태로든 실제적인 개입을 시도하려는 실력 행사'를 헷갈려서는 곤란하다.

또한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과거사에서 기인한 컴플렉스이고 열등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는 "우리는 이미 과거와 달리 21세기 중견강국이고 일본에 버금갈 만한 선진국으로 충분히 발돋움했기에 과거사 콤플렉스, 열등감에 얽매여 굳이 일본 천황을 '일왕'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승전국인데 무슨 배상금이 필요하냐"라는 호기 어린 한 마디로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 문제를 상큼하게 정리해 버린 마오쩌둥의 발언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피차 누가 승전국이고 누가 패전국이든, 누가 선진국이고 누가 후진국이고 간에 상관없이 사과는 사과고 배상은 배상인데, 이겼으니 보상이 필요없(또한 졌으니 보상해야 한다)다는 말과 이만큼 성장했는데 아직도 과거에 매여 찌질거리느냐는 핀잔은 '사과'와 '배상' 여부가 어떤 승패 여부와 관련이 있고 뭔가 그걸 받는 입장에서의 열등감 같은 걸 갖다 붙여서 열등감을 씻으려고 사과와 배상에 매달리는 거 아니냐고 보는 일본 우익의 논리와도 닿아 있고, 동시에 피해자에게 "아직도 옛날 일 가지고 속 좁게 꿍해 있냐", (배상 문제를 포기한 중국이나 대만의 경우를 들며) "너희만 식민지배 당했냐"며 비웃는 가해자의 논리와도 닿아 있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애초에 배상과 사과는 다른 문제로 배상이 제대로 된다고 해서 과거사에 대한 사과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말 백 번 양보해서 한국이 대한민국 제3공화국한일국교정상화 때처럼 대일 배상 청구권을 정부 차원에서 포기하고 그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정부 권력으로 찍어눌러서 덮어둔다고 한들, 일본 정부가 자신들이 저지른 제국주의 식민 모국, 전쟁 범죄 가해국으로서 피해국 및 그 피해 주민들에 대한 책임 인정이나 사과, 반성을 제대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대만이나 중국이 일본의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한 보상 문제를 "승전국이니 배상은 필요없다"고 자국 인민들의 여론은 무시한 채로 단칼에 무위로 돌렸음에도, 일본은 정부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거나[48]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20년 가까이 여전히 이어가 한국인의 감정을 대놓고 건드리며##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며 행사하는 우익 기업과 그 후원을 받는 이영훈, 존 마크 램지어 같은 어용 학자나 민간단체들이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이나[49] 난징대학살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왜곡, 부정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여론전을 벌여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과거 식민지 피해국은 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국 추축국이었던 미국의 심기까지[50] 벅벅 긁고 있는 판이다. 배상 여부를 떠나서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인정, 사과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이걸 마냥 친일적인 논자들의 주장처럼 '컴플렉스'니 '열등감'이니 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2.2.2. 구 추축국 일본의 과거사와 '천황' 인식에 대하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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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과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 식민지 지배의 가해국일 뿐 아니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책임이 존재하는 엄연한 구 추축국이다. 그리고 추축국 일본 제국 육해군의 최고 통수권자였던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은 현재 진행형으로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바로 지금의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쇼와 덴노)이다.

한국에서의 일왕 표기 등장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 총리 시기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에서는 천황/덴노로 표기했고 이에 대해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후 급격해진 일본의 우경화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항의 표시로 추정하는 식자도 있는데, 그 이전이라고 '일왕'이라고 표기한 기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51] 한국 언론에서 천황을 처음으로 '일왕'이라고 부른 것은 동아일보이다. [52][53]

앞에서 서울신문 황성기 논설위원이 말한,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른바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은 1981년에 처음 불거졌는데, 해당 기사가 한국에서 한창 보도중이던 1981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에서는 여전히 '일황'이라는 호칭이 버젓이 쓰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 천황을 가리켜 가장 많이 쓴 호칭 가운데 하나인 '일황'은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이 처음 한국에 보도된 1981년이나, 해당 사건이 거의 매듭짓게 된 1990년이나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에 대한 지문 날인을 의무화한 것에 대한 1천 명 규모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체포된 관련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1984년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던 전두환한국 대통령으로써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해 히로히토 당시 덴노를 네 차례 만났던 해이기도 한데# 일황이라는 표기는 이 1984년에 특히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과연 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의 주장처럼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이 한국에서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가 의문이 들게 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일왕'을 검색해 보면 드문드문 '천황'이나 '일황'보다 훨씬 적은 빈도수로 등장하던 '일왕'이 별안간 히로히토의 위독함을 전하는 기사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폭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는 '일왕' 표기의 등장이 단순한 피해의식이나 컴플렉스, 또는 모종의 정치 세력에 의한 선동 같은 것이 아니며 쇼와 천황 및 그의 치세에 대한 평가, 나아가 과거 일본의 '전범 국가'라는 어두운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지금이야 아키히토 상황과 나루히토 천황의 개념 행보로 인해서 천황에 대해 이른바 '이미지 세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일왕 히로히토 즉 쇼와 천황만큼은 결코 아니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쇼와 천황이나 일본 제국의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한 분노나 증오의 감정은 구미권이라고 해서 아시아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것은 한국의 일부 친일적인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열등감이나 피해의식, 모종의 정치세력에 의한 선동이라고 치부할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한국에게 있어 역사상 최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1910.8.29~1945.8.15)는 구미권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과 제2차 세계대전(1939.9.1~1945.9.2)이 모두 겹치는 시기로, 그 최악의 시대와 최악의 사건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던 세대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권과 구미권 모두에 버젓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쇼와 덴노의 건강 악화 소식이 일본 국외로 타진되었을 때, 영국에서는 (비록 황색 타블로이드지이기는 했지만) 더 선과 데일리스타에서 한 목소리로 히로히토에 대해 "지옥이 저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Hell's waiting for this truly evil Emperor), "저 개자식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 버리자(Let the Bastard Rot in Hell)", "저 사악한 친구(히로히토) 때문에 고통을 받은 사람(일본군 전몰자)들이 그들의 무덤에서 기뻐 춤출 것"이라고, 노구에 와병중이던 히로히토를 히틀러에 빗대며[54] "히로히토 저 작자는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비해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그 죄악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도 않았다는 것이 저 작자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가 가장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제대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설을 싣는 바람에## 일본 정부가 존 화이트헤드 당시 주일 영국 대사를 소환하고[55] 마쓰다 요시후미 당시 일본 외무성 대변인과 시바타 가즈오 주영 일본 대사가 해당 신문사들과 영국 정부에 대해 공식 항의를 전달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영국 안에서 히로히토나 일본에 대해 이 정도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은 비단 자극적인 가십성 기사만 좇는 황색언론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주요 우익 일간지 스펙테이터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히로히토를 접견한 것에 대해서 "여왕은 버킹엄 궁전에서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접대할 수 있겠나?"라고 수사적으로 따져 물었고, 많은 영국인들이 일왕 히로히토의 방영에 대해서 "(히로히토가) 공개적이고 과시적으로 영예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shoulud no have been “publicly and ostentatiously honored.)고 보도했다. 한 마디로 여기 히로히토 방문한 거 아무도 반기는 사람 없으니까 정 방문하려거든 환영 같은 거 기대하지 말고 딱 일정대로 쥐 죽은 듯이 있다가 알아서 꺼져라라는 뜻이다.

영국 왕실종친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남아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56] 평생 극동 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사망한 부하 장병들을 잊지 않았고,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하기 10년 전인 1979년 사망했을 때에도 그의 장례식에 일본측 인사가 참석 요청을 받지 못했을 정도[57] 죽어서까지 평생 일본과의 관계를 거부했던 인물이다. [58] 또한 1971년 히로히토의 영국 방문 당시 영국에서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규탄하는 전국적이고 광범위한 시위가 벌어져, 심지어 히로히토가 영국 왕립 식물원에 심은 기념식수마저 다음날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자리에는 뿌리까지 죽으라는 의미에서 제초제까지 부어졌고, "그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They did not die in vain)"는 표지판이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 심지어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키히토 역시 1998년 방영 당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무명용사비 헌화, 카디프 성 방문이라는 일정을 소화하는 이틀 내내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들과 시민들로부터 "일왕의 사과가 불충분하다"는 반응을 들어야 했다. #

미국의 경우 조지 부시 전 대통령(41대)이 일왕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에 "이제야 조금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든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히로히토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일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까딱 잘못했으면 일본군 위장에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다. 물론 생전에 대통령으로서는 대 소련 포위망을 명분으로 일본을 한국과 함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고는 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업무 수행과는 별개로 과거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물론 일본군에게 먹힐 뻔했다는 개인으로서의 트라우마만큼은 평생 잊지 않았고 떨쳐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네덜란드[59]에서도 히로히토가 1971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 군중은 히로히토를 향해 규탄 시위를 벌이며 일장기를 소각하거나, 히로히토가 탄 차에 계란보온병을 던져대는가 하면 영국과 마찬가지로 히로히토가 기념 식수한 나무 모종까지 뽑아 버렸다. 히로히토는 암스테르담에서 아르티스 동물원, 레익스 박물관 및 일본 자본이 지원된 신축 오쿠라 호텔을 둘러 보았는데, 아르티스 동물원에서는 한 청년이 히로히토가 탄 차에 달려들려다 경찰에 제지되거나, 레익스 박물관에서는 상복을 입은 여성이 "히로히토,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지(Hirohito, where is my father)?"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으며, 오쿠라 호텔 앞에서는 일장기 소각까지 벌어졌다. 히로히토 부처가 줄리아나 여왕과 점심 식사를 했던 바른의 소에스트틱 왕궁 앞에서도 200여 명 정도의 시위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히로히틀러는[60] 집에 가라(Hirohitler Go Home).”거나, “살인자(Murderer)”, 또는 “19,000.”[61]이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당시 대표적인 좌파, 우파 언론지인 헛 브뤼셀 볼크(Het Vrije Volk)와 더 텔레흐라프(De Telegraf)모두 히로히토에게 '강렬한 악과 비인간적인 불행'의 상징이라고 부르며 "대규모 야만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기여 혐의를 받고 있는 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62] 네덜란드 관리들은 쇼와 덴노가 네덜란드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방문이지 국빈 자격으로 온 것은 아니며, 여왕의 중찬 초대는 통상적인 외교적 예의라고 해명해야 했다. #

198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다. 당시 쇼와 덴노가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였는데, 베아트릭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하고자 했을 때 네덜란드 여론은 과장 안 보태고 "가기만 해 봐라."였다. 결국 쇼와 덴노가 죽고[63] 아키히토가 새로운 덴노로 즉위하고 난 1991년에야 베아트릭스 여왕은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때 베아트릭스 여왕은 새로이 일본 국왕으로 즉위한 아키히토가 주최한 만찬에서 "그 국치(國恥)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희생된 자국 군민(軍民)의 숫자까지 들어가며 "과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고통스런 체험을 진지한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울분과 원한으로 가득한 마음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음 세대들은 그런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장래를 보아야 한다"고 일왕 아키히토의 면전에서 발언해, 네덜란드가 과거 일본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전쟁 범죄의 피해를 잊어버리지 않았고[64] 자신의 방문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천명했다. #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도 2014년 일본을 국빈 방문하여 아키히토 일왕이 주최한 만찬 자리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 국민이나 병사가 체험한 것을 잊을 수는 없다"며 "전쟁의 상흔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희생자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 국왕 모자(母子)가 다른 국왕 부자(父子) 앞에서 대를 이어가면서 일본에 대해 네덜란드가 겪은 전쟁 피해를 잊어서는 안 되고 그들도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에 대해 한국 일각의 친일적인 논자들이 일왕 표기를 비난하면서 들고 나오는 어떠한 '정치적인 의도'나 '반일 선동' 같은 비난의 언사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즉 히로히토(쇼와 덴노)가 엄연히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범이자 전쟁 책임이 있음에도 미국과의 사법 거래로 재판 회부는커녕 어떠한 처벌도 없이 자리보전하고 천수 누리고 곱게 간 것[65] 그리고 엄연히 과거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 가해자라고 할 히로히토의 죽음에 그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대한민국 정부가 조문을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한국 국내에서 천황/일왕 표기 문제에 불을 붙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범으로 전쟁 책임이 있는 인물이 국가간 사법 거래를 통해 책임에서 빠져나가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던 역사의 부조리함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으며, 결코 일본의 식민지 피해 당사국이었던 한국 정부나 한국 사람들의 쓸데없는 자격지심, 컴플렉스 내지 특정 정치 세력의 소위 '반일 선동'에 의한 것만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2.3. 언론의 방송 보도상 용어로써의 '일왕'과 관련하여[편집]



2.3.1. 영문 기사의 'Emperor' 번역에 관련하여[편집]


국내 언론의 경우, 일본 황실 구성원 호칭에 대한 통일된 원칙은 없는지[66] '천황'을 '일왕'으로 부름과 동시에 '황태자' 역시 '왕세자'로 현지화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皇太子'를 유지하고선 '고타이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는가 하면(#[67]), '일왕'의 장남 '황태자'라는 괴이한(?) 서술도 있는 형편이다(#). 차라리 왕태자로 썼다면 모를까... 또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더라도 그 언론의 영문기사에선 서양에서의 번역에 맞춰 '일본 황제(Japanese Emperor)'로 표기하며[68] 이는 외국 독자들의 편의를 감안한 번역이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외신에서도 Emperor라고 표기한다는 점이나, 한국 언론이 굳이 '일왕'이라 표기하면서도 영문기사에서는 'Emperor'라고 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며 외신의 표기에 맞춰서 한국 언론도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외국 독자들의 편의를 감안해서 'Emperor'라는 번역으로 따라가는 것이고 국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기사에서까지 외신에서 '황제'라고 부르니 우리도 '황제'라고 불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 역시도 언론의 자유의 영역일 뿐이다.

구미권에서 덴노를 Emperor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첨언해 두자면 처음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이라는 왕국에서 정작 '왕'인 덴노는 종교적[69] 권위 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정치 실권은 엄연히 왕이 임명한 '장군'인 쇼군이 쥐고 있는 상황을 유럽 세계에 소개하면서 유럽의 당시 현실에 빗대어 덴노를 로마 교황, 쇼군을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비유해 설명했다.[70]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보다 중국[71]에 먼저 들어가서 전도한 경험이 있다 보니 일본과 중국의 국력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 수준일 뿐 아니라, 일본에서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고 칭해 봐야 결국 자국 내에서의 자칭이지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는 일본이 자국 군주를 덴노(천황)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건 뭐 병신도 아니고ㅋㅋ" 하고 코웃음을 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1577년 일본에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 주앙 호드리게스 추주(João “Tçuzu” Rodrigues)[72]1620년에 쓴 자신의 저서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 Arte Breve da Lingoa Iapoa)에서 중국 사람에게 일본의 덴노가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는 얘기를 하자 코웃음을 치며 "아니 밑에 제후로 거느리고 있는 왕도 하나 없는 것들이 황제는 무슨 얼어 죽을 황제래냐ㅋㅋ"라고 비웃더라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왕은 황제에 상당하는 이름을 여러 가지 쓰고 있으나, 중국인들은 이를 비웃는다. 그 이유는 중국의 국왕(황제)은 중국 안팎에 왕의 칭호를 가진 자 여럿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황제'이지만, 일본의 국왕은 그와 같은 왕을 거느리고 있지 않으니까 그저 국왕이지 황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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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로드리게스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 덴노의 존재를 뻔히 인지하면서도 일본에서 무력을 가진 무사들의 집정자, 다이묘들의 총지배자인 쇼군 내지는 자신들에게 사신을 보낼 정도의 힘을 가진 실력자를 '일본 국왕'으로 간주하고 그를 외교 관계의 대상자로 삼았던 것처럼, 유럽의 입장에서도 '이교도'에 껍데기뿐인 권위 말고는 아무 실권도 없는 덴노보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정치, 군사적 실력을 가진 쇼군을 일본의 실질적인 '왕'으로 간주하고 그를 일본의 '대표자'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에도 막부 말기 주일 미국 공사 타운젠드 해리스(Townsend Harris)는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Emperor of Japan' 앞으로 보낸 친서를 교토의 덴노가 아닌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

심지어 덴노가 아닌 쇼군을 가리켜 Emperor로 부르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일본을 통일하고 셋쇼 간파쿠에 취임해 여러 다이묘들을 휘하에 거느린 도요토미 히데요시[73]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를 가리켜 '황제 태합 전하(Emperor Taiko sama)'라고 부른 것이다. # [74] 즉 구미권에서 처음 일본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했던 'Emperor'는 동양에서와 같은 유일무이한 절대군주로서의 '황제'라는 의미보다는 '종교적 권위만 있을 뿐 실권은 없는 지도자' 덴노와 대비되는 '실권을 가진 세속의 정치, 군사 지배자' 쇼군이 한 나라 안에서 공존하는 일본의 상황을 강조하고자 사용되었던 셈이다. 이 무렵 덴노를 가리켜 번역할 때에 사용된 용어는 '미카도'(Mikado of Japan)였다.[75]

2.3.2. 일본 황실 궁중용어 표기에 관련하여[편집]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게 되면 일본 황실은 왕실, 황후는 왕비, 황태자는 왕세자가 되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도 덩달아 바뀌어야 하고 여기서 혼선이 야기된다는 점이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따로 친왕과 왕 등 각각의 작위가 황실전범[76]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천황을 지칭할 때 '일왕'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77] 여기에 '친왕/내친왕[78]', '왕/여왕[79]' 같은 일본 황실 용어들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난감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일왕'이라는 표현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를 대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일본 극우파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를 외친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 언론들은 "일본 극우파들이 '일왕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 주체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특히 일본인일 경우엔 일왕이란 표기는 영 어색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표현상의 문제이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개인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다.[80]

다만 현대 한국인 관점으로는 일본 황실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거나 관심이 없는 이상에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친왕 문서에 보듯, 왕 작위의 개념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왕'이라고 하면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 천황(황제)과 왕을 황족 내부에서의 위계에 따른 호칭으로 보기보다는 일단, 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나라의 수장에 대한 칭호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 군주가 여럿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이 한국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바꾸는 게 언어 소통 면에서 명확하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한 한국어로 그대로 음차할 수 있는 일본 천황과 황족 작위들을 '왕'이나 '왕세자' 등으로 현지화하는 것이 언어의 경제성과 사회성을 모두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황실을 설명할 때에 천황과 황후, 황태자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언론에서 굳이 일일이 다룰 일이 거의 없는데 중요도도 인지도도 없고 언론 노출도 별로 없는 인물을 위해서 굳이 고유명사 표기를 따로 도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경제성, 사회성 모두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81] 친왕이라는 용어는 현직 천황의 친자식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자식과 그 아들들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천황의 딸을 가리키는 내친왕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는 아예 쓰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82] 차라리 히사히토 '왕손'이나 아이코 '공주'라는 표기가 히사히토 '친왕'이라는 고유명사 표기보다 더욱 쉽게 와 닿을 뿐 아니라# 고유명사 표기의 경우 전근대에는 천황이 정실 황후뿐 아니라 측실이나 궁녀로부터도 자식을 얻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러한 경우 정실 소생이냐 아니냐 또는 친왕선하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나아가 승려로써 출가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친왕/왕/법친왕 또는 내친왕/여왕으로 구별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일단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천황이 양위하는 경우 양위한 천황을 상황이라고 부르게 되지만, 여기서 또 출가하면 법황(法皇)이라고 부르는 용어가 따로 있고, 나아가 양위하고 출가까지 한 천황이 인세이를 행하는 경우까지 있고 인세이를 행하는 천황을 '치천의 군'이니 '인(院)'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보니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특수한 일본 역사에서의 복잡한 전개 및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천황/상황/법황/원정 등의 용어 사용은 불가피하며 필수적인 것이지만, 적어도 근현대 언론 보도에는 그럴 우려가 없다. 아키히토는 나루히토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치천의 군'도 아니고 승려로써 출가한 '법황'도 아니며, 현대 일본의 종친 중에도 승려로 출가한 '법친왕'은 없다.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것은 감정적인 격하일 뿐이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 나루히토는 '천황'이고 '극우' 후미히토는 '대군'이라는 거냐고 하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나루히토가 태자가 되기 전까지는 후미히토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대군도 군도 아니라 일괄적으로 그냥 '왕자'였다. 여기에는 격하나 비하 어떤 의미도 없고 그냥 '왕의 아들'이라는 관계 설명의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83] 애초에 대군/군도 공주/옹주처럼 왕의 적자냐 서자냐를 구분하는 건데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그런 걸 구분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후미히토의 지위는 굳이 일본 현지 표현을 존중하자면 그냥 '친왕'이 아니고 '고시(皇嗣: 황사)'로 불려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황사'라는 용어가 생소하다 못해 거의 사장된 상태인 것은 물론, 일본에서도 확정된 계승자의 지위로 정립된 게 아니라 후미히토라는 인물이 이러한 지위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범 속 용어를 가져다 편의상 붙인 말이다. 그냥 왕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므로 한국 언론도 그 점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표현하고자 '황사'로서의 후미히토의 지위를 굳이 전근대의 용어인 '왕세제'로 치환해서 부른 것뿐이다.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이 왜곡된다는 우려도 학술 용어로써 천황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의 이야기지,[84] 학술 용어가 아닌 단순 언론 보도의 경우에는 천황 호칭에 딸린 무수한 일본 황실전범 속 고유명사 호칭들의 왜곡 문제를 우려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3.3. 중국의 한국 '총통' 표기와 비교하여[편집]


중국의 경우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천황/일왕 호칭 논쟁과 견줄 만한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한국을 포함해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의 국가원수는 대부분 공식 표기가 '대통령(大統領)'이고[85][86] 한국 역시도 국가원수를 대통령이라 공식 칭호이자 직함으로 정하고 있지만, 중국은 그런 걸 쿨하게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대통령'이 아니라 굳이 '총통(总统)'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세계의 다른 공화제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한국에서는 미국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러시아 대통령(Президент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독일 대통령(Bundespräsiden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라고 표기되는 지위가 중국 언론에서는 각각 '美利坚合众国总统', '俄罗斯联邦总统', '德國聯邦總統'인 것이다. 즉 '한국 대통령'은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한국 총통'이다.

2013년 한중정상회담 때에도 중국 언론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가리켜 '한국 총통'이라고 번역했지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지 않았고# 당연히 총통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고 총통 하면 히틀러부터 먼저 떠올리는지라 한국인들은 한국 대통령이 무슨 독재자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현행 중국어 위키나# 바이두 백과에서도# 심지어 외신의 중국어 번역에서도# 그러한 '한국(대한민국) 총통' 표기는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대만도 이 점에서 차이는 없다. 참고로 중화권은 아돌프 히틀러의 직책인 퓌러를 '원수'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한국어 문장에서 '대통령에서 총통으로 바뀌었다'는 중국어에서는 '총통에서 원수로 바뀌었다'라고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대통령을 의미하는 단어가 이미 총통이기 때문.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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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당시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대선 당시 충남 지역 선거 유세를 앞두고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단어는 대통령에 비해 묘하게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한 뉘앙스의 단어로 쓰인다. 아무래도 당시 총통이라 소개되던 이들로 나치 독일의 '히총통' 아돌프 히틀러나, 36년 동안 에스파냐를 독재 통치했던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 그리고 대만(자유중국)의 총통 장제스까지.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7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87]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을 두고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웃기게도 그때 한국 안에 신민당도 그렇고 공화당도 그렇고 '대통령'이나 '총통'이나 똑같이 미국에서도 쓰는 그 'President'의 이역(異譯)인 줄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지, 공화당에서도 "박정희가 당선되어도 총통제를 시행할 일은 없다"고 항변할 정도였다.

미국나 독일 같은 구미권이야 아예 언어 체계 자체가 다르니 그렇다 쳐도 일단 한자 문화권을 공유하는 한국에 대해서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기대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을 것을 굳이 자기네 한자 표기대로 바꾸는 중국의 사례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한국내 일각의 주장처럼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일왕이 아닌 '천황'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맞다면, 마찬가지로 총통이나 대통령이나 어차피 'president'의 번역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표기에 대해서 아무래도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있는 만큼, 미국 등 구미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은 총통이라고 부르기보다 한국에서 부르는 대로 '대통령'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맞겠지만, "민주당계 정당이 편집증적 친일 성향, 혹은 친중 성향이 있어서[88] 일본 천황은 일왕이라고 비하해서 표기하면서 중국 주석은 말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89]는 것이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근거라면, 마찬가지로 한국의 공식 표기인 '대통령'을 놔두고 '총통' 번역을 고집하는 중국에 대해서도 "총통이라고 부르는 건 듣기 뭐하니까, 우리 정부와 언론이 중국의 국가수반을 중국에서 부르는 대로 '주석'이라고 부르듯 중국에서도 우리가 부르는 대로 '총통'보다는 '대통령'이라고 표기해 달라"고 중국에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 총통이나 대통령이나 어차피 한 단어를 다르게 번역한 거고 총통에 대해서 독재자라는 뉘앙스를 갖는 것은 지나치게 과거사에 얽매인 오해이다, 중국이 우리 국가원수를 총통으로 부르든 대통령이라 부르든 민주 공화국인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반론이 나오기 충분하다. 그런 시점에서 천황이나 일왕이나 어차피 군주에 대한 호칭인데 무슨 상관이냐 라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한국 대통령을 굳이 '총통'으로 번역하는 것을 두고는 중립적이고 동등한 입지에서의 병행에 가까운 것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입장이 어떻든, 중립적이든 동등한 입지든 일차적으로 당장 그 대상자인 한국인들이 '한국 총통' 표기를 독재자 이미지가 겹쳐서 불쾌하고[90]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판인데[91] 그걸 중립적이네 동등한 입지네 말할 수는 없으며, '일왕'이라는 표기를 무조건 격하이고 폄하라며 일본에서의 표기대로 천황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한중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표기하는 대로 중국도 상호주의에 따라 '총통'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불러 줘야 마땅하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걸 "중국인들은 대통령이라는 말 가지고 한국인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발끈하지도 않고 한국인들이 그걸 가지고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지도 않거든?"[92]이라는 말은 몰상식한 단순 비교 내지 쓸데 없는 자국 폄하에 불과하다.


2.3.4. 민주 공화정의 시민으로서의 '천황' 인식에 관련하여[편집]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외국 군주의 호칭에 대해 불필요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을 폈다. 한 마디로 "쟤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든 말든 당당한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만 아니면 그만 아니냐"라는 것.

하지만 천황이라는 존재가 엄연히 과거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 전쟁의 기치로 활용되었고 패전 뒤에도 일본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전쟁 책임을 져야 할 천황은 미국과의 '사법 거래' 비슷하게 처벌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이는 다시 생각할 문제이다. 일본 정부가 '천황'을 앞세워 자행했던 그 부정적인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고 반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93] 모를까, 2023년 현재진행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의 우경화는 결코 과거의 일도 외국의 일도 아니며, 그 천황을 내세웠던 일본 제국 자체가 현대 대한민국이 1919년 임정 수립 이래 헌장에 명기하고 현대 헌법 조문 제1조에 명기할 정도로 자부하는 민주 공화정을 위협하는 한 축의 중심이었다. 박훈 교수 말처럼 '쟤들이 뭐라고 부르든 어떠냐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만 아니면 그만이지'라고 속 편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저 칼럼을 기고하고 두 달 뒤에 일본 나고야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에 우익들이 훼방을 놓았고# 박훈 교수 본인도 1년 전 서울경제에 기고했던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에서는 정작 '일왕'이라고 표기했다. #

한편 일본의 전 아사히 신문 기자였던 칼럼니스트 나리카와 아야는 2021년 한국기자협회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에 천황 관련 기사를 쓸 때 천황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고 '무슨 실례냐'며 항의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경험담을 전한 바 있다.#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의 언론에서는 천황 관련 보도에서 "천황이 백신을 접종했다"가 아니라 "천황 폐하께서 백신을 접종하셨다"라고 명사뿐 아니라 동사에까지 높임말을 쓴다는 것이다.[94] 아사히 신문은 예외적으로 동사까지는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95]

단순히 자국의 군주에게 '천황'이라는 표기를 넘어서 '금상 폐하'라고 부르거나, 그 천황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그냥 백신 접종했다고 적지 않고 "백신 접종을 하셨다"라고 높여 쓴다는 건 당연히 한국인들의 기준에서는 과거 군부 독재 시절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던 어용 언론들을 상기시키는 일이자 북한 노동신문 보도 정도에서나 남아 있는 해괴한 일이고, 한국뿐 아니라 웬만큼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나라의 가치판단 기준에서도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보도를 하는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해괴한 표현마저도 '언론의 자유'이고[96] 한국 언론도 아닌 외국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에 그 표현의 사용과 수위까지 일일이 한국 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 [97][98]

어떤 사안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그 사안이 옳고 그르고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박훈 교수의 말처럼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일본의 군주를 일왕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천황이라고 부르면 어떠냐"라는 논리는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라서 천황이라 부르든 일왕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황이라는 칭호 및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에 있어서 일본의 언론이나 사회 일각에서 보이는 언행들에 담긴 천황관(觀)이 결코 용납이 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타국의 문화나 사회 여론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지만, 그 여론이 어떠한 감정과 어떠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파악하지 않은 채로 맹목적으로 존중할 수는 없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한국인들은 '한국인의 편집증적 반일감정'만을 말할 뿐 일본의 '천황'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언론과 그 언론을 대하고 평가하는 일본인들의 천황관이 일본 사회에서 운위되는 '천황'이라는 용어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그것이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한국 사회에 시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조금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천황 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맹점이다.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하이고 비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이런 식의 보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일본이라는 사회가 인식하고 체감하는 '천황'에 대한 인식의 발로와 결을 같이하면서 나온 것이라면, 그걸 '민주 공화국' 한국 사회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고, 어디까지 용인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도 제기되어야 한다.[99] 즉 언론 차원에서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은 처음부터 뭔가 격하나 비하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도 아니지만, 언론사로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위한 '거리두기'를 위해서라도 보다 적절한 태도라는 반박이 존재하는 것이다.[100]


2.3.5. '천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언론 보도에 관련하여[편집]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 '천황'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감정적인 컴플렉스의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 가운데 하나가 한국 정부에서 외교 석상에서는 공식적으로 천황 표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반일감정에 편승하려는 특정 정치 집단의 정치적 의도이고 한국인들의 일방적 반일감정에서 나온 열등감으로 격하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고 대한민국 정부가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고 내세우며, 외교 석상에서 정부가 천황으로 부른다는데 왜 언론이나 시민들이 일왕으로 부르느냐고 문제삼는다.

하지만 일본 왕/일왕 표기를 주장하는(혹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방송 용어로서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도 학계에서 학술 용어로써의 '천황'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대일 외교석상에서 천황 표기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본 내에서도 자국의 천황을 '왕'이라고 불렀고 그걸 '격하'나 '비하'라고 여기지 않은 사례들이 있는 이상 "지들도 왕이라고 부른 전례가 몇 번이나 있는데 그게 왜 비하라는 거냐?"라는 반론을 제기할 근거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거니와, 국가 권력을 집행하는 정부 기관이나 공신력을 갖춘(그리고 그럴 의무가 강제되는) 학술 단체가 아니고 제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가치판단을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방송 언론이나 이러한 여러 문제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대중의 입장에서 천황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 자체에 대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이고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말 좀 험하게 보태면 공석도 아니고 공신력 있다 평가되는 기관이 아닌 개인이 왜황이라고 부르든 쪽바리 군주라고 부르든, 뒤집어서 인터넷에서 익명의 누군가 혹은 게시판에서 독립운동가 폄하 발언이나 위안부 왜곡 발언이 나와도 그것마저도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헌법으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본인들에게 닥칠 후폭풍이나 발언 자체의 가부 논쟁 및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란 및 비판, 나아가 그로 인해 발언자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모든 패널티에 대한 각오를 하고서라도 뇌 필터를 거치든 말든 자기한테 달린 입으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떠들고 다니겠다는데야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발언의 법리적 시시비비를 가려[101] 법으로 규정된 만큼의 패널티를 가하고, 또는 곱게 사회적으로 파묻어 줄지언정 발언하는 행위 자체를 무언가 법적으로 제재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매일경제가 평가하는 1989년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 이전에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실린 당시 신문들을 보면 오히려 언론이 '천황'이나 '일황'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일반 시민이 기고글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102] '천황'이라는 단어 사용을 굴종적인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용어로 여겨 불쾌함을 표하는 의견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1998년 당시 한국 정부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외교 관례에 따라 일왕이 아니라 천황으로 부르기로 결정했지만, 동아일보의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천황이라는 표현 자체를 '시대 착오적'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의견이 62.8%로 우세했고, 천황으로 부르자는 대답은 19.7%였다. # 참고로 "대등한 나라끼리는 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며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지한 이들 가운데는 조선일보이규태도 있었다.# 원윤수 당시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도 1998년 동아일보 기고에서 '천황' 표기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정부가 이러한 입장을 표명했으니 언론이나 대중도 그러한 정부의 입장을 보조해서 거기에 맞춰야만 한다는 주장은 자칫 언론이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언론으로 전락할 위험성, 나아가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내포한다. 국가 또는 범국가적 기관[103]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해서 그것을 꼭 언론이나 시민들이 무조건 그 표현만 사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하는 식의 어떤 강제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 국가의 군주에 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코로나19오염수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발견되고 발발한 지역인 중국의 우한의 지명을 따서 우한 폐렴이라는 용어가 언론에서 쓰였고, WHO는 특정 국가나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표기하는 것은 자칫 그 국가 및 지역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들어[104] '코로나19'라고 부르는 것을 권장했고 한국 정부 역시 그렇게 불렀지만# 그것을 각국의 언론이나 개인 SNS까지 강제한 것은 아니었고## '코로나19'와 '우한 폐렴'을 섞어 쓰는 언론은 많았으며# 조선일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한 폐렴', '우한 코로나'라는 용어를 사설에서 자주 사용해 저널리즘 관련 지적을 들었다. [105][106] 이것 역시도 그들 언론사로써는 '언론의 자유'의 영역일 뿐이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언론의 본령이자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나 신뢰도를 저버린다는 것도 그들 언론사가 감당할 '책임'이자 '업보'이다.

요컨대 천황이라는 표현이 국가, 정부 차원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방송이나 저널리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천황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거나 일왕이라는 표현은 쓸데없는 자격지심의 발로 또는 특정 정당의 선동일 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며, 오히려 국가, 정부 차원의 용어라고 방송이나 저널리즘에서까지 강제하기는 어렵다. 이 또한 전 항목에서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자유에 맡길 문제이며, 그에 수반되는 책임 역시 각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3. 결론[편집]


천황이라는 칭호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용어이자 한국 정부의 외교석상에서의 공식 칭호로, 학술 대회나 외교 석상에서 학술적인 견지 및 외교적 수사로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본 국왕(일왕)이라는 칭호 역시 엄연히 역사성이 존재하는 용어로 언론 및 방송상 제3자의 입장에서 일체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객관적인 용어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황이라는 칭호가 친일적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며, 일왕이라는 칭호도 반일적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요약하면 일본 천황이라는 호칭만이 정식이고 일왕(일본국왕/일본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하이자 비하라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메이지 이후에 정립된 것이고 일본의 역사에서는 그 군주를 가리켜 '천황'이라고 부르든 '왕'이라고 부르든 그 어느 쪽도 딱히 '비하'나 '격하'의 표현은 결코 아니었으며, 일각의 주장처럼 '천황'이라고 부른다고 무조건 친일파라는 식의 일방적인 평가만큼이나[107]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의 어두운 역사를 들먹이며 "쟤들은 더했는데 왜 여기만 뭐라고 하냐? 열등감 쩌네"라고 몰아붙이는 논리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특정 정치 집단의 편집증적인 반일 의식의 발로라거나 식민 지배의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국수주의적 표현이라고만 딱 잘라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4. 보론(補論): 학술 용어로서의 '천황' 사용에 대하여[편집]


한국어 말뭉치 물결21 코퍼스# 상에 '천황'을 입력해 보면 '천황'의 용례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일본의 천황뿐 아니라 치우천황이나 지리산 천황봉 혹은 고사성어 파천황 등도 중복되어 있으며, 시사 방송뿐 아니라 천황이라는 존재와 지위의 역사성을 추적한 학술 교양 서적에 대한 서평 기사도 공존하고 있다.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카이저', '차르'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된 동아시아사는 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한반도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도 일본에게 '조공'했다는 일본서기 식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함이며 일본서기 자체가 가려 볼 점이 많다는 전제가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우리가 중국의 황제를 인정해서 황제라 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 이집트 파라오애급의 애왕이라고 표기하지 않듯[108] 천황도 일왕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표기하고, 대신 그들이 천황이라 하든, 황제라 하든, 파라오라 하든, 카이저라 하든 우리는 으로 인식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즉 한자 뜻에 얽매이지 말고 현지에서 쓰는 고유명사로서 보자는 취지이다.

천황이나 일왕이 아니라 '일본 군주'와 같이 한국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반 명사 ‘군주’로 통일하자는 의견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영국 여왕 등 현대에도 군주정이 남아 있을 경우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군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제 작위가 대공인 모나코 등 소국 군주도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군주라 부르기 때문이다.

한편 책에서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왕을 사용하는 책들도 있다. 일례로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에서는 천황을 사용했지만 Go Go 카카오프렌즈에서는 일왕을 사용했다.

여담으로 NHK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2012년)의 경우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극중에서 천황가를 가리켜 왕가(王家)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 내부에서도 "천황가인데 왜 왕가라고 낮춰서 부르느냐"고 말이 나올 만큼 어메이징한 일이었다. [109] 담당자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게 학술적 견지를 따른 거였다. 당시 다카하시 마사아키와 함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시대 고증을 맡은 혼고 가즈토(本郷和人)[110]의 저서 <수수께끼 다이라노 기요모리(謎とき平清盛)> 62~64쪽에 소개되어 있는 일화를 보면

<ドラマ・平清盛>では、天皇や上皇の家を「王家」と称します。ですが、今までの大河ドラマでは、天皇家とか皇室とかの語を用い、王家とはいわなかった。どうして今回は新しい呼び方を取り入れるのか。

先ず押さえておかねばならぬのは、当時の言葉の使い方です。

そこで調べてみると、天皇家も皇室も王家も、使われていない、が正解です。当時は天皇や上皇や皇太子や女院などをひとまとめにして「ファミリー」として考える、ということをしなかった。

ある研究者の整理(「<王家>をめぐる学説史」歴史評論2011年8月号)によると、王家という語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第1章(3)でふれた黒田俊雄氏の権門体制論からのようです。

その後、西洋史の影響を受けて、日本の歴史学でも「王権」の分析が盛んになりました。戦前のように、日本の天皇は他国に例を見ない唯一無二の存在である、というのではなく、天皇を国の頂点に君臨する王と捉える。そうすると自ずと他国との対照・比較の視点が開け、東アジアの中の日本、世界の中の日本を考える際にも有用である。ですので、現在の学界では、王家という呼び方が確実に市民権を得ているのです。そこで時代考証の判断として、学問的な見地から、「王家」の語の採用を提案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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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드라마 다이라노 키요모리>에서는 천황이나 상황의 집안을 '왕가'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하드라마에서는 천황가라든가 황실이라든가 하는 말을 사용했지 왕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번에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는가.

먼저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시의 언어 사용법입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천황가'도 '황실'도 '왕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가 정답입니다.[111]

당시에는 천황이나 상황이나 황태자나 궁녀 등을 한데 묶어 '패밀리'로 생각한다, 는 게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112]

의 정리(<왕가>를 둘러싼 학설사> 역사평론 2011년 8월호)[113]에 따르면 왕가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 것은 제1장(3)에서 언급된 구로다 토시오(黒田俊雄)의 권문체제론(權門體制論)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서양사의 영향을 받아 일본 역사학에서도 왕권 분석이 활발해졌습니다. 전쟁 전처럼 일본 천황은 타국에 유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천황을 국가의 정상에 군림하는 '왕'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의 대조·비교의 시점이 열려 동아시아 속의 일본, 세계 속의 일본을 생각할 때에도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왕가'라는 호칭이 확실히 시민권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고증의 판단으로 학문적 견지에서 '왕가'라는 단어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인세이'를 포함한 일본의 중세사를 연구함에 있어 '왕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 혼고 가즈토의 책에 나온 이 구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이란 쉽게 말해서 중세 일본이라는 나라는 군주 즉 '왕가'를 국가의 핵심에 두면서도 '섭가'와 '무가' 등 여러 '권문(權門)'[114]이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하며 국가권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국가관으로, 현대 일본 중세사 연구에 있어서는 거의 정론이 되어 있다.[115]

구로다 토시오는 이 권문체제론을 주장하면서 '천황가'나 '황실'이라는 용어는 근대 일본 국가권력에 의해서 사용된 용어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근대에 성립한 용어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모종의 선입견, 이데올로기 등 사고상의 제약을 줄 수 있다[116] 보았기에 그러한 기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중세 당시에 실제로 자주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는 '왕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창한 것이다.[117] 쉽게 말해 '천황가'니 '황실'이라는 용어가 엄연히 천황가에 비등하게(혹은 그 이상으로) 중세 일본 역사 전개의 중추를 차지했던 섭가나 무가를[118] 단순히 천황가나 황실에 부속된 곁가지이고 독립성이 없었다고 여겨지게 함으로써 일본 역사를 지나치게 천황 중심으로만 이해해 버리는 착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구로다의 지적이다.

이를 "그게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그런 건 동기나 사유, 카테고리부터 다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학술 용어로서 '왕가' 내지 '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한국 학계가 아니라 일본 학계에서 나왔고 그러한 학계의 견해를 일본 국회의원이 "천황가를 왕가라고 부르는 것은 격하 표현이다"라고 지적했다는 것은 천황이라는 용어 역시 일본 일각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애초에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것이 격하이고 폄하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 격하와 폄하도 일본이 하면 학술적인 연구이고 한국이 하면 단순 정치적 동기라고 몰아가는 주장에는 어떠한 논리적 근거나 기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일본 국왕'이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한국인들의 열등감,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우기고 몰아가면서 그 배후에 특정 정당의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못박고 싶은 다분히 음모론적인 발상이다. 한 마디로 답정너. 다시 말하지만, 정부 입장이나 공식 기관에서 권장하는 용어라고 해서 언론이나 대중이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이유도, 따르지 않는다고 뭔가 정치적 의도가 있는 특정 정당에 의한 선동이라고 매도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1] 참여정부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2] 여담으로 한국에서 '일왕'이라는 표기를 해방 뒤에 가장 먼저 사용한 언론이 동아일보다.[3] 이와 같은 미디어물과 게임, 소설에 익숙해진 일부 사람들이 이런 식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댄 것이 대한제국의 황제 선포.[4] 정치 제도나 권력뿐 아니라 법률, 종교,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로마는 구미권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그 자체였다. 동아시아에서 중화 문명의 영향을 크든 적든 받지 않은 나라를 찾기 어렵듯이, 구미권에서 로마 문명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지역은 찾아보기 어렵다.[5] 차라리 동아시아에서 동로마 제국과 비슷한 국가를 찾자면 중국에서 진나라 이전에 존재했던 주나라(동주)와 더 가까우며, 이것도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여전히 힘이 건재해서 한때는 서로마령 수복까지도 실현에 옮길 뻔했고 그것이 실패하고 주요 속주들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건재하며 지역 강국이자 문화적 종주국의 위상을 유지했던 동로마가 형편은 주나라보다 더 나을 지경이었으므로 단순 1대 1 비교는 어려울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어쨌든 중국 안에서 '천자' 대접은 받았고 멸망한 뒤에도 그 의례나 문물 제도를 정리한 서적들이 유교 경전으로 통용되어 동아시아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표본으로 칭송받았으니, 일본과는 애초에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6] 이후 프로이센에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가 시집을 갔는데, 이후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칭호 문제가 촉발되었던 것. 마침 영국인도를 완전히 장악하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의 타이틀을 겸하여서 칭호 문제를 무마했다. 이건 영국 안에서도 "뭔 뻘짓이냐" 소리를 듣는 무리수였다.[7] 조선이 독립국을 선포하면서 곧바로 '황제'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대군주를 칭하고 영국 등 구미권 국가들의 왕을 '대군주'라 부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군주 항목 참조.[8] 동유럽은 구미권에서 '유럽'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 변방 지대였다. 이러한 구미권의 동유럽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 소설 드라큘라이다.[9] '로마 황제의 후계자' 내지 '기독교 교회의 인정을 받은 자'. 일본 덴노는 당연히(...) 기독교 교회의 인정도 받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의 후계자는 더더욱 아니고, 그나마 동로마 멸망 뒤에 그 수도를 점령하고 옛 동로마 황제가 맡았던 '정교회의 세속적 보호자'를 계승한다고 자처했던 오스만 튀르크나 까마득한 선대가 동로마 제국과 인척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내세워 제3의 로마로 정교회의 세속적 보호자를 자처했던 제정 러시아보다도 유럽인의 기준에서 'Emperor'의 자격 요건이 까마득히 멀다.[10] 맹자가 제시한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가 "왕이라도 정치 엉망으로 하면 하늘과 백성의 의사에 따라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떤 의미로 맹자가 일본사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에도 막부 말기에 막부를 쓰러뜨리고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이른바 '유신지사'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는 요시다 쇼인의 주요 저술이 맹자에 대한 강의록인 《강맹차기(講孟箚記)》였으니까 말이다.[11] 일본의 연호 가운데 무로마치 시대의 엔토쿠(延徳, 1489~1491)는 맹자의 開延道徳에서 따온 것이다.[12] 불경에서는 '데와 푸트라'라고 해서 도솔천에 사는 천인들을 천자(天子)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13]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이 쓰이기 전에 그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는 오키미(大王) 또는 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오오키미(治天下大王)였다. 애초에 천황이라는 호칭 자체가 중국 당의 고종과 그 황후 무씨가 각기 '천황', '천후'라고 스스로를 높인 칭호를 베껴 온 것이다.[14] 여기서 '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황이다.[15]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생 노리모리의 아들로 기요모리에게는 조카가 된다.[16] 여기서 구주는 일본 규슈가 아니라 '전 국토'라는 의미를 담은 관용어이다.[17] 여기서 '한 사람' 그리고 '왕'이 일본의 국왕 즉 덴노를 가리키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18]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上總介廣常). 보소(房總) 지역의 호족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했을 때 그를 따랐지만 이후에 요리토모에게 의심받아 피살된다.[19] 13세기의 승려이다.[20] 구칸쇼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 아라이 하쿠세키의 독사여론과 함께 일본의 3대 사론서로 꼽히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21] 여기서 왕씨의 '씨'는 문맥상 특정 성씨인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씨족' 다시 말해 왕가 나아가 천황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천황의 자손으로 성(가바네)를 받지 않은 자. 율령제에서 2세 이하 5세 이상의 황윤을 가리키며 '~~왕'이라고 불린 황족(天皇の子孫で、姓を与えられてないもの。律令制で、2世以下5世以上の皇胤こういん。「…王」とよばれる皇族)"이라는 뜻으로 설명된다.[22] 8월.[23] 구란도노토(蔵人頭).[24] 중국의 고전인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나오는 "하늘에 두 해는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天無二日, 土無二王)"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순(삼황오제) 항목 참조.[25] 잇따른 각지에서의 반헤이케 거병과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죽음으로 수세에 몰린 헤이케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격 앞에 결국 교토를 떠나 서쪽으로 낙향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헤이케는 안토쿠 천황과 모리사다 친왕 형제, 그리고 삼종신기까지 모조리 챙겨 교토를 빠져나갔다. 천황의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은 물론 새로운 천황의 즉위에 필요한 삼종신기까지 없는 상태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은 다카쿠라 천황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 쪽인 시노미야를 삼종신기도 없이 새로운 천황으로 지명해 즉위하게 했다. 해당 헤이케 이야기는 그러한 상황을 들며 헤이케를 비판한 대목이다.[26] 일본어로는 요레보시(ようれぼし). 반요 야샤히메에서 나온 그 요령성 맞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혜성(살별)의 출몰은 동서양 모두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27] 《태평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장차 일본의 미래를 예언한 글을 남겼고 거기에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고다이고 덴노의 왕정복고 또한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 미래기를 토대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정당화하였다고 나온다.[28] 국왕(国王)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국주와 국왕, 어느 쪽이든 '무가'와 구별하여 덴노를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다. [29] 사가미 뉴도라는 건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타카토키를 말한다. 《태평기》에서 타카토키는 덴가쿠와 투견에 빠져 사는 무능한 암군으로 그려져 있는데, 하루는 타카토키가 술에 취해서 자신의 방에서 평소처럼 덴가쿠에 몰두하는데, 어디선가 열 명 정도의 덴가쿠 광대패가 나타나 타카토키와 어울려 함께 덴가쿠를 추었다. 그때 바깥에 있던 어느 시녀가 타카토키의 방에서 "덴노지에 요령성 보이네(天王寺のや妖霊星を見ばや)"라는 노래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몰래 타카토키의 방을 엿보았는데, 타카토키 주위에서 덴가쿠를 추는 광대들이 한 명도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이 없고 입이 튀어나오거나 눈이 찢어진 등 야마부시(山伏) 즉 텐구의 모습을 한 요괴들이 타카토키 주위에 몰려들어 춤을 추고 있었다. 시녀가 급히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람들이 와 보니 타카토키만 혼자 술에 취해 잠들어 있고 타카토키 주위에 무수히 많은 새의 발자국 같은 것들만 잔뜩 찍혀 있었다. 이 괴이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카노리가 저렇게 말했다는 것이 《태평기》 해당 대목의 줄거리이다. 나카노리는 당시 조정의 형부소보(刑部少輔) 관직을 맡고 있던 유학자였다.[30] 제95대 하나조노 천황이 쓴 자필 일기이다. 막부 타도를 꾀하여 고다이고 천황이 일으킨 이른바 '겐코의 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히에이 산으로 대피했던 고다이고 천황이 결국 막부에 체포되어 '머리는 빗질도 하지 못해 풀어헤치고 평복에 장막 하나 달랑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쓴 것으로, 천황 자신이 자신의 일가를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31] 남북조 시대 남조의 구게로, 무장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이다. 이 사람은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에서 남조를 열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자 황자들을 데리고 오슈에서 친북조파 무장들에 대한 회유 공작에 나서기도 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무라카미 천황을 태자 시절부터 보좌하면서 사실상 남조를 거의 혼자서 지탱하다시피 했던 굉장히 유능한 인물이었다.[32] 신황정통기에서는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덴노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인(院)이라고만 부르는데,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그 전까지는 드문드문 붙여지던 일본 천황에 대한 '시호'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초에 후대에 이르러 양위한 상왕이 실제 국정을 맡아 행하게 되면서 덴노는 태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기도 하고.[33] 조큐의 난 이후에 막부에 의해 폐위되었고 시호가 붙여진 것은 메이지 시대의 일이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당대에는 그냥 '폐제'라고만 불렸다.[34] 교토 난젠지(南禅寺)의 곤치인(金地院)에 머물렀다 해서 곤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이라고도 한다. 사원제법도(寺院諸法度) ・ 무가제법도 ・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로 대표되는 에도 막부의 법률 입안과 외교, 종교 통제를 일선에서 맡았고(기리시탄 단속을 위한 단가 제도도 이 사람이 고안했다) 명의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와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의 흑의재상(黒衣宰相)이라고 불린 인물이다.[35] 곤치인 스덴은 후술할 하쿠세키처럼 혐한적인 면도 있어서 쇼군이 조선에 보내는 국서 형식을 그에게 자문했을 때 "고려(조선)는 일본보다 낮은 개같은 나라(戌國)이기 때문에 일본의 왕이 고려 왕과 동등하게 '왕'을 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국왕' 칭호를 반대했다고도 한다(요시노 마코토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쉽게 말해 "덴노나 쇼군께서 저 개 같은 조선 것들 왕하고 똑같이 노는 거 아닙니다."라는 취지랄까. 1617년 일본에 온 조선 통신사(정사-오윤겸/부사-박재)가 쇼군 히데타다의 답서에 '일본국 미나모토노 히데타다'라고 쓴 것이 대등외교에 맞지 않는다며 '일본국왕'으로 바꿔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쇼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일본국왕'이라고 쓰나?"라고 대답했다고(이경직 《부상록》). 이것도 가만 생각하면 스덴 역시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불릴 수 없다(='일본국왕'은 덴노 뿐이다)"라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스덴이 제정에 관여한 금중병공가제법도에서도 덴노와 쇼군을 '국왕'으로 불렀음을 감안하면 거의 확실하다.[36] 대표적으로 구로다 토시오나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등.[37]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38] 왕이 제후의 작위로 쓰이던 중국 왕조에서 그 왕조의 이름을 왕이라는 봉작에 붙여 주었던 적이 있는지(한의 황제가 한의 제후왕을 '한왕'으로 봉해준다던가 하는) 생각해 보자.[39] 일본으로 치면 친왕이다. 일본은 정비 즉 중궁의 소생이 아니어도 덴노가 인정하면 친왕이 될 수 있었다.[40] 사실 쇼군으로써도 일본국왕이라는 칭호가 마냥 달갑지도 않았던 것이, 쇼군이 '왕'이 되고 덴노가 '황제'가 되어 황제-(제후)왕의 구도가 성립될 경우, 일본이라는 왕국의 진정한 천자(황제)인 덴노가 행사해야 할 국정 운영권을 쇼군이 덴노로부터 횡령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고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권신들과 같은 존재임을 쇼군 스스로가 천하에 폭로하는 꼴이었고, '왕'이 '황제'보다 낮고 '일본국왕'인 쇼군이 '일본 황제' 덴노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정치를 신하가 멋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돌려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 존왕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권위가 높아지는 대신 반대로 위태롭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일본국왕'이라는 호칭 안에 들어있었던 셈이다.[41] 오다 노부나가 항목에서 나오는 삼직 즉 태정대신, 세이이타이쇼군, 관백이 아니라 총재(総裁), 의정(議定), 참여(参与)를 말한다.[42]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학자들도 일본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일본 본국과 차별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결코 온전하거나 정상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한계도 뚜렷했음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43] '종군위안부'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는 한국이나 중국 등 동북아, 동남아 여성들은 물론 심지어 네덜란드 여성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심지어 일본이 패망한 뒤에 만주에 남아 있던 일본 여성들 가운데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살당하거나, 그들을 만주까지 데리고 온 '개척단' 간부들에게 내몰려 구소련군, 중국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접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지에서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거나,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도 성접대 사실이 알려져 결혼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한국이나 중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성노예 과거가 밝혀져 고향에서 당했던 멸시와 차별을 일본 여성들도 똑같이 겪은 셈이다. # [44] 전제군주국가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과 같은 끔찍한 민중 탄압을 저지른 악행의 주체이며, 독일 제국 또한 영, 불만큼 영토가 넓지 않았을 뿐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적 침탈, 폭력을 저지른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45] 공작은 왕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로 간주된다[46] '교황'이란 칭호도 가톨릭 교계 안에서 "너무 권위적인 표현 아니냐"며 교황보다는 다소 수위가 낮은 교종(敎宗)으로 낮추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실제로 '교종'이라고 지칭해 부르는 언론도 존재한다. #[47]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에 독립 축하금을 지불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반성 명목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지불하였으며,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로 또 10억 엔의 배상을 지불하려 시도했다는 점이 근거로 꼽히지만,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배상 포기'를 말함으로써 그와 관련한 여파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이란 것도 정작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정부가 독단적으로 강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 더욱이 아베 정권 이후의 일본의 우경화나 그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아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처를 '비교적 잘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2023년에도 엄연히 현재진행형이다. ## [48] 심지어 그걸 분명하게 반대하고 거부하는 천황에게까지 권할 정도다.## 2023년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한국의 파트너다"라고 말한 바로 그날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하기우다 고이치 정무조사회장을 비롯한 자민당 각료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 기시다 총리는 참배는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마사카키(공물)를 보냈다. # 한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지만# 한국은 대통령이 일본에게 '일본은 한국의 파트너'라고 말한 바로 그날 일본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되었으며, 이것만으로도 '일본은 과거사 청산을 잘한 축에 속한다'는 일부 친일적인 논자들의 일본을 두둔하려는 주장은 근거가 떨어진다. ## [49] 램지어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왜곡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가짜 뉴스 유포)마저도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이자 정당방위"라고 왜곡했고(<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 일본의 아사히 신문 기자 출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램지어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여 쓴 책이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원제: 關東大震災「虐殺否定」の眞相 ハ-バ-ド大學敎授の論據を檢證する)이며, 2023년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50] 진주만 공습의 총지휘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오가사와라 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가 모두 합사되어 신으로 대접받고 있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이런 곳을 일본 정부의 각료들이 대놓고 참배하고 공물을 바치며 그곳에 합사된 옛 전범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짓거리를 일본 천황에게까지 권하는 꼴이 미국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보자.[51] 예를 들면 경향신문 1950년 1월 8일자동아일보 1954년 2월 7일자 등.[52] 日王處斷(일왕처단)을要求(요구)(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자) 본문은 천황으로 쓰면서도 큰제목을 일왕으로 썼으며, 이후 기사도 같다.[53] 천왕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데, 실제 역사에 엄연히 ‘천왕’이라는 단어를 군주 명칭으로 사용했던 태평천국이 존재하다 보니 쓰이지 않는다.[54] 구미권에서 "히틀러 같은 놈"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말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 그것도 1980년대 말이면 아직 동서 막론하고 그 지옥 같은 시절을 몸소 겪은 피해 당사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55] 대사 소환은 상대국과의 관계 단절까지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쓰인다.[56] 영국령 인도의 마지막 총독인 동시에 1945년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대장으로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대행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항복을 직접 접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마운트배튼 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한국광복군의 활약에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서 직접 치하하고 인원을 증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장제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한국광복군이 자체적으로 인원을 증원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해버렸다.[57] 콕 집어서 마운트배튼 경이 그렇게 "내 장례식에는 일본인 부르지 마라"고 못박아서 말한 것은 아니고, 마운트배튼 경 본인이 생전에 군인이었을 때도 일본과 관련된 업무가 생기면 이런저런 핑계로 차선임자를 대신 보냈고, 왕족으로서 일본인을 접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난 군인이라는 본업이 있어서 못 감' 식으로 뻐기는 등 최대한 일본과는 되도록 엮이지 않으려는 행보를 뚜렷하게 보였기에 장례식에도 그러한 마운트배튼 경의 생전 행보를 감안하여 유족 및 장례를 주관하는 이들이 일본측 인사에게 장례식 참석을 권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58] 마운트배튼 경이 딱 한 번 자신의 의사를 굽힌 것이 사망 8년 전인 1971년 히로히토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로, 원래는 영국 외무성의 요청에 "난 일본인 안 만난다"며 거절했지만 당시 영국 여왕이었던 조카며느리 엘리자베스 2세의 간청에 마지못해 사석에서 히로히토를 접견한 것이었다.[59] 일본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네덜란드는 쇄국 시대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했던 구미 국가로 일본과의 인연이 구미 국가 가운데 가장 길고도 깊은 나라이다.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는 네덜란드인도 포함되었다.[60] 히로히토+히틀러.[61] 옛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사망한 네덜란드인들의 숫자이다.[62]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는 네덜란드의 언론인으로 수마트라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일본 정부측이 연 기자회견에서 "그(히로히토)는 미안하다고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Can't he just say that he's sorry)?"라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63] 이때 네덜란드는 히로히토의 죽음에 조문 사절조차 보내지 않았다. # 뉴질랜드호주도 마찬가지로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으며, 심지어 밥 티자드 당시 뉴질랜드 국방장관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당시 일본 총리가 조의(弔意) 담화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며 “전화(戰禍)에 시달리는 국민의 모습을 보다 못해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렸다”고 찬양한 것에 분개해 "(히로히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총살이나 공개처형을 당했어야 했다(should have been shot or publicly chopped up at the end of the war)!"고 다소 과격한 발언을 했을 정도. # 데이비드 러셀 롱이(David Russell Lange) 총리가 티자드 국방장관의 발언을 "뉴질랜드 정부 입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개인의 의견이다"라며 부인했지만, 롱이 총리 역시 히로히토의 죽음에 대해 일본인들이나 일본 왕실 유족들에 대한 조의를 딱히 표하지는 않았다. ## [64] 사실 네덜란드도 한국과 상황이 묘하게 닮은 게 네덜란드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고, 일본도 이에 따라 1천만 달러를 '위로금' 명목으로 네덜란드에 지급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전쟁 피해 당사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않고, 7천 8백 명의 전쟁 피해자들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한 사람당 2만 달러씩의 배상금을 일본에 물리도록 유엔에 제소하는가 하면, 베아트릭스 여왕의 방일에 맞춰 해당 단체의 대표가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 [65] 무솔리니는 분노한 이탈리아 군중에게 맞아 죽어 시체가 내걸렸고,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이 둘에 비하면 정말 히로히토는 곱게 사망했다.[66] 사실 천황이냐 일왕이냐 문제에 대해 통일이 안 되어 있으니 이런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기는 한데, 후술하듯 언론사마다 논조의 차이가 생기는 것 역시도 '언론의 자유'의 영역이다.[67] 해당 기사에선 '상황', '상황후', '황사' 등도 모두 '상왕', '상왕비', '왕사'로 일률 조정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上皇', '上皇后', '皇嗣'로 해 두고선 각각에 '조코', '조코고', '고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었다. 한자 표기를 사실상 일본식 호칭 전용으로만 쓴 셈이다.[68] 예제 1예제 2 [69] 덴노는 일본 신토의 최고 사제이기도 하다. 예수회의 입장에서는 신토나 불교나 모두 '혐오스런 이교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70]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천황가를 진무 덴노부터 오기마치 덴노까지 소개한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의 저술 《일본왕대일람》의 경우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 아이작 티트싱(Isaac Titsingh)에 의해 거쳐 유럽에 전해졌고 1834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는데, 프랑스어 번역 제목이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즉 '일본의 역대 황제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왕'이라고 쓴 제목이 프랑스에 전해져서는 '황제'로 번역된 흥미로운 사례다.[71] 당시에는 명나라.[72] 1561~1634. 중국 이름은 육약한(陸若漢). 이 사람은 일본-포르투갈의 나가사키 교역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했다는 이유로 1604년 일본에서 쫓겨나 마카오로 왔는데, 1628년부터 1632년까지 청과의 전쟁에서 명을 지원한 포르투갈군의 통역을 맡아 그 공로로 숭정제로부터 예수회 선교사로는 최초로 포상을 받았다. 로드리게스는 자신이 일본에 체류했던 1577년부터 1604년까지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와 그리스도교 교회 상황을 쓴 《일본교회사》(Historia da Igreja de Iapam)도 집필했으며, 일본어에도 뛰어났다. 또한 1631년 명에 온 조선의 사신 정두원에게 망원경자명종 등 서양에서 가져온 신문물을 전해 준 사람이 이 사람이다.[73]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닌 셋쇼 간파쿠가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항목 참조. 어차피 군사적 실권자라는 점은 쇼군이나 다를 바가 없긴 했다.[74] 서양에서 황제라는 말인 Emperor가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군단 사령관'이라는 뜻에서 시작했으니만큼 군사 실권자인 쇼군에게 Emperor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다.[75] 일본인들의 천황 숭배 의식을 가리키는 구미권의 미카도이즘(Mikadoism)이라는 용어의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아서 설리반이 이 제목으로 오페라창작했는데 일본에서는 이 오페라가 덴노를 비하했다고 반발이 일기도 했다. #[76] 심지어 한국에서는 이것도 왕실전범이라고 하기도 한다.[77] 일왕이라는 표현은 자칫 일본인들이 자기네 군주를 격하해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한자문화권인데다가 날 일(日) 다음에 임금 왕(王)자가 붙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물론 천황이라고 쓴 책들도 많고 나무위키나 위키백과 등 인터넷 자료에서도 천황이라고 부르므로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오해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고 애초에 일왕은 '일본 (국)왕'의 줄임말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유명사는 아니다. 미국 군대를 '미군'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과 같은 용법이다.(현지 표기도 United States Armed Forces 이지 U. S. Armed Forces 같은 줄임말이 아니다.) 공수처의 정식 명칭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고 그걸 편의상 줄여서 '공수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보도가 한국인을 위주로 작성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78] 천황의 손자/손녀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다.[79] 천황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80] 경향신문의 박용채 기자는 2008년 당시 일본 왕실에서 한창 벌어지던 나루히토 당시 태자와 일본 왕실(정확히는 궁내청 안의 우익 세력) 사이의 알력을 보도하면서, 기사 전체상에서는 '일왕', '왕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기사 안에서 거론하는 하케다 신고 궁내청 장관 등 일본측 인사나 일본측 언론의 발언, 보도를 따옴표 처리로 전하면서는 '폐하', '황태자', '천황'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살리는 센스를 발휘한 바 있다. 본 기사 안에서 박용채 기자가 사용한 '주상'과 '동궁'은 일본 공식 매체 및 언론에서 버젓이 천황과 황태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는 용어다. # [81] 와닿지 않는다면 현재 천황의 작은 할아버지아들부인을 한국 언론이 언급할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자. 워낙 가십거리를 많이 날리고 다녀 언론에 자주 오르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본 황실 인사들에 대해 한국 언론이 세세히 보도할 일도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82] 중국에서도 내친왕이라는 용어는 공주라는 용어에 밀려 완벽하게 사장됐다.[83] 천황을 'Emperor'라고 쓰는 구미권에서는 친왕을 'Prince'로 부르는데, Prince에는 '왕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작위로서의 왕도 Prince로 번역된다. 예를 들어 팔왕의 난의 주역들은 모두 엄연한 일자왕 혹은 이자왕들이지만 영어로는 War of the Eight Princes라고 칭한다. 이는 서유럽 역시 King of OOO는 독립국가의 군주로, King ‘in’ OOO는 외공내왕 정도로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왕(King)이 통치하는 나라는 대부분이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화제국의 번왕이나 친왕처럼 제국의 속국으로서의 왕국은 보헤미아 왕국 등 사례가 몇 없다.[84] 일왕이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도 학술 용어로써의 천황이라는 호칭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외교석상에서의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후술.[85] 물론 이것도 한국이나 일본 안에서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는 하다.[86] 한국의 사학자 전우용은 일왕 표기를 비하, 격하라고 보는 주장에 대해 '중세적 사고방식'이라며 'President'라는 영어를 '대통령'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에서였고, 그 의식 자체에 미국의 President를 일본의 덴노(Japanese Emperor)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이런 의도를 가지고 호칭을 문제삼을 거면 '대통령'이라는 호칭부터 문제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 혹자는 이러한 전우용의 발언까지도 "이런 걸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람들이 '일왕' 표기를 격하 표현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왕은 천황의 다른 표기일 뿐'이라는 중립적이고, 비하 의도 없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반론할 이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우기지만,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하려고 드니까 니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맞다라는 식의 말은 기본적인 논리마저 결여되어 있는 우기기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는 뒤집어 말하면 천황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진짜 의도가 "쟤들이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선진국이고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쟤들이 부르는 표현을 존중하자"라는 표현상의 이유가 아니라는 걸 굳이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을 듣기에도 충분하다.[87] 박정희는 제5대, 제6대 대통령을 연임했다.[88] 천황 표기를 옹호하는 이들은 으레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격하일 뿐이며 그 배후에 민주당계 정당의 반일 선동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89] 한국에서는 한때 임정의 수반도 사용했던 '주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놈에 의해 굉장히 안 좋은 이미지로 박혀 있어서 '주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좋은 의도가 되기는 어렵다.[90]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두산백과에서도 # 총통은 '독재적 지위'라고 설명된다.[91]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 별명 나는 듣기 싫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걸 "좋은 의미로 부르는 건데 왜 화를 내냐? 속 좁게"라고 반문하는 거나 다름없다.[92] 한국에서 자국의 국가원수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총통'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감정적인' 대응은 전혀 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93] 천황이야 아키히토-나루히토 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전쟁으로 피해 입었던 아시아 국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엄연히 현실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본 내각과 정부의 수반이 그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천황이 백날 천날 사죄의 발언과 행보를 보인들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94] 일본어를 조금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일본어의 존댓말 구조란 게 인칭이나 지칭 대상에 따라서도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95] 나리카와 아야는 이미 2018년 중앙일보 정현목 기자와의 대담에서도, 아직 나이 많은 일본 사람들 중에는 천황의 사진을 집에 걸어 두고, 천황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라거나 천황과 황족을 부를 때 뒤에 '폐하'나 '전하'를 붙이지 않는 것은 결례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6년 일본 영공을 지나면서 히로히토 당시 천황에게 "폐하, 본인은 아름다운 귀국의 영공을 통과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대신해 폐하께 정중한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1984년 본인의 귀국 방문시 폐하와의 만남을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이 기회를 빌어 폐하의 건안과 귀 황실과 귀 국민의 무궁한 번영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깍듯이 히로히토를 '폐하'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리카와는 놀라워하면서 "일본을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영공을 지나면서 뭐하러 그런 메시지를 보냈단 말이냐? 속국도 아니고"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96] 전임 대통령(당시 후보)의 방송 출연을 두고 "형광등 백 개를 켜 놓은 아우라"라는 굳이 안 써도 될 낯 뜨거운 표현을 사용해 빈축을 샀던 한국의 언론도 있었다. # [97]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일본의 어느 언론이 보도했다면 그것 자체는 분명히 '역사 왜곡'이 틀림없으며, 한국에서는 그러한 일본의 언론 보도에 대해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언론사나 시민 사회가 나서서 실제 사실 관계를 들어가며 '팩트체크' 형식으로 반박하고 정정 보도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외에 한국 정부가 그런 보도를 한 일본 언론사 자체에 대한 비난이나 그 언론사에 대한 폐쇄를 요구할 수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서 침략자라고 불러도 일본 정부에서는 똑같이 '팩트체크' 형식으로 반박 내지 한국 정부에 '유감'을 표명하고 정정 보도를 요구하는 것 외에 그런 보도를 한 한국의 언론사 자체를 정부 차원에서 부정하거나 폐쇄를 요구하지 못한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도 그건 명백하게 '언론 자유'의 영역을 건드리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98] 첨언해 두자면 현대에는 '방종'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언론사들의 편향적인 왜곡 보도, 눈가리고 아웅 식의 특정 세력 편들기(혹은 무조건 까기) 기사의 남발과 그걸 '언론의 자유'를 들이대며 면피하려는 작태가 문제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 운운하며 왜곡, 편향 기사를 남발하는 그런 언론을 아예 폐쇄 내지 언론사 폭발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제재하지 않더라도 그 언론의 보도가 왜곡임을 독자인 대중이 인지하고 언론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대중 신뢰도'를 실추시켜서 공개적으로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목숨만 붙여놓았지 사회적으로는 아주 매장시켜 버리는 우회적이면서도 더 확실한 '처단' 방법이 이미 여러 가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조선일보는 언론사로서 편향적인 일부 특정 성향의 고정 구독층이나 사회적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좇선일보'라는 멸칭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며 2019년 이래 여러 기관의 통계조사에서 꾸준히 불신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이미 언론으로서의 신뢰도는 바닥을 기는, 한 마디로 언론으로서는 죽은 좀비나 다름없는 처참한 지경이다. ####### [99] 일본에서 사용되는 표기를 존중해서 천황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까짓것 일본 언론에서 천황을 '금상 폐하'라고 부르고 '~~하셨다'고 높임말을 쓰는 것처럼 '천황 폐하께서 ○○하셨다'라고 존대까지 그대로 써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다분히 냉소적인 반응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100]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준에서 자신과 가까운 이를 타자화(삼인칭화)해서 부르며 보다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추구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후세 다쓰지의 장남인 후세 간지가 아버지에 대한 평전 '나는 양심을 믿는다'를 쓰면서 굳이 '아버지'로 부르지 않고 'F씨'라고 타자화한 호칭을 써서 부르고# 문성근도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공석에서 지칭할 때 굳이 아버지가 아니라 '문 목사'라고 거리를 둔 호칭으로 부르는데, 그 이유를 "나한테는 아버지지만 세상에서는 문 목사로 통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라기보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사회적 인상이 더욱 강하기에 나도 후자를 따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101] 예를 들면 명예훼손이라든가 허위 사실 유포라든가.[102] 조선일보 1982년 8월 15일/동아일보 1984년 8월 28일 [103] 예를 들면 UN 산하의 국제 기구인 WHO 같은.[104] 사실 해당 용어에는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발발을 전후해서 보이던 여러 가지 문제적 행보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다.[105] 김활빈(2022) '지역 이슈로서 코로나19 뉴스 프레임에 관한 연구: 〈조선일보〉. 〈한겨레〉, 〈매일신문〉의 사설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61집 제3호, 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106] 심지어 대구 경북 지역 언론인 매일신문은 과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대적으로 확산 일로를 걷기 전인 1월에 해당 질병을 '우한 폐렴'이라고 쓰는 것은 특정 지역에 대한 낙인효과의 우려가 있으니 되도록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쓰라는 정부 권고에 대해 "우한폐렴 왜 안돼? "메르스도 신종 코로나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우한폐렴이라는 말이 우한이라는 지역이나 우한 사람들을 혐오하는 효과를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는 주장은 많은데 딱히 근거가 없다."며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어디서'라는 지명과 '무엇이'라는 전염병의 주요 증상을 묶은 하나의 정보로 인식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너무 생각이 많은 게 아닐까. 오히려 우한이라는 지역이나 우한 사람들을 혐오하는 현상은 누군가 바이러스 숙주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고 병을 퍼뜨려서라거나 또 누군가 우한에서 왔다거나(또는 다녀왔다거나) 등의 정보를 삐딱하게 접하며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라는 논지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후 대구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코로나19가 발발하면서 "TK 코로나라는 명칭은 지역 차별이고 낙인효과다"라는 푸념이 나왔다. # 어떤 의미로 매일신문으로써는 본인들이 했던 말을 제대로 돌려받은 셈이지만.[107]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왕' 표기를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천황' 칭호의 학술적인 차원의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 이들이 많으며, 특히 헤이케 이야기 같은 일본의 고전 번역에 있어서까지 '천황' 칭호를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굳이 '천황 폐하'라는 용어를 들먹이는 인간들도 없는 건 아니다.[108] 재미있게도 식민지 조선의 신문이나 근현대(1995년) 신문에서도 이집트 국왕을 '애급왕'/'애왕'으로 표기한 전례가 존재한다.[109] 일본 참의원 총무위원회에서 NHK에 배정할 예산을 심의할 때 가타야마 사쓰키(片山さつき) 참의원 의원이 참고인으로 출석한 NHK 회장 마쓰모토 마사유키(松本正之)에게 한 질문에도 "우리나라에서 이 왕가라는 호칭이 헤이안 시대에 일반적이었다는 역사 교육에 어느 정도 합의된 바가 전혀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 국민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런 판단을 하셨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여기에 대해 마쓰모토는 "전문가에 따르면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기에 걸친 중세사 연구의 역사, 학술적 분야에서는 당시 정치의 중심에 있던 법황을 중심으로 하는 '집안'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왕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라고 답변했다. #(138/140, 320 참조) 당시 혼고 가즈토나# 이소 도모아키 프로그램 수석 프로듀서 역시 모두 '왕가'라는 표현은 결코 천황가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週刊ポスト2012年2月3日号)라고 일본 언론에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 이때 데인 경험인지 2022년 같은 시대를 다룬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서는 '왕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110] 도쿄대 사학과 교수로 전공은 일본 중세사. 한국에는 그의 저서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 -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신과 음모>가 2022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일본에서 새로운 연호 레이와(令和)가 선포되었을 때, "令에는 '명령'이라는 뜻이 있는데 꼭 '평화롭게 지내라'라고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것 같다."라고 이 레이와 연호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일본에서 국회의원이 세습 비슷하게 대물림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원래 일본인들은 세습을 좋아했다"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과거제 같은 것도 없었고 섬나라 특성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치열한 경쟁보다는 출생으로 모든 게 납득되는 세습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씁쓸하게 지적한 적도 있다. # 혼고 가즈토는 일본의 역사탐정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해 일본사를 설명하거나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같은 일본사를 소재로 다룬 만화 작품에서 해당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 및 해설을 써 주거나 하는 등으로 일본사의 대중적 홍보에도 힘쓰고 있다.[111] 정확하게 말하면 '천황가'라고 쓰나 '왕가'라고 쓰나 어느 쪽이든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가라고 쓴 것이 꼭 사실에 맞다고도 할 수 없지만, 천황가라고 쓰는 것도 사실에 맞는 건 아니라는 얘기.[112] 다카마쓰 모모카(高松百香)[113] <「王家」をめぐる学説史> 『歴史評論』 2011年8月号 # [114] 이 '권문'은 한국사의 권문세족이라는 용어에도 나오는 그 권문인데, 한국에서와는 달리 구로다 토시오는 이 권문에 '왕가' 즉 천황과 상황의 가문들까지도 포함시킨다. 이는 천황이라는 '군주'가 정점에 군림하면서 '문신 권문'인 공가들이나 '무사 권문'인 무가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또한 공가나 무가는 무조건적으로 천황에게 복종하면서)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천황 역시도 공가나 무가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진 한 '축'으로서 기능하면서 이들 '축'이 서로 융합하고 견제하기를 반복하며 일본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15] 물론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두 개의 왕권론(二つの王権論)을 제시한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두 개의 왕권론은 덴노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를 각각 하나의 '왕권'으로 간주한다.[116] 황실이라는 용어 자체는 이미 고대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도 나온다. 구로다의 이 주장은 이전까지는 왕으로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으로 고치면서 천황 용어만을 쓰도록 했다는 게 아니라, 그전까지는 '천황'이라고 부르든 '왕'이라고 부르든 이중 어느 한쪽이 경칭이라거나 격하라거나 하는 인식이 없었던 것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만이 높이는 칭호이고 왕이라는 칭호는 낮추는 칭호라는 인식을 메이지 신정부라는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립시키고 대중에 프로파간다로 퍼뜨렸다는 것이다.[117] 구로다 토시오 '중세 천황제의 기본적 성격', 1977.[118]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일본 역사는 결코 군주인 천황이 주도해서 뭔가를 운영하거나 결단한 역사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일본이라는 '왕국'의 역사에서 군주의 역사는 조선과 같은 군약신강을 넘어서 그냥 군주가 셋칸 혹은 쇼군의 권력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어서 연명하는 구조로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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