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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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 문서
고려 문종 시기의 문신. 일반적으로는 해동공자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등장한다.
여요전쟁이 종결된지 1년이 지난 1020년에는 중서문하성 기거사인에 임용되었으며, 1024년에는 중추원직학사, 1025~1026년에는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 및 한림학사 지공거에 임명되었다. 1025년에는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을 지었고, 이듬해인 1026년에는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몇몇 인물들을 정계에 선발하였으며, 홍경사 비문을 지은 공로로 태자중윤에 올랐다. 거돈사의 탑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물 제78호, 홍경사의 비갈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1030년에는 현종의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태자유우덕에 임용되었고, 이듬해인 1031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표문을 공표하였다. 이후 덕종 대부터 형부상서 등 여러 관짐을 역임하였고, 정종 대에는 중추형부상서, 상서우복야, 상서좌복야, 문하시랑 등에 등용되었다.
1046년에 최충은 당시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 등과 함께 선정전에 모여 문종과 정사를 논의하였다. 최제안 사후 이듬해인 1047년에 최충이 문하시중에 등용되어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는 공신을 위한 공음전시법, 세금을 면제하는 재면법, 세금을 감면하는 담험손실법, 노약자를 우대하는 구휼법, 중죄인을 심문할 때 3인의 형관이 공정한 재판을 심의하는 삼원신수법 등을 공표하여 민생안정을 위하여 힘을 썼다. 1049~1050년에는 사추충찬도공신에 올라 원로 대신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고, 복지정책을 실현하여 봉양할 이가 없는 고아, 과부, 홀아비, 폐인, 병자 등을 편안히 보살폈다. 같은 시기에 서북지역의 휼민대책을 건의하였고, 당시 고려의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들을 석방하여 그들과의 친선 외교를 도모하여 공신 작위를 받았다.
1053년 음력 12월에 최충은 문종에게 퇴직을 청하였지만, 문종은 허락하지 않고 예법에 의거하여 편한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약 1년 반 정도가 지난 1055년 음력 7월에 최충은 약 칠순이 되어서야 퇴임하였다.
<보한집>은 최충의 집은 누각이 12개나 있고 화려한 것이 마치 옥청의 집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저자 최자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는데 재상 집은 이 정도였다며 놀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과 문벌귀족의 사치를 엿볼 수 있다. <보한집> 권상에 따르면 최충은 두 아들에게 사치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 문종이 연회를 열었는데 늙은 재상 최충이 두 아들 재상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자 사람들이 상서령이 중서령을 돕고 온다며 다들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당시 해주 최씨 가문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해동의 공자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 그의 학문과 인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은 별로 현존하는 것이 없다. 무신정변 이후 문신들이 대거 살해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공자에 비견되는 사람의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문종은 1058년에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예물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1065년에는 그에게 양평부원군 등의 작호를 내렸다. 1068년에 그가 서거하였을 때에 백성들 및 문종은 그를 기리는 조문을 썼고, 유학 교육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공 덕분에 사후에도 사학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렸다.[6][7]
최충은 최유선, 최유길(崔惟吉)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최유선은 최사제(崔思齊)를, 최사제는 최용(崔湧)을, 최용은 최충의 고손자 최윤의를 낳았다.
차남 최유길은 최사추를, 최사추는 조선국공 이자겸의 아내 조선국대부인을, 조선국대부인은 예종의 아내 문경태후를, 문경태후는 최충의 외고손자 인종을 낳았다. 인종 이후의 모든 고려 국왕은 인종의 직계 후손이므로 그들은 최충의 방계 후손이기도 하다.
여몽전쟁 당시 제1차 자모산성 전투에서 빛을 발한 최춘명[8] 은 최충의 8대손이며 훈민정음 반대 상소로 유명한 최만리는 12대 후손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도 그의 후손이다.
보한집에서는 최충 문하생의 두 부류를 소개한다. 정종 원년(1035) 진사시에 급제하고 상서 등 관직에 오른 10명은 상서방(尙書牓)이라 불렸고, 문종 37년(1083)에 급제하고 뒤에 관직을 떠나 은거한 두명은 처사방(處士牓)이라 불렸다. 처사방이 급제한 과거에서는 명망있는 관리가 된 사람이 없었는데 처사방은 관직까지 버렸으니, "모름지기 상서 합격패(尙書牓)에 이름을 올려야 하거늘, 검소하게도 처사과에 급제했구나."[須占尙書牓, 休登處士科.]라고 조롱을 듣기도 했다.
상서방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아직 최충이 현역 관료로 있을 때의 일이므로 이들이 9재 학당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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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고려 문종 시기의 문신. 일반적으로는 해동공자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등장한다.
2. 생애[3][편집]
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최충은 1005년 목종 대에 실시된 갑과에 장원급제를 하였고, 옛 고구려 영토인 해주 출신이었던 그는 고구려 수도였던 서경에서 7품 지방관직인 장서기(掌書記)로서 정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제2차 여요전쟁이 벌어진 1010년에 행영도통사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의 행영 수제관(修制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참전한 공을 인정받은 듯 전쟁이 끝난 해인 1011년에 우습유로 임명되었으며, 1013년에는 후술되었듯 수찬관으로서 감수국사인 최항 등과 더불어 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016년에는 우보궐로 승진한다.
여요전쟁이 종결된지 1년이 지난 1020년에는 중서문하성 기거사인에 임용되었으며, 1024년에는 중추원직학사, 1025~1026년에는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 및 한림학사 지공거에 임명되었다. 1025년에는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을 지었고, 이듬해인 1026년에는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몇몇 인물들을 정계에 선발하였으며, 홍경사 비문을 지은 공로로 태자중윤에 올랐다. 거돈사의 탑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물 제78호, 홍경사의 비갈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1030년에는 현종의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태자유우덕에 임용되었고, 이듬해인 1031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표문을 공표하였다. 이후 덕종 대부터 형부상서 등 여러 관짐을 역임하였고, 정종 대에는 중추형부상서, 상서우복야, 상서좌복야, 문하시랑 등에 등용되었다.
1046년에 최충은 당시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 등과 함께 선정전에 모여 문종과 정사를 논의하였다. 최제안 사후 이듬해인 1047년에 최충이 문하시중에 등용되어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는 공신을 위한 공음전시법, 세금을 면제하는 재면법, 세금을 감면하는 담험손실법, 노약자를 우대하는 구휼법, 중죄인을 심문할 때 3인의 형관이 공정한 재판을 심의하는 삼원신수법 등을 공표하여 민생안정을 위하여 힘을 썼다. 1049~1050년에는 사추충찬도공신에 올라 원로 대신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고, 복지정책을 실현하여 봉양할 이가 없는 고아, 과부, 홀아비, 폐인, 병자 등을 편안히 보살폈다. 같은 시기에 서북지역의 휼민대책을 건의하였고, 당시 고려의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들을 석방하여 그들과의 친선 외교를 도모하여 공신 작위를 받았다.
1053년 음력 12월에 최충은 문종에게 퇴직을 청하였지만, 문종은 허락하지 않고 예법에 의거하여 편한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약 1년 반 정도가 지난 1055년 음력 7월에 최충은 약 칠순이 되어서야 퇴임하였다.
2.1. 은퇴 이후[편집]
최충은 은퇴 이후 총 9곳의 학당이라는 뜻의 '9재학당'을 세워 문관을 배출했다. 이른바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인데 '최 시중의 공도들'이란 뜻으로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이다. 당시 국립 교육 기관이었던 국자감이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직 시험관으로서 직접 돈을 들여 창설한 것. 의도는 좋았는데 문제는 학벌을 만들어 버렸다는 것으로 최충의 학당에서 공부한 문하생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사학을 열어서 사학 12도가 완성된 것도 모자라 현재의 입시 위주 교육을 하는 학교처럼 되어 버렸고 뽑아준 시험관들과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의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일이 발생한 것.[4] 최충의 9재 학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그의 경력도 강하게 작용했는데 최충은 장원 급제를 한 뒤에 외교 문서 작성 및 서연과 과거 시험에도 관여하는 한림학사, 교육+외교+예법+제사+과거 시험을 담당하는 예부시랑,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과거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지공거는 여러 번 역임했다.[5]
<보한집>은 최충의 집은 누각이 12개나 있고 화려한 것이 마치 옥청의 집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저자 최자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는데 재상 집은 이 정도였다며 놀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과 문벌귀족의 사치를 엿볼 수 있다. <보한집> 권상에 따르면 최충은 두 아들에게 사치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 문종이 연회를 열었는데 늙은 재상 최충이 두 아들 재상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자 사람들이 상서령이 중서령을 돕고 온다며 다들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당시 해주 최씨 가문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해동의 공자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 그의 학문과 인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은 별로 현존하는 것이 없다. 무신정변 이후 문신들이 대거 살해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공자에 비견되는 사람의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문종은 1058년에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예물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1065년에는 그에게 양평부원군 등의 작호를 내렸다. 1068년에 그가 서거하였을 때에 백성들 및 문종은 그를 기리는 조문을 썼고, 유학 교육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공 덕분에 사후에도 사학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렸다.[6][7]
3. 후손[편집]
최충은 최유선, 최유길(崔惟吉)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최유선은 최사제(崔思齊)를, 최사제는 최용(崔湧)을, 최용은 최충의 고손자 최윤의를 낳았다.
차남 최유길은 최사추를, 최사추는 조선국공 이자겸의 아내 조선국대부인을, 조선국대부인은 예종의 아내 문경태후를, 문경태후는 최충의 외고손자 인종을 낳았다. 인종 이후의 모든 고려 국왕은 인종의 직계 후손이므로 그들은 최충의 방계 후손이기도 하다.
여몽전쟁 당시 제1차 자모산성 전투에서 빛을 발한 최춘명[8] 은 최충의 8대손이며 훈민정음 반대 상소로 유명한 최만리는 12대 후손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도 그의 후손이다.
4. 경력[편집]
4.1. 실록 편찬[편집]
제2차 여요전쟁으로 인해 고려 왕실이 제작한 실록이 사라졌다. 1013년에 현종은 자신의 앞 7명 국왕의 기록을 다시 모으고자 했고 이에 사관을 재정비해 이른바 '칠대사적(七代史籍)'을 편찬하였다. 1037년 정종 대에는 참지정사 수국사에 임명되어 현종실록 및 덕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가 제작에 참여한 실록들은 조선시대까지 내려와 고려사의 주요 인용자료가 되었으며, 조선 왕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고려 전기 역사에 대해 연구할 때에 큰 도움이 된 셈이다.
4.2. 문하생[편집]
보한집에서는 최충 문하생의 두 부류를 소개한다. 정종 원년(1035) 진사시에 급제하고 상서 등 관직에 오른 10명은 상서방(尙書牓)이라 불렸고, 문종 37년(1083)에 급제하고 뒤에 관직을 떠나 은거한 두명은 처사방(處士牓)이라 불렸다. 처사방이 급제한 과거에서는 명망있는 관리가 된 사람이 없었는데 처사방은 관직까지 버렸으니, "모름지기 상서 합격패(尙書牓)에 이름을 올려야 하거늘, 검소하게도 처사과에 급제했구나."[須占尙書牓, 休登處士科.]라고 조롱을 듣기도 했다.
상서방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아직 최충이 현역 관료로 있을 때의 일이므로 이들이 9재 학당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은 낮다.
5. 대중매체[편집]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김선빈이 연기했다. 사실상 최충이 등장하는 최초의 드라마이다. 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 문서의 최충 문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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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주 최씨 대종회 기록 986년.[2] 자세한 일대기는 해당 링크 참조.[3] 자세한 일대기는 해당 링크 참조.[4] 조선시대에는 붕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현된다.[5] 현대로 따지면 고등고시 수석 출신에 고등고시 출제 위원장, 청와대 사회수석, 교육부 차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입시 학원을 차린 셈. 그야말로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6] 아쉽게도 끝내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는데,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불교에 오염된(...) 신라와 고려에 박하여 고려는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과 정몽주만이 문묘에 들어갔다. 그렇게 따지면 설총은 승려의 자식인데? 하긴 이이도 한때 입산하여 불도를 닦긴 했다.[7] 그러나 중앙과는 다르게 지방의 문묘에서는 최충과 그 아들 최유선을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8] 아이러니하게도 최춘명을 구명한 것은 몽골의 다루가치였다. 살례탑과 항복을 권유하러 갔던 고려 관료이자 대집성은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주장하여 그대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가 그는 우리에게는 적이었으나 너희에게는 충신이요, 이미 강화를 맺고 우리도 그를 죽이지 않은 마당에 너희가 스스로 끝까지 성을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하고 꾸짖었다고.[9] 명예 품계로는 무산계, 향직 품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