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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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끝나지 않는 울림"
-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의 소개 문구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사회운동가.[12]
흔히 알려져 있는 별명은 가객(歌客). 진정성 있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많은 명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로, 대한민국에 포크송 붐을 일으켰던 가수이다.
짝사랑할 때는 '사랑했지만', 입대할 때는 '이등병의 편지'[13] , 이별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살 때는 '서른 즈음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할 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의 곡으로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1964 - 1982)[편집]
대구시 출신으로, 남구 (당시) 대봉동 태생이다. 5살 때이던 1968년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16]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17] ,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는데 반해 그의 상징과도 같은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다소 늦은 편인데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 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친구한테 선물로 '젊은 예수'[18] 라는 민중노래를 엮은 노래책을 받게 되고[19] 수록곡들을 따라 부르며 골방에서만 듣던 노래들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부르는 민중가요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2. 활동 초기부터 노찾사 활동까지 (1984 - 1988)[편집]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GamyLyingHurtNeed, 합의사항1=다음에 해당하는 문화예술인은 '운동가' 분류에 삽입한다.
1. 진보적 운동(노동운동, 사회운동 등)을 기반으로 한 민중예술을 하는 예술가 2. 진보적 시민단체 운동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3. 민주노총의 구성원과 정파 활동을 하는 문화예술인, 다음에 해당하는 문화예술인은 ‘정치인’으로 분류한다. 1. 진보정당의 당원인 문화예술인 2.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문화예술인 )]
1984년 그는 김민기의 「개똥이」 노래극에 참여한 것[20] 이 계기가 되어 이때 함께 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한다. 이때 김민기의 학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김광석은 가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21]
1985년 1월 김광석은 군에 입대했으나 맏형인 김광복이 이전에 군에서 사고사하여 6개월을 복무한 후 7월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인 1986년 8월 1일, 김광석은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앞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열었지만 워낙 후배 가수들과 동료들에게 공짜로 대접하는 바람에 얼마 영업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87년 5월 31일, 노래패 멤버들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일환으로 김광석을 포함한 13명이 모여 발매한 음반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 발매되었다. '녹두꽃'을 포함한 김광석이 솔로로 부른 노래들이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모두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의 코러스로만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87년 10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키며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 가수로 떠올랐고, 이후 김광석은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1987년 여름, 김광석, 김창기 등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청년 7명이 모여서 자그마한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고, 산울림의 김창완이 이들의 노래를 듣고 정식으로 음반을 내자고 권유하여 1988년 7인조 그룹 동물원의 1집이 세상에 나온다.
별 생각없이 낸 음반이었기에 김창완은 이들의 음반을 작업하면서 반농담으로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거다."라는 생각을 했고, 미약한 팬층이라도 확실히 확보하자는 의미에서 '가수 이름을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라고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 자신 또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적었다.
결국 듣는 사람보다 자신들만 좋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아무 기대 없이 두 번 공연을 했는데 의외로 잘 팔리기 시작했다. TV에도 나가고, 라디오에도 나가게 되었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동물원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가수는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이었다. 1집 음반이 잘 팔리자 2집 음반도 제작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하나 둘 취직을 하기 시작하면서 김광석 혼자밖에 무직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22] 김광석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23] , 그리고 완전히 프로로 데뷔하기 위해 9개월 후에 발매된 동물원 2집의 활동 이후 동물원을 나온다.
2.3. 솔로 활동 (1989 - 1996)[편집]
1989년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1년 10월 14일부터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4일,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25] 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요구 받았지만 방송법에 이러한 권한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광수 교수는 3개월, 김광석은 1개월 동안 불교방송에서만 방송 출연금지를 받았다. 뉴스1 뉴스2[92고단10092]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 등 그를 대표하는 여러 곡이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26]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를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27] 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 60대 노부부들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 18일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1월 23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그의 마지막 7시간 30분[28] 은 사망 문서에서 후술한다.
2.4. 사망[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의문사 음모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음악성[편집]
3.1. 가창력[편집]
김광석에 관하여 설명할 때, 흔히 '진정성이 있는', '마음을 울리는', '우리들의 감정을 건드려주는 목소리' 등등의 말들. '전위적인 실험정신을 지닌', '뛰어난 기교를 지닌' 등의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김광석을 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없다. 그가 생전에 부르고 만들었던 노래와 앨범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내기란 솔직히 어렵다. 기교라는 측면에서건 아니면 전위성이라는 측면에서건, 김광석보다 훌륭한 대중음악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차라리 빠를 것이다. 다만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혹은 그가 남기고 간 노래가 청자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짧게 소개하는 것으로 본 항목의 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의 노래를 들은 혹자는 김광석을 가리켜서 가객, 노래하는 시인, 노래하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김광석이 광석이 형, 오빠, 아저씨라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남아있는 가수라고도 말한다. 가객과 광석이 형이라는 두 표현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꽤나 넓다. 한쪽은 위인전의 소재목으로나 쓰일 법한 단어이고 다른 한쪽은 친근한 일상어라는 사실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김광석과 김광석의 노래는 저 두 단어 사이의 간극, 그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 셈이다. 김광석을 '가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광석이 형'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판단은 물론 당신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김광석이 감정만 좋고 노래 실력은 그렇게 좋다곤 볼 순 없는 옛날 가수인지 아니면 노래 실력은 아쉬우나 감정과 가사의 전달력은 지금도 훌륭한 현재진행형 가수인지에 관한 판단의 몫 역시 본 문서를 읽고 있는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김광석의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음색과 거기에 실린 짙은 감정 때문이다. 특히 김광석의 바이브레이션은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29]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30][31][32] 이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영화 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꽤나 주목받기도 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김광석은 노래할 때 또박또박하게 발음한다. "광야에서"의 가사 중,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다만 처음 이 곡을 부른 안치환 또한 '흙이여'를 [흘기여]라고 발음하므로 이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라이브 공연에서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진다. 감정을 많이 실어서 부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인지, 단순히 발음 뿐만 아니라 음정을 내뱉은 입술의 모양도 불안정해진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김광석의 다른 공연 영상들을 보면 일부러 입술을 작게 한다거나 이를 앙다물고 노래를 부르는 등 발성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음낼 때 후두가 너무 올라가서 짜내듯이 소리가 나오는 인골라, 작게 벌리는 입,[33] 목을 잡는 소리[34] 등이 대표적이다. 즉, 좋지 못한 발성으로 노래를 하다보니 테크닉적으로도 떨어지는 것. 발성과 테크닉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김광석이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은 커녕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은 트레이닝도 받은 적이 전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테크닉으로 점철된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그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비유컨대 프로바둑선수에게 왜 정석대로 두지 않느냐고 하는 꼴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과 연륜[35] 이 있고 그 목소리로 자신이 부른 곡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가창력이란 결국 노래를 표현하는 능력,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광석은 자신의 곡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므로 엄청난 가창력의 소유자이며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김광석은 생전에 저런 창법으로 10년 넘게 녹음과 공연을 수없이 해왔음에도 라이브에서 기복이 거의 없었다. 김광석은 심지어 1000회 라이브 기록을 세워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가수 기준으로도 라이브 활동을 많이 갖는 가수였으며, 그럼에도 당대에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로 통해 대학 축제 등 여러 무대에서 사랑받던 사람이다.[36]
그런데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곡에선 3옥타브 레의 고음을 라이브에서도 원키로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즉 이것은 교과서적이지 못하단 소리를 들어도 본인에겐 노래하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 창법이었단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김광석의 발성이 좋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김광석 입장에선 큰 무리도 가지 않고 노래 표현에도 알맞은 좋은 창법인 것이다.[37]
애초에 대중음악은 성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성공한 가수들이 클래식에서 말하는 정석과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창법을 쓰며, 사람의 성대 역시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김광석이 저런 창법을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지점들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힘든 이유도 명확해진다. 흔히 김광석을 가리켜 '우리에게 독특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 음악가'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목할 부분은 '독특함'이다. 그 독특함은 그가 누구나 보편적으로 쓰는 효율 좋은 발성법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요즘에는 실용음악의 발달로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안정적인 발성을 배우고 데뷔를 준비하지만, 그때의 김광석은 뛰어난 발성보단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갈고 닦는데 더 집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에는 보기 어려운 김광석의 독특한 개성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지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는 점이다.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김광석을 그리워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3.2. 그의 천재성에 대하여[편집]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러하겠으나 김광석도 사실 타고난 천재라기 보다는 엄청난 노력가였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가장 유명한 천재들 중 하나라고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도 실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조기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다. 물론 그의 천부적인 재능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차르트 역시 거의 일중독자로 볼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즉 많은 이들이 말하는 소위 천재성이란 것은 사실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보지 않고 결과물들만 본 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한번 김광석이 만들거나 참여한 초기 앨범들과[38] 중기 앨범[39] , 다시 부르기 1~후기 앨범[40] 들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초기 앨범들이 그 뒤의 앨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초기 앨범 속에서도 몇곡의 노래들은 그 나름대로 빛나는 좋은 음악들이지만,[41] 그럼에도 적지 않은 곡들이 그 음악적인 면에서나 가창력 즉 노래적인 측면에서나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곡들이다. 작곡적인 측면에 있어도, 1집의 수록곡 중에서 김광석 본인이 작곡한 곡은 5곡이지만 그중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말할 수 있는 곡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발매한 4집 앨범 중에서 김광석이 작곡한 곡 4곡 중에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점하고 있으며, 곡의 질 또한 월등하게 높은 편이다. 게다가 김광석은 사망 전에 제작하고 있었던 5집 앨범에서도 자작곡을 다수 수록할 예정이었다. 즉, 작곡적인 측면을 봐도 크게 발전한 것.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4집 앨범이나 2장의 다시부르기 앨범 중에서도 특히 2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3집이나 특히 다시부르기 1집은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 달리 말하면 김광석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찾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앨범으로 평한다. 이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을 높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후기 앨범들(4집과 다시부르기 2집)이 이룬 성과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뒤늦은 음악적 성취가[42] 그의 성실성이나 노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가 성실하고 노력가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소극장 공연을 1000회나 했다. 그가 처음 대학로에서 소극장 공연을 한 날은 91년 7월 1일이었고 1000회를 달성한 년도는 95년 8월 11일인데 91년 ~ 95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2일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발매 년도를 살펴보면 1집(89년) - 2집(91년) - 3집(92년) - 다시부르기 1집(93년) - 4집(94년) - 다시부르기 2집(95)년 순이다. 1집에서 2집의 2년 공백을 제외하면 전부 1년 마다 앨범 작업을 한 셈이며 새 앨범들은 전의 앨범들 보다 음악적으로도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로 판단컨대, 그의 음악적 성취라는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도 일부 있겠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4.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편집]
4.1. 노래[편집]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하였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다. 원래는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43] 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44] ,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해나간다. 당시 김광석의 곡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11년 6월 즈음부터 SK텔레콤에서 아이유와 듀엣으로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내용의 광고가 제작, 방영되었다. 링크 CG로 재현된 것.
김광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는 이 광고를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의 본좌인 김광석의 이미지에 편승해서 아이유를 그만큼 노골적으로 띄워주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보는 시선이 더 크다. 애초에 김광석만큼 서른 즈음에를 잘 부르는 가수 찾는 게 너무 힘들다. 아이유의 팬들로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합성 CF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잡음처럼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아이유 본인은 해당 광고 제안에 김광석에 대한 오마주의 의도로 응한 것으로 보인다.[45] ,
2013년 김광석의 노래들을 기초로 한 뮤지컬 <그날들>이 대학로에서 초연되었다.
2013년 지산월드락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유명 밴드 Weezer가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된 '먼지가 되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국 팬들에게 제대로 된 팬서비스였다는 후문이다. 보러가기
히든싱어2 12회는 김광석 편으로 꾸며졌다.
이미 고인이 된 가수였던 데다가, 당시 음반도 전부 아날로그 방식이었던지라 불가능할 듯했으나, 제작진은 김광석의 음성을 디지털로 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화제였던 만큼 시청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레전드 TOP 10의 1위를 차지했다.
2014년 3월에 김광석 오마쥬 '나의 노래' vol 1,2,3가 발매되었다. 인디씬 아티스트들이 곡들을 재해석한 앨범이다. ###
김광석이 속했던 그룹의 멤버인 김창기가 2013년에 발표한 정규 2집의 타이틀곡이 '광석이에게' 이다.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김광석을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는 내용의 곡이며, 김광석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나의 노래'를 단조 형식으로 편곡한 곡이라고 한다.
4.2. 도서[편집]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수기, 작가 주변 인물들의 김광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출간한다. 2017년 기준으론 절판된 상태이다.#
2013년 말에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메모, 편지, 문서[46] 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 <미처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다. 책 뒷면에 김광석이 남긴 작곡 노트가 있는데,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미완성된 가사들[47] 을 그대로 실었다. 이로 인해 페이지의 절반 넘는 부분이 미완성된 채 비어 있는데, 보고 있으면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이 페이지가 다 차서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평이 많다. 이 외에도 <김광석 악보집>과 노래 가사 모음집 <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앤솔로지>등이 있다.
4.3. 뮤지컬[편집]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이 초연되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으로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Mamma Mia'(ABBA]) 외에도 'All Shook Up,'(엘비스 프레슬리), 'We Will Rock You'(퀸),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2016년에 김광석 20주기 기념으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그 여름, 동물원'이 시작한다. 2016년은 김광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4.3.1. 그날들[편집]
2013.4.4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2016년 충무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이 올라갔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주크박스 뮤지컬.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오종혁, 오만석, 민우혁, 강태을, 양요섭 등이 출연했다.(#)
김광석의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작법으로 편곡하고 일부는 매쉬업했다. 이런 탓에 혹자는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지만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부모님께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는 편지를 보내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뮤지션의 감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을 구축한 것이 단점이자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출가 장유정은 이런 비판에 대해 그의 음악 특유의 정서는 극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은 편이다.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한중수교의 비밀을 덮으려는 정부와 그 사건에 휘말린 두 남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과거와 영애양이라는 지위의 무게에 환멸을 느끼는 영애양과 경호인 대식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현재가 대응을 이뤄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장유정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다만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4.3.2. 바람이 불어오는 곳[편집]
2012년 11월 30일 대구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광석 추모 뮤지컬의 대표주자이다.
(사실, 2008년 5월 15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회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뮤지컬이 아니었음)
대구 초연 이후에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이후, 현재 2017.11.10~2018.1.21 예그린 시어터까지)
참고로, LP STORY 기획사(대표:이금구)에서 제작한 공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이풍세 역의 최승열은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우승은 김광석... 의외로 표차는 크지 않았는데 김광석 45표 최승열 35표.
박창근은 내일은 국민가수에 출연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4.3.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편집]
(2013.12.19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 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세 개의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 등이 출연했다.#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럼에도 또 김광석의 이름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이 장면은 프리뷰 1회 공연 후 어색함을 이유로 삭제되었다. 대중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으로 특히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중년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않았다. 후에 제작을 맡은 NEW 대표 김우택은 영화 7번방과 뮤지컬 디셈버의 흥행수익이 엄청났다고 회고했다.
4.3.4. 그 여름, 동물원[편집]
4.3.5. 우리들의 사랑[편집]
4.4. 남긴 것[편집]
국내의 장덕, 김현식, 유재하, 신해철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비운의 천재'로 평가받는 가수 중 하나이다. 그의 예술적 재능이 우선된 이야기지만, 인품마저 겸비했으니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그를 본받는 가수들이 계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가수이고 인물이었다.
그는 19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이 그 뒤를 잇고 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2000년대 이후로 인터넷에서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고,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쿨하지 못하다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김광석만은 까는 사람이 없다. 처음에는 그의 음악적 전달력에, 그리고 그 이후에 알게 된 그의 인품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남긴 이야기 또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사색을 담고 있어 호평. 그의 사후 발표된 추모 음반에는 아예 이 이야기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중 '이야기 하나'에서 루저의 설움을 너무나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중략) 얼마 전에 후배를 하나 만났는데 올해 갓 서른이에요.
"형. / "왜?" / "답답해." / "뭐가?" / "재미없어." / "아 글쎄 뭐가?" / "답답해."/ "너만할 때 다 그래."
/그 친구 키가 180이에요. / "형이 언제 나만 해 봤어?" / "...그래 나 164다. 숏다리에 휜다리다. 왜?"
또한 그는 모터사이클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수록이 되어있다.
일부분만 잘라내서 이렇지 '이야기 하나'의 진지한 부분은 한 번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다. 이 부분은 EBS의 지식채널e(#)로 제작되기도 했으니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중략) 마흔 살 되면 오토바이 하나 사고 싶어요. 돈도 모아놨어요.
그 얘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상당히 걱정을 하시대요?
"...다리가 닿겠니?"(후략)
그거 타고 세계일주 하고 싶어요. 괜찮겠죠?(청중들 웃음 & 박수)
박찬욱이 2000년에 감독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가 OST로 삽입되었으며 영화의 히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간혹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이 가사에서 반복되는 '그대 잘 가라'를 제목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12년 9월, 네이버 지식인에 누군가가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올렸다. 그리고 이런 답변이 달렸다.
이 촌철살인급 답변은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받아 성지가 되었다.(#)"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여담으로 '다시 돌아온 그대' 라는 미발표곡이 히든싱어2에서 방송 최초로 공개되었다. 김광석의 유작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인데 김광석의 음악을 사용하는 디셈버라는 뮤지컬의 출연진들이 나와 미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방송에 패널로 출연한 김광석의 절친인 동물원 출신의 김창기는 이 노래는 자기가 만들어 김광석한테 줬으나 김광석이 버린 노래라고 하였다.
4.5.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음반 목록[편집]
[ 앨범 목록 ] - 커버 1집}}}}}}{{{-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다시 부르기 1
1993. 3. 2. ||-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000,#fff 커버 2집}}}}}}
1995. 3. 1. || || ||}}}
[ 사후 앨범 ] - 라이브}}}}}}{{{-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인생이야기
1996. 8. 13. ||-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000,#fff 라이브}}}}}}
1996. 8. 13. ||-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000,#fff 대표곡}}}}}}
2001. 4. 1. ||-4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000,#fff 리메이크}}}}}}
2016. 12. 7. ||}}}
[ 관련 문서 ]
5.1. 기타[편집]
- 배트를 들라
5.2. 사후 출시된 앨범[편집]
김광석이 직접 낸 게 아니라 세상를 떠난 후 추모앨범,다시부르기1,2,김광석 베스트, 김광석 나의 노래 BOX등의 앨범이다. 김광석의 사후 앨범 확인 정보는 비트(BEAT),[49] 네이버 뮤직로 확인.
- 김광석 인생 이야기,노래 이야기(1996.7.1) : 김광석이 생전 소극장에서 부른 노래들를 모은 앨범이다. 즉 쉽게 말하다면 라이브 음반.
- 1+2(1998.7.1) : 1+2가 발매된 같은 날 가객- 부치지 않은 편지도 같이 발매.
- 가객-부치지 않은 편지(1998.7.1) : 같은 날 1+2도 발매.
- 다시부르기 1(2000.7.1) : 생전 다시부르기 1를 다시 판매 한것 같다. 이등병의 편지 라이브 버젼도 있다.
- Anthology 1(2001) :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후 2001년에 낸 추모앨범,김광석의 대표곡과 김광석이랑 친분이 있던 가수들이 부른 앨범이다. 참여한 가수들은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안치환, 김창기, 박학기, 여행스케치 등 꽤 인기가 있는 가수들이나 김광석의 절친한 친구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불렸다. 타이틀 곡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이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 모두가 함께 녹음한 합창곡.
- 5집 The Classic(2001) : 김광석의 대표 곡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앨범. 5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보니 김광석의 정규 앨범으로 착각되는데 절대 정규 앨범이 아닌 리메이크 앨범이다.
- Collection - My Way (1964 ~ 1996)(2002) : 김광석의 정규 앨범중에 인기가 좋았던 노래만 묶어서 판매한 노래. 즉 다시부르기에서 녹음한 노래가 아닌 원곡 노래만 모은 앨범이다. Disc 3에서는 미공개곡과 이미 발표된 곡의 미공개 버전, 라이브 버전 곡 등이 담겨져 있다.
- 김광석 베스트(2005) : 김광석의 인기 곡(베스트 노래)들만 모음.
- 김광석 셋,넷(2006) : 김광석의 정규앨범 3,4집을 묶음.
- 다시부르기1,2(2006) : 다시부르기 1,2를 묶음.
- 인생+노래 이야기(2007) : 1996년에 냈던 인생+노래 이야기를 묶음.
- 나의 노래 BOX SET(2012.7.9) : 김광석의 정규앨범+다시부르기1,2+인생,노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앨범.
- Unforgettable(2012.8.9) : 소개 저작권 때문인지 이 앨범의 경우 직접 앨범을 사서 들을수 밖에 없다.
-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2014.11.11) : 4집을 리마스터링 한 앨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에선 원곡과 꽤 차이가 있다.
- 연결의 신곡발표 프로젝트(2015. 10. 30) : 김광석의 미완성곡을 심현보, 성시경, 정재일[50] , 이지혜[51] 등 여러 사람들이 완성시켜 만들어진 신곡이다. 부른 가수는 성시경. 편곡은 심현보와 정재일. 하지만 김광석의 곡이라는 느낌보다 성시경-심현보의 느낌이 너무 강했는데다가 이 프로젝트 자체가 대기업 SK에서 내놓은 프로젝트인지라 호불호가 갈렸다. 호불호가 갈렸던 것과는 별개로 성적은 꽤 좋았던 편.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2016.4.27.) :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를 재발매한 앨범.슬픈 노래, 광야에서, 그대 웃음소리 등 3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LP에 스크래치에 손자국이 많아 수많은 구매자들이 환불을 요구한 바 있다. LP 표지는 민중화가 이종구가 디자인했고, 더블게이트식 양장형 LP커버, LP속봉투 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아트 콜렉터스 에디션 #2(2016.8.25) '전작과 다른 공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저번 레코드판에 흠집이 많아 구매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다시 발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창우 화가가 LP표지를 디자인했다. 제작 공장과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바뀐 것이 없다.
- 김광석, 다시(2016.12.7) : 12월 1일에 가수 정인과 콜라보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먼저 공개되었고 12월 7일에 로이킴과 콜라보한 김광석의 1집노래인 너에게 등 9곡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6. 어록[편집]
끝 인사'는 이런 말을 하겠습니다.
"행복하셔요" 인데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사시고, 보람도 느끼시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행복하셔요.
― 콘서트를 비롯해 그가 언제나 사람들과 헤어질 때의 인사말인 '행복하세요'에 대한 본인의 설명[52]
[53]
아저씨..가슴이 두근거리면 사랑인가요?
1995/06/28 15:46 | 외기러기 ( 이연수 ) | 조회 56
음.. 그냥 질문이기보다는 좀 그런..
좀 인생선배로써.. 한가지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뭐랄까, 좀 관심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나도 근1년이 지나고도
그 사람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게 사랑일까요? 아니면, 뭘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 사람 앞에서는 너무 작아보이는 제 자신이
너무 애처러워 보입니다
[to연수]사랑의 시작이 설레임일까요?
1995/06/29 23:31 | 김광석 (김광석) | 조회 217
(중략)
내 기본적인 생각은,
'시도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아프고 깨지더라도 시도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일텐데,
그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것은, '만나서 서로 자잘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서로를 얼마나 많이 이해할 수 있는가' 가 중요한 것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시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시도하는 방법은 알아서 하기를
“다음 곡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인데요. 사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 (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에,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많이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54]
“그,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뭐, 스스로 투자한 시간이나, 주었던 정이나, 이게 아까워서 아플수도 있구요. 혹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줘서, 그럴수도 있구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아플수도 있습니다. 여튼. 근데 안아프면, 사랑이라고 할수가 없겠죠? 그만큼 희생이 따르고, 그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
? 제가 공연을 많이 하는 이유 ?
1995/07/21 20:44 | 김광석 ( 김광석 ) | 조회 639
(중략)
무엇보다도 공연을 하면, 내 스스로의 존재가 확인도 되고,
가수로서 보람도 가장 크더군요
해서 기회가 되는데로 큰공연 작은공연 가리지 않고
하다 보니 8월1일부터 하는 학전 소극장 공연에서
1000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수로서 열심히 살아왔구나' 라는
자기만족도 있습니다만,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내 스스로 선택한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려 노력할겁니다
“1000회는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매 회 (기타) 한줄 한줄 정성들여서 쳤지요. 그렇다보니 1000회 되데요.. ”
― 김광석. 1995년 8월 11일 1000회 콘서트 중에서[55]
“주변에, 살아가시는 분들이 다들 자기 직업에 충실해서 직장 다니시고 그러듯이, 저도 제 가수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연 열심히 하다 보니까 1,000회 되데요?”
― 김광석. 1995년 8월 11일 1000회 공연 기록 달성 직후 SBS와의 인터뷰에서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 1995년 샘터 9월호 김광석 인터뷰 중에서
우울한 시간
1995/09/26 02:52 | 김광석 (김광석)
(중략)
있을때 잘 해.
참 실천하기 힘든 말이다
누군가 옆에 있을때 그에게 충실할 수 있는가?
나는 늘 옆에 누군가 있을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고,
막상 옆에 없으면 그리워 하는가?
모순이다
내안의 모순
[주제] 오늘 부터 주제는 <거짓말> 입니다.
1995/10/14 00:57 ㅣ 김광석(김광석) ㅣ 조회:172
금방 들통날 거짓말은 하지말라. 애시당초 거짓말은 하지말라.
거짓은 상황 윤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짓말은 본디 착하다?
(후략)
6.1. 미디어에서[편집]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 오경필 중사(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의 배역)
Q: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서 나온 명언. 김광석과 그의 음악에 대한 정의.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는 그가 있어서 80년대를 버텨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찬욱
아주 오랜 후에 이 시절의 모든 음악이 다 잊히는 날이 올지라도 김광석의 노래는 기억될 것이다.
―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中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
첫인상, 진짜 후줄근했지.
차림새, 완전 변두리.
목소리, 청승맞다고 생각했지.
이제 내게 기억되는 건 그의 얼굴 가득 주름 지으며 웃던 웃음 뿐.
나 이제 광석이 형 노래 안 들어. 도저히 CD를 손에 들 수가 없어서.
나 형 미워해.
살아있었으면, '나 형 졸라 맘에 안 들어' 라고 꼭 얘기하고 싶은데,
그럼 또 그 주름 쫙 만들면서 웃어줄 텐데.
7. 이야깃거리[편집]
7.1. 여담[편집]
- 법정 스님, 마광수 교수와 서로 인연으로 연결된다. 법정 스님에게는 직접적으로 법명[56] 을 받은 바 있고, 윤동주 연구로 명성이 높은 마광수는 김광석의 고교 선배이면서 동시에 위의 불교방송에서의 일 때문에 개신교 사학인 연세대학교에 속한 인물이 불교 쪽에서 오히려 두둔받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마광수가 발굴한 안도현 시인은 백석을 롤모델 삼았는데, 그 백석에게 자야라는 필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자신이 소유한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현재의 길상사가 되었다.
- 김광석은 포크라는 형식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음악에 목말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얼터너티브, 슬라브, 컨트리, 특히 락이나 블루스 형식의 음악을 앞으로 해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57] / 출처# 34번문항에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
- 좋아하는 가수들로는 도노반, 김민기, 송창식이라고. 가장 친했던 가수는 박학기였다. 좋아하는 개그맨은 김경규.
- 버킷 리스트를 짜 두었던 듯 하다. 공연 중 자신이 7년 뒤 40살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을 여행하고 싶다고 언급하였다. 60살이 되면 로맨스를 하고 싶었다고.
- 어릴 적 꿈이 회사원이랑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꿈은 이루었다.
- 즐겨부르던 노래는 김민기의 '친구'였다.
- 인터넷을 활발하게 이용하였다. 본인의 나우누리 사이트인 '둥근소리'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오후 11시나 새벽에 활동하였다. 여기서 '물어보기/답해주기' 채널에 사망 6일 전인 1995년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남긴 'wkf tkfwl?(잘 살지?)' 라는 글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훗날 제16대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을 만난 적이 있다. 1989년 1월 26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의 일부인 미니 콘서트에 리드싱어로 출연하였는데, 이때 같이 진행되었던 청소년을 위한 교양강좌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참석하게 된 것.[58] 해당 공개방송의 마지막에도 이문세가 '노무현 국회의원에게 개인적으로, 또 별밤가족을 대표에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남기며 마무리했다.
- 김광석의 노래에 가사를 써준 시인도 있는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를 쓴 류근이라는 시인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 2014년 2월 9일 E16편에서 본인이 작사한걸 밝혔다. 정작 본인은 곡과 김광석의 유명세와 달리 조용히 지내다가 2010년 등단 후 첫 시집 《상처적 체질》을 내면서 이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다. 해당 곡의 가사는 실려있지 않으나, 〈너무 아픈 사랑〉이라는 시에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라는 부분이 있다.
- 소시민적 감성과 아름다운 노랫말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곡은 여전히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추모 음반이나 추모 콘서트의 인기는 웬만한 뮤지션을 뛰어넘는다.
- 김광석은 우리나라에서도 매해 가장 많은 추모 콘서트가 열리는 가수 중 한 명이며 그가 출근하듯이 공연했던[59] 대학로 쪽에 김광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성시경, 박효신, 타이거 JK, 김범수, 리쌍, 장기하 등 수많은 가수들과 김제동 등의 연예인들도 존경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가창력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면에서도 기억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가수들 뿐이 아니라 국내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힌 적도 있다. 가요를 전혀 듣지 않고 클래식 음악만 듣고 살았다던 소설가 윤대녕도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마자 빠져들어 팬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 정이현도 김광석을 추모하는 글귀를 쓴 적이 있고 김경욱은 출판한 책에서 김광석에 관한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인들도 종종 김광석을 추모하는 시를 쓰고는 했으며 소설가인 신경숙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로 김광석이란 가수를 알게 되었다가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문학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 혈액형의 대한 정보는 미상이다. A형이나 O형이라는 추측이 많으며 일부는 B형이라는 정보도 있지만, 생전에 혈액형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지금으로써는 그의 유족이 공개하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다.
7.2. 사용 악기[편집]
- 김광석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기타 목록 (어쿠스틱 기타 혹은 클래식 기타는 ☆, 일렉트릭 기타는 ★) / 출처는 #
- Gibson J-200 클래식 :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 Guild D-100NS : 길드기타답게 따스한 중저음이 특징이었던 기타. ☆
- Taylor 910 :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사용했던 밝은 색상의 기타.☆
- Santa Cruze H13 : 산타크루즈는 캘리포니아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는 수제 공방이다. 밥 딜런이 해당 모델을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 Ibanez 12현 기타 : 정확히 어떤 모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 Fender Stratocaster : 오리지날 70년산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
- 삼익 클래식 기타 : 김광석이 노찾사 시절 사용하던 기타. 정확한 모델명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 Godin : 캐나다산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61] 라고 한다.☆
- Ovation 1717 : 88년도에 구입한 기타로, 김광석의 형이 김광석이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 위해 처음으로 김광석에게 사줬다는 기타로 추정된다. ☆
- Martin D-45: 마틴 드레드넛 바디 기타 중 하이엔드 모델로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김광석이 너무 갖고 싶어 카피 버전을 구매했다고 한다. ☆
- Martin M-36 : 일명 '김광석 기타'라고도 알려져 있다. 테일러 910 기타와 마찬가지로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연주한 누런빛 기타. 김광석 사후 20주기에 마틴에서 52대 한정으로 김광석 트리뷰트 모델을 출시했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에 조성된 거대한 기타 조형물이 이 모델이다. ☆
- Martin Backpacker : 일명 '트래블러스기타'로 바디를 부채꼴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서 야외 캠핑장이나 여행을 갈때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진 기타이다. ☆
박학기가 95년 9월쯤에 공연하던 기타. 박학기 왈, "김광석씨가 이 기타가 섹시하다고 매우 탐을 내요" - Cort 스틸 기타 : 정확히 어떤 모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7.3. 성격[편집]
좋은 인상답게 성격도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인. 특히, 후배들을 많이 아껴서 돈이 궁한 후배가 있으면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가 힘든 후배들을 위해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치킨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후배들이 있는 대기실에서 곧잘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김광석이 오는 날에는 대기실에서는 치킨냄새가 퍼진 날이 많았다고 한다. 갓 가수가 된 후배들을 위해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성격 까칠하고 주위 가수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은미도 방송에서 종종 김광석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참았으며 가수 윤종신도 신인 시절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절히 말을 걸어 주었던 김광석을 회고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도현은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힘들었던 무명시절에 김광석은 윤도현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62] 이에 윤도현은 김광석이 죽은 이후 매해 그의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답을 하고 있다.
폐쇄적인 성격의 이소라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송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라이브 공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또한, 가수 채환은 히든싱어2-김광석 편에서 김광석을 좋아해서 그가 태어난 동네까지 알던 정도로 김광석을 좋아 했다고. 이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이 증명되는 셈이다. 김광석의 후배 가수들이 그가 눈을 감은 후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링크) 알쓸신잡2에서 유희열이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국내에서 유희열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라며 부러워할 정도로 국내 팬들과 가수들 사이에서 김광석은 여러모로 받는 대접이 남다르다고 볼수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와 마주해서 좋은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의 이야기도 여럿 눈에 띈다. 한 팬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김광석에게 주었다고 한다. 김광석은 "보답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네요"라는 대답을 하면서 즉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또 한 팬은 춘천으로 입대를 하는 길이었는데 김광석을 춘천가는 길에 만났다고 한다. 김광석은 "입대하세요?"라고 물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었다고.
이러한 성격 덕에 많은 이들이 더욱 그를 기억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