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연(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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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江智淵
(418 ~ 463)
남북조시대 유송의 관료로 제양군(濟陽郡) 고성현(考城縣) 출신.
강이의 조카로 아버지 강승안(江僧安)은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지냈다.
2. 생애[편집]
강지연은 처음 저작랑(著作郞)을 지냈고 강하왕(江夏王) 유의공의 태위부 행참군(行參軍), 태자태부(太子太傅) 주부(主簿), 수왕(隨王) 유탄의 후군부(後軍府) 참군을 역임했다. 당시 강이, 강담 부자는 뛰어난 명성이 있었고 모두 높은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강지연의 아버지 강승안은 젊은 시절에 명망을 얻지 못했고 강담이 강승안을 매우 냉대해서 강지연은 항상 이를 원망했고 절기나 명절이 아니면 강담의 집안에 출입하지 않았다.
뒤에 강지연은 양양(襄陽)에서 수왕 유탄을 보좌할 때 유탄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으며 자의참군(諮議參軍) 사장, 주부 심회문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심회문은 매양 강지연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응당 갖춰야할 것을 모두 갖췄고 사람들이 갖추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강지연이로다!
원가(元嘉) 연간 말, 강지연은 상서고부랑(尙書庫部郞)으로 제수되었다. 이때 명문가의 자제들은 대랑(臺郞)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강지연의 집안은 이미 쇠락한 가운데 홀로 상서고부랑으로 제수되어 속으로 매우 기쁘지 않아서 관직을 고사했다.
효무제가 즉위한 뒤 경릉왕(竟陵王)으로 전봉된 유탄에 의해 다시 표기부(驃騎府) 참군으로 임명되고 주부로 전임되었다. 455년 유탄이 사공(司空)으로 전임된 뒤 주부,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역임하고 남복양(南濮陽) 태수를 겸임했으며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옮겼다.
유탄이 장차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지연은 유탄의 밀모를 알고 휴가를 청하며 유탄의 밑을 떠나 건강으로 돌아갔다. 459년 유탄의 반란이 실패한 뒤 강지연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었다.
뒤에 강지연은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전임되고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을 역임하였다. 효무제는 연회를 열 때마다 신하들을 능욕하고 더불어 신하들이 서로를 능욕하도록 하며 이를 재밋거리로 삼았다. 강지연은 정직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점점 효무제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효무제가 왕승랑에게 아들인 왕경문을 조롱하도록 명하자 강지연은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자 효무제는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아마 이런 희롱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강지연은 이 말을 듣고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고 이로 인해 효무제는 강지연을 매우 냉대했다. 강지연은 뒤에 신안왕(新安王) 유자란의 장사, 남동해(南東海) 태수로 전출되고 영삭장군(寧朔將軍)이 더해졌고 남서주(南徐州)의 사무를 대행하였다.강승안은 어리석고 못난 사람인데 그런 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서로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462년, 효무제가 총애하는 숙의 은씨가 죽자 효무제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숙의 은씨의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때 강지연은 '회(懷)'라는 시호를 건의했는데, 효무제는 이 시호가 은씨를 기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호라고 생각해서 강지연을 매우 원망하였다.[1] 이후 효무제가 남산(南山)으로 거둥하고 은씨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당시 신하들이 말을 타고 효무제의 뒤를 따랐는데, 효무제는 말채찍으로 무덤의 기둥을 가리키며 강지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위에 회(懷)라는 글자를 넣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강지연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결국 463년 근심 속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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