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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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교육인, 관료이다.
2. 생애[편집]
1904년 전라북도 익산군(현 익산시)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보통학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신학교, 해주고등보통학교, 해주공립중학교 등에서 18년간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과 충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충주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미군정 하에서 충청북도 학무국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을 거쳐서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1963년 12월부터 1964년 5월까지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직 재임 시절에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가장 격렬할 때였는데, 학생들에게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를 하고 총장 인사를 시위 압박의 도구로 사용하는 등 정부 측 입장을 대변했다.
장관직 퇴임 이후 1965년 민주공화당 전북도당 위원장, 중앙위원 등을 지냈으며, 1968년 1월부터 1969년 3월까지 부산대학교 총장을,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경향신문사 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 경향신문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공식 활동은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 방문했을 당시 로스엔젤레스 교민회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교민 대표로 환영사를 했다는 기사다.
그 외에도 1984년 7월 동아일보 기사에는 몇 년 전 로스엔젤레스 한인 사회에서 노인회장을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91년 윤형섭 교육부장관이 종로의 한 식당에서 역대 문교부 장관들을 초청해 만남을 가졌는데, 이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불참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후 1994년 2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언론에선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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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은 은퇴한 후 근황이 전해지지 않다가도 나중에 사망 소식은 보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고광만의 경우 20년 넘게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면서 세간에서 잊혀졌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