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r20210301판)

 







제6공화국
국민의 정부
國民의 政府 | Government of the People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출범 이전
이후
문민정부
참여정부
대통령
김대중 ,(15대),
국무총리
김종필 ,(1998.8.18~2000.1.12),
박태준 ,(2000.1.13~2000.5.18),
이한동 ,(2000.6.29~2002.7.10),
김석수 ,(2002.10.5~2003.2.26),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 자유민주연합 (1998.2~2001.8)[연립여당]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 민주국민당 (2001.4 ~ 2001.8)[연립여당]

1. 개요
2. 국정지표
3. 외교/국방
4. 정치/사회
5. 경제
6. 비판/논란
7. 주요 사건
8. 인사
9. 여담
10. 관련 문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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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취임선서

국민의 정부 또는 김대중 정부는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이 이끌었던 정부이며,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로 출범한 정부다.[1] 제6공화국 세 번째 정부로 1998년 2월 25일 0시에 출범해 2003년 2월 25일 0시까지 존속했다. 참고로, 공식 명칭인 '국민의 정부'의 의미는, 새로운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을 강조[2]하기 위해서 채택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DJP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였기 때문에 불완전한 정권교체라는 비판 또한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호남권 출신 대통령과 정부이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황해도 출신이고 후임 윤보선은 충청도 출신[3]이고 최규하가 강원도 출신인 걸 빼면 박정희 때부터 2018년 현재 문재인 대통령까지 전부 영남 출신인데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호남 정부는 김대중 정권이다. 그리고 이 정권은 나름 탕평책을 핀 정부인데 일단 초대 국무총리가 박정희의 후계자 대접을 받았던 김종필이고 비 호남권 노베이스 아웃사이더였던 노무현도 이때에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해 후임 대통령이 된다.


2. 국정지표


  • 국민적 화합정치
  • 민주적 경제발전
  • 자율적 시민사회
  • 포괄적 안보체계
  • 창의적 문화국가


3. 외교/국방


국민의 정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외정책은 바로 햇볕정책이다. 이 정책은 광복 이후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악화된 북한과의 관계를 녹이는 정책이었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직접 외교로 전쟁 위협을 낮추고 인도적인 지원 및 경제적 교류를 통해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시도한 투 트랙 차원의 접근 방식으로, 상호의존도를 높여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적 구조론[4]에 입각한 외교 정책이다.[5]

햇볕정책의 가동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전례없이 호전되었고, 마침내 2000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는 분단 50여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평화통일의 당위와 그 구현 방식에 있어 같은 목소리를 낸 남북 역사상 가장 큰 금자탑 중 하나로 남은 업적이었다. 다만 2002년 연평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들어 이 정책의 효과가 미미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하며, 일부에서는 햇볕정책의 지원금이 북한의 핵개발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러한 평화적 제스쳐와는 별개로 북한 유사시, 기존 북한 지도 세력을 무력화하고 지지세력을 숙청한 후 개혁세력을 지원하여 통일을 주도하려는 계획도 세워놨다는 것이 밝혀졌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니 시도할 일조차 없었지만.


4. 정치/사회


새정치국민회의는 출범 당시 역사상 가장 적은 의석수의 여당이었다. 공동 여당인 자민련과 합해도 130석이 채 되지 않았다.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단독 의석으로만 과반을 훌쩍 넘기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책임총리제를 약속하여 DJP연합김종필과 같이 이끌어낸 김대중 대통령은 실제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내정, 임명하였으나 워낙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심해서 서리로 무려 5개월 정도 있었다. 김종필은 총리가 중심이 된 내각책임제를 원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했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내심 그 정도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아 그들의 연합은 끝까지 지속될 수는 없었으며 결국 집권 4년차인 2001년,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이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로 통과되자 공식적으로 DJP연합이 막을 내린다.

정권 출범 3개월 이후에 있었던 제2회 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과 허니문 효과의 위력으로 16개 광역단체 중 공동 여당이 10개를 휩쓸었다. 이후 경제 상황이 호조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1999년 초반까지 줄곧 5~60%의 지지율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9년 중반에 터진 옷로비 파문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50% 아래로 처음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사건이 수습되고 다시 지지율 50%를 이어나가서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으나 결과는 전체 273석 중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115석, 자민련이 17석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6] 그리하여 지지율이 최초로 30%대로 주저 앉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국정지지율이 60%를 돌파하였다. 하지만 이도 잠시, 의약분업 사태를 거치며 다시 지지율이 하향곡선을 그렸고 결정적으로 8월 말,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30%로 폭락하였다. 이때 국민의 정부는 최초로 레임덕 초기에 진입하게 된다. 2001년 들어서도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권의 인기가 많이 시들었으며,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 등지에 공권력을 투입해 폭력진압한 것 때문에 재야세력과 노동자 계층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IMF에서 완전히 졸업하고 계속되는 남북화해 무드 덕분에 그래도 30% 초중반대 지지율을 지키며 국정 운영에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의 지지율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2002년 초반,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이른바 홍삼게이트가 터지자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하여 사실상 레임덕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여파로 2002년 6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16개 광역단체 중 11개를 내주며 참패하게 된다. 이후 계속 20%대 중반의 지지율을 이어나가다가 여당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하게 되자 말년에 지지율이 30%대로 다시 급등했지만 홍삼게이트 판결이 나오자 24%로 내려갔다. 이후 임기 막바지였던 2003년에 대규모 인명피해 사고인 대구지하철참사가 발생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암울한 분위기에서 임기를 마쳤다.


5. 경제


IMF의 구제금융 조건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정권이기도 하다. 물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처음으로 시작된 건 김영삼 정부에서 였기는 했지만.. IMF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던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에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띤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수행한다는 각서를 받았으며, 동아일보에서는 김대중의 취임 다음날 사설에 "IMF 위기만 극복해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란 내용을 싣는 현실에 당면한 상황이었다.

김영삼 정부, 문민정부 임기말에 터진 IMF 사태 혹은 외환위기로 인해서 국민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다. IMF의 원조 조건이었던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s)의 핵심 내용은 당시 다음과 같았다.

1) 시장의 자유 강화
2) 규제완화 및 철폐
3) 국유화 된 사업체에 대한 민영화
4) 정부지출(보건복지 등) 축소
5) 고금리(29.5%)

이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유지되어온 국가주도의 경제정책 노선을 많이 상실했으며, 이후 나오는 FTA, 비정규직 문제 등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이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IMF 사태 직전까지 유지되었던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으로 인한 일이었으며, 국민의 정부가 원해서 진행된 정책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IMF에서 최대 피해자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 시절 1998년 2분기 ~ 2003년 1분기까지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은 6.15%에 달했다. 전임 정부인 문민정부 시절 1993년 2분기 ~ 199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79%보다도 1.46% 높은 수치였으며, 후임 정부인 참여정부 시절 2003년 2분기 ~ 200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34%보다는 1.81% 높은 수치였다. 이는 국민의 정부 시절 뛰어난 외교 성과 및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인한 대외 신인도의 급격한 회복세와 원화 저평가로 인한 경상수지 대폭 확대, 대기업 간 업종 빅딜을 통한 기업의 국가경쟁력 향상, IT 및 벤처기업(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지, 기초생활보장법 통과로 인한 기본적 복지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석학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처럼 시장과 국민 복지가 극단적인 양자택일 사항이 아니고,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실업자와 노숙자, 극빈층에 대한 지원 및 구제정책을 실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7]

하지만 이렇게 높은 거시 경제지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행된 1/4분기 초고금리와[8] 사회적 안전장치가 덜 마련된[9] 상황에서 실시된 대규모 구조조정 여파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기 시작, 이는 곧이어 출범한 민주 개혁 성향의 정부인 참여정부의 숙제로 남겨진다.


6. 비판/논란


신용카드 활성화로 인해 개인의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 신용카드에 대한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하면서 신용등급에 맞지 않게 사람들이 과잉 소비를 하였고 이것이 신용불량자를 아주 많이 양성하는 문제점이 생겼다. 또한, 이는 가계 파탄의 주된 이유가 되었고 많은 국민들이 빚쟁이가 되었다. 그 외 많은 부분은 김대중/평가 문서 참조.


7. 주요 사건



7.1. 1998년




7.2. 1999년




7.3. 2000년




7.4. 2001년


  • 여성부 출범 및 교육부총리 신설
  •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및 파업 사태
    • 4.10 해고자 시위 폭력진압
  • 국민의 정부 제4차 개각
  • 5.18 유공자법 제정
  • 철도노조 위원장 직선제 실시
  • 구미 박정희체육관 개관
  • 예지학원 화재 사고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국민의 정부 제5차 개각
  • 전국교수노동조합 결성
  • 제2차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 강정구 교수 만경대 방명록 사건
  • 엑스존 사태
  • 아이노스쿨 폐쇄 사건
  • 이반시티 등 인터넷 동성애자 커뮤니티 폐쇄 사건
  • 김인규 교사 온라인 누드사진전 파문
  • 영화 등급보류제도 위헌 판정
  • GTB 개국
  • 서울 등 월드컵경기장 8개 개장
  • '정보통신망의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정보통신기반보호법' 제정
    • 인터넷 내용등급서비스 실시
  • 테러방지법 파동
  •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 이용호 게이트
  • IMF 관리체제 공식 해제


7.5. 2002년




7.6. 2003년




8.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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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재정경제부장관
이규성강봉균이헌재진념전윤철
교육인적자원부장관
이해찬김덕중문용린송자이돈희한완상이상주
통일부장관
강인덕임동원박재규임동원홍순영정세현
외교통상부장관
박정수홍순영이정빈한승수최성홍
법무부장관
박상천김태정김정길안동수최경원송정호김정길심상명
국방부장관
천용택조성태김동신이준
행정자치부장관
김정길김기재최인기이근식
과학기술부장관
강창희서정욱김영환채영복
문화관광부장관
신낙균박지원김한길남궁진김성재
농림부장관
김성훈한갑수김동태
산업자원부장관
박태영정덕구김영호신국환장재식신국환
정보통신부장관
배순훈남궁석안병엽양승택이상철
보건복지부장관
주양자김모임차흥봉최선정김원길이태복김성호
환경부장관
최재욱손숙김명자
노동부장관
이기호이상룡최선정김호진유용태방용석
여성부장관
한명숙
건설교통부장관
이정무이건춘김윤기오장섭김용채안정남임인택
해양수산부장관
김선길정상천이항규노무현정우택유삼남김호식
기획예산처장관
진념전윤철장승우






9. 여담


국민의 정부 시절 5년은 그야말로 1세대 아이돌들의 활동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 1세대 아이돌들은 모두 해체하거나 활동을 접고 사라졌다. 이는 지금과 달리 아이돌은 '청춘스타'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5년이나 되는 긴 활동을 하면 멤버들이 20대 중반 이후 30대까지도 넘어가버려서 청춘스타라고 하기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별명이 '문화대통령' 이었던 만큼 문화계 인사들이나 가요계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던 상황이었던데다가, 문화 검열을 하는 폐단이 많이 사라졌던 것도[11] 김대중 정부 때였고, 한국영화계도 쉬리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1999년부터 점유율 36%를 기록한 이래로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었고 이전까지 대다수를 수입에 의존했던 계임계도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여 해외로까지 게임을 수출할 정도에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기고 e스포츠라는 용어가 생기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만화계도 90년대 만화계를 이끌던 잡지만화가 쇠락했지만 한편으로 학습만화가 한국만화 시장을 주도한 장르로 떠오르고 웹툰이 크게 인기를 끄는 큰 변화를 겪었다.[12] 한류 열풍도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난 현상으로[13]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등 한국의 문화컨텐츠들이 해외로 대규모로 수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뜻이 깊은 시기였기도 했다.

참고로 국민의 정부 이 시점이 바로 대한민국 밀레니엄#s-1의 무려 1000년 이라는 1자리 수 에 의하여 가장 으리으리했었던, 어찌보면 순간 밀레니엄적인 시절로부터의 대격동이란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그야말로 시대상으로도 아주 중대했던 그 시점을 제일 대표적으로 증명해보인 한마디로 생생했던 시기로도 볼 수 있다.[14]

또한, 국민의 정부시기에 태어난 1998년생 ~ 2003년 들은 대부분 세기말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대한 시기에 태어난 세대이며 아날로그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이자 디지털을 경험한 첫 세대 즉,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둘다 경험한 과도기 세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세대(1998년생 ~ 2003년생)을 기준으로 전 후 세대가 나뉘는데, 문민정부 이전생들은 아날로그(비디오테이프, 피처폰 등)에 익숙한 세대이고, 참여 정부 이후 태어난 세대부터는 디지털(스마트폰, SNS 등)에 익숙한 세대로 나뉜다.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의 출현.


10. 관련 문헌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3권 - 강준만 저.

  •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노무현 시대의 명암 1~2권 - 이하 동일.


[연립여당] A B [1] 제1공화국부터 이 이전까지의 모든 정권교체는 쿠데타 또는 시민혁명으로 이전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2]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도 꽤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3] 하지만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여서 대통령은 그냥 얼굴마담이고 실권은 총리가 가지고 있어 5.16 때도 윤보선 대신 장면을 노렸다. 하지만 어쨌든 대통령은 윤보선이었으니. 참고로 제2공화국의 실권자이던 장면은 서울시 출신이다.[4] 국제정치경제적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국제정치학적 개념으로 이해에 주의를 요한다.[5] 대화를 통한 외교정책은 일본과의 전면적 문화 개방 등을 고려할 때, 국민의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였던 것으로 보인다.[6] 하지만 완전한 패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애초에 인구 500만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인구 1300만의 영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상대로 과반을 저지하고 총 의석의 42%에 달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공동 여당인 자민련과 합하면 사실상 여반야반의 구도를 절묘하게 이루어냈기 때문에 결과가 비슷했던 19대 총선과 견주어보았을 때 내용상 더 좋은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7]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 출범 무렵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인들 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정부에서 이분들이 동사무소에 지원을 요청 시, 소정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끔 조처한 덕분이었다고.[8] "제도권 금융기관의 금리"가 저랬다는 말이다. IMF측이 제시한 명분(시중의 자금을 금융기관으로 끌어들인다)은 그럴 듯 했지만, 실제로는 실직 후 자영업자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직자분들을 니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막대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작극으로 보험금을 타내려다 적발된 사건까지 일어나는 상황에서, 결국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금융시장 개방을(=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투자자들이 인수가능하도록)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 한 끝에 겨우 이율을 낮추게 된다.[9] 실업수당제도와 정부 지원을 받는 직업전문학교들이 주축이 되어 실직자, 구직자분들께 소액의 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업 훈련을 돕는 제도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한다.[10] 쉽게 말해서 대우 부도[11] 물론 제도상의 문화검열은 이미 김영삼 정부 때 대부분 사라졌지만 1997년 청보법 파동에서 볼 수 있었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12] 당시부터 웹툰 인기작들이 출간되어서 파페포포 메모리즈같은 일부 작품들은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보였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옴니버스 형식의 웹툰이나 에세이툰 위주였기 때문에 잡지만화가 쇠락하는 와중에도 웹툰의 미래에 대해 회의하는 시각이 많았기는 했다.[13] 다만 김영삼 정부 말기에 사랑이 뭐길래, 의가형제 등 한국 인기 드라마가 중국과 베트남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류열풍의 싹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 한류 열풍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평가절하할 이유까지는 없고 사실 한류열풍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다.[14] 1998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