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시노부/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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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부는 밑에 나오는 측실들을 두었는데,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미카코를 친모로 하여 길러졌다.
一色須賀 (1838~1929)
요시노부의 정실 이치조 미카코의 하녀가 된 후, 요시노부의 측실이 되었다고 한다. 슬하의 자식은 없다.
お芳 (생몰년 미상)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첩(딴살림하는 첩)이다. 보통 첩으로 표기되며 측실로도 표기될때도 있다. 에도의 마치히케시(町火消, 오늘날의 소방관[76] )이자 요시노부와 친분이 있는 협객 신몬 타츠고로[77] (新門辰五郎)의 딸이다.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성으로 도망칠때 오요시도 같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요시노부를 따르지 않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 이전 작인 '나는 듯이'에서도 등장한다.
1. 선대 가계[편집]
2. 형제[편집]
2.1. 정실 요시코 여왕 소생[편집]
2.2. 측실 오기하라 코아타에 소생[편집]
2.3. 측실 야마노베 나오 소생[편집]
2.4. 측실 마츠나미 사다코 소생[편집]
2.5. 측실 야나기하라 노보리키키 소생[편집]
2.6. 측실 타치하라 토시코 소생[편집]
2.7. 측실 마데노코지 무츠코 소생[편집]
2.8. 측실 타카오카 토쿠코 소생[편집]
2.9. 측실 타카하시 미치코 소생[편집]
2.10. 측실 타카하시 코우메 소생[편집]
3. 부인과 자녀[편집]
3.1. 정실 이치조 미카코 소생[편집]
요시노부는 밑에 나오는 측실들을 두었는데,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미카코를 친모로 하여 길러졌다.
3.2. 측실 잇시키 스가[편집]
一色須賀 (1838~1929)
요시노부의 정실 이치조 미카코의 하녀가 된 후, 요시노부의 측실이 되었다고 한다. 슬하의 자식은 없다.
3.3. 측실 신무라 노부 소생[편집]
3.4. 측실 나카네 사치 소생[편집]
3.5. 외첩 오요시[편집]
お芳 (생몰년 미상)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첩(딴살림하는 첩)이다. 보통 첩으로 표기되며 측실로도 표기될때도 있다. 에도의 마치히케시(町火消, 오늘날의 소방관[76] )이자 요시노부와 친분이 있는 협객 신몬 타츠고로[77] (新門辰五郎)의 딸이다.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성으로 도망칠때 오요시도 같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요시노부를 따르지 않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 이전 작인 '나는 듯이'에서도 등장한다.
3.6. 양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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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토 번 8대 당주. 번정개혁에 성공해 막부말기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사후에 그를 신으로 모신 사당이 생겨났을 정도다.[2] 미토 번 7대 당주.[3] 미토 번 6대 당주. 미토번을 중흥시킨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4] 고토 사이치로(後藤左一郎)의 딸이다.[5] 미토 번 10대 당주.[6] 우와지마 번 8대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와 약혼하기도 했다.[7] 미토번 가로 야마노베 요시히데(山野辺義芸)의 정실.[8]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바로 아래 동생에 해당된다. 가와고에 번 제5대 번주 마츠다이라 츠네노리의 양자가 되어 개명했다. 나오모계 에치젠 마츠다이라가 10대.[9] 하마다 번 3대 영주 마츠다이라 타케나리의 양자가 된다. 양아버지를 뒤이어 하마다 번 4대 영주가 된다. 오치 마츠다이라 가 8대.[10] 모리오카 번 14대 번주 난부 도시히사의 부인이 된다.[11] 돗토리번주 이케다 요시히데가 사자 없이 급사한 것으로, 막부 명령에 의해 양자가 된다. 돗토리번 12대 영주.[12]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요시마사의 데릴사위가 되어, 이케다 모치마사라고 자칭한다. 오카야마 번 9대 영주.[13] 센다이 번 13대 번주 다테 요시쿠니의 부인이 된다.[14] 키츠레가와 번 제10대 번주 키츠레가와 노리우지의 양자가 된다. 키츠레가와 번 제11대 번주.[15] 맏형인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츠와 함께 상경하여 어린 나이에 요시미츠를 잘 보좌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16]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정실.[17]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사촌동생인 츠치우라 번의 제10대 번주 쓰치야 토라나오의 양자로 들어간다. 츠치우라 번 11대 번주이자 자작.[18] 형제들 중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가장 관계가 깊었다. 쇼군 실각후 요시노부와 같이 사진 촬영이나 사냥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 요시노부의 쇼군 시절 파리 사절단으로 파견가기도 했는데, 이 때 아키타케를 수행하였던 사람들 중 하나가 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시미즈 도쿠가와 제6대 당주이자 미토 번의 최후의 번주.[19] 마츠다이라씨 모리야마번의 번주 마츠다이라 요리노리의 양자가 됐다. 마츠다이라씨 모리야마번 제7대 번주[20]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 제18대 당주.[21] 이노우에씨 타카오카번 제11대 번주 이노우에 세이준의 정실.[22] 아이즈 마츠다이라가 10대 당주, 모리야마 마츠다이라가 9대 당주.[23] 친아버지는 이마데가와 키미히사이며, 양아버지는 이치조 다다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약혼 자체가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인데다, 요시노부는 시할머니인 히토츠바시 요시토시의 미망인 토쿠신인(徳信院)과 매우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미카코는 매우 외로운 신혼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딸을 낳자마자 바로 요절하자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이후에는 나름대로 부부 사이가 회복한 듯 하지만, 미카코는 병약했던 적도 있어서, 두 번 다시 아이를 얻지 못했다.[24] 이 명칭은 계명이다. 4일만에 죽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받은 이름은 없다.[25] 하타모토 마츠다이라 칸쥬로의 딸이다. 메이지 유신 후도 요시노부를 측실로서 섬긴 것은, 노부와 나카네 사치뿐이다.[26] 향년 21세의 병사했다.[27] 다야스 도쿠가와가 가문 제9대 당주[28] 미조구치 나오요시(溝口直亮)의 부인이 된다.[29] 도쿠가와 다케사다(徳川武定)와 결혼한다.[30]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 가문 제11대 당주[31] 후작 이케다 테루토모가 사자 없이 사망한 것에 수반해, 그 둘째 딸 쿄코와 결혼해 사위 양자로서 이케다 후작가를 상속해 습작했다. 이케다씨(池田氏) 16대 당주. 이케다 가문을 이은 그는 학습원 초등과 재학중에,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의 광대한 벌판을 개간해, 이케다 농장을 열어서 땅의 개척을 진행시켰다. 1907년에 그는 '돗토리 성터'의 부지에, 자신의 별저가 되는 양옥을 건설한다. 이 양옥은 당시 황태자였던 다이쇼 덴노가 숙소로 사용했다. 이것을 진푸우카쿠(仁風閣)이라 불렸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영빈관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진푸우카쿠는 1973년에 중요문화재 지정되어 현재도 돗토리현의 명소로서 사랑받고 있다.[32] 이케다씨(池田氏) 17대 당주.[33] 육군소장 쿠츠키 쓰나사다의 양자가 된다. 양아버지의 사망에 따라 1930년 4월 1일 자작을 습작했다.[34] 본명은 도쿠가와 츠네코.[35] 고준 황후의 6촌 아우다.[36] 제2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 당주.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아버지 요시노부에게 귀족원 의원 직위를 물려받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케이큐사마라고 불리면서 사랑받았다고 한다.[37]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딸이다. 옛이름은 미에코여왕(實枝子女王)이다.[38] 남편은 다이쇼 덴노의 아들 노부히토.[39] 제3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 당주.[40] 요시미츠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토모(徳川慶朝)는 아버지를 이어 제4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 당주가 됐다. 요시토모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문은 단절했지만 요시노부의 직계 후손은 계속되고 있다.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친정을 상속했다. 그는 사진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41] 자작 사카키바라 마사하루(榊原政春)와 결혼했다.[42] 마츠다이라 야스마사의 장남 마츠다이라 야스요시의 부인이 되지만 전사했다. 이후 이데 지로와 재혼한다. '도쿠가와 말괄량이 공주'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43] 1911년 제13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 도쿠가와 구니유키와 결혼했다.[44] 제13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 제12대 귀족원 의장.[45] 제14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46] 백작 카가와 타카오(香川敬男)와 결혼했다.[47]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의 삼녀 타에코와 결혼했다.[48] 자작 마츠다이라 요리야스의 양자가 됐다.[49] 자작 마츠다이라 아키오의 양자가 됐다.[50] 가쓰 가이슈의 적남 가쓰 코코로의 양자가 됐다. 교우관계도 넓어 독자적으로 자동문을 발명하는 등 화족으로서는 파격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첩과 함께 자살했다.[51] 쿠치키 츠나히로의 부인[52] 카케이 모토사다(筧元貞)의 부인[53] 자작 이시노 모토츠네(石野基恒)의 부인[54] 자작 도다 다다카즈 부인 이후 사사키 코지의 부인이 된다.[55] 남작 후지타 고이치(藤田光一)의 부인이 된다.[56] 하타모토 나카네 요시사부로의 딸로 태어나 후에 하타모토 나리타 신쥬로의 양녀가 됐다. 메이지 유신 후에도 요시노부를 측실로서 섬긴 것은, 신무라 노부와 나카네뿐이다.[57] 귀족원 남작 의원으로 활동했다. 천리교의 신자였으며, 뺑소니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58] 요시노부의 맹우이자 후쿠이 번 전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의 육녀. 일본 적십자사에서 일했다.[59] 아내는 시라이 신타로의 장녀 미요코다. 아버지를 뒤이어 귀족원 남작 의원이 됐다.[60] 백작 오오키 엔이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귀족원 백작의원으로 활동했다. 도쿄공업학교의 설립자다.[61] 사기강도죄로 수감된 전과가 있다.[62] 형 노부토의 양자가 되어 남작이 됐다.[63] 하치스카가 17대 당주 하치스카 마사아키와 결혼했다. 시인으로 활동해 시집도 냈다.[64] 하치스카가 제17대 당주.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부의장이 되기도 했다.[65] 남편은 츠야마 마츠다이라가 당주 자작 마츠다이라 야스하루(松平康春).[66] 남작 마츠다 마사유키(松田正之)의 아내가 된다.[67] 조류학자, 탐험가, 비행가. 멸종새인 도도 연구의 권위자다. 또 오키나와 본섬과 미야코섬 사이에 그어진 생물지리학상의 선인 하치스카선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68]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 마츠다이라 히토시(松平斉)의 아들.[69] 정치사상사학자. 메이지대학 교수.[70] 귀족원 자작 의원.[71] 귀족원 후작 의원.[72] 수의사. 도쿄대 교수.[73] 귀족원 남작 의원이자 사업가.[74] 귀족원 남작 의원 나와 나가노리(名和長憲)의 딸.[75] 일본군 육군소령.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다.[76] 일본은 예전부터 지진과 목조건물로 인한 화재가 빈번했던지라 일찍부터 소방쪽이 발달됐다.[77] 훗날 요시노부가 근신하고 있던 우에노 간에이지 사원의 경호를 하기도 했다. 요시노부가 근신하게 되었을 때, 2만 냥의 코슈금을 수송하고, 도쿠가와가의 슨푸(시즈오카현) 이주에도 따라다니며, 끝까지 좌막파의 의리를 지켰다.[78]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 10대 당주, 타카스번(高須藩) 11대 번주, 오와리번(尾張藩) 15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대신해 히토츠바시가 당주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