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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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Robert Louis Stevenson


파일:external/hilobrow.com/Robert_Louis_Stevenson_1885.jpg

본명
로버트 루이스 밸푸어 스티븐슨
Robert Lewis Balfour Stevenson
출생
1850년 11월 1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894년 12월 3일 (향년 44세)
사모아 바일리마
직업
작가
장르
소설, , 기행문
학력
에든버러 대학교
배우자
패니 스티븐슨 (1880년 결혼)
자녀
의붓자식 2명
종교
개신교(장로회)[1]무종교[2]
서명
파일:150px-Signature_of_Robert_Louis_Stevenson.jpg

1. 개요
2. 생애
2.1. 일화
2.2. 사망
3. 작품 목록
4. 작가 연보



1. 개요[편집]


영국 빅토리아 시대소설가. 1850년 11월 13일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보물섬이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전 분야에 걸쳐 좋은 소설을 쓴 작가이다. 비슷한 성향의 작가로는 미국의 마크 트웨인이 존재한다. 두 작가 모두 알고 보면 어린이가 보기 좋은 글만 쓴 건 아니다.

마크하임(Markheim)이라는 단편은 영문학에서 보기 드문 명문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편집]


성격이 좋고 사람들에게 매우 자상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여 투병 생활을 했다. 그 영향으로 모험을 동경했고, 이는 보물섬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에든버러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변호 업무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20대 중종반에는 프랑스벨기에 여행을 즐겨 했다. 이때 프랑스에서 10살 연상인 유부녀 마틸다 반 더 그리프트 오스본을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 그녀는 당시 남편의 바람기 등의 원인으로 별거 중이었다. 2년 뒤인 1878년에 이혼한 그녀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그 뒤에 미국으로 가서 1879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오스본에게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딸 이소벨과 아들 로이드가 있었는데, 아들과 스티븐슨은 18살 차이였지만, 딸과 스티븐슨의 나이 차는 고작 8살(!)이었다고.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아꼈기에 부부 관계는 무척 좋았다고 한다. 의붓딸과 그녀가 바람과 술 문제가 원인이 되어 이혼한 전 남편 조셉 드와이트 스트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오스틴 스트롱, 의붓아들도 스티븐슨의 집필 활동을 돕기도 했고, 사모아에서 함께 산 적도 있다.

1887년부터 여러 건강 문제를 보였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 권유했다. 회복을 목적으로 미국과 영국 시골에서 오가며 지냈다. 1888년에는 오세아니아사모아로 여행했는데, 머무르는 동안 마음이 편하고 사람들도 좋다고 해서 아예 정착했다. 매우 인간적으로 섬 사람들에게 대해줘서 백인들에게서 온갖 차별을 받던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3][4] 사모아 사람들에게서 그가 불리던 이름은 이야기꾼, 책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Tusitala'이며, 아내가 불리던 이름은 날아다니는 구름이라는 뜻의 'Aolele'.

하와이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죽은 가톨릭 선교사인 다미앙 신부를 장로교 목사인 하이드가 비난하자, 장문을 써서 다미앙 신부의 삶을 찬양하였다.


2.1. 일화[편집]


세상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에다가 의식 있는 지식인이었다. 스티븐슨은 사모아 섬에서 살아가면서 조국 영국이나 유럽 열강이 저지른 식민지 약탈 및 차별 대우, 부족끼리 이간질시켜 내전을 일으키는[5] 등의 모든 만행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글로 고발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그의 고발이 통할 리가 없었다. 열심히 식민지를 만들어간 조국 영국에선 스티븐슨의 고발을 무시했고, 그는 영국 어디에서도 글을 연재하지도 못했다. 이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세상은 부조리하며 하이드와 같은 게 바로 내 나라, 그리도 문명국이라 자부하는 나라들의 실체라며 한탄했다.

그가 쓴 편지 중 조지 고든 바이런잔 다르크를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라고 말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바이런을 두고 첫째로 위대한 시인으로서, 둘째로는 귀족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깠다. #

친하게 지낸 이웃집 꼬마 여자 아이가 자신은 생일2월 29일이라 4년에 1번씩만 생일이 온다고 슬퍼하자 웃으면서 이 아저씬 다 컸으니까 내 생일인 11월 13일을 대신 네 생일로 주고 내가 2월 29일 생일을 맞이하겠다는 글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아이는 물론 기뻐했다고 한다.


2.2. 사망[편집]


1894년 12월 3일 저녁, 아내 패니 스티븐슨과 사모아 섬에 있던 집에서 정답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너무나도 아쉽게 요절한 것이다.

스티븐슨이 죽자 사모아 섬 마을의 여러 부족장들이 슬퍼하였다. 그들은 사모아 섬에서 존경받는 위인만 묻힐 수 있다는 성지 바에아 산에 그가 묻히길 바라여 그는 그곳에 묻혔다. 그녀는 홀로 사모아에서 몇 해 동안 살다가 외로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 미국으로 돌아갔고, 1914년 생일 한 달 전에 미국에서 73살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목록[편집]


  • 보물섬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하룻밤 묵어가기
  • 마크하임
  • 악마가 깃들인 병
  • 목소리의 섬
  • 해변가 모래언덕 위의 별장
  • 시체 도둑
  • 자살 클럽
  • 오랄라
  • 꿈에 관하여
  • 유괴
  • 물레방앗간의 윌
  • 목이 돌아간 재닛
  • 메리 맨
  • 프랑샤르의 보물
  • 말트루아 경의 대문
  • 존 니컬슨의 불행한 모험들
  • 사람을 죽이다
  • 한 어린이의 시 정원(시집)
  • 나에게 더 이상 고향은 없네
  • 아메리카행 이민선
  • 색깔이 없는 것은 1페니, 있는 것은 2페니
  •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 당나귀와 함께 한 세벤느 여괴
  • 잠의 땅, 꿈의 나라
  • 타샤의 어린이 정원

4. 작가 연보[편집]


1850년 출생 11월 13일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하워드 플레이스 8번지에서 등대 기술자인 아버지 토머스 스티븐슨과 어머니 마거릿 이사벨라 스티븐슨 사이에서 태어남. 엄격하고 완고한 장로교의 집안 분위기 아래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냄.
1866년 16세 『펜트랜드의 반란: 1666년 역사의 한 장The Pentland Rising: A Page of History, 1666』이라는 책을 자비로 출판함.
1867년 17세 11월 가업을 잇기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 방학마다 친구들과 프랑스로 여행을 다님. 이 시기의 여행이 이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침.
1871년 21세 4월 아버지에게 기술자가 아닌 작가로 살겠노라고 편지를 보냄. 동시에 생계유지를 위해 변호사가 되기로 하고 법률 공부를 시작함.
1873년 23세 11월 폐결핵으로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의 망통으로 휴양을 떠남. 이곳에 머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림.
1874년 24세 4월 휴양지에서 돌아옴.
1875년 25세 7월 변호사 시험을 통과함.
1876년 26세 9월 프랑스 그레로 카누 여행을 떠남. 이곳에서 장차 아내가 될 패니 오즈번을 처음 만남. 당시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패니 오즈번은 남편과 별거 중이었음.
1877년 27세 연초에 스티븐슨은 다시 패니 오즈번을 방문하고, 둘은 연인으로 발전함. 단편 「하룻밤의 잠자리A Lodging for the Night」, 「옛 노래An Old Song」, 「러더퍼드 가문의 교훈적인 편지Edifying Letters of the Rutherford Family」 집필.
1878년 28세 8월 패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자기 집으로 돌아감. 여행 에세이집 『내륙 여행An Inland Voyage』 출간. 단편 「아라비안나이트, 그 이후Later-day Arabian Nights」, 「신의 섭리와 기타Providence and the Guitar」 집필.
1879년 29세 여행 에세이집 『당나귀와 떠난 여행Travels with a Donkey in the Cévennes』 출간. 8월 패니 오즈번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행 배를 타고 뉴욕으로 감.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기차 여행 도중, 몬테레이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맴. 12월 샌프란시스코로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함. 하지만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다시 건강이 심각하게 안 좋아짐. 전남편과 이혼한 패니 오즈번이 스티븐슨의 침상에서 간호를 함.
1880년 30세 에세이집 『대륙 횡단Across the Plains』 출간. 단편 「모래 언덕 위의 별장The Pavilion on the Links」과 여행 에세이 『아마추어 이주민The Amateur Emigrant』 집필(발표 시기는 1895년). 5월 패니 오즈번과 결혼하여 함께 스코틀랜드로 귀국함.
1882년 32세 단편집 『신아라비안나이트New Arabian Nights』 출간. 단편 「거짓말 같은 이야기The Story of a Lie」와 「메리 맨The Merry Men」 집필.
1883년 33세 여행 에세이집 『실버라도의 정착민들The Silverado Squatters』 출간. 의붓아들을 위해 해적들과 함께 감춰진 보물을 찾는 모험담인 『보물섬Treasure Island』 집필, 출간. 원제는 〈바다의 요리사〉였으나 편집자의 뜻에 따라 제목을 바꿈.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함. 장미 전쟁 동안 벌어진 로맨스를 다룬 『검은 화살: 장미 두 송이의 이야기The Black Arrow: A Tale of the Two Roses』 출간.
1884년 34세 단편 「시체 도둑The Body Snatcher」 집필.
1885년 35세 가상의 독일 왕국에서 벌어지는 액션 로맨스물 『오토 왕자Prince Otto』 출간. 아내 패니 스티븐슨과 공저로 『신아라비안나이트: 속편More New Arabian Nights: The Dynamiter』 출간. 단편 「마크하임Markheim」 집필.
1886년 36세 재능 있고 점잖은 의사와 정신병자 괴물의 삶을 오가는 이중인격자의 이야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완성, 동명의 단편집 출간. 소년 데이비드 발포의 모험을 그린 역사 소설 『납치Kidnapped』 출간.
1887년 37세 아버지 토머스 스티븐슨 별세. 단편 「물레방앗간의 윌Will O’ the Mill」, 「목이 돌아간 재닛Thrawn Janet」, 「올라야Olalla」, 「프랑샤르의 보물The Treasure of Franchard」 집필. 단편들을 묶어 『「메리 맨」과 단편들The Merry Men and Other Tales and Fables』 출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의 요양원에 들어감.
1888년 38세 가족과 함께 남태평양 여행을 시작함.
1889년 39세 스코틀랜드와 미국, 인도를 배경으로 복수담을 그린 『밸런트래 경The Master of Ballantrae』 출간. 의붓아들인 로이드 오즈번과 공저로 코믹 소설인 『잘못된 상자The Wrong Box』 출간.
1890년 40세 사모아의 섬을 구입하여 정착함. 이해와 포용력으로 원주민들의 신뢰를 얻음.
1891년 41세 단편 「병 속의 악마The Bottle Imp」 집필.
1892년 42세 로이드 오즈번과 공저로 코믹 모험물 『약탈자The Wrecker』 출간.
1893년 43세 『납치』의 후속편인 『캐트리오나Catriona』 출간. 단편 「목소리 섬The Isle of Voices」 집필. 단편집 『남섬의 이야기들South Sea Tales』 출간.
1894년 44세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신의 재능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함. 로이드 오즈번과 공저로 『썰물The Ebb·Tide』 출간. 12월 3일 사모아 섬의 자택에서 사망. 그를 숭배하던 사모아 섬의 추장 40명이 바에아 산 정상까지 길을 내어 그를 추모하는 묘비를 세움.
1896년 미완성 유작인 『허미스턴의 둑Weir of Hermiston』 출간. 미완성 유작인 『생 이브: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인 죄수가 겪는 모험담St. Ives: Being the Adventures of a French Prisoner in England』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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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rah Barnette, "A “Brave Reading” of One’s Faith: Robert Louis Stevenson’s Spiritual Travels", renovatio.zaytuna.edu, 2021.6.22.[2] 1873년, 22세에 부모에게 더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을 밝혔다. 다만 이후에 개인적으로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Sarah Barnette, "A “Brave Reading” of One’s Faith: Robert Louis Stevenson’s Spiritual Travels", renovatio.zaytuna.edu, 2021.6.22. · Annie Laurie Gaylor, "Robert Louis Stevenson", ffrf.org)[3] 친구가 편지로 "야만인들과 같이 살면 불편하지 않나?"라고 글을 쓰자 “남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바로 야만인이네. 이들은 친절하고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이곳이 바로 천국이네.”라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4] 스티븐슨의 사상은 그 당시에는 매우 진보적이었는데, 정글북을 쓴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백인의 짐이라는 작품까지 쓸 정도였다.) 러디어드 키플링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세상에, 지식인이나 시민들이나 유색인종이나 비백인을 야만인 취급하던 세상에서 저런 사상은 진보적이라 할 만 하다.[5] 제국주의 시대에 흔하디 흔한, 아니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이이제이 수법이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오세아니아의 섬 나라에서 자주 벌이던 짓이다. 우선 부족끼리 사이가 안 좋다면 총을 판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화폐는 받지 않았다. 대신 농업이나 어업 허용권과 같은 섬에 대한 수많은 권리를 가져갔다. 그렇게 야금야금 압박하면서 섬을 차지하는 수법이었다. 민족이 비슷하다면 종교를 가지고 이간질을 시켰다. 다만 한족이 너무 많았고 세속의 끝판왕인 중국에서는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