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플랜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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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Pl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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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Jimmy Page and Jeff Back
The Honeydrippers: Volum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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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with Jimmy Page
Walking into Clarksdale
1998
with Alison K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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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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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년기
3. 밴드 오브 조이 (1967 ~ 1968)
4. 레드 제플린 (1968 ~ 1980)
4.1. 1960년대
4.2. 1970년대
5. 솔로 활동 (1981 ~ 현재)


1. 개요[편집]


영국 뮤지션 로버트 플랜트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유년기[편집]



파일:식물옹 유년기.png

▲ 어린 시절의 로버트 플랜트.

로버트 플랜트는 1948년 8월 20일 영국의 웨스트 미들랜즈의 기술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계 아버지와 집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Half) 집시 혈통이었다.[1] 본인 외에도 밑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고향인 브로미치는 버밍엄의 중심부에 위치한 동네인데, 가까운 동네[2]에서 후일 영혼의 음악적 동료가 되는 존 본햄이 태어나기도 했다.[3]

대부분의 록스타들과는 달리 로버트 플랜트의 집안은 유복한 중산층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역덕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럽 고대사를 좋아했으며 특히 로마 제국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플랜트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J. R. R. 톨킨이라고 한다. 이러한 톨키니스트적인 면모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플랜트는 현재에도 서구권에서 대표적인 톨키니스트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는 면모는 후술하듯이 훗날 레드 제플린 시절에 작사와 작곡을 할 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50년대 시기의 수많은 영국 학생들이 그러하듯 로버트 플랜트는 블루스로큰롤 등 흑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4] 블루스와 로큰롤에 빠진 그는 로버트 존슨, 윌리 딕슨, 엘비스 프레슬리, 하울링 울프 등 여러 블루스 및 로큰롤 음악가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로버트 플랜트의 재능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도 있는데, 로버트는 당시 동네에서 엘비스 흉내를 가장 잘 내는 소년으로 꼽힐만큼 어릴 때부터 보컬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기성 세대가 그러하듯 로버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엘비스 노래를 커튼 뒤에 숨어 따라 부르며 엘비스가 되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로큰롤 가수를 꿈꿨지만,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했던 편이었기에 아버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회계사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를 회계사 학교에 집어넣었지만 얼마 못견디고 뛰쳐나왔다.


3. 밴드 오브 조이 (1967 ~ 1968)[편집]


로버트 플랜트는 결국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오게 된다. 당시 무명이었던 그는 도로 포장하는 일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일을 하는 동시에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클럽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는 록 아티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집을 나온 것이라 집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로버트 플랜트는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었지만, 여타 노동 계급 출신의 록스타들처럼 금전적으로 궁핍한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보냈다.


파일:밴드 오브 조이.jpg

▲ 밴드 오브 조이의 모습. 가장 왼쪽 인물이 로버트 플랜트이며, 플랜트 옆에 있는 인물이 존 본햄이다.

1965년, 로버트 플랜트는 어느 한 공연장에서 후에 레드 제플린과 밴드 오브 조이 활동을 같이 할 평생의 음악 동료인 존 본햄을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존 본햄은 ‘크라울링 킹 스네이크‘의 드러머를 맡고 있었고, 이들은 동갑이기까지 했기에 금방 친구가 되었다.

1966년, 로버트 플랜트는 버밍엄에서 기타리스트인 ‘베논 페레이라’, 키보디스트인 ‘크리스 브라운’과 함께 ‘밴드 오브 조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러나 결성된지 얼마 안 돼서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 매니저와의 갈등으로 밴드를 탈퇴해 버린다. 밴드를 탈퇴한 로버트 플랜트는 한 공연장에서 ‘모린 윌슨’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로버트 플랜트와 모린 윌슨은 이 자리에서 첫눈에 반하게 되고, 이듬해부터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재정적으로 궁핍했던 로버트 플랜트와 달리 모린 윌슨은 간호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5], 그에게 금전적 지원까지 해 주던 조강지처였다. 로버트 플랜트와 마찬가지로 모린 윌슨도 아버지가 제철 공장의 관리자인 중산층 출신인데, 로버트 플랜트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관리하는 공장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한편 로버트 플랜트는 1967년에 존 본햄과 함께 밴드 오브 조이에 재가입하여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로버트 플랜트는 블루스에 푹 빠져있었기에 밴드 오브 조이도 블루스 밴드였는데, 로버트 플랜트의 어마어마한 가창력과 괜찮은 세션 실력으로 당시 버밍엄 모드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밴드 오브 조이도 버밍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인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파일:식물 시위 컬러.jpg

▲ 1967년, 마리화나 합법 시위를 하는 로버트 플랜트.

1967년은 서구권 국가들에서 플라워 무브먼트가 한창이었는데, 당시 로버트 플랜트 역시 히피즘에 도취되어 있었다. 로버트 플랜트는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의 웬즈베리 법원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마리화나 합법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6]


4. 레드 제플린 (1968 ~ 1980)[편집]



파일:RP 1970.jpg


파일:RP 1980.jpg

▲ 레드 제플린 초중기의 로버트 플랜트.
▲ 레드 제플린 후기의 로버트 플랜트.

로버트 플랜트는 데뷔한 지 단 1년만인 1969년부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면서 인생의 최정점에 섰으며, 특히 지미 페이지와는 역사상 최고의 기타-보컬 듀오 중 한명으로 뽑히는 플랜트-페이지를 구성하며 대놓고 꽁냥거리는 절친 사이로 발전했다. 또한 그는 레드 제플린 활동 기간 동안 수많은 그루피들을 몰고 다니고 각종 마약을 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4.1. 1960년대[편집]


1968년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유명한 밴드였던 야드버즈가 멤버들의 탈퇴로 밴드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남은 멤버였던 지미 페이지와 크리스 드레야가 밴드의 보컬로 로버트 플랜트를 추천받게 된다. 지미 페이지는 버밍엄으로 와서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들었고, 로버트 플랜트는 특유의 초고음을 질러대면서 지미 페이지의 마음에 쏙 드는 보컬을 보여주었다. 지미 페이지는 이렇게나 뛰어난 보컬이 왜 지금까지 유명 밴드에 섭외가 안되었냐는 의문을 가지게 됐고 로버트 플랜트의 인성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여 “나와 함께 며칠 지내보자”라고 제의를 한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성격이 안 좋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로버트 플랜트는 인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 정말로 무명이었기에 메이저 데뷔를 못 했던 것이었다.

당시 영국 록 씬은 런던으로의 쏠림 현상이 매우 심했다. 그렇기에 런던이 아닌 변방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더라도 대중은 물론이고 같은 음악 업계에서도 인지도가 극히 떨어졌다. 로버트 플랜트 또한 런던이 아닌 버밍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었기에 무명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로버트 플랜트는 ‘뉴 야드버즈’의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또한 로버트 플랜트는 언더그라운드 시절 활동했던 밴드 오브 조이의 드러머인 존 본햄을 지미 페이지에게 추천해 존 본햄과 함께 뉴 야드버즈의 멤버가 된다.

한편 1968년 11월 9일, 언더그라운드 시절 때부터 금전적, 정신적으로 로버트 플랜트를 지원해주던 모린 윌슨과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식은 레드 제플린이 처음으로 결성된 장소인 ‘라운드하우스’에서 시행되었고, 밴드 멤버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 1969년, 런던 공연 당시의 모습.

1968년 로버트 플랜트를 비롯한 뉴 야드버즈의 멤버들은 밴드의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밴드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를 하게 된다. 지미 페이지는 과거 키스 문존 엔트위슬이 추천해 준 이름인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밴드는 레드 제플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레드 제플린은 데뷔한 해인 1969년부터 1집2집이 전부 상업적, 비평적으로 대성공하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었다. 현재 대중들은 ‘레드 제플린’ 하면 플랜트-페이지라는 작사/작곡 및 보컬/기타 콤비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1969년 초의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 내에서의 입지가 가장 불안정했던 멤버였다. 1집 작업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에서 가장 적은 기여를 했는데, 이 때문에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에서 해고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등 밴드 내 입지가 가장 적었다고 한다.


4.2. 1970년대[편집]


로버트가 레드 제플린의 2인자로 자리잡은 것은 1970년이다. 1970년 1월 31일에 로버트는 고향인 버밍엄에 방문한 후 런던으로 돌아가다가 자신의 승용차가 미니밴과 충돌하여 완파되는 사고에 휘말린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로버트의 부상은 심각하였다. 일부 치아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져서 수술을 받았다. 다리에 마비도 와서 한동안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어깨 위로 팔을 들어올릴 수가 없고 눈가에는 흉측한 상처 자국이 남은 상태임에도 로버트는 공연에 나가려고 시도하지만 매니저인 피터 그랜트와 지미가 만류하여 포기한다. 사고로 인한 부상 때문에 입원한 기간에 로버트는 지미와 3집 앨범을 구상하는데 추후 3집 작업을 하기 위한 여행도 계획하게 된다.


파일:로버트 플랜트 브로니어.jpg

1970년 브로니어 별장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로버트.

로버트와 지미는 북미 투어가 끝난 후 웨일스로 여행을 떠난다. 로버트와 지미 외에도 지미의 여자친구와 로버트의 아내와 아들이 동행하였고 추가로 매니저 2명과 가사를 책임질 친구 2명을 데려간다. 도착한 장소는 로버트의 가족이 로버트가 어린 시절 여름 휴가를 보내려고 구매한 산장인 브로니어. 휴식을 취하려고 도착한 곳이지만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서 우물에서 물을 퍼오고 양초로 불을 밝히며 살았다. 로버트와 지미는 로버트가 잘 알던 폭포로 유람을 가거나 물놀이를 하고 그러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오를 경우 잊지 않으려고 작은 녹음기를 가지고 다녔다. 이런 방식으로 브로니어에서 3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언플러그드 어쿠스틱 노래들이 작곡된다. 동시에 작곡만 되고 가사가 붙여지지 않은 Immigrant Song의 작사를 로버트가 마무리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로버트는 지미의 최측근이자 핵심 작곡 멤버로 부상하여 레드 제플린에서 가장 입지를 적었던 1969년과 다르게 1970년에는 지미에 이어 레드 제플린의 2인자가 되고 지미와 대놓고 어울리는 절친으로 발전한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로버트는 1975년에 심각한 수준의 사고를 당한다.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로버트의 가족과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데리고 휴가를 보내던 중 아내 모린이 운전하던 자동차가 도로를 이탈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백 미터를 떨어진 뒤 나무를 들이박고 멈춘다. 뒤에 탑승한 3명의 아이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모린은 골반과 다리 하나가 완전히 꺾이고 얼굴이 찢어졌으며 과다출혈로 빈혈 증상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모린은 희귀한 혈액형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수혈이 없다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버트도 두 다리가 크게 골절되고 팔도 꺾였다. 다행히도 지미의 가족들과 매니저인 피터가 뒤따라오고 있어서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고 로버트 부부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로버트의 친구인 로저 워터스가 로버트에게 자기 소유의 그리스 별장을 빌려주고 로저의 별장에서 재활을 시작하였다.

로도스 섬은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로저의 별장에서 약간의 휴양만 마친 로버트 부부는 런던의 대형병원으로 보내지고 몇 주의 입원생활을 한다. 치료가 마무리될 즈음 의사는 로버트에게 영구적으로 다리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퇴원하자마자 조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 곧바로 프랑스 연안의 섬으로 이동하였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로버트는 7집 작업 당시 휠체어에 앉아서 녹음하였고 진통제를 먹고 무대에 올라갔다.


파일:플랜트 해밀턴.png

오드리 해밀턴과 촬영된 1977년의 로버트.

당대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런 것처럼 로버트도 여러 마약을 복용하고 그루피들과 성관계하며 문란한 사생활을 보냈다. 1970년대의 음악가들은 그루피와 성관계를 하는 식으로 향락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밴드에서도 비주얼이 우수한 로버트는 그루피들이 더욱 많이 달라붙었다. 어마무시한 수준의 마약을 복용한 지미와 달리 로버트는 마약은 과도하게 복용하지 않았다.

로버트와 어울린 그루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드리 해밀턴. 오드리는 텍사스에 거주하는 레드 제플린의 팬이었는데 1977년에 레드 제플린이 북미 투어를 시작하면서 로버트와 만나게 된다. 로버트는 19세의 오드리에게 매력을 느끼고 오드리도 로버트에게 반한다. 로버트와 오드리는 각자 아내와 남편이 있음에도 빠르게 애인이 된다. 이미 그루피가 많던 로버트는 자신이 만나던 여타 그루피와 오드리를 다르게 대했는데 북미 투어를 진행하는 동안 오드리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1977년 6월 21일에 진행한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는 오드리를 향한 개인적인 샤라웃까지 하였다. 오드리는 공연마다 VIP석과 다름없는 전면에서 공연을 관람하면서 Going to California를 연주하면 로버트에게 장미꽃을 주었다. 이 노래는 목소리가 감미로운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간다는 내용의 노래인데 여성의 모티브는 조니 미첼. 하지만 이 투어에서 로버트는 오드리를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오드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미국 투어를 진행하던 로버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5살이던 로버트의 아들인 캐락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루피들과 어울리며 문란하게 살았어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강하던 로버트는 아들의 죽음에 큰 슬픔에 빠지고 결국 북미 투어를 중단하게 된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로버트와 오드리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난다. 북미 투어는 비보와 함께 종료되고 로버트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자택에 칩거하면서 보낸다.

1978년에 아들의 죽음에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다잡은 로버트는 다시 레드 제플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의 상황은 매우 최악이었다. 1년이라는 공백기를 거치며 지미는 극심한 헤로인 중독에 시달려 생사를 오가는 중이었고 존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폴은 정상적이었으나 레드 제플린이 활동하지 않는 동안 폴 매카트니피트 타운젠드 등의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언론이 레드 제플린의 해체까지 거론하는 상황이었기에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로버트는 폴과 차기작을 작업하기 시작한다. 로버트는 아직 아들의 죽음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차기작은 폴을 중심으로 작업되었다. 로버트는 아들을 추모하면서 All My Love를 작곡하고 오드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Hot Dog라는 컨트리 곡도 작곡한다. 이렇게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1980년에 존이 사망하면서 지미가 레드 제플린의 해체를 선언하고 로버트는 솔로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5. 솔로 활동 (1981 ~ 현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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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 활동 초중기의 로버트 플랜트.
▲ 현재 모습.

존 본햄의 사망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사실상의 칩거 생활에 들어간 지미 페이지[7], 존 폴 존스와 달리 레드 제플린이 해체된 이후인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대중음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레드 제플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이렇다 할 침체기 없이 여전히 음악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앨범이 판매 성적과 평론가들의 평가까지 굉장히 좋았다.

특히 2007년에는 미국 역사상 그래미 상을 가장 많이 탄 전설적인 컨트리 뮤지션인 ‘앨리슨 크라우스’와의 듀엣 앨범인 Raising Sand를 발매했는데, 올타임 레전드급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Raising Sand는 메타크리픽 점수 87점에 안착하는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200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앨범을 비롯한 5개의 상을 싹쓸이했다. 이 앨범은 300만 장 가량 팔렸는데, 레드 제플린의 7집 Presence보다 많은 판매고를 기록하였다(…).[8]

1990년대에는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등 옛 음악적 동료들과 함께 앨범을 발매했다. 그러나 1998년 지미 페이지와 마지막 앨범을 낸 이후에는 둘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졌는지 함께 활동하고 있지는 않다. 2007년에 재결성 공연을 한게 전부다.

이후에도 로버트 플랜트는 뮤지션으로서 여러 프로젝트 밴드에 몸 담으며 다양한 활동과 투어를 계속했다. 투어에서는 솔로 활동곡뿐만 아니라 레드 제플린 시절의 히트곡들도 현재의 바뀐 목소리에 맞게 편곡하여 부르는데,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월드 투어는 무기한 연기했으며, 현재까지 코로나19 관련 의료 종사자들을 위한 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파일:식물옹 앨리슨 크라우스.jpg

▲ 로버트 플랜트와 앨리슨 크라우스.

2021년 부터는 다시 투어를 재개했으며, 보통 앨리슨 크라우스와 함께 투어를 다니고 있다. 솔로 히트곡 뿐만 아니라 When the Levee Breaks 등의 레드 제플린 시절의 히트곡들도 적절히 편곡하여 셋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있다.
[1] 그렇기에 그는 이란계 파르시 혈통인 프레디 머큐리, 마찬가지로 집시 혈통인 로니 우드와 더불어 아시아계 혈통을 가진 대표적인 영국 연예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프레디 머큐리가 이름을 영국식으로 개명하고 잔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숨기려고 한 것과 달리, 로버트 플랜트는 All My Love에서 아리아인이라는 3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고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하프 집시라고 밝히는 등 본인이 집시 혈통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2] 물론 다른 멤버들이 자란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버밍엄의 중심지와 시내 끝자락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동네에서 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3] 이 때문에 혹자는 주다스 프리스트, 블랙 사바스의 고향이기도 한 버밍엄헤비 메탈의 탄생지라고 보기도 한다.[4] 영국은 미국과 달리 흑인 음악 문화가 백인 문화에 스며드는 것에 별 편견이나 거부감이 없었는데 훗날 이것이 브리티쉬 인베이션의 영향을 주었다. 흑인 음악이 백인 사회에 스며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미국 사회는 흑인 뮤지션들을 악마 숭배자로 몰아가는 등 사회적으로 말살 시키려고 안달이 났었다. 반면 영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 훗날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시조가 되었다.[5] 모린 윌슨은 자격증까지 보유한 정식 간호사였다.[6] 다만 후에는 이에 대해 후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7] 1980년대에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솔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라디오, TV쇼 등에 꾸준히 출연하며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로버트 플랜트처럼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은 아니고 고전 헤비 메탈 성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마저도 거의 활동하지 않고 현재는 레드 제플린의 자료를 정리하는 일만을 하고 있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관계가 갈라진 건 이런 솔로 활동의 차이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8] 다만 이건 Presence가 죽을 쑨 음반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그걸 감안해도 디지털화가 이뤄져 음반 판매량이 감소한 2000년대에 이 정도의 성적을 낸 건 대단한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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