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플랜트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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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그래미 시상식[1]
파일:Grammy.svg
올해의 앨범상
제50회
(2008년)


제51회
(2009년)


제52회
(2010년)

"River: The Joni Letters" - 허비 행콕

"Raising Sand" - 로버트 플랜트

"Fearless" - 테일러 스위프트
올해의 레코드상
제50회
(2008년)


제51회
(2009년)


제52회
(2010년)

"Rehab" - 에이미 와인하우스

"Please Read the Letter" - 로버트 플랜트 & 앨리슨 크라우스

"Use Somebody" - 킹스 오브 리온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1]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본명
로버트 앤서니 플랜트
Robert Anthony Plant
출생
1948년 8월 20일 (74세)
영국 잉글랜드 웨스트 미들랜즈 스태퍼드셔 웨스트 브로미치[2]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직업
싱어송라이터
소속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Led_Zeppelin_logo.svg.png
(1968 – 1980)
서명
파일:로버트 플랜트 서명.png
파일:로버트 플랜트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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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로버트 찰스 플랜트 (1918 - 2004)
애니 케인 플랜트 (1920 - 1997)
배우자
모린 윌슨 (1968 - 1983, 이혼)
자녀
슬하 3남 1녀
장녀 카르멘 제인 플랜트 (1968 - )[A]
장남 캐락 펜드래곤 플랜트 (1972 - 1977)[A]
차남 로건 로메로 플랜트 (1979 - )[A]
삼남 제시 리 플랜트 (1991 - )[1]
학력
에드워드 4세 문법 학교 (중퇴)
종교
불명[2]
신체
186cm, 82kg
혈통
집시계 영국인
재산
약 $2억[3]
활동 기간
1965년 – 현재
사용 악기
보컬, 하모니카, 퍼커션, 기타, 베이스 기타[4]
장르
, 블루스, 포크송, 컨트리 뮤직, 포크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컨트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얼터너티브 록, 뉴 웨이브, 포스트 펑크, 신스 팝, 월드 뮤직[5]
음역대
0옥타브 도 – 4옥타브 시[6]
레이블
애틀랜틱, 유니버설, 스완송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유년기
3.2. 밴드 오브 조이 시절
3.4. 솔로 활동
4.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4.1. 보컬리스트로서
4.2. 프론트맨으로서
4.3. 작사가로서
4.4. 솔로 음악가로서
5. 가족관계
6. 다른 음악가와의 관계
6.2. 기타 음악가
7. 디스코그래피
7.1. 정규 앨범
7.2. 싱글
7.2.2.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7.2.4.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2위~10위
7.2.5. 기타 차트 성적
8. 여담
8.1. 성격
8.2. 외모



1. 개요[편집]


영국의 음악가.


2. 상세[편집]


로버트 플랜트는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아티스트이다.

레드 제플린보컬리스트[3]로 유명하다. 지미 페이지와는 역사상 최고의 기타-보컬 듀오로 꼽히는 플랜트-페이지를 구성하기도 했다. 1980년대 레드 제플린의 해체 이후에는 솔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9년 그래미 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 활동도 평가가 높은 편이다.

4옥타브에 이르는 넓은 음역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보컬, 찰랑이는 금발 머리, 잘생긴 외모, 윗통은 반쯤 벗고 다닌 패션으로 그루피 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등 수많은 여심을 사로잡고 무대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1970년대 하드 록헤비 메탈 씬의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목소리 톤 자체도 매우 높은 편이기에 언뜻 들으면 여성처럼 들릴 정도로 높은 고음을 소화해낸다. 그의 보컬은 이안 길런, 액슬 로즈, 프레디 머큐리 등 동시대 및 후대의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심지어 로저 달트리 등의 선배 록스타들과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스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를 빼놓고서는 하드 록,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보컬리스트이다. 대중들에게 "최고의 가수" 투표를 하면 1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15위[4]에 들었고,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5]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파일:식물옹 유년기.png

1948년 8월 20일 영국의 웨스트 미들랜드에서 기술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고향인 브로미치는 버밍엄의 중심부에 위치한 동네인데, 가까운 동네[6]에서 후일 영혼의 음악적 동료가 되는 존 본햄이 태어나기도 했다.[7]

로버트 플랜트의 집안은 유복한 중산층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역덕이었는데, 유럽 고대사를 좋아했으며 특히 로마 제국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편 로버트 플랜트는 블루스로큰롤 등 흑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8] 블루스와 로큰롤에 빠진 그는 로버트 존슨, 윌리 딕슨,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로버트 플랜트의 재능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도 있는데, 로버트는 당시 동네에서 엘비스 흉내를 가장 잘 내는 소년으로 꼽힐만큼 어릴 때부터 보컬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부모 세대가 그러하듯 로버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엘비스 노래를 커튼 뒤에 숨어 따라 부르며 엘비스가 되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로큰롤 가수를 꿈꿨지만,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했던 편이었기에 아버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회계사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를 회계사 학교에 집어넣었지만 얼마 못견디고 뛰쳐나왔다.


3.2. 밴드 오브 조이 시절[편집]


로버트 플랜트는 결국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오게 된다. 당시 무명이었던 그는 도로 포장하는 일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일을 하는 동시에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클럽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1967년 로버트 플랜트는 자신과 똑같이 버밍엄에서 활동하던 인디 밴드의 드러머인 존 본햄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존 본햄 등 여러 세션 멤버들과 함께 “밴드 오브 조이”라는 밴드에 가입하여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뛰어난 보컬 실력으로 인해 버밍엄 인디 씬에서는 나름 잘 알려진 보컬이었다.

파일:식물옹 마리화나 시위.jpg

한편 1967년은 서구권 국가들에서 플라워 무브먼트가 한창이었는데, 당시 로버트 플랜트 역시 히피즘에 도취되어 있었다. 로버트 플랜트는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의 웬즈베리 법원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마리화나 합법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3.3. 레드 제플린 시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레드 제플린 시절의 모습.
1968년 당시 영국, 미국에서 유명한 밴드였던 야드버즈가 멤버들의 탈퇴로 밴드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남은 멤버였던 지미 페이지와 크리스 드레야가 밴드의 보컬로 로버트 플랜트를 추천받게 된다. 지미 페이지는 버밍엄으로 와서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흡족해 했는데, 그는 이렇게나 뛰어난 보컬이 왜 지금까지 유명 밴드에 섭외가 안되었냐는 의문을 가지게 됐고, 그의 성격이 매우 안 좋기에 섭외가 안 됐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여 “나와 함께 며칠 지내보자”라고 제의를 한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성격이 안 좋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지미와 로버트는 며칠간의 생활 후 서로가 매우 잘맞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 결과적으로 로버트 플랜트는 “뉴 야드버즈”의 보컬리스트가 되었고, 인디 시절 같은 밴드의 드러머인 존 본햄을 지미 페이지에게 추천해 존 본햄과 함께 뉴 야드버즈의 멤버가 된다.

1968년 로버트 플랜트를 비롯한 뉴 야드버즈의 멤버들은 밴드의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밴드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를 하게 된다. 지미 페이지는 과거 키스 문존 엔트위슬이 추천해 준 이름인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밴드는 레드 제플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로버트 플랜트는 데뷔한 지 단 1년만인 1969년부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면서 인생의 최정점에 섰으며, 특히 지미 페이지와는 역사상 최고의 기타-보컬 듀오인 플랜트-페이지를 구성하며 대놓고 꽁냥거리는 절친 사이로 발전했다. 또한 그는 레드 제플린 활동 기간 동안 수많은 그루피들을 몰고 다니고 각종 마약을 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1977년 미국 투어 도중 아들인 카락 플랜트가 사망하게 된다. 큰 상심에 빠진 로버트 플랜트는 투어도 중단해 버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약 1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게 된다. 슬픔을 털고 1978년 말부터 다시 밴드에 돌아와 음악 활동을 재개했으나, 1980년 존 본햄이 사망하면서 레드 제플린이 해체되었고, 그는 솔로 음악가로 활동을 재개한다.


3.4. 솔로 활동[편집]



솔로 활동 시절의 모습.
존 본햄의 사망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사실상의 칩거 생활에 들어간 지미 페이지[10], 존 폴 존스와 달리 레드 제플린이 해체된 이후인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대중음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레드 제플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이렇다 할 침체기 없이 여전히 음악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앨범이 판매 성적과 평론가들의 평가까지 굉장히 좋았다.

특히 2007년에는 컨트리 뮤지션 앨리슨 크라우스와의 듀엣 앨범인 Raising Sand를 발매했는데, 올타임 레전드급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Raising Sand는 메타크리픽 점수 87점에 안착하는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200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앨범을 비롯한 5개의 상을 싹쓸이했다. 이 앨범은 300만장 가량 팔렸는데, 레드 제플린의 7집 Presence보다 많은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1990년대에는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등 옛 음악적 동료들과 함께 앨범을 발매했다. 그러나 1998년 지미 페이지와 마지막 앨범을 낸 이후에는 둘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졌는지 함께 활동하고 있지는 않다. 2007년에 재결성 공연을 한게 전부다.

이후에도 로버트 플랜트는 뮤지션으로서 여러 프로젝트 밴드에 몸 담으며 다양한 활동과 투어를 계속했다. 투어에서는 솔로 활동곡뿐만 아니라 레드 제플린 시절의 히트곡들도 현재의 바뀐 목소리에 맞게 편곡하여 부르는데,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월드 투어는 무기한 연기했으며, 코로나19 관련 의료 종사자들을 위한 기부 활동을 한다.


4. 뮤지션으로서의 재능[편집]



4.1. 보컬리스트로서[편집]


Robert Plant is one of the most original vocalists of our time.

로버트 플랜트는 현 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프레디 머큐리[11]



1972년 Rock and Roll 라이브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 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최강의 보컬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그를 추앙하고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대표적으로 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프레디 머큐리, 겐키 히토미, 게디 리, 데이비드 리 로스, 새미 헤이거, 잭 러셀, 김종서[12] 등이 있다. 역대 최고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로버트 플랜트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 뿐만 아니라 Thank You, The Rain Song같은 소프트 록, 파워 발라드 등에서 감정을 잡는 능력도 수준급이다.

지미 페이지는 처음 로버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사람이 지금껏 무명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높은 음역대를 가진 테너 성종의 록보컬의 대명사로 통한다. 비음이 많이 섞인 엄청난 하이톤의 미성이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를 바탕으로 중고음을 굵직하게 긁어 처리하고,[13] 고음역대는 거칠고 선명한 두성으로 처리한다. 때문에 소리에서 굵직한 허스키함과 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순되는 특성들이 어우러진 음색을 가지고 있다. 후대에 그를 모델로 삼고 연습한 보컬들 중에서도 그의 굵직한 허스키함과 중성적인 날카로운 하이톤을 모두 재현한 보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4] 이 야누스적인 카리스마는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평가되며, 그 포스는 정말 말그대로 압도적인지라, 무대에서 삑사리를 자주 내는데도 그 특유의 음색과 카리스마, 음악적 센스로 다 커버해 사람들을 열광시킬 정도다.

고음 뿐만 아니라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는데, 0옥타브 대에서도 안정적인 보컬을 구사할 수 있다. Going to California 같은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데, 잔잔한 어쿠스틱 반주에 저음역대의 보컬이 매우 잘 어우러진다.

성량 또한 매우 크다. 라이브에서 목소리가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올 정도. 또한 리즈 시절에 라이브 중 스피커가 터진 적도 있다.[15] 또한 악기들의 발달로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보다 악기 소리가 훨씬 더 짱짱해진 현재에도 보컬이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온다.

로버트 플랜트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2년까지로[16], 이 시절 라이브를 들어보면 전성기 때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17] 예로 1971년 스위스 공연을 들어보면 애드리브로 지르는 3옥타브 중후반대의 샤우팅, 기타 소리마저 뚫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성량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1979년 넵워스 라이브 등과는 다르게 Rock and Roll, Black Dog, Stairway to Heaven 등의 히트곡들을 음을 낮추어 부르지 않고 원키로(!) 부른 것이 백미.

1집 시절에는 중음에서 목을 잔뜩 긁어 무겁게 소리내는 것을 힘으로(...) 고음까지 쭉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18] You Shook Me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데, Immigrant Song을 부를때처럼 소리를 얇고 날카로운 질감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매우 무겁고 거칠게 처리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 소모가 매우 심하고 성대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창법이라[19] 2집 발매 이후, 1970년부터 날카로운 고음을 내기 유리한 식으로 창법을 변화시켜 왔고, 4집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1973년부터 부족한 자기관리와 그 동안의 무리한 발성으로[20] 음색이 탁해지고 음역이 줄어 초창기보다 훨씬 거칠고 진한 음색과 창법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당시 라이브에서는 몇몇 곡들을 낮추어 불렀는데,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는 Black Dog, Rock and Roll 등의 히트곡들을 전부 낮추어 불렀다.

이후로 창법을 변경하면서 고음역 회복을 줄기차게 꾀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본래 엄청난 보컬리스트라 제 몫은 해냈지만,[21] 레드 제플린 해체 후 1980년대 중반부터 목이 완전히 상해서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고음을 거의 소화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철저한 관리로 1990년대에 목소리를 회복하였고, 90년대 중반의 페이지&플랜트 투어에서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2007년 Kashmir 라이브[22]
노년기인 현재까지도 워낙 기본적인 가창력이 뛰어났던데다 밴드가 해체한 이후로는 관리도 잘 하였기 때문에 수준급의 보컬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의 인상과는 전혀 매치가 불가능한 목소리는 덤이다. 현재까지 흡연자에 음주를 즐겨하는 데다가 과거 마약을 달고 살았던 사람인데도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관리는 엄청나게 하였다는 의미. 젊었을 적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그동안 창법을 꽤나 바꿔오며 적응해냈기 때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고령의 나이 때문에 몇몇 곡들은 키를 한두키 낮추어서 부르고 있으나, Since I've Been Loving You 같은 곡들을 부를 때는 여전히 3옥타브 솔(G5)의 샤우팅을 보여주는 등 어마어마한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 록밴드의 보컬들이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엄청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록 보컬리스트로서 얼마나 열심히 임하고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앨범들을 리마스터링 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음악 활동을 하지 않고 칩거하지미 페이지와는 대조적으로 2022년 현재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라이브 투어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히트곡들도 투어 셋리스트에 계속해서 포함시키는데 현재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새로운 편곡을 거쳐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평. 2020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투어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이안 길런, 프레디 머큐리 등 당대 유명했던 고음형 보컬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으며, 이들이 정식으로 보컬 레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레드 제플린 팀 자체가 앨범의 최상의 퀄리티를 위해 녹음 시 라이브 걱정은 안하고 본인들 기량을 최대한 쥐어짜서 녹음하는 타입이라, 애초에 본인의 곡들을 라이브에서 애드리브까지 다 살려가며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운 곡들이었을 것이다.[23] 또한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음원 이상의 라이브를 보여주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고 그를 위대한 보컬리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소니 보이 윌리엄슨, 하울링 울프, 재니스 조플린, 스티브 매리엇, 로저 달트리 등의 보컬리스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리스트인 스티브 매리엇의 열렬한 팬이어서 무대 뒤, 대기실 등에까지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창법에 있어서도 스티브 매리엇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발표한 이 곡을 들어보면 로버트 플랜트가 매리엇의 창법 스타일을 얼마나 많이 벤치마킹했는지를 알 수 있다.[24]

그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도(C2) ~ 3옥타브 시(B5)이며, 가성까지 포함하면 4옥타브 시(B6)이다.#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록 보컬리스트는 프레디 머큐리[25], 액슬 로즈[26] 정도밖에 없으며, 다른 장르까지 보더라도 니콜라 세다[27], 디마시 쿠다이베르겐[28], 비타스[29] 정도밖에 없다.


4.2. 프론트맨으로서[편집]


파일:식물옹.gif

록 장르 프론트맨의 이미지를 구축한 아티스트이다. 찰랑찰랑한 긴 금발과 헤드뱅잉, 잘 빠진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반신 노출, 어딘가 세상 일 따위 상관없이 내 갈 길 간다는 달관한 눈빛, 3옥타브 대에 이르는 샤우팅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른바 “록 보컬리스트”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특징 중 대부분은 로버트 플랜트와 믹 재거, 그리고 로저 달트리를 통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 이러한 점은 후대의 록 프론트맨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특히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공연에서 지미 페이지와의 호흡 또한 매우 잘 맞았기에 “최고의 프론트맨”을 뽑자면 플랜트-페이지가 열 손가락 안에 자주 꼽힌다. 이들은 공연에서 관중을 조련하기도 하며 샤우팅과 기타를 이용해 친목질 둘이서 온갖 퍼포먼스를 다 하는 등 공연에서의 볼거리도 다양했다.


4.3. 작사가로서[편집]


And as we wind on down the road

우리가 인생의 길을 달려갈 때

Our shadows taller than our soul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보다 더 커 보일 때

There walks a lady we all know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여인이 걸어와

Who shines white light and wants to show

하얀 빛을 밝히며 보여주려 하죠

Stairway to Heaven


Oh, father of the four winds fill my sails

오, 사풍의 아버지여, 내 돛을 채워 주시오

Across the sea of years

세월의 바다를 건너도록

With no provision but an open face

대비책이란 없이, 다만 정직한 마음으로

Along the straits of fear

두려움의 해협을 따라가도록

Kashmir

작사가로서의 능력도 가히 최상급이라고 평가할 만한데, Stairway to Heaven, Kashmir 등 제플린의 대다수의 히트곡들의 작사를 맡았다.

역사와 문학 쪽에 조예가 깊은 로버트 플랜트답게 그가 쓴 가사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역사에 기반한 가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Immigrant Song이 대표적인데, 이 곡은 중세 유럽 당시 바이킹잉글랜드를 침략하는 장면을 바이킹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곡이다. 따라서 해당 곡에서는 북유럽으로 진출했던 게르만의 일파인 바이킹들의 신화인 북유럽 신화, 그들의 주요 본거지 중 한 곳이었던 아이슬란드의 간단한 역사와 지리적 특징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Kashmir 같은 경우에도 서구권 팬들로부터 그저 단순한 노래가 아닌, 실제 카슈미르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낸 한 편의 문학 작품같다라는 평가부터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지 않았으면 절대 쓸 수 없는 가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작사 능력은 가히 경탄할 만하다.

한편 로버트 플랜트 또한 과거 사이키델릭 록 뮤지션들처럼 마약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Stairway to Heaven 같은 경우는 마약을 하다가 약에 취해 무아지경에 빠져서 정신없이 썼던 가사이다. 해당 가사같은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인이 가장 놀랐다고(…).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쓴 Stairway to Heaven의 가사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이후 작사에서는 손을 떼버리고 로버트 플랜트에게 전부 맡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4. 솔로 음악가로서[편집]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필 콜린스, 루 리드, 시드 바렛, 스팅, 피터 가브리엘, 브라이언 이노 등과 더불어서 밴드 활동 외에 솔로 활동으로도 인정받는 몇 안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보통 밴드, 그 중에서도 레드 제플린과 같은 레전드급 밴드에 몸담았던 음악가들은 솔로 활동이 밴드의 성공에 비해 부진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음악가들의 전성기는 5~10년 정도인데, 밴드 활동은 아무리 못해도 10년은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쯤에는 전성기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데다가, 밴드 시절과는 달리 음악적 충고를 해줄 사람이 없어지니 어딘가 부족한 면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로버트 플랜트도 신보를 제작할 때마다 "지미 페이지가 여기있으면 좋았을 텐데" 타령을 매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의 유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적 스타일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커리어는 하드 록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대의 흐름에 맞춰 팝 록, 신스팝, 뉴 웨이브를 수용했고, 1980년대 말기에는 얼터너티브 록, 포스트 펑크도 시도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음악적 색체가 더욱 다양해져서 아메리카나, 컨트리 뮤직, 심지어는 월드 뮤직도 선보였다.[31]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엄청난 음악적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앨범들의 평가가 꽤나 준수했고, 상업적으로도[32]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약 300만 장 가량이 팔린 Raising Sand를 비롯하여 그의 앨범들은 대부분 빌보드 차트, UK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그는 1,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평론적으로도 올타임 음악가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높다. 로버트 플랜트는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855위에 랭크되었다. 더욱 유의미한 것은 1980년대 661위, 1990년대 488위, 2000년대 168위로 오히려 순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5. 가족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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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카멘 플랜트, 아들 카락 플랜트와
전처인 모린 윌슨과의 사이에서 딸 카멘 플랜트,[33] 아들 카락 플랜트, 로건 플랜트를 두었다.

그러나 1977년에 당시 다섯 살이던 카락 플랜트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당시 투어 도중이라 아들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 슬픔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In Through the Out Door에 수록된 All My Love와 I'm Gonna Crawl이다.

1991년에는 아내의 여동생인[34] 셜리 윌슨과의 사이에서 제시 플랜트라는 아들도 두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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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출생인 셋째 아들 로건 플랜트는 아버지와 빼닮은 외모로 주목받기도 했다.


6. 다른 음악가와의 관계[편집]


현대 유명 음악가와까지 친분을 맺고 있는 록 음악계의 대표적인 마당발인 링고 스타데이비드 보위 만큼은 아니지만 활동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맺었는데, 이는 후술할 그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성격 때문으로 추측된다.


6.1. 지미 페이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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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플랜트-페이지 문서 참조.

레드 제플린 시절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사랑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서구권에선 실제로 둘의 친분에 착안하여 브로맨스를 만끽하는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이 둘의 끈끈한 우정은 록 음악계에서 최고였다고 회자될 정도이다. 각자의 실력도 해당 분야에서 최고였던 데다가, 우정도 돈독하여 서로를 신뢰했다고 한다. 심지어 활동 당시에는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가 성행위를 했다는 소문도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친했기에 밴드 활동 내내 시도때도 없이 친목질을 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서 소외되고 자신의 역할이 세션맨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느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가 활동 중반기와 후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다. 물론 존 본햄의 설득으로 다시 밴드에 재가입했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사이가 예전만큼 좋지 못하다. 해체 후 둘이 간혹 같이 공연하거나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견 불일치와 사소한 다툼 등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7년 재결성 공연에서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에게 무언가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며, 이 때문에 2021년 현재까지 레드 제플린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 기타 음악가[편집]


로버트 플랜트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이었으며[36], 엘비스의 공연이 끝나고 엘비스와 따로 만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일화는 후술함.

록 음악계의 거장인 만큼 비틀즈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존 레논과는 친분이 없으나, 존 레논이 헤비한 노래를 좋아했기에 생전에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밝혔다.[37] 폴 매카트니 또한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하며, 특히 로버트 플랜트와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라고 한다. 조지 해리슨과도 친분이 있어[38] 1972년 크리스마스를 조지 해리슨과 함께 보냈으며, 이후 1990년대에도 같이 찍은 사진들이 존재한다.

로저 워터스와는 상당히 친한 사이로, 후술할 로버트 플랜트가 당했던 큰 교통사고 당시 워터스가 플랜트의 재활을 도운 적이 있으며, 서구권에서는 식물에게 을 준다는(…) 밈이 있다. 데이비드 길모어와도 친한 사이로, 데이비드 길모어가 개최한 파티에 참석해서 즐기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음악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았다.

보컬적인 부분에서 로저 달트리에게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1968년 데뷔하기 이전부터 지미 페이지를 통해 더 후의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더 후와 친해졌다고 한다. 최근 로저 달트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직까지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퀸 멤버들이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었으며, 로버트 플랜트 또한 퀸에 대한 존경심을 몇 번 드러낸 바 있다. 프레디 머큐리와는 1977년 이전에 공식석상에서 마주친 적은 없으나, 프레디가 “로버트는 나에게 퀸 노래 중에서 Killer Queen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기에 사적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러한 인연으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참가하여 다른 퀸 멤버들과 합동 공연을 하였다.

야드버즈 시절 기타리스트였으며 제플린 시절 동료였던 지미 페이지의 절친이었기에 이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에릭 클랩튼과는 1984년에 열린 필 콜린스의 결혼식에서 합동 공연을 한 적이 있다.

AC/DC가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밴드인 만큼 AC/DC의 보컬인 브라이언 존슨과 친분이 있다. 이 인연으로 브라이언 존슨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또한 2017년에는 브라이언 존슨, 폴 로저스와 합동 공연도 진행했다.

의외로 갱스터 힙합의 거장인 스눕 독과도 친분이 있다. 2008년 컨트리 뮤직 어워드에서 처음 만났고 친분을 맺어 사진도 찍었다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60년대 영국 히피와 90년대 미국 서부 갱스터의 조합이라 서구권의 팬들도 놀랐는지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인 Black Dog과 스눕 독의 첫 데뷔 당시 예명인 Snoop Doggy Dogg를 합쳐서 Black Doggy Dogg(…)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7. 디스코그래피[편집]



7.1. 정규 앨범[편집]




7.2. 싱글[편집]



7.2.1. 빌보드 핫 100 3위~10위[편집]


  • Sea of Love (1984, 3위)


7.2.2. 빌보드 핫 100 11위~20위[편집]


  • Big Log (1983, 20위)


7.2.3.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편집]


  • Other Arms (1983)
  • Little by Little (1985)
  • Heaven Knows (1988)
  • Tall Cool One (1988)
  • Hurting Kind (I've Got My Eyes on You) (1990)
  • Most High (1998)[39]


7.2.4.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2위~10위[편집]


  • Burning Down One Side (1982, 3위)
  • Big Log (1983, 6위)
  • In the Mood (1983, 4위)
  • Ship of Fools (1988, 3위)
  • Tie Dye on the Highway (1990, 6위)
  • Your Ma Said You Cried in Your Sleep Last Night (1990, 8위)
  • 29 Palms (1993, 4위)
  • Calling to You (1993, 3위)
  • I Believe (1993, 9위)


7.2.5. 기타 차트 성적[편집]


  • Please Read the Letter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20위)
  • Rich Woman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18위)


8. 여담[편집]


  • 상단에 있는 사진은 로버트 플랜트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찍힌 사진인데, 당시 공연이 개막할 때 천 마리의 비둘기들을 관객들을 향해 풀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날아오르지 않고 로버트 플랜트의 손 위에 앉았을 때 찍힌 것이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사진을 직접 복사해서 가지고도 있다고.

  •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게르만, 켈트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인 금발벽안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흑발에 다소 어두운 피부[40]를 가진 롬인, 즉 집시이다. 따라서 로버트 플랜트는 집시 혈통이다.


  • 간간히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에는 본인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 지미 페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인지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한다는 평이 많은 편.

  •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메이저 데뷔도 1968년에 하는 등 빨랐기에 동시대의 아티스트 중에서는 나이가 상당히 어린 편이며, 후배 밴드들의 구성원과 나이가 비슷하다.[41]

  • 필 콜린스의 앨범이자, 1980년대 팝 음악의 메가 히트작인 No Jacket Required의 앨범 이름에 본의 아니게 영감을 줬다. 이에 대한 일화는 문서 참조.


  • 풍성한 금발 머리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로저 달트리를 은근히 닮았었다. 이 둘은 활동 당시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었다.

  • 당대의 많은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여러 그루피 등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몇 년 전에는 ‘밴드 오브 조이’ 활동을 같이 했던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패티 그리핀과 교제중이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고 밝혔다.

  • 창법 때문일진 몰라도 노래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많이 야한 편이다. 또 무대에서 성적매력을 과시한다며 설쳐대서 레드 제플린 무명시절엔 안티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당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던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소리를 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성적 매력 강조를 운운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다른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로버트 플랜트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는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팬들의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42] 다만 브렉시트를 계기로 영국 정부가 투어를 전보다 어렵게 만들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인 이유든 경제적인 이유든 브렉시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43]

  • 프레디 머큐리와는 록 음악의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 보컬 실력 면에서 록 음악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점 때문에 해외에서는 극성 레드 제플린 팬들과 극성 퀸 팬들에게 자주 비교당한다.[44] 물론 프레디 머큐리와 로버트 플랜트 정도의 클래스의 보컬이면 굳이 비교하는게 무의미한 수준. 사실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고 보면 된다.

  • 젊은 시절에는 지미 페이지처럼 종교적으로 흑마술, 오컬트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이후 나이가 들어서 점차적으로 믿지 않게 되었다. 현재에는 종교에 관련해서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종교에 대해 기독교, 무종교(범신론/이신론), 혹은 불교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지만 어느것도 확실하지 않다.

  • 레드 제플린 시절에 다른 아티스트들처럼 마약을 했지만[45], 지미 페이지처럼 심한 마약 중독에까지 이르진 않았고, 나름 절제하려고 노력하며 건강에도 신경 쓰는 타입이었다.

  • 1975년 매우 끔찍한 교통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 가족,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휴가를 보내던 도중 아내 모린 플랜트가 운전하던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뒷좌석에 탄 자녀들은 많이 다치진 않았으나 앞좌석의 플랜트 부부는 크게 다쳐 거의 죽을 위기에 놓였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친구였던 로저 워터스가 그에게 자기 소유의 그리스 별장을 빌려줘서 휴양하면서 점차적으로 부상을 치유했다. 그러나 부상이 매우 심각하여 영구적으로 다리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정을 받아 2년 동안이나 골절된 채로 생활해야 했고, 공연과 7집 녹음 또한 휠체어를 타고 했었다.

  • 1976년 영화인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중세 유럽의 기사 분장을 하고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후술할 브라이언 존슨의 방송에서 저 복장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다![46] 참고로 이 당시 길쭉한 대검을 하나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브라이언이 칼을 보고 놀라 웃자 로버트는 "사람들이 이 칼만 보면 칼 얘기만 그렇게 해댄다."라며 소소한 불평(?)을 하기도 했다.참조


  • 팬들에게서 불리는 별명은 식물(Plant)옹(...).

  • AC/DC의 보컬 브라이언 존슨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브라이언 존슨의 길 위의 삶”[47]에 출연하여 레드 제플린 시절의 여러 썰들을 풀었다. ###

  • 영국인답게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자주 하며 EPL의 축구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매우 열광적으로 응원한다.[48]

  • 해외에서는 Watch Robert Plant while Roger Waters라는 유명한 밈이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성인 Plant가 영어로 ‘식물’을 뜻하고, 로저 워터스의 성인 Waters가 영어로 ‘물’을 뜻하는 점을 들어 "식물에게 물을 준다"라는 언어 유희를 하는 것. 여기에 을 하늘에 띄워 놓거나, 옆에 장미꽃을 하나 심어놓는 등의 기출 변형도 존재한다. 참고로 이들의 성씨는 링고 스타를 제외하면 모두 예명이 아닌 원래 성씨이다.

  • 우리나라의 가수 김종서가 로버트 플랜트와 노래 스타일이 비슷한데, 실제로 김종서는 로버트의 열렬한 팬이다. 창법 뿐만 아니라 무대 매너까지 로버트와 흡사한데, 김종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롤 모델, 귀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본인 노래도 당연히 잘 부르지만 레드 제플린 노래를 부를 때도 놀라운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는데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가장 잘 커버한다는 평이 있다.


8.1. 성격[편집]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74년 5월에 로버트, 지미, 존 본햄은[49] 어릴적 우상이자 오랜 팬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당시 엘비스의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연을 관람한 뒤에 호텔을 방문하여 엘비스를 만난적이 있었다.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잠깐만 시간을 내주려 했으나, 로버트의 재치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결국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는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에피소드를 추가하자면,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최신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50] 그래서 제플린의 음악보다는 당시에 매스컴에 많이 나오던 제플린에 관한 가십성 소문들에 대해 관심있었는데, 특히 순회공연 때마다 수많은 그루피족과 질펀하게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한다.

기혼자였던 로버트로서는 이에 대해 답변하기가 곤란한 처지였는데, 다음과 같은 재치있는 답변으로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게 유일한 즐거움입니다(일동 웃음)." 곤란한 질문도 서로 기분 좋게 넘어가게 하는 플랜트의 재치있는 언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플랜트의 장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의 ‘Love Me’를 부를 때 노래나 표정이나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를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8.2. 외모[편집]



1970년 로열 앨버트 홀 공연 中

늙어서도 미노년인데, 젊었을 때는 정말 엄청난 꽃미남이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와 함께 엄청난 그루피들을 몰고 다녔다. 금발벽안과 흰 피부를 가졌으며 북유럽 신화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졌다. 실제로 전성기 때에는 60~70년대 특유의 패션과 어우러져 북유럽 신화 속의 신 혹은 바이킹 같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51] 이는 동양적인 외모를 가진 지미 페이지와 대조를 이루며 레드 제플린의 인기 상승에 기여했다. 섹시한 록 스타 순위를 꼽을때 커트 코베인, 믹 재거, 로저 테일러, 액슬 로즈,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결코 빠지지 않는 대단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거기에다가 엄청난 고음의 목소리로 색기를 발산해댔을 뿐더러 외모 또한 미소년이었던 탓에 여성 그루피 뿐만 아니라 남성 그루피까지 주변에 꼬였다고 했다. 물론 식물옹은 저기 멀리 서있는 놈이 남편이라면서 걷어 찼다 더군다나 키 또한 무려 186이나 되는 장신이라 당시 로버트 플랜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상술한 것처럼 한국의 김종서, 김경호 등 이름을 알만한 록 스타들이 롤모델로 삼는 프론트맨의 끝에는 항상 로버트 플랜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멋있는 록 뮤지션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970년에서 1971년 사이에 수염을 길게 길렀던 적이 있다. 수염을 기르면 북유럽 신 같은 느낌이 더욱 극대화된다. 특히 수염을 기르고 Immigrant Song을 부를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백인의 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라이브 에이드 당시에 30대 후반이 맞는지 의심되는 수준의 동안을 보여줬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면서 갑자기 폭삭 늙어버렸는데 2007년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보면 다른 게 거의 없다(…).

일명 ‘히피펌’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풍성한 금발 곱슬머리가 특징이다.[52] 일부러 파마나 고데기를 했던 것은 아니고, 집시 혈통인 어머니에게서 곱슬머리를 물려받았다. 이 헤어스타일에 애착이 강하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외모나 노래 실력에 대한 칭찬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 아무튼 애착을 갖고 신경써서 관리했던 덕분인지 그 풍성한 금빛 머리의 효과까지 더해져 20대 리즈시절 무대 위 그의 모습은 여심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당시 별명도 황금빛 신(The Golden God)이었으며, 노년이 된 현재까지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가족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본인과 똑같이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의 당시 헤어 스타일도 로버트 플랜트와 똑같다(…).

이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당시 레드 제플린의 안티들은 로버트 플랜트가 당시 유명했던 로저 달트리를 배꼈다고 마구 비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저 달트리가 직접 등판하여 자신은 로버트 플랜트와 친한 사이이며, 자신을 따라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헤어스타일이 너무 부러웠는지 고데기를 해서 억지로 곱슬을 하고 다녔는데, 그루피들에 의하면 이것 때문에 머리에서 탄내가 풍겼다고(…) 한다.

칭찬만 있던 건 아니고, 뻑하면 웃도리를 벗어던지고, 옷을 입더라도 단추를 잠그는 일 없이 털이 숭숭 난 가슴을 다 드러냈기에 레드 제플린 안티들에게는 노출증 환자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똑같이 가슴털을 드러내고 웃통을 까고 노래한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고릴라 같다고 욕을 듬뿍 먹었지만 플랜트는 그나마 얼굴이 잘 생겨서 덜 욕을 먹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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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등급 CBE 대영제국 훈장 수여자.[2] 버밍엄과 가깝기 때문에 보통 버밍엄 출신이라고 한다. 존 본햄도 버밍엄 출신이지만 두 사람이 사는 곳은 매우 멀리 떨어져있다. 서울로 비유하자면 로버트 플랜트는 강남구, 존 본햄은 노원구 정도의 지역에 살았다.[3] 보컬 이외에도 탬버린도 자주 쳤다. 리암 갤러거처럼 노래하면서 탬버린도 같이 쳤던 건 아니고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솔로 때 탬버린을 치곤 했다. 또한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연주 실력이 상당하다. Bring It On Home, Nobody’s Fault but Mine 등의 곡에서 그의 하모니카 연주 실력을 알 수 있다.[4] 이는 록 가수중 6번째로 높은 수치다.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밥 딜런,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다음. 게다가 해당 리스트는 롤링 스톤이 다른 리스트랑 비교해봐도 확연하게 소울이나 R&B 쪽에 유리하게 줄세우기를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20위권 안에 들었다.[5] 당장 2위가 프레디 머큐리, 3위가 보노니 할 말은 다한 셈이다.[6] 물론 다른 멤버들이 자란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버밍엄의 중심과 시내 끝자락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동네에서 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7] 이 때문에 혹자는 주다스 프리스트, 블랙 사바스의 고향이기도 한 버밍엄헤비 메탈의 탄생지라고 보기도 한다.[8] 영국은 미국과 달리 흑인 음악 문화가 백인 문화에 스며드는 것에 별 편견이나 거부감이 없었는데 훗날 이것이 브리티쉬 인베이션의 영향을 주었다. 흑인 음악이 백인 사회에 스며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미국 사회는 흑인 뮤지션들을 악마 숭배자로 몰아가는 등 사회적으로 말살 시키려고 안달이 났었다. 반면 영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 훗날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시조가 되었다.[9] 당시 영국 록 씬은 런던으로의 쏠림 현상이 매우 심했는데, 로버트 플랜트는 런던이 아닌 버밍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디 뮤지션이었기에 무명이었던 것이다.[10] 1980년대에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솔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라디오, TV쇼 등에 꾸준히 출연하며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로버트 플랜트처럼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은 아니고 고전 헤비 메탈 성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마저도 거의 활동하지 않고 현재는 레드 제플린의 자료를 정리하는 일만을 하고 있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관계가 갈라진 건 이런 솔로 활동의 차이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11] 프레디 머큐리는 평소에도 레드 제플린에 대한 빠심(…)이 엄청났는데, 그는 로버트 플랜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이와 동시에 프레디 머큐리 본인도 역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힌다.[12] 아마추어 시절에 로버트 플랜트를 카피하며 노래 연습을 했을 정도로 그의 팬이다. ‘레드 제플린 커버는 아시아 최고’라는 소리도 종종 들을 정도.[13] I Can’t Quit You Baby 등 1집에서 이 점이 크게 두드러진다.[14] 그와 보컬 스타일적인 면에서 쏙 빼닮았다고 평가받는 김종서도 음색은 중성적인 음색의 록 보컬리스트인 러시의 게디 리와 벗지의 버크 쉘리와 비슷하다고 평가된다.[15] 이는 그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도 한 몫할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착각될 정도로 하이톤의 음색으로 4옥타브를 훌쩍 넘기는 샤우팅을 애드리브로 지르고 다녔으니 스피커가 터질만도 하다. 또한 라이브 중 스피커가 터졌다는 등의 상황은 성량이 매우 큰 보컬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애로사항이었다. 대표적으로 겐키 히토미.[16] 즉, 4집 시절까지.[17] 다만 1971년~1972년 공연의 영상 자료는 매우 드물며, 공연에 간 팬이 녹음기로 녹음한 녹음 자료 몇 개만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약 50년 전의 녹음기이다보니 음질은 영 좋지 않지만 이런 자료들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일 따름. 그러나 상기되어 있는 1972년 호주 공연에서 부른 Rock and Roll 라이브가 공식 영상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공개되지 않은 전성기 때의 공연을 찍은 공식 영상 자체는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8] 겐키 히토미가 이 시절 로버트 플랜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레드 제플린 곡을 커버한 걸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19] 쉽게 말하면 그냥 생목으로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3옥타브 라[20] 상술했듯이 초고음역대의 노래를 부르면서 4옥타브 이상의 샤우팅을 애드리브로 발사하고 다녔다. 이 영상을 보면 3옥타브 솔(G5) 이상의 고음만 40번이 나온다.[21] 이 시절의 로버트 플랜트의 공연이 궁금하다면 1979년 넵워스 라이브를 보면 된다. 당시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라이브 중 하나로, 이 공연에서 부른 Kashmir는 역대급 라이브로 평가받는다.[22] Kashmir는 창법이 바뀐 후인 6집의 수록곡이며, Whole Lotta Love 정도를 제외한 초창기 곡을 부를 땐 고음을 전부 낮추어 불렀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의 곡들은 대다수가 3옥타브를 훌쩍 넘기는 어마어마한 고음 파트가 존재하기에, 한 음 낮춰 부른다고 해도 대부분 최고음이 2옥타브 후반대에서 3옥타브 초반대인데, 노년의 나이에 이 음을 전부 소화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더군다나 키만 낮추었을 뿐이지 애드리브로 지르는 샤우팅이 대부분 3옥타브 초중반대이며, 한 음 낮추어 부른 Rock and Roll은 음원에서의 음 그대로 불렀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 때 불렀던 것보다 음이 더 높다(…).[23] 50년대 블루스 뮤지션들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굵고 거칠게 노래하는 창법을 가지게된 플랜트가 고음을 라이브에서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다 살려 라이브하기엔 레드제플린 1~4집의 곡들이 대체로 너무 고음역대다. 4집의 히트곡 Black Dog은 여성 보컬들이 자주 커버하는 노래이다.[24] 이 곡은 윌리 딕슨이 작곡하고 머디 워터스가 1962년에 녹음해서 발표한 'You Need Love'란 곡을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커버한 곡이다. 이 스몰 페이시스의 커버 버전과 머디 워터스의 원곡을 레드 제플린이 짜깁기 한 뒤 편곡해서 녹음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Whole Lotta Love'다.[25] 프레디는 음역의 정확한 넓이가 밝혀지지 않았다. 주변인들이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적 없다고 하였고 본인도 고음을 선호하지 않았으며그게 4옥타브 파(F6),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다. 이 때문에 프레디가 바리톤이라는 추측도 있다. 확인된 음역은 0옥타브 파(F2) - 4옥타브 라(A6)[26] 음역대가 무려 -1옥타브 파(F#1) - 4옥타브 라#(A#6)로, 록 보컬리스트 중에서는 음역대가 가장 넓다. 하지만 이는 전성기 기준이며, 현재는 목이 엄청 상하고 살이 엄청 쪄서 정글에 있는 것을 다 쳐먹은 것 같은 보컬, 미키마우스가 뀍뀍대는 소리 같다는 혹평을 들으며 팬들에게 폭풍 까임을 당한다.[27] -1옥타브 도(C#1) - 8옥타브 파#(F#10)으로 라이브는 아니지만 전세계 음역 1위[28] -2옥타브 솔(G0) - 6옥타브 레(D8)로 공식적으로 전세계 음역대 1위[29] 소위 아쟁총각이라 알려진 가수로, 음역대는 0옥타브 레(D2) - 5옥타브 시(B7)[30] 포이즌(록밴드), 머틀리 크루, 스키드로우(밴드)등 후대 헤비 메탈 밴드의 프론트맨들은 모두 긴 금발과 고음역대의 소유자이다.[31] 지미 페이지는 반대로 고전 헤비 메탈, 블루스 색체의 음반들을 몇장 발표했다.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그나마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합작한 앨범 Coverdale–Page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고 평가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도 지미 페이지는 지미 페이지인지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2210위에 선정되어있다.[32] 그나마 1980년대 후반 앨범들이 차트에서 약간 부진했다.[33] 후에 베이시스트 찰리 존스와 결혼한다.[34] 아내와는 1980년도에 이혼을 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전처의 여동생[35] 그렇게 태어난 아들과 전처와의 아들은 서로 외사촌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한 셈이다.[36] 물론 로버트뿐만 아니라 모든 레드 제플린 멤버들이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37] 그리고 로버트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친분이 있어서 1980년대와 근래에 찍은 사진들이 존재한다.[38] 조지 해리슨은 1973년 열린 존 본햄의 생일 파티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하였고, 지미 페이지가 The Rain Song을 작곡할 계기를 심어주는 등 비틀즈 멤버 중에서도 특히 레드 제플린과 친했다.[39] 지미 페이지와 콜라보[40]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부분이다. 롬인이 속한 인도아리아인에는 칼라쉬인, 카슈미르인처럼 금발벽안이 흔하며 피부색이 밝아 유럽계 백인과 생김새가 거의 흡사한 민족들도 있으며, 로힝야족, 벵골인처럼 피부색이 매우 짙은 민족들도 있다.[41] 후배 밴드인 의 구성원 중 존 디콘, 로저 테일러를 제외하면 전부 로버트 플랜트보다 나이가 많으며, 로버트 플랜트와 비슷한 연배의 밴드로는 1971년에 데뷔한 이글스, 1975년에 데뷔한 보스턴 등이 있다.[42] 부유한 집안 출신이므로 보수 성향일 것이라는 추측부터 당대 대부분의 음악가들처럼 진보 성향일 것이라는 추측까지 있으나,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43] 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유명 아티스트로는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존 라이든, 리암 갤러거 등이 있다. 그러나 전술한 아티스트들이 브렉시트에 정치적인 견해를 들며 반대한 것과 달리, 로버트 플랜트는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명확한 이유를 말한 적이 없으며(심지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인지도 불명이다), 브렉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정치 성향을 판단할 수 없기에 어느것도 확실하지 않다.[44] 다만 레드 제플린과 퀸이 1대 1로 비교되는 일은 드물다. 애초에 퀸은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짙게 받은 밴드였으며, 레드 제플린은 동시대에 같은 장르를 추구했던 딥 퍼플, 블랙 사바스나, 동시대에 활동했던 또 다른 거대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와 자주 비교당하는 편이다.[45] 1960~1980년대 서구 록 아티스트 중에서 마약을 안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프랭크 자파처럼 마약을 안 했던 뮤지션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가 오히려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46] 영화를 촬영한 장소에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47] 원제는 Brian Johnson’s A Life on the Road.[48] 하지만 플랜트를 제외한 레드 제플린의 나머지 멤버들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듯하다.[49] 여기서도 유일하게 소외된 존 폴 존스(...)[50] 엘비스는 자기를 구시대 가수로 만들어버린 1960~70년대 후배 세대의 록 음악, 이른바 "요즘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최신 음악은 일부러 멀리 했고, 자기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올드송들이나 가스펠 음악을 주로 들었다. 사실 최신 트렌드 음악엔 별 관심 없고 자기가 어릴 때 좋아했던 음악을 계속 듣는 것은 비단 엘비스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뮤지션들도 그러한 편이다. 반면 데이비드 보위처럼 늘 최신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물결을 계속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으며, 최근에는 에릭 클랩튼저스틴 비버의 음악에, 지미 페이지가 힙합에 빠졌다고 밝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51]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중세 기사로 분장한 모습을 보면 바로 이해가 갈 것이다.[52] 레드 제플린이 여전히 인기 있는 해외에서는 히피펌을 한 사람을 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국내에서도 가끔씩 보이기도 한다.